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조선의 첫 왕검 백익(伯益)
중국기록에 따르면 요순 시절에 나타나는 여러명의 공신 중 한 사람인 익 (益)이 舜 임금으로 부터 사제권을 위임 받은 백익(伯益)이다.[1]
사마천의 대완열전에 따르면 “우본기(禹本紀) 를” 읽었다. 높은 하늘에 있는 “빛을 숭산하던 사람들이 서쪽 곤륜구 (崑崙丘)에서 출발하여 동쪽”으로 왔다.[2]
신흥 유가의 지침에 따라 편찬된 사기 하본기에는 백익(伯益)이 정치적 지도권을 이양 받아 우의 삼년상을 치루고 지도력이 약하여 제후들이 떠나 왕위를 우의 아들 계(啟)에게 선양하고 기산에 은거 했다.[3] 그러나 묵자(墨子)에 따르면 백익이 국토의 북쪽지역에 자리를 잡고 구주를 완성 시켰다 . 백익(伯益)이 순, 우왕과 같은 시대 사람으로 같은 반열의 통치자가 되였다 . 순 우 두 지도자는 남쪽인 해지 연안 (於服澤之陽 )에 수도를 정했고, 백익(伯益)은 산 너머 해지 북쪽 (於陰方之中), 옛 부터 해(奚, 解)족이 살던 식양(息壤)에 도읍을 정하고 통치를 했다 . 백익(伯益)의 익(益)자는 “물이 넘처 흐른다, 웃사람 중의 웃사람, 그가 사는 곳에는 피신 할수 있는 험한 요새가 있다”는 등등 많은 사연이 엃켜 있다.
그가 살던 마을(隘, 阝,右:益)을 한국에서는 “좁을 애, 막을 액”이라고 읽고 풀이 한다. 해편(篇海)에서는 해/개(蓋)가 사는 마을(𨽈)이라 했다 . 익으로 인하여 한방에서 쓰던 익모초 (益母草)라는 이름이 생겼다. 왕옥산에 있던 왕검성을 사용 할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었다는 뜻이다 . 묵가와 잡가에서는 모두 백익(伯益)을 유능한 보좌관으로 인정 했다 .
수경주에서는 비문의 내용을 인용하여 백익(伯益)이 전욱 고양씨의 두쩨 아들이고, 성은 이씨(伊氏) 휘가 익(諱益) 자는 토개(字隤敳)라 했다[4]. 토개(隤敳)가 고양씨의 후손이란 기록은 “춘추좌전, 통전, 설문해자”에도 있다 . 순임금은 고양씨의 후손인 이씨(伊氏)의 딸을 정실로 드렸다 .
태평어람에는 사마천의 사기에서 인용 했다는 문구를 실었다. 황제가 치우천왕을 얻어 “천도를 밝혔다 하나 현존 하는 사기에는 그 내용을 볼수가 없다. 같은 내용이 통전과 관자 오행에도 실려 있다. 그러면서 모두 퇴개(隤敳, 伯益)가 유능한 보좌관 이라 했다. 이름자를 풀어보면,퇴(隤)자에는 “귀한 사람(貴)이 살던 마을(阝) 이란 뜻”이 숨어 있다. 이 글자에 마을 이란 뜻을 바꾸어 땅이란 뜻의 흙토(墤) 변을 적용하여 귀한 사람(들)이 살던 땅이란 두 글자(隤,墤)가 한한 사전에는 보잊 않는 글자(穨)에서 또 바꾸어 “무너질 퇴, 턱 퇴(頹)란 글자와 같은 뜻”이라 한다 . 퇴개(隤敳)라는 이름자에는 산서성 해지 북쪽 하동군에 있던 귀한 사람이 다스리던 마을 힘으로 빼았다”는 뜻이 숨어 있다 .
이렇게 백익(伯益) 또는 퇴개(隤敳)에 관한 기록이 선진시대 부터 당송시대 기록에 모두 유능한 보좌관으로 나타나 있지만, 그가 선양 한 계(帝啟)가 집권 6년 만에 살해(?) 했다 . 백익(伯益)은 중화문명의 발생지인 관중분지 해지 연안 북쪽에서 살다 죽었다. 그리 하여 백익(伯益)이 이끌던 부족은 북으로 도망했다. 이러한 사실이 사마천의 사기 흉노열전 첫 문다 .
사기 오제 본기에는 전욱 고양씨의 어머니가 촉산씨의 딸(蜀山氏女)이라 하니, 촉산 또한 분수 연안에 있어야 한다 . 분수가 황하로 이어지는 가까운 곳에 우뚝히 서있는 산을 독산(獨山)이라 했다. 글자를 바꾸어 촉산(蜀山)이라고 했다[5]. 강희자전에 따르면 <시경 빈풍(詩·豳風) 동산에 나오는 나비 애벌래란 뜻의 촉(蠋)자가 원래는 하나(one) 라는 뜻이 있는 홀로 독(獨)자에서 사슴록 변을 띠어 버린 촉“蜀” 자 였다고 한다. 이 산이 왕검성이 있던 왕옥산이고, 산해경에서는 천제산 (天帝之山)이라 하고, 산의 서남 쪽 강물 언덕에는 고도산(臯塗之山, 皋塗之山, 㱙塗之山)이 있다고 했다 . 이 산에서 시작한 여울이 도수(塗之水)의 마지막 지류다 . 도수가 시경 소아에 나오는 면수(沔水)와 합처서 서주의 수도 가까이 지나 갔다. 이 곳에 회계산(會稽山)이라고 알려진 도산 (塗山) 이 있었다 .
북쪽에 살던 전욱 고양씨의 후손들이 산서성 서쪽 분수 (汾水)를 따라 해지 연안에 이르러 번성 하여 “첫 왕중왕 단군 왕검”이 나타 났다. 우를 따르던 자들이 개를 추대하여 동이수령 백익(伯益)을 살해 하고 하나라를 세웠다. 백익의 후손이 분산 되었다. 남아있던 사람들은 떠돌이 생활을 하여 부유(蜉蝣, 浮游, 不與)라 했다. 한 지류는 다시 북쪽 고향으로 피신 했다. 탁록전을 비롯하여 분수를 따라 올라가는 지역에서 전쟁이 많았다 . 백익의 직계 후손이 뒤에는 발해만 연안에서 기자 (箕子) 를 따라 올라 온 상나라 유민을 만났다. 또 다른 고조선의 후손(費侯, 費伯, 費氏, 解毗氏)이 단군조선 발생지에 남아 중원 세력에 동화 되기도 하고 또는 계속 반항 하여 서주를 멸망 시키고, 서주의 제후국 진을 셋(三晉)으로 갈라 전국시대로 들어 갔다 . 처음 부터 해(sun, 日, 太陽)을 사음한 여러 글자의 해(解Xie, 阿, 何, 解毗, 解批, 蓋, 盖,契) 성씨가 특히 산서성 평양(平陽)에 많이 살았었다 .
끝
[1]. 尚書 舜典:帝曰:「咨!四岳,有能典朕三禮?」僉曰:「伯夷!」帝曰:「俞,咨!伯,汝作秩宗。夙夜惟寅,直哉惟清。」伯拜稽首,讓于夔、龍。帝曰:「俞,往,欽哉!」
[2]. 史記 大宛列傳:《禹本紀》言「河出崑崙。」太平御覽:《史記》曰:《禹本紀》言:河出昆侖,其上有澧泉華池
[3]. 史記 夏本紀: 禹之父曰鯀. 帝禹東巡狩,至于會稽而崩。以天下授益。三年之喪畢,益讓帝禹之子啟,而辟居箕山之陽。禹子啟賢,天下屬意焉。及禹崩,故諸侯皆去益而朝啟,曰:「吾君帝禹之子也」。於是啟遂即天子之位,是為夏后帝啟。
[4].水經注 伊水:又有《百蟲將軍顯靈碑》,碑云:將軍姓伊氏,諱益,字隤敳,帝高陽之第二子伯益者也
[5].蜀:《詩·豳風》蜎蜎者蠋。本作蜀。詳蠋字註。又獸名。《山海經》杻陽之山有獸焉,其狀如馬,其文如虎,
名曰鹿蜀。佩其皮尾,宜子孫。又《韻會》雞大者謂之蜀雞。又巴蜀,地名。秦置蜀郡,卽益州地。
又《爾雅·釋山》獨者,蜀。《疏》山之孤獨者名蜀。又《字彙補》祠器也。
끝, 다음에 계속.
August 22, 2017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