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 (三國史記) 에 실린 낙랑(樂浪) 과 대방(帶方)-2:
삼국사기에 실린 삼국의 발생에 관한 기록에 신라,백제, 가야에 관한 기록이 간략하다. 백제 땅에서는 백제본기1 에 낙랑(樂浪)이 여러번 나온다. 백제의 기원을 두 갈래로 기록했지만, 첫 아들 비류(沸流)가 새운 나라에 관한 기록이 거의 없다. 반대로 중국기록에는 두쩨 아들 온조왕(溫祚)에 관한 기록이 없다. 이를 편의상 필자는 “비류(沸流)가 새운 대륙 백제(大陸百濟)와 온조가 새운 나라를 동백제(東百濟)”라 가칭하여 설명 한다.
대륙백제(大陸百濟)의 시조 비류(沸流)는 졸본부여를 떠나 옛부터 전해 오던 통상로를 택했다. 발해만 서안을 따라 패수와 대수를 건너 (渡浿、帶二水) 당산 천진 일대라고 풀이 되는 옛적 대방 땅(帶方故地) 미추홀 (彌鄒忽)에 정착하여 나라를 새웠다. 그곳에서 요동태수 공손도 (遼東太守公孫度) 의 딸을 부인으로 맞아 동이의 강국이 되였다 . 하여 부여의 후손이라 하고 성씨 또한 부여라 했다. 북사(北史)에선 백제의 뿌리가 “개마한(蓋馬韓) 색리국 (索离国)”이라 했다 .
게국신화에 동명(东明)이 부여와 고구려의 시조로 나타났다. 우거왕의 경기에 현토군(玄菟郡)이 설치되였다. 그 지역에 “고구려(高句驪) 상은대(上殷台) 서개마 (西蓋馬) 세개의 현”을 두었다. 상은대(上殷台)에 살던 주민을 상나라 유민촌으로 부여라고 기록 된 곳이다.
이문제은 “삼국지 부여편”에서 다시 다루기로 한다. 시대적으로는 틀렸지만 공손도가 백제왕실과 사돈 괸계를 맺었다는 점은 틀림 없다. 이를 삼국지 한전에는 큰아들이 새운 나라라 하여 백제국(伯濟國)이라 했다. 그러나 삼국지에는 이름이 백제라고 알려진 사람이 둘이 나타나 혼란을 초래 한다 . 두쩨 아들 온조(溫祚)는 심양 일대였다고 추리되는 졸본부여 (卒本扶餘)에서 동쪽으로 요동 반도에 내려와 하남위래성 (河南慰禮城)에 수도로 정하고 나라이름을 십제 (國號十濟) 라고 했다. 뒤에 더 많은 가구가 들어와 백제(百濟)로 이름을 바꾸었다는 동부 백제를 뜻한다. 삼국유사에서는 백제가 금마산(金馬山)에 도읍을 정했다. 그 땅에 읍산(邑山)이 있었다. 그 지역이 마한이 라 마읍산(馬邑山)이라 했다. 고구려의 영역이라고 했다 .
백제 초기에 나타나는 낭랑(樂浪)은 요동반도에 있었다 .
삼국 사기에 따르면, 온조왕(溫祚王) 2년과 3년 (기원전 17-16년) 에 북쪽에 있는 말갈(靺鞨)이 친입해 왔다 . 말갈(靺鞨)은 고구려 첫 도읍지인 졸본부여 가까이 있어 백제와 신라의 북쪽에서 그들을 괴롭 혔다 . 온조왕 제임 4년(기원전 15년)에는 낙랑 (樂浪)과 우호관계를 제 확인 했다 . 백제의 기원을 고려해 보면 이 때 나타나는 낙랑은 요동반도에 있던 최리왕의 낙랑국을 뜻했다. 처음으로 낭랑태수 (樂浪太守) 라는 관직 이름이 나타 났다. 기원전 8년에는 낙랑이 말갈을 시켜 백제 병산책을 습격하여 7월에는 독산과 두산 두 성책을 쌓아 낙랑에서 오는 길을 막았다. 백제 영토가 요동 반도에 있던 낙랑국 남쪽에 있었다. 요동 반도에 있던 낙랑의 지도자를 발해만 서쪽에 있던 한낙랑(漢樂浪)으로 착각하여 낙랑태수 (樂浪太守)라 불렀다. 이는 삼국사기 편찬진의 오류가 분명하다. 백제본기 2, 고이왕 13년인 243년에 관구검 (毌丘儉;? – 255년)이 한낙랑태수와 대방태수를 인솔하고 고구려를 친입했다. 발해만 서안에 있던 한낙랑(漢樂浪)지역이 허술한 틈을 타서 좌장 진충을 보내 한낙랑(남쪽) 변방을 친입하여 포로로 잡아왔다 . 그 후에 9대 책계왕(責稽王, ? ~ 298년)은 서진 (西晉, 265 – 316년)이 맥인을 인솔하고 공격하자 왕이 직접 전장에 나가 싸우다 전사 했다. 10대 분서왕(汾西王, 재위:
298년- 304년) 또한 옛 한낭랑(漢樂浪) 태수가 보낸 자객에 살해 당했다. 이 시대는 발해만 연안에 있던 삼한의 후예들이 공손도 일당에게 빼았겼던 권한을 되찾아 가는 전환기였다. 삼국지 한전에는 이 사실을 오림이 낙랑본통 한국 (部從事吳林以樂浪本統韓國)하는 사기극 실패에 실렀다.
진수는 삼국지 선비전에 단석괴(檀石槐)에 관해서 설명하면서 왜인(倭人)과
한인(汗人; 韓/翰)을 혼용 했다 . 왜, 가야, 백제를 혼용 했다고 본다.
이 지역이 기원전 128년에 동이 예군 남려 등 (東夷薉君南閭等)28만 명이 내려와 창해군이 생겼던 곳이다. 이곳이 수서( 隋書 百濟)에 서쪽으로 3일을 가면 맥국(貊國)에 이른다고한 곳이다 . 발해만 서만 해안 황하 하구에 이르는 지역이다. 백랑사, 창해력사, 고씨, 최씨, 위씨, 전씨, 김씨등 한국에 많이 알려진 성씨들이 살았다. 삼한의 후예가 발해만 서남쪽에서 산동성 해안을 따라 양자강 하구를 지나 복건성 일대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서 활동 했던 시기가 대륙백제(大陸百濟) 의 전성기다. 이를 묘사한 기록이 삼국사기 최치원 (崔致遠)이 남긴 문집에 있다 .
“백제가 전성기에는 강한 병력이 백만이였다. 남으로는 오나라와 월나라를 침략 했고, 북으로는 유주, 연,제, 노를 재압하여 중국의 큰 골칫거리 였다.”
앞에서 필자가 삼국시대 오나라의 손권(孫權)이 뱃길을 잘 아는 백제사람을 특사로 보내 공손연 (公孫淵)에게 연왕(燕王)이라는 칭호를 주었다고 했다.
이를 뒷밭침하는 사료가 진서 (晉書)에 있다. 서진(西晉) 왕조가 유연(劉淵)의
전조(前趙)에게 멸망하고 사마예(司馬睿)가 강남(江南)으로 피하여 진(晉)의 망명 왕조를 이어 이를 동진(東晉, 317년 – 420년)이라 한다. 당시 중원 내륙은 고조선의 서쪽 후손인 오환과 선비족이라하는 여러 호(胡)들이 번창 했고, 동쪽 해안선을 따라서는 한해(翰海)의 주동권을 잡고 있던 삼한의 후예, 대륙 백제가 관장 했다. 고조선의 후예들이 한해(翰海)의 주동권을 잡게 된 실마리가 한서에 나타난 “한무제가 조선을 치고 낙랑과 현토군으로 하니 조선(朝鮮)이 바다에 있게(朝鮮在海中) 되였다 . 이 조선의 분산 세력을 진수는 한인 (汗人, 韓人) 한국 (汗國, 韓國)을 왜인(倭人)이라 하여 왜가 대방 남쪽 바다에 있다고 했다 . 대륙 백제 세력이 중국의 동해안으로도 진출 했다는 근거가 북사(北史) 수서 (隋書)에는 부여의 후손이 공손도와 혼인관계를 맺고 동이의 강국이 되였다고 했다. 동이의 강자를 설명하며, 조선이 제일 강했다 하고, 그뒤를 부여가 이어 받고, 부여의 뒤를 만주땅에서는 고구려가 해양원은 백제가 점유했다는 표현이 공이강국(東夷强國)
이란 문구라고 본다.
이러한 기록이 진서 재기 9 (晉書 帝紀第九)편에 실려 있다 .
“동진 효무제(東晉 孝武帝, 재위: 372년- 396년) 2년인 379년에 백제와 임읍왕 (林邑王)이 사신을 통해 방물을 바쳤다. 동진에서는 (답례로) 사신을 보내 백제왕여구(餘句)를 진동장군(鎮東將軍)으로 하여 낙랑 태수를 다스리도록 했다. 재위 11년 (388년)에는 모용수(慕容 垂, 재위: 384년-396년)가 옛 중산국 땅에서 후연(後燕) 의 초대 황제로 즉위했다. 산동성 태산 태수(太/泰山太守)가 진조에 반대하고 적요(翟遼)에 투항 했다. 백제왕이 세자 여휘를 특사로 보내 도독 진동장군 백제왕으로 했다. 대왕 척발규가 위왕이라 바꾸어 불렀다.”
적요(翟遼)란 새로 만든 명사로, 북적(北狄)이 옛 요동 땅에서 큰 정치세력으로 나타났던 다는 뜻이다. 백제를 적요(翟遼)라고 기록 했다.
진서 제기(晉書 載記) 에는 선비,오환, 고구려,백제, 설라(薛羅/新羅) 휘인(休忍 )등 모두 따라서 복종하지 않았다고 했다 . 같은 내용이 사고전서 십육국춘추
(欽定四庫全書 十六國春秋卷四十一 前秦錄九)에도 실려 있다 . 이렇게 흐터저 숨어있는 사료를 종합해 보면,진수는 삼국지에서 대륙백제 (大陸百濟)의 발전 성장시기를 은미하게 묘사하여 중원과는 지리적으로 먼 왜인전에 숨겨 버렸다.
북송시대 편찬된 태평어람에는 당나라 때에 편찬된 북사 내용을 인용하여 사라저 버린 백제의 시말과 고구려의 멸망에 관하여 잘 설명 했다.
요공태수 공손도가 딸을 백제에 출가시켜 인척관계를 맺어 삼한의 후예중에 제일가는 동이의 강국이 되였다. 백제 국왕의 성은 부여씨(夫餘氏)다. 왕을 어라하(於羅瑕) 왕비를 어륙(於陸)라 주른다. 하언(夏言) 즉 우왕이 다스리던 부족의 말이다. 우왕이 단군왕검이라한 필자의 추론을 접붙이면 설명이 뚜렸하게 나타난다. 그들은 단군조선의 후손인 부여 (夫餘)혈통을 이어 받은 흉노의 한 분파로 만주에서 남쪽으로 내려 왔지만, 옛 풍속을 이어왔다는 뜻이다. 백제의 음식 의복 풍속이 고구려와 같고, 시조를 모시는 조당을 수도에 새워 놓고 오제를 모시고 제천의식을 치루었다. 그러나 나라의 중요 성씨 여덟은 오늘날 주로 중국 땅에서 많이 살고 있다.
오호 십육국시대가 끝나고 수나라 창립 초에, 진나라 문제가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진나라를 평정할 시절(隋文帝, 平陳之歲588-589년)에 탐라국(耽牟羅國) 즉 제주도에 표류 했던 수나라 전함을 돌려 보내면서도 백제 왕실은 옛 부여의 종주권을 되찾으려고 수문제의 도움을 요구 했다. 후에 수나라가 고구려를 치려 계획 할때에도 산동성에서 요동반도에 이르는 한해의 해로를 안내해 주겠다고 제언 했지만 수나라는 백제의 속샘이 의심스럽다 혹시(수나라가 통일한 영역에 백제가 다시 들어 올까 두려워)하여 백제의 제안을 받아 드리지 않았다 .
남조 양나라 때인 537년에 남조 제나라(479년-502년)의 역사를 기록한 남제서 (南齊書)는 백제왕에게 주었던 정동대장군(鎮東大將軍) 칭호를 왜왕(倭王)에게 주고, 북쪽 세력의 지도자들이 왕검(王儉)이란 칭호를 썼다 . 진서, 십육국춘주, 남제서(南齊書), 태평어람에 실린 내용을 종합해 보면 대륙백제(大陸百濟)의 흥망이 드러 난다. 남만주에서 번창 했던 옛 부여 (扶餘)의 종주권을 놓고 고구려와 싸우던 백제(百濟)가 광개토대왕 (廣開土王,재위: 391년- 412년)에게 요동반도 끝에 있던 전술상 요새를 빼았기고, 뒤를 이은 장수왕에게 완전히 패하여 만주를 떠나 “옛 전우였던 가야,왜(倭)와 같이 한해(瀚海)를 따라 한반도 동남쪽” 으로 옮겨간 이후다.
후진(後晉, 936년-946년)시대에 편찬된 구당서(舊唐書)에는 당나라가 정복했던 고구려와 백제에 관한 기록이 많이 실려있다. 망국이 된 고구려의 후손을 요동군왕, 백제왕실의 후손을 백제왕부여장을 대방군왕, 신라왕 김진평을 낙랑군왕이라 했다.
삼국의 뿌리가 만주 땅에서 나타났다는 사실을 인정한 근거다 . 백제는 서울을 동서 두 곳에 두었다. 측천무후 때에 이르러서는 “백제의 옛 영토가 패허가 되고, 신라, 발해, 말갈이 나누어 갖아 백제의 후손이 끝났다”고 했다 . 백제의 옛 영토를 “발해, 말갈”이 신라와 같이 나누어 차지했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도 실려 있다 . 이밖에도 삼국유사에는 각족 중국기록에 실려 있는 백제에 관하여 많은 의문점이 있다는 점을 밝혔다 . 백제가 결부지별종(抉夫之別種)이라 했다. 옛적 부여(夫餘) 의 남아 있던 후손이란 뜻이다. 이 문구의 뜻은 사마천이 부여(夫餘)라고 부른 “연의 북쪽에 남아 있던 사람(夫)이란 뜻과 같다. 백제의 선조가 요녕성의 서남쪽에 있던 부여에서 내려와 부여를 백제 왕실의 성씨로 했다. 백제의 성씨로 알려진 흑치(黑齒) 는 해씨(解, 奚, 解枇氏)를 이리저리 뒤바꾸어 가차전주(假借轉注, PSMCs)한 글자다 . 이는 다시 부여의 어원에서 다루기로 한다. 백제가 장수왕에 완전히 패하여 만주땅을 떠나고 한반도에 정한 수도 사비(泗泚)가 소부리(所夫里) 란 말과 같아. 비사성(卑沙城)은 요동반도에 있던 사비성(沙卑城)을 거꾸러 불러 만든 이름이라 했다. 부여 왕실의 이름 부여는 부(扶,夫)자 여(餘)자의 결합으로 여주사람(餘州者)이란 뜻이라고 했다. 여주(餘州)는 중원 세력이 미치지 못한 북주(北州), 즉 고조선을 뜻했다. 여주 서쪽에 자복사(資福寺)란 문구가 일본에 있는 자복사(資福寺)를 뜻한다고 풀이를 한다. 유사에 실려있는 의문이 있다고 남긴 기록 ”여주공덕대사(餘州功德大寺),가림군(佳林郡), 하남임주 (河南林州) 은 모두 중국 땅에 있던 이름이라고 본다 .
백제는 옛적에 다섯 군이였는데,이를 다시 37군으로 했다. 두 곳에 백제성이 있었다 (百濟國舊有五部”分統三十七郡.二百濟城). 백제 왕은 동서 두곳에 있는 성에서 살았다(其王所居。有東西兩城)다. 중국 문헌에도 백제가 서울을 두곳에 두었다고 했다. 삼국사기와 구당서에 백제 장군 흑치상치가 백제 서부인이라 했고, 산해경 전국책등 여러 중국문헌에는 흑치국이 중국 동남쪽 해안 지역에 있었다 . 삼국지에는 흑치국에 왜 여왕국에서도 멀리 떠러저 있다고 했다 .
동이의 강국 백제가 한해를 통치 했다는 근거가 이렇게 멀리 흐터저 있다.
고구려에는 신성이 중요한 방어선으로 나온다. 이를 필자는 “중원의 세력을 막기위해 만든성이라 수도의 서남쪽에 있어야 한다고 추리 했지만, 삼국사기 에서는 그 성의 위치를 수도 동북 쪽에 있다고 풀이 했다. 필자의 추리가 옳다는 근거가 구당서(舊唐書)에 “당나라 여러 장수들 예기를 신성(新城)은 고구려 서쪽 국경에 있는 중요한 성이라 (남겨두고 지나가면) 꼭 방해가 될것이다”고 했다 .
이 문제도 뒤에 다루기로 한다. 다시 또 “공손도전(公孫度傳)과 왜인전(倭人傳)의 새로운 고찰”에서도 다루기로 한다.
끝
March 12, 2017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