단군조선의 첫쩨 임금 백익(伯益)-3
보충 했습니다.
상서에는 마땅히 백익(伯益)이 나와야 한다. 그러나 없다. 백익(伯益)을 음이 같은 익을 이로 바꾸어 썼다. 상서 순전에 사제권을 일임 받은 나오는 백이(伯夷)이 백익(伯益)이다.
帝曰:「咨!四岳,有能典朕三禮?」僉曰:「伯夷!」帝曰:「俞,咨!伯,汝作秩宗。
앞장에서는 백익(伯益)이 제우하후씨(帝禹夏后氏)로 부터 합법적으로 지도권을 인수 받았다고 밝혔다. 하우씨의 후손이 중원에 위국(魏國)을 세웠다고 논증 했다.
사기 진세가에는 그들이 순임금의 후예였다가 우왕의 후손을 받아 드려 하우씨의 후예라고도 한다. 그 밖에도 여러 지도자의 후손과 인척 관계를 맺아 살았다. 서쪽에서 온 유목민이 양자강 이북 중원 일대에서 북으로는 외몽고 만주 일대로 퍼졌다는 뜻이다 . 동쪽 해안에 있는 회계산에, 진시황과 하후우(夏后禹)의 상을 나무로 깎가 세웠다 . 우왕의 후손이 점차로 중원으로 옮겨갔다는 증거다.
사마천은 흉노(匈奴)가 하우씨의 후예(夏后氏之苗裔) 라고 했다 . 우왕이 서쪽에서 온 융족 이란 뜻으로 융우(戎禹)라고도 했다 . 흉노는 우왕의 후손으로 산서성 일대에서 한족 (漢族)을 고롭히던 유목민 이다. 흉노(匈奴)란 이름은 이름이다.
묵자(墨子)에 따르면 백익이 국토의 북쪽지역에 자리를 잡고 구주를 완성 시켰다 . 백익(伯益)이 순, 우왕과 같은 시대 사람으로 같은 반열의 통치자가 되였다 . 순 우 두 지도자는 남쪽인 해지 연안(於服澤之陽 )에 수도를 정했고, 백익(伯益)은 산 너머 해지 북쪽 (於陰方之中), 옛 부터 해(奚xī, 解)족이 살던 식양(息xī壤)에 도읍을 정하고 통치를 했다 . 백익(伯益)의 익(益)자는 “물이 넘처 흐른다, 웃사람 중의 웃사람, 그가 사는 곳에는 피신 할수 있는 험한 요새가 있다”는 등등 많은 사연이 엃켜 있다. 강희자전에 따르면 으로 제왕 만이 자칭하던 이라는 뜻이 있다 .
그가 살던 마을(隘, 阝,右:益)을 한국에서는 “좁을 애, 막을 액”이라고 읽고 풀이 한다. 왕옥산에 있던 왕검성을 사용 할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었다는 뜻이다 . 해편(篇海)에서는 해/개(蓋)가 사는 마을()이라 했다 . 익으로 인하여 한방에서 쓰던 익모초 (益母草)라는 이름이 생겼다.
묵가와 잡가에서는 모두 백익(伯益)을 유능한 보좌관으로 인정 했다 .
설원(說苑 脩文)에는 는 문구가 있다 .
백익(伯益)의 말이 곧 법이란 뜻 글자(謚; 言,益)가 이를 증명해 주고 있다. 이런 뜻의 글자를 묘하게 돌려 일주서에는 시법해(逸周書 諡法解) 이라고 하여 주공 단을 추켜 세웠다. 설문해자, 현행 한한사전, “http://ctext.org/zh” 에서는 모두 이라고 했다 . 그러나 중국에서 쓰는 한전 (漢典)에는 고 했다. 이에 따라 가 서주 때부터 나타났다. 수경주에서는 백익을 백충장군(百蟲將軍) 이라고 했다. 이는 마치 란 뜻으로 비하 했다. 백충장군 현령비(百蟲將軍顯靈碑)문에 백익(伯益)이 전욱 고양씨의 두쩨 아들이고, 성은 이씨(伊氏) 휘가 익(諱益), 자는 토개(字隤敳)라 했다 . 현령비는 우왕이 홍범구장(洪範九章)이 적힌 낙서(洛書)를 구했다는 낙수(洛水) 가까운 곳에 있었다 . 이씨(伊氏)의 본향은 있었다 .
강희자전에서 저 이(伊)자를 찾아 보면, 그 시절에 크고 작은 거문고(大琴 小瑟)와 4대 악기(四代之樂器)를 만들었다. 그러한 지도자를 왜 백익(伯益)을 백충장군 (百蟲將軍) 이라고 불렀나 하는 의문 점이 풀린다 . 사전에는 맹자에서 백익(伯益)이 기산(箕山)으로 갔다는 기록과 일치 한다. 맹자는 백익을 실패한 사람으로 묘사 했지만, 실은 계(啟)일당의 모함에 걸려 피살 당했다 . 왕자 였던 백익 (伯益)을 저 노인 이라고 했다. 그가 덕이 많은 분이라 이기 (伊耆)라고 비하 했던 별명을 서주에서는 관명(名官)으로 썼다. 백익(伯益)이 납향제(臘享祭)를 시작 했다. 필자가 어려서 겨울이면 참새를 잡아 새끼줄 (索)에 끼어 놓았다 납향(臘享, 臘日; 동지 후 셋째 未日)날 참새 구이를 즐기던 시초를 여기서 찾았다. 그래서 납형 사(蜡 )를 삭(索) 이라고도 한다 .
동명(東明)이 백익(伯益)의 후손이다:
중국사서에 시조 동명(夫餘東明)의 출생지에 관하여 여러 글자로 표기 했다. 그 한 나라 이름에 북리 삭/색리국(北夷索離國)국이 있다 . 진수의 삼국지에는 이를 숨기려고 고리국 (高離之國)이라 했다 . 논형, 통전 태평어람에서는 글자가 비슷한 탁리국(橐離國) 이라 했다. 동명이 백익과 같은 혈통이라 는 결정적 증거( smoking gun)를 찾았다. 삭(索)자와 부여 고구려의 관계는 앞서
“고구려(高句麗)의 어원과 발생지” 에서 다루 었다.
토개(隤敳)가 고양씨의 후손이란 기록은 “ 춘추좌전, 통전, 설문해자”에도 있다 . 순임금은 전욱고양씨의 후손인 이씨(伊氏)의 딸을 정실로 드렸다 . 개천절은 전욱력 (顓頊曆)으로 첫(상)달 처음으로 달(月, moon)을 볼수 있었던 초사흘(3)을 택 했다 . 태평어람에는 사마천의 사기에서 인용 했다는 문구를 실었다. 황제가 치우천왕을 얻어 “천도를 밝혔다 하나 현존 하는 사기에는 그 내용을 볼수가 없다. 같은 내용이 통전과 관자 오행에도 실려 있다. 그러면서 모두 퇴개(隤敳),즉 백익 (伯益)이 유능한 보좌관 이라 했다.
공양전(公羊傳) 소(疏)에 따르면, 라 한다 . 옛적에 다섯의 강력한 지도자(五伯)를 돼지 같이 두려워 놈이라 하여 돼지우릿간 같다는 뜻의 혼(溷, hùn/훈)이라 불렀다. 이를 피해서 백(伯)자를 패(覇)자로 바꾸어 제 환공 진 문공 등을 오패(五覇)라 한다. 백익은 문무를 겸한 유능한 지도자였다.
이름자를 풀어보면,퇴(隤)자에는 “귀한 사람(貴)이 살던 마을(阝) 이란 뜻”이 있다. 마을 이란 뜻을 바꾸어 땅이란 뜻의 흙토(墤) 변을 적용하여 귀한 사람(들)이 살던 땅이란 두 글자(隤,墤)가 한한 사전에는 보이지 않는 글자 (穨)에서 또 바꾸어 “무너질 퇴, 턱 퇴(頹)란 글자와 같은 뜻”이라 한다 . 퇴개(隤敳)라는 이름자에는 산서성 해지 북쪽 하동군에 있던 귀한 사람이 다스리던 허물어진 마을 (穨城)이란 뜻이다 .
나무 목(木,右:百)년에 붙은 일 백(100) 백 (百, 一,下:白)자는 이 있다. 이 글자를 발음이 같은 흰 백(白)자로 바꾸어, 측백나무 백(栢)를 잣나무 백(柏)로 바꾸고, 루(婁[lóu]/로우/盧)는 비슷한 글자()로 바꾸 었다. 이 글자()가 가 나타났다. 맏 백(伯)자를 제일 높은 직위란 뜻에서 공(公)자로 바꿔어 백(柏)자를 공(松)자로 바꾸었다 . 상서
“四岳群牧,班瑞于群后”의 뜻을 감안 하여 사음대자로 만든 문구다.
자설(字說)에는 “송 백목지장, 유공 고자종공(松,百木之長,猶公, 故字从公)
이라 했다. 백(百)자는 예맥의 맥(貃)을, 나무 목(木)자는 목(牧) 사음한 다른 글자다.
도사람의 대화에서 나온 “附無松栢”란 문구는 는 뜻이였다.
백익 伯益, 백익(柏益), 백익(栢益),백예(柏翳), 백예(伯翳), 隤敳, 隤敳를 隤敱로.
伯翳亦曰伯益.
백익을 사기와 한서에 다른 이름과 글자로 기록 했다.
한서에는 진의 선조는 백익(秦之先曰柏益)이라 하고 그는 전욱(顓頊)의 후예라 했다. 효왕의 말은 인용하여 같은 사람을 백익(伯益)이라고 기록 했다. 사마천은 진본기에 전욱의 묘예 손(帝顓頊之苗裔孫)에 대업(大業)이 있었다. 그가 낳은 대비(大費)가 우와 같이 치수사업을 했다.그가 순임금을 보좌 하여 새와 짐승을 길들였다는 액예(柏翳)다. 순임금은그에게 영씨(嬴氏)를 하사 했다.
하 본기(夏本紀)에는 백익(伯益)을 간략히하여 익(益)으로 또는 익자를 같은 음을 사음대자 하여 백이(伯夷)로 기록 했다. 사기 전반에 백익(伯益)이란 이름은 조세가(趙世家)에 한번 나온다. 우와 같이 치수 사업을 하던 동이 수령 백익이 아니다. 춘추좌전에는 백익(伯益)이라고 인시 되는 사람을 여러 글자로 적었다. 정사의 첫 기록이 되는 사기와 한서에서 부터 백익을 은밀 하게 기록 했다.
< 本紀 -> 秦本紀:秦之先,帝顓頊之苗裔孫曰女修。女修織,玄鳥隕卵,女修吞之,生子大業。大業取少典之子,曰女華。女華生大費,與禹平水土。已成,帝錫玄圭。禹受曰:「非予能成,亦大費為輔。」帝舜曰:「咨爾費,贊禹功,其賜爾皁游。爾後嗣將大出。」乃妻之姚姓之玉女。大費拜受,佐舜調馴鳥獸,鳥獸多馴服,是為柏翳。舜賜姓嬴氏
漢書 志 地理志下:秦之先曰柏益,出自帝顓頊,堯時助禹治水,為舜朕虞,養育草木鳥獸,賜姓嬴氏,歷夏、殷為諸侯。至周有造父,善馭習馬,得華騮、綠耳之乘,幸於穆王,封於趙城,故更為趙氏。後有非子,為周孝王養馬汧、渭之間。孝王曰:「昔伯益知禽獸,子孫不絕。」乃封為附庸,邑之於秦,今隴西秦亭秦谷是也。>>
강희자전에 측백 나무 배(柏)자를 풀이한 내용을 보면 이란 뜻이라 했다 . 부(附;fù pǒu bù fū/fu6/bhiò)는 빛의 사음자다. 부(附)자를 음이 비슷한 부((培, 部)자로 일백 백(栢)자 또한 흰백(柏)와 바꾸어 현행 춘추전에는 “培塿無松柏. 部婁無松柏”로 나온다. 부여(夫餘, 扶餘)의 다른 글자 였다. 그 곳의 지도자가 단군 (壇君)이다. 해부루 (解夫婁)라고 기록 되였다.
이렇게 백익(伯益) 또는 퇴개(隤敳)에 관한 기록이 선진시대 부터 당송시대 기록에 모두 유능한 보좌관으로 중화문명의 발생지인 관중분지 해지 연안 에서 피살 당했다 . 백익(伯益)이 이끌던 부족은 북으로 도망했다. 이런 사실이 사기 흉노열전 첫 문구 “흉노는 그 선조가 하후씨(夏后氏)의 묘예(苗裔)” 다 .
사기 오제 본기에는 창의가 내려와서 약수 (若水)가에 살다 촉산씨의 딸(蜀山氏女) 을 부인으로 맞아 전욱 고양씨를 낳았다” 하니, 약수와 촉산은 산서성 서남쪽을 흐르는 분수 연안에 있어야 한다 . 분수가 황하로 이어지는 가까운 곳에 우뚝히 서있는 산을 독산(獨山)이라 했다. 글자를 바꾸어 촉산(蜀山)이라고 했다 . 그 산 위에 성을 쌓고 살았다 하여 독산 (獨山) 을 왕옥산(王屋山) 이라고 불렀다. 이 산에 왕검성이 있었다. 산해경에서는 천제산 (天帝山)이라 하고 했다. 산의 서남 쪽 강언덕에는 고도산(臯塗之山)이 있다고 했다 . 이 산에서 시작한 여울이 도수 (塗之水)의 마지막 지류다 . 도수가 시경 소아에 나오는 면수(沔水)와 합처서 서주의 수도 가까이 지나 갔다. 강가에 있는 회계산(會稽山) 이라고 했다 .
북쪽에 살던 전욱고양씨의 후손들이 산서성 서쪽 분수 (汾水)를 따라 해지 연안에 이르러 번성 하여 “첫 왕중왕 단군 왕검”이 나타 났다. 폭도들에게 백익(伯益)이 살해 당하여, 그 후손이 다시 북쪽으로 피신 했다. 탁록전을 비롯하여 분수를 따라 올라가는 지역에서 전쟁이 많았다 . 백익이 기산(箕山)에 살았다는 직계 후손이 뒤에는 발해만 연안에서 기자 (箕子)를 따라 올라 온 상나라 유민을 만났다. 또 다른 하후씨 (夏后氏)의 후손(費侯, 費伯, 費氏, 解毗氏)이 단군조선 발생지에 남아 살던 산융, 험융이라 부르던 흉노다. 그들이 중원 세력에 동화 되기도 하고 또는 계속 반항 하여 서주를 멸망 시키고, 서주의 제후국 진을 셋(三晉)으로 갈라 전국시대로 들어 갔다 . 서진의 제후국 진(晉)이 고조선(古朝鮮)의 핵심부를 차지한 산서성, 주 성왕 때 노예로 끌려가 관노로 일하여 예성(隸省)이라고 했다. 시경 한혁(詩經 大雅 韓奕)에 나오는 이다.
진(晉)자에는 조선(朝鮮)과 같은 뜻을 안고 있다 . 처음 부터 해(sun, 日, 太陽)을 사음한 여러 글자의 해(解Xie, 阿, 何, 解毗, 解批, 蓋, 盖,契) 성씨가 특히 산서성에 많이 살았었다 . 그들의 수도를 평양(平陽)이라 했다.
합법적으로 지도권을 물려 받아 단군조선의2대 통치자가 되였던 백익(伯益)을 살해 하고 주도권을 빼았은 사람들이 중원에 남아 되였다 .
상서에는 가 여러번 나오지만 뜻을 종잡을수 없다. 강희자전에는 그 글자가 악(咎,惡也)고, 1976년에 한글로 번역된시경에는 죽서기년에4번 나온다 . 벌목에는 “微我有咎” 을 아니 불 돌아볼 고, 불고(弗顧)라고 바꾸었다 . 죽서기년에 보면, 구(咎)가 세 사람으로 나온다. 한사람은 제우 하후씨 2년에 죽었다. 또 다른 한 사람 구(咎)가 하후씨 다음에 집권하여 제구(帝啟)라 했다. 셋쩨번 구는 상나라때에, 네번쩨는 서주 시대에 나타났다 . 장희자전에 따르면, 글자 구(咎)를 자세히 설명 했다. 그 글자를 “舅, 皋. 臼.啟, 启” 등등 여러 글자와 같다고 했다 .
음모론을 뒷 받침할 사료가 삼국지에 실렸다. 조조의 행적을 계에 비교하여 무제기 <수계융행(首啟戎行)계은신3년(啟隱神三年) 아라고 했다 . 급총죽간 발굴 당시 기록인 진서 모용수전(晉書 慕容垂)에도 있다 . 그 내용은 한글 어순이다. 백익이 (추장 간 乾) 개(啟)를 웃자리에 앉혔더니(位), 개(啟)가 (백익)을 죽였다는 일화를 모용수가 힘을 기를 때 상황으로 설명 했다. 가위 간계신기 (可謂乾啟神機) 란 문구는 는 뜻이다.
이로 나타난 사람의 혈연 관계가 뚜렸치 않다. 백익을 비밀리에 암살하고 하조(夏)를 시작한 자라 하여 열 계(啟, 启)자 를 이름으로 했다고 볼수 있다. 두 사료 모두 같은 뜻으로 쓰는 열개(開)는 간계 (乾啟)와는 달리 쓰기도 했다. 그의 후손이 처음으로 혈통을 이어 하조(夏)를 첫 군주제(君主制, monarchy) 국가라 한다.
끝. December 5, 2016. Revised August 24, Again August 31, 2017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