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부: 대륙백제:
머릿 말: 한무제가 고조선 침략 이후에 부여에서 고구려와 백제가 나타 났다. 주몽이 큰 강을 건너 세로 도착한 곳(졸본부여)에서 세로 장가 들어 아들 둘을 두었다. 큰 아들 비류(沸流)는 발해만 서쪽을 따라 내려 가서 수도를 정하고, 동생 온조왕은 요하 동쪽으로 내려와 백제를 세우고 한성에 수도를 정했다. 대륙에 백제가 있었다는 증거는 삼국사기 최치원전(崔致遠)에 보인다. 중국 역사서에는 부여왕 위구대(尉仇台)가 한나라 말기에 공손도 (公孫度) 딸을 부인으로 맞아드려 동이의 강국이 되였다고 하고, 한국 역사에 실린 백제의 시조 온조왕에 관한 기록이 없다.
창해군을 설명한 후한시대 문헌 속에; <동이 맥군 남여 (穢貊君南閭)가 280,000
명을 인솔하고 요동에 내속 (遼東內屬) 했다>는 문구가 있지만, 그후에는 어떻게 변해 갔다는 기록이 없고, 한국 기록에는 비류(沸流)의 후손에 관한 기록이 없다.
진수는 대륙에 백제(百濟)가 있었다는 사실을 은패했다. 다만 삼국지 한전에는 대방 남쪽에 비리국 (卑離國)을 포함한 50여국 중에 큰 아들이 물을 건너와 세운 나라란 뜻의 백제(伯濟)국이 나와 있다[1]. 관구검의 고구려 친입 이전에 부여왕과는 혈통이 다른 <위거(位居)를 대사(大使)로 정했다. 그가 인심을 얻어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랐다. 세세로 경도(京都)에 사신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그 이후에 편찬된 중국사서에 <대륙에 백제가 있었다>는 사실이 좀더 뚜렸하게 실려 있다. 신원이 불확실한 공손씨 (公孫氏)가 후한 말기에6-70년 동안 남만주 역사에 나타난다. 삼국지에는 위솔선(魏率善, 率善)이란 직책이 동이전에만 나타난다. 대륙에 백제가 있었다는 사실이 공손씨 (公孫氏)영역으로 묘사 되였다고 본다.
삼국사기에는 공손도 (公孫度)가 기원전 18년 백제 건국에 나타난다. 비류에 관한 내용은 중국측 기록과 상반되여 어느설이 옳은가를 모르겠다고 했다[2];
<북부여왕 해부루의 서손 (庶孫)인 큰 손자 비류왕 (沸流王)이 미추홀(彌鄒忽)에서 백제를 건국하고, 동생 온조는 우례성(慰禮城)에서 수도를 정했다. 형이 돌아와 부끄러움을 뉘우치고 죽었다. 북사와 수서에 동명의 후손 유구대(有仇台)가 어질고 인심을 얻어 (篤於仁信) 옛 대방땅 (帶方故地) 에서 나라를 세우고 공손도 의 딸을 부인으로 맞아드려 동이의 강국 (東夷强國)이 되였다>.
북부여 해부루왕을 조상으로 하는 고구려편에는 공손도 (公孫度)가 169년(新大王 5년)에 현토 태수로 나온다. 그의 후손인 공손연(公孫淵)이 247년에 제거 될때 까지 그들의 활동 영역이 <비류왕의 어머니가 돌아와 살았다는 졸본부여에서 부터 남만주 서남쪽 해안 일대를 포함하여 모두 고구려 영역으로 기술 되였다.
한중 두사라 사서에는 이렇게 백제 건국 시조가 다르고, 건국에 깊히 관여 했다는 공손도 (公孫度)의 출생 시대에 관한 설명이 뚜렸치 않다. 진수는 공손도 (公孫度) 를 사기와 한서의 기록과는 달리150여년 이후의 사람으로 기록 했다[3].
대륙에 백제 있었다는 증거를 부여와 공손도, 그리고 맥군 남여의 후손들이 상관 관계가 있다는 가정을 증명해 보기로 한다.
부여왕 위구대(夫餘王 尉仇台)의 혈통:
진수는 부여전에서 한나라 때부터 왕래 (漢時有朝見者)가 있었다는 년호가 분명치 않은 모호한 기록을 남겼다[4]. 왜인전에 <금사역소(今使譯所), 사역시통(使譯時通) 등 위지 30 동이전에 나오는 통역 역(譯)자 기노(耆老)하는 글자>가 증거다. 앞뒤를 살펴보면, 동이전이 들어 있는 삼국지 위지 30은 현지인으로 부터 들은 예기와 위약을 인용 했다. 부여전에서 위구대 이전 부여의 역사를 설명한 자료를 <위약이 외에 또다른 옛 기록 에 (魏畧曰:舊志又言 )하는 문구>가 있다. 옛 기록(舊志)이란 문구는 부여전에 단 한번만 나타난다. 진수(陳壽 233-297)가 어린시절(太康元年, 279년)에 발굴된 급총죽간 (汲冢竹簡) 내용을 근거로 작성했던 위나라의 역사서 (蓋魏國之史書)라 본다.
앞에서는 부여(夫餘)의 어원과 그들이 지나온 경로를 살펴 보았다. 부여왕의 혈통은 부여(夫餘, 胡不與之國)의 어원과 같이 산서성 해지 연안에서 나타났다. 한 줄기는 하북평원으로 나와 상왕조 발전에 기여했다. 상나라가 멸망하자 기자를 따라 요동 에 있던 고조선 땅에 들어와 점차로 남만주에 올라와, 산서성에서 분수를 따라 올라와 대흥안령를 너머온, 또하나의 부여족과 함께 고조선의 황금시대를 이루었다.
위약에;<부여는 상나라 유풍이 풍부하고 그 곳에 자리잡은 이래로 파괴된 적이 없었다(其國殷富,自先世以來, 未甞破壞也).옛적에 도망온 사람들이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성을 쌓았다(作城柵皆員). 마치 감옥 같았다. 예맥 땅에 있던 예성(濊城) 이다. 그안에 옥갑이 있고, 은정월 (전욱역; 顓頊歷,상달,초사흘, 3일)에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전국적인(殷正月祭天,國中大會) 행사를 지냈다[5]. 자기들은 도망온 사람들이다>라고 했다.
상나라의 유풍이 풍부하다와 똑 같은 내용이 <신서(新序) 사기(史記) 전국책 (戰國策) 제후국 연(燕國)에도> 실렸다[6]. 기자가 상나라 유민을 인도하고 조선 땅 요동에 왔다는 내용과 일치 한다. 기원전 208년의 모둔 선우 친입과 기원전
108년에 한무제가 우거왕을 친입했던 시절에도 부여성(夫餘城, 濊城)은 점령 당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부여성 (夫餘城)은 요하 동쪽에 있었다. 그곳에 부여왕 위구대(夫餘王 尉仇台)가 살았다. 그가 죽고 위거(位居)가 왕이 되였다. 그가 아들이 없어 여러 지도자들이 서자 마여(孽子麻余)를 왕으로 세웠다. 혈통이 다른 우가형 아들에 이름이 위거(牛加兄子名位居)란 자가 있었다. 대사직을 맡은(為大使) 위거(位居)가 잘하여 나라 사람들이 그를 따라 매년 조위의 수도 (京都)를 찾아와 조공을 바쳤다.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략 한 전쟁에는 위거가 대가를 보내서 교외까지 나가 환영하고 군량미를 운반 했다[7].> 마여(孽子麻余)란 문구는;<직계 혈통이 아니라 기마유목민족 어느 부족 지도자>란 뜻이다. 위구대 이후에 <여러 부족장이 합의 하여 혈통이 다른 기마민족 지도자가 왕으로 선출 (諸加共立麻余) 되였다>는 뜻이다. 졸본부여 사람들이 관구검의 고구려 침략을 도와 협조 하여 고구려의 미움을 샀다. 고구려에서 독립 하려고 최후의 계책으로 불러 들인 조위의 세력이 패하자 280년에는숙신 부락이 반기를 들고 처들어 왔다. 서천왕(西川王, 재위 : 270년~292년)은 아우 달가(達賈)를 보냈다. 달가는 숙신씨의 수도에 있는 단로성(檀盧城)을 함락하고 추장을 죽이고 600여가를 부여 남쪽인 오천 (扶餘南烏川)으로 옮겼기고, 6-7개 부락 국가를 고구려의 명을 받는 부용국
(附庸國)으로 만들었다. 달가(達賈)를 안국군 (安國君)으로 봉해서 양맥 숙신 여러 부락(梁貊、肅愼諸部落)을 통치 하도록 했다 . 옛적에 명림담부에게 주어졌던 지역과 직권을 주었다. 고구려 서천왕은 옛 수도 졸본부여지역을 동생 달가(達賈) 에게 위임하고 자신은 수비를 목적으로 환도성을 수리하고 그 곳에서 살았다.
삼국사기와 삼국지의 내용을 종합해 보면;< 공손도가 등장한 이후에 나타난 발기(拔奇,發岐, ? ~ 197년)사건은 졸본부여의 통치자가 혈통이 바뀌었고, 혈통이 다른 사람이 천진 일대에 대사로 나가 졸본부여 사람들이 많이 따라 갔다. 요양-해성시 일대와 발해만 서남 쪽에 자리잡았던 비류왕 계통의 백제 세력과 긴밀한 유대 관계>를 이루었던 시대다. 이를 진수는 부여왕 해부루(扶餘王 解夫婁)의 서손(婁庶孫)이 서자 마여(孽子麻余)다. 그가 요동에 다시 돌아간 발기(拔奇, 發岐)다. 그의 아들 박우거(駮位居)가 졸본부여에 남은 부족을 다스렸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실린 발기(拔奇, 發岐)가 큰아들 비류(沸流)의 후손이다[8].
진수는 고구려전에 졸본부여에 남은 부족을는 박우거(駮位居)라 하고, 부여전에는 우가 아들 우거(牛加兄子名位居)라고 했다. 서자 마여(孽子麻余)가 대사 (大使)로 기록된 발기(拔奇)라고 본다. 고구려가 현토군을 공격하자<발해만 연안에 있던 유구대(尉仇台,尉仇台)의 후손 합세하여 현토를 방어> 했다[9].
공손도(公孫度) 와 발기(拔奇)사건:
고구려 신대왕(新大王, 재위 165년~179년)이 169년에 우거(優居)와 주부연인 (主簿然人)등을 보내서 현토태수 공손도(玄●大守太守公孫度)를 도와 부산의 적을 토벌(富山賊) 했던 시기다. 부여전에 몇번 나타나는 위거(位居)와 음(音)이 같은 이름이다. 같은 사람이 아닌가 한다. 부여에서 위거가 계부를 죽여 (位居殺季父父子) 왕권이 바뀐 사건은 조위의 실질적으로 마지막 황제 조방 (曹芳)의 집권 초기 <정시중(正始中; 240年-249年)에 관구검이 고구려 동천왕 (憂位居, 東川王, 재위: 227년 ~ 248년)의 국내성을 침략한 사건 이후> 에 발생 했다[10]. 그보다 10년전인 238년에 공손연이 양평성,즉 부여성(夫餘城, 濊城)에서 주살 당했다.
삼국사기에는 이 사건을 (동천왕 편에 실린 조위, 공손연, 오나라와의 관계는) 중국기록 위서(魏書)에서 인용 했다. 태후 우씨가 죽으면서 그녀의 첫 남편 상산왕(山上王, 재위 197년~227년)을; <국토를 양보(國壤)한 사람>이라고 했다[11]. 그녀의 잘못으로 상산왕 당시 나타 났던 공손도와 발기(拔奇)사건으로 비류수연안 일대를 많이 잃었다는 뜻이다. 신라와 백제가 모두 만주에 있던 시기라 고구려와 세 나라의 국경이 불확실하게 기술되였다.
삼국사기와 삼국지의 내용을 보면 졸본부여는 고구려의 자치주였다. 왜인전에 금사역소(今使譯所), 즉 사신이 통역관을 대리고 온곳이다. 이곳을 맥전(濊傳)
에서 금조선 (今朝鮮)이라한 곳이다. 맥군남여(濊君南閭)가 280,000명을 대리고 요동에 가서 창해군이 나타났다는 맥군이 살던 곳이다. 이곳에서 공손연이 잡혔다[12].
고구려8대 신대왕 백고(新大王, 伯固 ;재위 165년~179년)가 죽고 큰 아들 발기 (拔奇)가 불초 하므로 나라 사람들이 두쩨아들 이리모(伊夷謨)를 왕으로 세웠다. 발기는 소노가(消奴加)와 함께 30,000여호를 이끌고 179년에 공손도 (公孫康/度) 투항했다가 곧 되돌아와 비류수상 (沸流水上), 즉 고구려의 첫 수도 였던 졸본부여에서 살았다. 발기와 소노가(消奴加)가 곧 되돌아와 비류수상(沸流水上) 에 살면서 고구려로 부터 하나의 자치국으로 인정을 받아 통치권을 국상 명림답부 (明臨答夫)에게 맏겼다. 상산왕은 198년에 환도성 (丸都城)을 중축 하고 209년에 그곳으로 수도를 옮겼다. 217년에는 한나라 평주사람 하요(平州人夏瑤) 가 1,000여호를 이끌고 와서 받아 드렸다[13]. 삼국지 고구려전에는 <이리모가 새로 나라를 새웠다 (伊夷模更作新國). 고구려의 남쪽은 조선과 예맥이 접했다>고 했다.
이곳 출신으로 발해만 서남쪽 천진 일대에 자리잡았던 어느 지도자를 예맥군 남여 (濊君南閭)라고 했다. 부족군장을 왜인전에는 솔선(率善)이라 하고 한전(濊傳) 에는 형용사를 붙여 위솔선(魏率善)이라고 했다[14]. 사람들을 선한 곳으로 인도하는 앞서 솔선(率善)하여 모범을 보이는 사람이란 뜻이다. 솔선(率善)중에 서도 최고 지도자를 위솔선이라고 했다. 발기(拔奇)를 위솔선(魏率善)이라고 했다.
조선 예맥이 사는 곳을 <고구려에서는 하나의 나라로 인정(句麗別種依小水作國)
했다고 삼국지에 실었다[15]. 삼국사기에는 양맥부락(梁貊部落)이라고 했다[16]. 첫 도읍지 졸본부여를 상산왕 시절에 대륙 백제에게 빼았겼다. 졸본부여 동북쪽에 고구려 환도성, 서남쪽 발해만 연안에는 대륙백제가 있었다. 추모왕이 도읍을 정했던 고구려의 첫 도읍지의 소유권이 백제 온조왕의 형 비류왕이 세운 대륙백제로 너머 갔다[17]. 40년간 잃었던 성역 (聖域) 졸본부여 땅을 찾으려는 노력이 공손연 세력을 몰아내려는 동천왕(東川王, 재위: 227년 ~ 248년)시대 부터 나타난다. 제위 10년에는 손권이 (고구려와 밀약 하여 조위를 치자는 밀약을 하려고)보냈던 사신을 처형 하여 조위에 바치고, 12년에는 1,000여명의 병사를 파견하여 사마선왕(司馬宣王)의 공손연 토벌작전을 도아 주었다[18].
중국기록에는 <손권이 특사를 (다른 나라를 통하지 않고)직접 요동 양평에 있던 공손연에게 보냈다. 공손연이 특사를 처형하여 수급을 조위에 바쳤다. 손권은 크게 노하여 공손연을 치겠다고 했다[19].> 그 다음 해 (238년)에 공손연이 양평성(夫餘城, 襄平城, 濊城) 에서 잡혀 주살 당했다. 그후 부터 졸본주의 소유권을 잡고 있던 부여(倭)에서는 조위에 조공을 바쳤다. 이러한 사실을 “歲歲遣使詣京都貢獻”라고 기록 했다. 진수는 공손도가 남만주에 들어와서 부터 고구려가 공손씨를 몰아 내려는 오랜 전쟁 통에 부여의 왕위가 몇차례 바뀐 사실을 이렇게 은미 하게 기록 했다. 뿐만 아니라 (공손연을 토벌하고 부여성에서 갖고온 4,000여 귀중품을 간략히) 옛 부터 전해오던 보물 (傳世以為寶)이라고만 적었다[20].
양평성(襄平城)이 예성, 즉 부여성(夫餘城, 濊城)이다. 옛 비류국(沸流國)이 있던 곳이다. 비류수(沸流水)라고 부르던 졸본천 (卒本川, 沸流水, 梁水) 연안에 있었다.
신대왕 백고(新大王,伯固, 재위 165년~179년) 때에 명림답부의 난으로 반란자를 국상으로 인정하고 그(國相答夫)에게 졸본부여 일대의 통치권을 주었던 맥족 숙신씨 (梁貊部落)가 살던 곳이다[21]. 이곳을 연나부 (椽耶部,椽那部)라고도 했다[22].
부여(扶餘) 동명왕의 후손 비류(沸流)가 옛 대방 땅에 자리잡고 살았다. 이를 삼국사기 백제 본기에는; <동명(東明)의 후손 유구대 (有仇台)가 발해만 서남쪽 천진 일대에서 도망온 공손도의 딸을 부인으로 받아드렸다>고 했다[23]. 졸본부여가 온조왕의 형 비류(沸流)가 세운 백제 땅이 되였다는 뜻이다. 전한 말기 기원전
18년경에 건국한 대륙백제를 신원이 불확실한 공손도 (公孫度)와 결부시켜
한나라 때(漢時)라는 모호한 시대로 기롯 했다.
고구려 제11대 동천왕(東川王, 或云東襄,諱憂位居; 재위: 227년 ~ 248년)이 조위를 도와 238년에는 공손연을 토벌하고 그 후부터는 공손연에게 빼았겼던 옛 땅을 되찾으려고 노력했다. 동천왕이 집권 말기인 247년에 그곳을 되찾아 부여성 (夫餘城, 襄平城, 濊城, 沸流國)을 수도로 정했다. 진수(陳壽, 233년 ~ 297년)가 살아 있던 시절에 발생한 사건이다. 부여성을 고구려에 빼앗긴 사실을 동천왕 우거가 계부 부자를 죽였다 (位居殺季父父子)고하여 부여왕의 혈통을 끝냈다.
진수는 삼국시대(三國 時代; 220~280) 이후 서진 초기 까지 살았다. 조위(曹魏; 220~265)는 졸본부여 사람들의 요청으로 동천왕의 아들 중천왕 (中川王) 12년(259년)에 또 다시 고구려를 침약하다 양맥(梁貊)지역 에서 싸우다 크게 실패 하였다. 졸본부여의 반란을 완전히 진압 시키고, 그 다음 해(260년)에는 그 곳에 있던 시조묘(始祖廟, 東明王 鄒牟)에 제사를 드렸다.
삼국사기에;< 평양성을 쌓고 (築平壤城) 조당을 세웠다. 선인 왕검이 살던 곳 (平壤者本仙人王儉之宅也)이다>라고 했다[24]. 세로 자리잡은 서울 가까이에는 10년 전에 공손연의 사슬에서 풀려난 신라(新羅)가 있었다. 그에 사절 단을 보네서 우호관계를 맺었다. 그가 죽으니 그를 따라 순장 하려는 자가 많이 나와 이를 말렸지만 무덤가에서 자살한 자가 많아 나무가지로 덮어 자원(柴原)이란 이름이 생겼다[25]. 고구려가 시조 추모성왕이 처음에 수도로 정했던 곳을 되찾은 동천왕의 서거에 온 나라 사람들이 애도를 표했던 모습이다. 천년전 부터 수도로 사용해 오던 부여성(夫餘城, 襄平城) 즉 예성(濊城)을 되찾았다. 이를 잘못 인식하여 아직도 왕검댁(王儉之宅)이 한반도 평양 (平壤)이라고 인식하고있다.
진수(陳壽, 233 ~ 297)는 조위(曺魏, 220년 ~ 265년)의 멸망과 서진(西晉, 265년 ~ 317년)의 건국을 목격했다[26]. 공손연 세력이 사라진 이후의 부여왕실의 혈통은 혼미하게 기록 했다.
위구대(夫餘王 尉仇台) 이전의 혈통:
진수는 부여왕 위구대 이전의 혈통은 <위약에 실린 옛 기록(魏畧曰:舊志又言) 에서 인용 했다>고 했다[27]. 위약에; 옛 기록에는 북방에 고리국(高離國)의 시녀가 햇빛을 받아 아들을 낳았다. 그가 동명이다. 동명이 구사 일생으로 (졸본)부여 땅에 와서 왕이 되었다. 북국의 이름을 “高離之國, 橐離國”등등 다른 글자로 기록 했지만, 같은 내용이 진수 이전 사람이 쓴 논형(論衡 吉驗)에도 실려 있다[28]. 동명(東明)이란 이름은 신이경 (神異經)에도 나온다. 신이경(神異經)의 동명에 관한 예기를 언제 누가 남겼나를 확인 할수 없다. 그러나 논형은 후한 왕충 (王充,
27년~99년?) 의 작품이라 위약(魏畧曰)의 출처라고 보는 급총죽간(汲冢竹簡)이
279년에 발굴 (太康元年) 되기 전에 완성 되였다[29]. 왕충은 진수가 말한 옛 기록 (舊志又言)의 내용을 보았다. 또한 <논형 햇님의 뜻을 예기 한다>는 편(論衡談天) 에는 우본기(禹本紀, 禹紀)를 언급 했다. 구지(舊志)라고한 옛 기록의 내용을 중원 사람들이 진수 이전 부터 알고 있었다. 그 속에는 부여의 역사가 기록되여 있었다. 사마천과 수경주에서도 인용한 우본기(禹本紀)를 “옛기록에 또 이르기를; 舊志又言” 이라고 했다. 안씨가훈에 나타난 회구지 (懷舊志)에서 이를 추측을 할수 있다[30]. 회구지 (懷舊志)는 옛적부터 전해 오던 맥족의 가첩이란 뜻이다.
또하나 의문점은 <논형에 실린 내용을 인용 했다는 예문류취(藝文類聚)와 태평어람(太平御覽)에는, 동명의 출생 북국을 고려국(高麗國)이라고 했다[31].
그 밖의 사서에는 그가 건넜다는 강 이름(掩淲水,淹水, 施掩水)과 같이북국의 이름을 여러글자로 기록 하여> 어느 것이 옳은가를 판정하기 어렵게 되였다.
오늘의 지도로 설명하면 큰강 엄호수(淹淲; yānhǔ/biāo水)일명 개사수(蓋斯水; hésī)가 요하(遼河)다. 요하를 건너 보슬수(普述; pǔshù水)에서 세 친구를 만나 동행하여 졸본부여에 도착 했다. 도착한 비류수상(沸流水上)이 <비류수 북쪽, 높은 지대란 뜻>으로 오늘의 심양-요양 일대다. 이 곳이 부여의 경기지역이라 하여 당시 그곳 사람들의 발음을 사음하여 졸본부여 (卒本扶餘)라고 기록 했다. 요하 서쪽에 있는 요녕성 부신시(阜新市)가 북부여 (北扶餘) 였다. 그 보다 동쪽에는 유하 (柳河, Liehegouzhen)라는 자그만 여울이 있다. 동부여 (東扶餘)는 유하구진 (柳河溝鎭) 일대에 있었다. 그 곳이 압록수(鴨綠/淥水,遼河) 가까이에 있던 동부여 (東扶餘) 에서 동명왕 어머니 유화(柳花) 부인이 죽었다[32]. 금사(金史)에 이르기는 가섭원 (迦葉原)이라 하던 유하(柳河)는 발해의 월희 (粵喜yuèxǐ/위에 시)현이였다 하여 요하(遼河)란 이름을 붙였다. 구하(狗河)와 유하(柳河)가 있다. 월희(粵喜)는 옛 발음으로 위에 시(yuèxǐ/)와 비슷하여 햇 님(xǐ)같이 위에 높이>하는 뜻이다.
요하를 <압록수, 아리수, 또는 비류수>라고 기록 했다.
회구지 (懷舊志)의 회(懷)자는 시경에 나온 회수(淮水)자와 같은 부족의 사음자로 예(穢,濊貊) 족을 뜻했다. 그 부족이 만주에서 살던 마을을 지나는 강을 훈하(渾河, 渾江, 梁水)라고 했다. 금사에 요양(遼陽)은 동양하(東梁河)에 의지(倚)하고 있다. 올로홀필렬(兀魯忽必剌)이라고 하는 나라가 있었다. 속명으로 태자하(太子河)라 부르는 강이다[33]. 주몽이 떠나서 도착한 졸본부여가 현제 요양(遼陽)이다
삼국유사에서는 동명설화의 출처를 단군기 (壇君記云)라고 했다.
이렇게 흐트려진 사료를 종합해 보면; <진수는 구지(舊志)라 하고, 안씨가언에는 회구지 (懷舊志) 라고 밝힌 사료가279년에 발굴 (太康元年) 된 급총죽간 (汲冢竹簡) 내용이 모두 위나라의 역사서(蓋魏國之史書)였다. 맥족의 가첩이 우본기(禹本紀)다. 우본기가 단군기> 라고 추리 된다. 단군조선의 탄생부터 고구려와 부여라고 인식되는 부족의 이름이 해지연안에서 산서성을 거쳐 남만주 지역으로 옮겨 왔다는 근거가 글자를 이리 저리 바꾸어 놓은 기록에 남아 있다.
어떻게 동명의 선조가 북국에 나타났는가는 알려 지지 않았다. 그러나 앞에서 부여의 어원을 다루면서 논증한 바와 같이 해부루(解夫婁)의 선조는 산서성 해지 연안에서 올라 왔다. 동명(東明)의 출생지와 그가 왕이 되였다는 나라는 부여 또는 고구려라고 했고, 그 사료의 출처가 모호하다. 광개토왕 비문과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를 보면, 동명이 태여났던 북국은 고려국 (高麗國)이 옳다. 이를 진수는 고리국 (高離之國) 이라고 했다. 일연스님이 인용 했던 단군기 (壇君記)는 중원에 있었다. 일연 스님은 단군기 내용을 인용하여 부여 고구려 백제의 왕은 떠오르는 햇볓을 받아 임신하여 햇님의 아들(天帝子) 해(解)씨가 곧 고씨(高氏)라고 했다[34].
백제 왕의 성은 고씨(高氏)였다. 이를 중국 사람들은 사마천이 비하 하여 만든 일반 명사 부여(夫餘)로 바꾸어 기록 했다.
삼국유사에는 <단군기(壇君記)내용을 인용하여 해부루와 주몽은 배다른 형제> 라고 했다[35]. 중국기록에는 고구려와 부여의 건국에 나오는 해모수 (解慕漱), 그의 아들 해부루(解夫婁), 그리고 금와(蛙, 蝸)란 이름이 없다[36].
순자정론(荀子正論)에는 난세의 어려움을 다루면서<왕옥산 요새에 숨었던 사람이 어떻게 동쪽에 있는 낙원 땅을 알수 있겠느냐 면서,이를 우물안의 개구리 우화 (坎井之蛙,不可與語東海之樂)로 다루었다. 황하 문명의 발생지에서 요순임금이 양위(堯舜擅讓)를 했다. 그곳을 떠난 부족이 중산국(中山)에서 부유(扶柳)족을 흡수하여 호타하 연안에 제단(擅呼沱)을 쌓았다. 산서성 사람 범저 (范睢)는 상산 부유(常山 扶柳)일대 지역을 자기 마음 대로 행동하는 왕(擅國之謂王)과 같은 존제가 되였다>[37]. 그 곳에 살던 사람들이 만주땅에 들어와 나라를 세워 강성해진 과정을 설명 했다[38]. 모용씨가 요녕성 서남쪽에 있었던 유성(柳城)에 자리잡고 점차로 중원의 풍속을 모방했다. 유성(柳城)은 산서성 상산 일대에 살던 부유 (扶柳)의 성(城)을 간략한 글자다. 그곳이 옛적 부여(不與, 浮游)의 수도 였다. 그 이름 또한 다른 이름들과 같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옮겨져서 유성(柳城)이란 이름이 만주 서남 쪽에 나타났다[39]. 연왕 모용황(燕王 慕容皝)이 수도로 정한 용성현 (龍城縣) 화룡궁 (和龍)이다[40].
왕위를 이어 받은(金蛙嗣位) 금와 (蛙, 蝸)란 글자에는 통치권의 뜻이 있다[41]. 이를 장자에서는 하백(河伯)의 후손이 발해만 서남쪽 일대(北海)에 정착했다는 사실을 은미하게 기술 했다[42]. 햇님의 후손이란 뜻이 부여의 건국 신화에 나타났고, 부여의 후손인 고구려, 백제 왕실의 성씨 해 고 부여(解, 高, 夫餘)에 나타나 있다.
공손씨(公孫氏)의 시말:
공손도가 남만주에 나타난 시기부터 공손연이 주살 당한 내용을 옳바로 판독 해야 동북아시아 상고사의 문젯점이 풀린다. 이를 너무 이리저리 휘돌려 섞어 놓아 풀이 하기가 어렵다.
공손홍(公孫弘)이 한무제(漢武帝)의 제상으로 있을 당시인,기원전 128년에 창해군 (蒼海郡;滄海之郡)을 설치했다. 그의 후손 공손도(公孫度)가 산양태수(山陽太守)가 된지 10년 만에 죄를 저서 (천진-당산 일대를 관장하던 평진후)작위를 잃었다. 같은 사건을 제후년표에는 <어느 후손 경(侯慶)이 기원전 107년 (元封 四, 전쟁이 끝난 다음해)에 일설에는 사통 또는 근친 강간이라는 경미한 죄로 작위와 봉지를 잃었다. 일설에는 혹한 벌이 무서워 도둑의 소굴이였던 현토땅으로 도망을 갔다>고 한다[43]. 제후년표에 적힌 후경(侯慶)이 공손홍전에는 공손도 (公孫度)로 기록 되였다. 한서 제후년표에는<해변가 출신 공손홍이 재상(宰相)에 이르러 황실의 은총을 받아 열후의 폐자가 되였다[44]. 그 후손 양산태수 도(山陽太守度)가 죄를 지어 5년동안 성을 쌓는 형벌(完為城旦)을 마쳤다. 고성(高城)이란 두 글자를 끄테 남겼다. 높히 성을 쌓았다는 뜻이다. 공손홍의 후손이 가벼운 죄를 범하여 당시에 요동(遼東)지역에 성을 쌓는 노역장에서 일했다. 이를 필자는 현토성 (玄菟城)이라고 풀이했다.
사기 평진후열전에; “태사공왈(太史公曰)하고 사마천이 글을 끝낸 다음에, 어느 태상황후(太皇太后)가 공손홍의 후손을 찾아 한(西漢)나라 서울에 살게 하라고 지시 했지만 조정에서는 <찾을 수가 없다고 알렸다>는 기록을 “반고칭왈 공손홍 (班固稱曰; 公孫弘)”하는 긴 문구를 첨가하여 설명 했다[45].
한서 고혜고후 문공신열표(漢書 高惠高后文功臣表)에는 선조는 밝히지 않고 기원후 2년(元始二年)에 “후경이 꺼려서(侯慶忌) 오만한 현손(敖玄孫紹封)이 천호(千戶)밖에 안되는 적은 봉지의 작위를 이어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46]. 이를 삼국지에는 한시(漢時) 후한서에는 한조(漢朝)라고 은미하게 기록 했다.
진수는 신원이 분명치 않은 공손도 (公孫度)란 이름을 정당화 하려고 강(康)이 공손도의 아들이라고 했다. 고구려전에는 공손씨 3명(公孫度,康,淵) 이름이 실려 있다. 도(度)는 169년에, 강(康)은 고국천왕(故國川王, 재위: 179년~197년)사후 왕위 계승 문제로 발기(發岐)가 공손강에 귀화 했다는 사건에 나타난다. 이를 진수는 건안중(建安中; 196-220)이라 했다. 음은 같고 뜻이 다른 두 글자로 기록한 발기(拔奇, 高發岐, ? ~ 197년) 사건은 비슷한 시대 발생 했다. 후한서에는 공손도 (公孫度)란 이름이 두번 나온다. 건안2년(建安二年, 169년)에 칙소를 내려 유능한 사람(有道之士)을 찾았다.사필(謝弼)과 동해 사람 진돈 (東海陳敦)과 현토 공손도 (玄菟公孫度)세 사람이 모두 심의 대상이되여 낭중에서 제거(皆除郎中) 되였다. 고구려와 관계하여 공을 세웠다는 근거가 없다[47].
건안 12년(建安十二年, 207년)에 요동태수 공손강 (公孫康)이 자기 진영으로 피신 온 원상(袁尙, ? ~ 207년) 형제를 죽여 그들의 수급 을 조조에게 바쳤다[48]. 원소의 생질 고간(高幹)은 병주자사(幷州刺史) 조조에 반대 하다 하북성 보정시 일대에서 잡혀 죽었다. 고간(高幹)이 대륙에 자리 잡았던 비류왕의 후손이다. 후한서, 삼국지, 자치통감에는 그에 관한 기록이 다르다[49]. 태평어람에는 위지(魏志)의 내용을 인용하여 <공손강이 죽고 그의 아들 황(子晃)과 연(淵)이 모두 어려 여러 사람들이 동생 공손공(恭)에게 지도권을 맏겼다. 그가 능력이 없어 공손연이 탈취 했다>고 했다[50]. 황(子晃)보다 더 어려서 정원을 못 맏끼겠다던 공손연이 정권을 잡고 30년 후(景初元年, 237년)에는 오늘의 요양시인 옛적 졸본부여 (卒本扶餘)의 부여성, 즉 양평 (襄平)성에서 잡혀 주살 당했다[51].
공손씨 (公孫氏)멸망과 서진의 흥망:
사마씨는 고조선 후예들의 도움으로 공손연을 제거하여 조위로 부터 선양을 받아 나타났다가 고조선 후예들에 쫓겨 강남으로 도망 갔다. 일본 열도에서 도꾸가와 막부 말기에 <너도 같은 무사 계급이다. 물러가야 한다>는 취지로 밀어 버렸던 사건과 같은 현상이 하북 평원을 휘둘렀다. 이를 오호십육국시대라 한다.
공손연 일당이 사라진후 한해 서북쪽 해안 일대를 장악한 대륙백제가 두드러지게 나타 났다. 공손연 (公孫淵, ? ~ 238년)의 영향역이 미치던 활 모양의 지역에 관한 역사는 둘로 나누어 요동만 서북쪽에서 요하 입구에 이르는 지역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5-6에 실려 있다. 요동만 서남쪽에서 산동성 북부에 이르는 지역의 역사는 중국기록에 실렸다. 오호십육국이 등장한 혼란기라 중국측의 사료가 혼잡하다. 중국기록으로는;진서, 오호 십육국 시대 (五胡十六國時代: 304년 ~ 439년) 역사서 십육국춘추, 북사와 위서, 그리로 남조의 송서(宋書) 등에 숨어 있다. 그후 당-송시대에 편찬된 사서에 오호십육국 시대의 역사가 나타나기도 한다.
중국에서는 한(漢) 나라가 유지 했던 중원을 독차지 하려는 세 영웅호걸이 나타나 싸운 삼국시대가 나타났다. 강남의 손권이 고구려와 밀약을 하려고 사신을 보냈다. 동천왕 (東川王, 재위: 227년 ~ 248년)은 제위 10년인 236년 봄에 도착한 손권이 보낸 사신을7월에 처형하여 수급을 조위에 바쳤다[52]. 다음 해에는 조위에서 년호 를 경초 원년 (景初元年, 237년)으로 정한 행사에 사신을 보냈다. 그 다음 해인 238년에는 사마중달이 인솔하여 공손연을 토벌하려는 작전에 협조하여 파병 했다. 공손연이 주살 당한지 4년 뒤인 242년에는 왕이 직접 인솔하여 발해만 연안의 요동 서안평 (遼東西安平)을 공격했다[53]. 고구려 세력이 확대되자 제위 19년 (245년)에는 요동반도 동쪽 옥저 땅에서 미녀를 바쳐 내부 했다. 발해만 서쪽에 있던 신라 북쪽을 점령 했다. 이렇게 공손연 치하에 있던 남만주 요동만 연안을 모두 고구려가 통치하게 되였다. 이에 졸본부여(대륙 백제의 일부 영역) 일대를 돌보아 주던 조위는 246년에 유주자사 모구검(毋丘儉,毌丘儉)을 총사령관으로 고구려를 친입하였다. 그 전과는 달리 졸본부여의 지역민이 조위에 협조하여 전쟁에서 크게 패망했다. 졸본부여에는 득래 (得來)라는 사람이 동천왕의 국토확장 정책에 반대하여 단식투쟁을 하다 죽었다. 관구검은 그의 묘지를 극진히 돌보아 주었다[54]. 수도 환도성(丸都城)을 점령한 관구검 (毋丘儉,毌丘儉)은 돌아 가고, 현토태수 왕기(王頎)를 선봉장으로 보내 고구려 왕을 추격했다[55]. 왕은 몇년 전에 내부 했던 요동반도 남쪽 옥저땅으로 도망갔다. 그곳에서 유유 (紐由)의 묘책이 성공하여 침략군을 대파 했다. 전쟁이 끝나고, 247년(제위 21년)에는 공손연이 숨었던 졸본부여에 있던 양평성(襄平城)을 수리하고 수도로 정했다. 이곳이 평양성(平壤城)이다. 제위 22년 (248년)에는 졸본부여 가까이에 있던 신라에 사신을 보내 화친 했다. 그해 가을에 왕이 죽으니 순장 하려는 자가 많이나와 이를 말렸지만 무덤가 에서 자살한 자가 많아 나무 가지로 덥어 자원(柴原)이란 이름이 생겼다[56].
공손연 이후의 남만주 일대에서 나타난 한국의 삼국 초기역사를 간략하게 그렸다. 신라는 요하 하류 서쪽에 있었다. 동천왕을 추겪했던 현토태수 왕기 (太守王頎)가 247년 (正始八年)에 대방 태수로 왜왕 비미호가 살던 왜 (東倭, 남만주 요양 일대 졸본부여)를 다녀 갔다[57]. 배송지는 <일설에는 (世語曰) 서진을 멸망 시킨 영가의 난에 주동이 되였던 산동성 동래 사람 왕미(王彌)가 대방 태수 왕기 (太守王頎)의 손자라고 했다[58].> 대륙백제의 영역이 활 모양이 였다는 증거다.
동천왕(東川王, 재위: 227년 ~ 248년)이247년에 관구검을 도와 주었던 양맥곡의 숙신씨가 소유했던 평양성(平壤城)으로 수도를 옮기자, 그 지역 토착민 숙신씨 (肅愼)가 이를 되찾으려고 반항 했다.
동천왕의 아들 연불(然弗)이 뒤를 이은 중천왕(中川王, 재위 248년~270년) 이다.
259년에 조위가 졸본부여에 까지 친입하였다. 양맥(梁貊)에서 싸워서 이겼다.
중천왕의 둘째 아들 약로(藥盧)가 뒤를 이은 13대 서천왕(西川王, 재위 :
270년- 292년) 이다. 졸본부여에서 반란이 일어 났다. 서천왕은 여러 중진의 추천으로 동생 달가(達賈)를 사령관으로 단로성(檀盧城)을 빼앗고 진압했다. 동생을 안국군 (安國君)으로 봉해서 졸본부여의 독립운동을 막았다[59]. 달가
(達賈)는 졸본부여의 추장을 죽이고 6백여 가구를 부여 남쪽의 오천(烏川)으로
이주시키니 그 곳에 있던 6-7부락이 항복해 왔다. 졸본부여 남쪽 지역이다.
서천왕은 서쪽에 있던 모용(慕容)씨로 기록된 대륙백제 세력을 견제하여 서쪽에 설치된 신성(新城)을 몇 차례 순행하였다. 서천왕의 아들이 14대 봉상왕(烽上王,
재위 292년~300년) 이다. 취임 첫해에 삼촌 안국군을 죽였다. 다음 해(295년)에는 전연(前燕)을 세운 모용황(慕容皝)의 아버지 모용외(慕容廆, 269년 –333년) 가 친입 했다. 고구려에 졸본부여를 빼았긴 모용씨의 첫 공격이였다. 또 다시296년에는
천추의 원수 고구려를 쳐들어와 서천왕릉을 도굴했다. 고구려와 백제가 성역 졸본부여를 소유하려는치열한 투쟁의 한 면모다.
백제와 고구려는 부여의 후손을 자처 하며 옛 부여의 수도였던 졸본부여(卒本扶餘, 遼陽)의 종주권을 놓고 오랫동안 싸웠다. 백제와 고구려 사이에 끼어 있던 자그만 나라 신라 (新羅)는 큰 두나라가 싸우는 통에 많은 사람들이 도망을 와서 갑짜기 성장 했다. 그로 인하여 신라 지증왕(智證王,재위: 500년- 514년)시절에 많은 국책사업 을 했다. 국호를 신라로 확정하고 그 시절에 울릉도를 발견하고 수도를 한반도 동남쪽으로 옮겼다[60]. 삼국유사에는 지증왕 이전을 상고 그후를 중고 (已上為上古已下為 中古)라 했다. 이 시절에 민요 아리랑이 나타났다고 본다.
삼국사기에 실린 백제는 온조왕이 세운 반도 백제만을 뜻했다.
고구려가 247년에 수도를 졸본부여로 옮긴 뒤로는 요동 반도 끝에 남아 있던 (반도) 백제와 요동만 서쪽을 관장 하던 대륙백제가 합세한 대백제(大百濟) 세력과 오랫동안 싸웠다. 고구려 제16대 고국원왕 (故國原王, 재위: 331년 ~ 371년)
이 요동 반도에 있던 백제 치양성 (雉壤)을 치려다 실패 했다. 다음 해에는 백제가 반격하여 졸본부여에 들어 왔다. 여기서 평양성을 방어하다 전사 했다[61]. 큰아들이 뒤를 이어 제17대 소수림왕 (小獸林王, 재위 : 371년~384년)이 되였다. 그가 아들이 없어 동생(故國原王의 두쩨)이 그의 뒤를 이어 18대 고국양왕 (故國壤王;재위 : 384년 ~ 391년)이고 그의 아들이 광개토대왕이다. 고구려는 16대 부터 19대 광개토대왕이 만주를 통일 할때 까지 동이의 최 강국이였던 대 백제(大百濟) 세력과 싸웠다. 고구려의 전쟁 상대 이름이 서쪽은 진 (秦), 현토, 요동, 글안, 연(燕), 모용씨 (慕容), 왜(倭) 로 나오고 요동만 끝에 있던 온조왕의 영역은 백제로 실렸다[62]. 고국양왕은 요동만 서북쪽 해안에 있던 신라을 인질로 삼았다[63]. 고국양왕의 아들 광개토왕이 남만주를 통일한 내용은 광개토왕 (廣開土王) 비문에 실렸다.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이 백제 왕 부여경 (王扶餘慶)을 대동강 하류에 있던 수도 한성(漢城)에서 몰아 내고 영토를 확장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해의 주도권을 잡았던 “삼한의 후예들 (백제, 신라, 가야, 일본, 유구)이 만주를 떠나 뱃길로 중국 동쪽 바다에서 부터 한해(翰海)의 동서 해안에 흐터저 있는 여러 섬으로 퍼저 나갔다[64].
중원에는 공손연을 토벌한 사마중달의 후손이 세운 서진(西晉; 265년 ~ 317년)이 고조선의 후예들에 밀려 강남으로 도망가고, 하북 평원에는 오호 16국 시대가 나타났다. 십육국시대 말기에, 대륙 기마민족 생활 풍속을 지니고 있던 선비족
탁발부가 고조선의 발생지인 산서성에서 북위(北魏: 386년 ~ 534년)를 세워 하북 평원을 통일 했다. 그 사람들 말로 <탁(拓)은 땅, 발(跋)은 북쪽(後,北)이란 뜻>에서 탁발을 성씨로 했다가 뒤에는 원씨(元氏)로 바꾸었다[65]. 탁발씨拓跋氏)는 아사달 (阿斯達)에 살던 사람들이란 뜻이다. 그 나라 말엽에 <위(魏)자와 같은 놉다는 뜻을 훈역한 글자 최(最, 崔, 高)를 성씨로 한 사관 최홍(崔鴻)이 십육국춘추 (十六國春秋) 를 남겼다.
이 시대에 백제의 역사서 서기 (書記)를 고흥 (高興)이 저술했다. 더더욱 고기에 이르기를; 근초고왕(近肖古王; 346년 – 375년) 전 까지는 개국이래 문자로 사실을 기록하지 못했다. 그때에 이르러 박사 고흥(高興)을 얻어 서기(書記)를 시작 했다. 고흥이 다른 책에는 나타나지 않아 그가 어떠한 사람인지 신분을 알수 없다. (不知其何許人)고 했다[66]. 고흥(高興)은 창해군이 있던 발해만 서남쪽 사람으로 대륙 백제의 왕족이라 본다.
진서 (晉書)에 나타난 동왜(東倭):
중국문헌에는 동왜(東倭)란 문구가, 사마중달의 업적을 기록한 진서(晉書·帝紀一) 에 단 한번 나온다[67]. 요동(遼東)의 서쪽을 요서(遼西)라 부르듯, 동왜(東倭)의 서쪽에 왜(倭)라고 부르던 지역 또는 부족이 있었다는 뜻이다. 삼국지 선비전에, 단석괴(檀石槐)가 발해만 서쪽 해안 일대에 살던 한국(汗國)에서 한인(汗人)을 대려 갔었다. 같은 지역을 왜인전에 실어 한인(汗人)이 왜(倭)로 기록 되였다. 후한서에서는 왜인 왜국(倭國)이라고 했다. 그곳 사람들을 서왜(西倭)로 인식하여 동쪽에 있던 같은 부족을 동왜(東倭)라고 했다. 동왜(東倭)에서 바쳤다는 공물은 개선장군 사마중달이 양평성(襄平城), 즉 부여성 (扶餘城, 濊城)에서 갖고온 귀한 조각물 이였다. 공손연을 토벌한 지역을 방현령 (晉書)은 한 예가 사는 조선 (朝鮮韓 貊) 땅이라고 했고, 진수는 금조선 (今朝鮮) 이라 했던 곳이다. 동왜(東倭)는 요양이 분명 하다. 이를 왜인전에는; <지금 통역이 사는 곳 (今使譯所)에서 30여국을 지나 왔다. 종군지왜(從郡至倭), 즉 발해만 서안 (낙랑 대방군)을 지나 동왜에 이른다. 그로 부터 요동반도 끝을 돌아 동쪽으로 가면 (乍南乍東) 대동강 하구 구야한국 (狗邪韓國),즉 한성(漢城)에 이른다[68].>고했다.
진서(晉書)에는 왜(倭)자가 3번 실렸다. 어느 한자도 일본 열도를 뜻한 글자가 아니다.
첫 번쩨는 사마중달이 공손연을 토벌한 시기, 두번쩨는 그의 아들 사마염 (司馬炎)이 서진의 첫 황제가 된 265년 행사에 왜인(倭人)이 방물을 보냈다. 세번쩨는 열전에 처음으로 중원과 국교를 텄던 비미호 (俾彌呼)를 설명 하면서 <조위 시절의 사건을 한말 (漢末)이라고>했다[69]. 진서(晉書)에 나오는 모든 왜(倭)자와 삼국지 왜인전과, 후한서의 동이전을 종합해 보면, 왜국 여왕 비미호 (倭國女王俾彌呼)가 살았던 곳을 동왜(東倭)라고 했다. 동왜(東倭)는 한인(汗人, 汗國)이 살던 한국(汗國, 韓國)이였다. 대륙백제의 졸본부여를 그렇게 불렀다.
오림이낙랑(吳林以樂浪)사건과 마한 백제:
마한 딴에 나타났다는 백제는 위진시대 이후를 기록한 진서(晉書) 에 처음으로 나타난다; 전연(前燕)을 세운 모용황(慕容皝, 재위: 337년 ~ 348년)전과 부견
(苻堅, 재위 : 357년 ~ 385년)전에 발해만 연안에 있던 여러 나라들 “오환, 고구려,설라 휴인등(薛羅、休忍等諸國) 그리고 선비족 여러 분파”와 같이 나온다.
진서 본기(晉書 帝紀)에는 사마씨가 강남으로 쫓겨간 이후 372년(咸安二年)에 처음으로 백제(百濟)가 나온다[70]. 진서 보다 2세대 후에 편찬된 통전(通典)에는 삼국지에 나타난 오림이낙랑 (吳林以樂浪)사건이 실렸다[71]. 마한왕이 서진 황실을 찾았다지만 진서(晉書)에는 오림이 낙랑 사건이 없고, 여러 나라와 같이287년에 마한 (馬韓)이 사신을 보냈다고 기록 했다[72]. 한국이나 일본 역사서에는 그때에 서진(西晉)과 교류 했다는 기록이 없다. 이 사건을 설명한 통전에 나오는 마한왕 (馬韓王)은 한반도 사람이 아니라, 대륙에 있던 마한, 즉 비류왕 후손이 분명 하다.
대륙에 백제가 있었다는 증거:
대륙에 백제가 삼국지에는 나타나지 않으나, 진서(晉書) 동이전에 있다.
왜왕 비미호 (倭國女王俾彌呼)가 살았던 동왜(東倭)가 남만주 지역이 였다는 확실한 증거가 뚜렸하게(明文化)적혀 있다[73]:
“宣帝之平公孫氏也,其女王遣使至帶方朝見,其後貢聘不絕. 及文帝作相,又數至.”
<사마선왕이 공손씨를 정벌하니 그 여왕이 사신을 대방에 보내 천자를 만났다. 그후로 공빙이 그치지 않았다. 문제(文帝)는 그들을 제상으로 임명하여(文帝作相) 여러 해를 지났다. 태시초(泰始:265-274년)에 다시 와서 조공을 바쳤다.>
졸본부여 지역 또는 대방 사람들(汗人, 倭人)이 서진의 조정에서 높은 직을 맡아 보았다는 뜻이다. 사마씨가 서진을 세운 뒤에는 왜(倭)라고 기록 되던 대륙백제 사람들이 서진의 중진으로 일했다. 진수는 이 사실을 부여전(夫餘傳)에; 위거가 대사가 되여 조위 경도에 매년 사신을 보넸다 (歲歲遣使詣京都貢獻)고 기록 했다.
또 다른 확실한 증거가 남조의 사서에도 실려 있다.
양나라 때 소자현이 편찬한 남제서(南齊書)에는 대륙 백제가 하북 평원에서 활발하게 해양권을 소유한 강자로 대륙을 본향으로 하던 선비족과 싸웠다. 진동대장군 백제왕 모대(鎮東大將軍百濟王牟大)가 올린 표(表曰)에, <태시중에 이르러 (泰始中; 465년-471년) 서는 이웃에 있던 송나라에 사신 (比使宋朝)을 보냈다. 조부 모도(牟都)의 작위를 이어 받아 백제왕에 봉했다. 위로(魏虜) 수십만명이 백제를 공격하려고 국경을 너머 와 해례곤(解禮昆)과 목간나 (木干那)등을 보내 무찔렀다[74],[75]. 문장에 나오는 <위로(魏虜), 혐융(獫狁), 이 불손(弗悛)하게 많은 병사를 동원하여,낙랑태수 (樂浪太守), 조선태수신 장한 (朝鮮太守臣張塞) 등 등, 여러 상황을 종합해 보면> 전쟁터는 하북평원이였다. 백제왕 모대 (牟大)의 선조는 대륙백제 고(高)씨가 모용씨(慕容)와 같이 서진 말기에 서쪽에서 나타난 선비족 탁발씨 (托跋氏)의 친입을 맞아 싸워 이긴 상황을 설명 했다. 대륙백제의 혈통을 <여러번 연(燕)이란 나라를 세웠던 모용씨>로 기록 했다. 전연(前燕)의 초대 황제가 된 모용황 (慕容皝, 297년- 348년)을 조선공 (朝鮮公)으로 봉했다[76]. 북사에도 조선후 (朝鲜侯)란 칭호가 발해만 서쪽지역에 나타난다.
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모용황 (慕容皝)이 346년에 부여를 흡수한 내력을 다음과 같이설명 했다[77]:
“夫餘居于鹿山,為百濟所侵,部落衰散,西徙近燕,而不設備。 遂拔夫餘,虜其王玄及部落五萬餘口而還。皝以玄為鎮軍將軍,妻以女.”
<발해만 연안에 있던 백제가 부여를 친입한 와중에 록산( 夫餘居于鹿lù lǘ山, 의무려산?) 에 있던 부여왕 현(夫餘王玄)을 잡아 그의 딸을 부인으로 삼았다.>는 뜻이다.
부여왕현(夫餘王玄)의 후손이 동위의 발해왕 고환(渤海獻武王歡)이고 그의 큰아들 이 고등(高澄, 521년–549년)이다[78]. 동생 고양이 북제 초대 황제(北齊 文宣帝 高洋, 526년–559년)가 되여 형을 세종 문양제(世宗 文襄帝)로 추존했다.
십육국춘추(十六国春秋) 와 통전에; 모용씨 (慕容氏)의 어원은 보요관이 와전 (步搖冠; bù yáo)되여 나타난 사음자라고 한다[79]. 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보요(步搖)란 글자가 없다. 진서(晉書)에서도 선비족의 풍속에서 나온 음이 와전 되여 모용(慕容)이 되였다 하나, “보요(步摇) 라고 읽는 글자는 [bùyáo] 부야오/부여 로 발음 되였고 한서, 동관 한기, 자서(字書 釋名)등 여러문헌에 나온다. 자서 역명 (字書釋名)에는 귀인의 머리 장시품을 보요 (步摇)라고했다. 발기(拔奇) 사건이후 상산왕 (山上王, 재위 197년~227년) 21년(217년)에 평주인(平州人) 하요(夏瑤)가 1,000여 가구를 인솔하고 고구려에 복속해 왔다[80]. 하요(夏瑤)는 그와 같은 의관을 했던 사람이다.
일주서 왕회해에는 산서성 일대에 있던 북당(北唐)과 발해만 연안 에서 있던 해국의 지도자가 해유관(解隃冠)을 선물로 바쳤다[81]. 이와 같은 관을 산서성 일대(燕, 趙,代)에 살던 부여 사람들이 썼다. 그관을 보요관(步搖冠) 이라고 했고,
그 관을 쓰던 사람들이 조양 일대로 올라 왔다[82]. 면류관冕旒冠)의 원형이 유관 (隃冠)이고 유관을 보요관(步搖冠)이라 했다. 햇님의 후손이 쓰던 관이다.
진서에는 선비대인 모용외(慕容廆)전에 부여의 종말을 기록 했다[83]:
부여는 왕이 자살하고 한 분파는 고구려로 도망 갔다. 동진(東晉)의 평주 자사(平州刺史)· 최비 (崔毖)가 고구려, 선비 모용부, 단부(段部) 와 우문부 (宇文部)의 중간에서 제간을 부리려다 실패하여 고구려로 도망 왔다[84].
십육국춘추에는 모용수(慕容垂)가 건국한 후연(後燕, 384년– 407년)은 부여왕 의려 (依慮)의 후손 재상 여위(餘蔚)를 부여왕에 책봉 했다[85]. 태평광기에는 월주(越州)에 부여현 (扶餘縣)과 부여위정안(扶餘尉程顏)이 있었다[86].
삼국지에는 신구 당서에 백제의 서쪽이 월주라고 했다[87]. 중국 양자강 이남 지역, 오늘의 절강성(浙江省)으로 알려 젔다. 부여의 후손이 방대한 한해(翰海)의 동서 연안에 흐터져 살았다는 증거다.
산서성 상산 일대에 있던 부여족을 뜻하던 부여지국 (不與之國, 浮游作矢, 古者夷牟初作矢, 常山 扶柳)이 대흥안령 동쪽으로 옮겨왔다[88].
서쪽에다 쌓은 유성 (柳城)이란 이름이 동쪽에 있던 요새 이름으로 바꾸 였다[89]. 조양 일대에 있던 유성(柳城)이 극성(棘城)이란 이름으로 바뀌었다. 극(棘)자는 시경에서 산서성을 무대로한 시문 여러곳에 나온다[90].
이를 용성(龍城)이라고도 했다[91]. 적봉시에서 조양에 이르는 지역이 전욱 고양씨의 유적(棘城即帝顓頊之墟)이 나타나는 곳이다. 모대(牟大)가 보냈던 해례곤(解禮昆) 은 발해만 연안에서 여러번 나타났던 해(解)의 예군(禮君) 이란 뜻으로 옛적에 중원에 있던 대륙백제의 어느 제사장 단군(壇君)이였다. 발해만 서남쪽 해안이 대륙백제의 본향이다.
결론: 산서성 해지연안에서 탄생한 단군조선의 후손들이 지도자를 잃고 남만주 지역으로 옮겨 왔다는 근거가 글자를 이리 저리 바꾸어 부여왕해부루의 큰 손자 비류(沸流) 가 미추홀(彌鄒忽)에서 백제를 건국하여 중국대륙으로 펼쳐나갔 었다는 증거를 찾았다
공손도와 삼국지에 나타난 공손도와는 100년 이상 공백을 은패 하려고 한 나라때 년대를 사용 했다. 맥군 남여가 인솔하고온 사람들의 후손들이 해부루(解夫婁)의 후손 발기(拔奇)다. 그를 위구대(尉仇台)로 바꾸어그가 요동에 돌아왔다. 이러한 모순을 은패 하려고 조선이 바다 안에 있다, 바다 안에 왜인이 있다. 바다안에 있다던 조선이 더 멀리 퍼저 나갔다고 기록했다. 발기(拔奇)를 위솔선(魏率善) 이라고 했다. 양평성(襄平城)이 예성, 즉 부여성(夫餘城, 濊城)이다. 옛 비류국 (沸流國)이 있던 곳이다. 신대왕 백고(新大王,伯固, 재위 165년~179년) 때에 명림답부의 난으로 반란자를 국상으로 인정하고 그(國相答夫)에게 통치권을 주었던 맥족 숙신씨 (梁貊部落)가 살던 곳이다
사료의 출처인 단군기 (壇君記) 는 279년에 발굴된 급총죽간이다. 구지(舊志), 회구지 (懷舊志) 라고 했다. 우본기(禹本紀)라고 알려졌던 의문의 기록물이 맥족의 가첩이다.
끝.
[1].三國志 韓傳: 韓在帶方之南,東西以海為限,南與倭接,方可四千里。方可四千里。有三種,散在山海間,無城郭。
有爰襄國、牟水國、桑外國、小石索國、大石索國、優休牟涿國、臣濆沽國、伯濟國、速盧不斯國、 如來卑離國、
楚山塗卑離國、凡五十餘國。大國萬餘家,小國數千家,總十餘萬戶。辰王治月支國。臣智或加優呼臣雲遣支報安邪踧支濆臣離兒不例拘邪秦支廉之號。 其官有魏率善、邑君、歸義侯、中郎將、都尉、伯長. <魏率善胡邑長>.
[2]. 三國史記 百濟本紀第一: 是前漢成帝鴻嘉三年也。沸流以●鄒,土濕水鹹,不得安居,歸見慰禮,都邑鼎定,人民安泰,
遂慙悔而死,其臣民皆歸於慰禮。後以來時百姓樂從,改號百濟。其世系與高句麗,同出扶餘,故以扶餘為氏。一云:始祖沸流王,其父優台,北扶餘王解扶婁庶孫。母召西奴,卒本人延●勃之女,始歸于優台,生子二人,長曰沸流,次曰溫祚。優台死,寡居于卒『北史』及『隋書』皆云:「東明之後有仇台,篤於仁信。初立國于帶方故地,漢遼東太守公孫度以女妻之,遂為東夷强國。」未知孰是
[3]. 三國志 公孫度傳: 公孫度字升濟,本遼東襄平人也。度父延,避吏居玄菟,任度為郡吏。時玄菟太守公孫琙,子豹,
年十八歲,早死。度少時名豹,又與琙子同年,琙見而親愛之,遣就師學,為取妻。初平元年(190년),度知中國擾攘,語所親吏柳毅、陽儀等曰:「漢祚將絕,當與諸卿圖王耳。」史記 平津侯主父列傳: 元狩二年,弘病,竟以丞相終。 子度嗣為平津侯。度為山陽太守十餘歲,坐法失侯. 史記 史記 表 建元以來侯者年表:元封四年,侯慶坐為山陽太守有罪,
國除. 漢書 表:: 平津獻侯公孫弘.元狩三年,侯度嗣,十三年,元封四年,坐為山陽太守詔徵鉅野令史成不遣,完為城旦.
[4].三國志 夫餘傳: 國之耆老自說古之亡人。作城柵皆員,有似牢獄。魏畧曰:其國殷富,自先世以來,未甞破壞也。
其印文言「濊王之印」,國有故城名濊城,蓋本濊貊之地,而夫餘王其中,自謂「亡人」,抑有似也。
三國志 魏書三十 倭人傳:倭人在帶方東南大海之中,依山島為國邑。舊百餘國,漢時有朝見者,今使譯所通三十國。
[5].三國志 夫餘傳:食飲皆用俎豆,會同、拜爵、洗爵,揖讓升降。以殷正月祭天,國中大會,連日飲食歌舞,名曰迎鼓,
於是時斷刑獄,解囚徒。在國衣尚白,白布大袂,袍、袴,履革鞜.
[6]. 新序 : 燕王吊死問孤,與百姓同甘苦二十八年,燕國殷富,士卒樂軼輕戰史記 燕召公世家:燕國殷富,士卒樂軼輕戰,
於是遂以樂毅為上將軍,與秦、楚、三晉合謀以伐齊.戰國策 燕策: 十二八年,燕國殷富,士卒樂佚輕戰。
於是遂以樂毅為上將軍,與秦、楚、三晉合謀以伐齊。齊兵敗,閔王出走於外。燕兵獨追北入至臨淄,盡取齊寶,
[7].夫餘本屬玄菟。漢末,公孫度雄張海東,威服外夷,夫餘王尉仇台更屬遼東。時句麗、鮮卑彊,度以夫餘在二虜之間,妻以宗女。尉仇台死,簡位居立。無適子,有孽子麻余。位居死,諸加共立麻余。牛加兄子名位居,為大使,輕財善施,國人附之,歲歲遣使詣京都貢獻。正始中,幽州刺史毌丘儉討句麗,遣玄菟太守王頎詣夫餘,位居遣大加郊迎,供軍糧。
[8]. 三國志 魏書三十 夫餘傳:夫餘本屬玄菟。漢末,公孫度雄張海東,威服外夷,夫餘王尉仇台更屬遼東。時句麗、鮮卑彊,
度以夫餘在二虜之間,妻以宗女.有孽子麻余。位居死,諸加共立麻余。牛加兄子名位居,為大使,輕財善施,國人附之,歲歲遣使詣京都貢獻。高句麗傳: 拔奇遂往遼東,有子留句麗國,今古雛加駮位居是也。其後復擊玄菟,玄菟與遼東合擊,
大破之. 三國史記 百濟本紀第一:始祖沸流王,其父優台,北扶餘王解扶婁庶孫。母召西奴,卒本人延●勃之女,
始歸于優台,生子二人,長曰沸流,次曰溫祚。優台死,寡居于卒本.
高句麗本紀第三 大祖大王 六十九年 ,王率馬韓、穢貊一萬餘騎,進圍玄●城。扶餘王遣子尉仇台,領兵二萬,與漢兵幷力拒戰,我軍大敗。
[9]. 三國志 魏書三十 夫餘傳:夫餘本屬玄菟。漢末,公孫度雄張海東,威服外夷,夫餘王尉仇台更屬遼東。時句麗、鮮卑彊,
度以夫餘在二虜之間,妻以宗女.有孽子麻余。位居死,諸加共立麻余。牛加兄子名位居,為大使,輕財善施,國人附之,歲歲遣使詣京都貢獻。高句麗傳: 拔奇遂往遼東,有子留句麗國,今古雛加駮位居是也。其後復擊玄菟,玄菟與遼東合擊,
大破之. 三國史記 百濟本紀第一:始祖沸流王,其父優台,北扶餘王解扶婁庶孫。母召西奴,卒本人延●勃之女,
始歸于優台,生子二人,長曰沸流,次曰溫祚。優台死,寡居于卒本.
高句麗本紀第三 大祖大王 六十九年 ,王率馬韓、穢貊一萬餘騎,進圍玄●城。扶餘王遣子尉仇台,領兵二萬,與漢兵幷力拒戰,我軍大敗。
[10].三國志 毌丘儉傳: 正始中,儉以高句驪數侵叛,督諸軍步騎萬人出玄菟,從諸道討之。句驪王宮將步騎二萬人,
進軍沸流水上,大戰梁口,梁音渴。宮軍破走
[11].三國史記 高句麗國本紀第五:東川王:八年,魏遣使和親。秋九月,大后太后于氏薨。大后太后臨終遺言日曰:「妾失行,
將何面日目見國壤於地下?若群臣不忍●於溝壑,則請葬我於山上王陵之側。」遂葬之如其言
三國志 毌丘儉傳: 正始中,儉以高句驪數侵叛,督諸軍步騎萬人出玄菟,從諸道討之。句驪王宮將步騎二萬人,
進軍沸流水上,大戰梁口,梁音渴。宮軍破走
[12]. 前漢紀 孝武皇帝紀三: 獲首虜數千級東夷穢貊君南閭等口二十八萬人降。以為蒼海郡。
[13]. 三國史記 高句麗國本紀第四: 上山王. 二年,春二月,築丸都城. 十三年,冬十月,王移都於九都丸都.
二十一年,秋八月,漢平州人夏瑤,以百姓一千餘家來投,王納之,安置柵城
[14]. 三國志 韓傳:辰王治月支國。臣智或加優呼臣雲遣支報安邪踧支濆臣離兒不例拘邪秦支廉之號。其官有魏率善、邑君、
歸義侯、中郎將、都尉、伯長。倭人傳:今以難升米為率善中郎將,牛利為率善校尉,假銀印青綬,引見勞賜遣還.
復立卑彌呼宗女壹與,年十三為王,國中遂定。政等以檄告喻壹與,壹與遣倭大夫率善中郎將掖邪狗等二十人送政等還,
[15].三國志 高句麗傳:國人有氣力,習戰鬪,沃沮、東濊皆屬焉。又有小水貊。句麗作國,依大水而居,
西安平縣北有小水,南流入海,句麗別種依小水作國,因名之為小水貊,出好弓,所謂貊弓是也
[16]. 三國史記 高句麗國本紀第四: 上山王. 二年,春二月,築丸都城. 十三年,冬十月,王移都於九都丸都.
二十一年,秋八月,漢平州人夏瑤,以百姓一千餘家來投,王納之,安置柵城
[17].三國史記 高句麗國本紀第五: 故國川王新大王伯固之第二子。伯固薨,國人以長子拔奇不肖,共立伊夷謨為王。
漢獻帝建安初,拔奇怨為兄而不得立,與消奴加涓奴加,各將下戶三萬餘口,詣公孫康降,還住沸流水上
[18].三國史記: 十年,春二月,吳王孫權,遣使者胡衛通和。王留其使,至秋七月,斬之,傳首於魏.東川王 十二年,魏大傅太尉司馬宣王率衆,討公孫淵。王遣主簿大加,將兵千人助之.
[19].三國志 吳主傳:三月,遣舒、綜還,使太常張彌、執金吾許晏、將軍賀達等將兵萬人,金寶珍貨,九錫備物,
乘海授淵。淵果斬彌等,送其首于魏,沒其兵資。權大怒,欲自征淵
[20].三國志 夫餘傳: 公孫淵伏誅,玄菟庫猶有玉匣一具。今夫餘庫有玉璧、珪、瓚數代之物,傳世以為寶,
耆老言先代之所賜也。其印文言「濊王之印」,國有故城名濊城,蓋本濊貊之地,而夫餘王其中,自謂「亡人」,抑有似也
[21].三國史記:明臨●天明臨答夫之難,次大王太子鄒安逃竄,及聞嗣王赦令,卽詣王門,告曰:「嚮,國有災禍,臣不能死,遯于山谷,今聞新政,敢以罪告。若大王據法定罪,棄之市朝,惟命是聽,若賜以不死,放之遠方,則生死肉骨之惠也,臣所願也,非敢望也。」王卽賜狗山瀨、婁豆●婁豆谷二所,仍封為讓國君。拜●夫答夫為國相,加爵為沛者,令知內外兵馬兼領梁貊部落。改左右輔為國相,始於此
[22].三國史記:二十年,春正月晦,日有食之。三月,大祖大王薨於別宮,年百十九歲。冬十月,椽那●衣明臨●夫,因民不忍,弑王。號為次大王. 其子弟幷恃勢驕侈,掠人子女,奪人田宅,國人怨憤。王聞之,怒欲誅之。左可慮等與四椽那謀叛.
[23].三國史記 百濟本紀第一: 遂與第弟率黨類,渡浿、帶二水,至●鄒忽彌鄒忽以居之。『北史』及『隋書』皆云:
「東明之後有仇台,篤於仁信。初立國于帶方故地,漢遼東太守公孫度以女妻之,遂為東夷强國。」
[24].三國史記 高句麗國本紀第五: 東川王 二十一年,春二月,王以丸都城經亂,不可復都,築平壤城,移民及廟社。
平壤者本仙人王儉之宅也。或云王之都王儉. 二十二年,春二月,新羅遣使結和
[25].三國史記 高句麗國本紀第五: 東川王 二十二年,春二月,新羅遣使結和。秋九月,王薨。葬於柴原,
號曰東川王。國人懷其恩德,莫不哀傷。近臣欲自殺以殉者衆,嗣王以為非禮,禁之。
至葬日,至墓自死者甚多。國人伐柴,以覆其屍,遂名其地曰柴原
[26].晉書 帝紀第三: 泰始元年冬十二月丙寅,設壇于南郊,柴燎告類于上帝曰:「皇帝臣炎敢用玄牡明告于皇皇后帝:
魏帝稽協皇運,紹天明命以命炎。昔者唐堯,熙隆大道,禪位虞舜,舜又以禪禹,”封魏帝為陳留王”
[27].三國志 夫餘傳: 夫餘本屬玄菟。漢末,公孫度雄張海東,威服外夷,夫餘王尉仇台更屬遼東。時句麗、鮮卑彊,
度以夫餘在二虜之間,妻以宗女。尉仇台死,簡位居立。無適子,有孽子麻余。位居死,諸加共立麻余.魏畧曰:舊志又言,昔北方有高離之國者,其王者侍婢有身,王欲殺之,婢云:「有氣如鷄子來下,我故有身。」後生子,王捐之於溷中,猪以喙噓之,徙至馬閑,馬以氣噓之,不死。王疑以為天子也,乃令其母收畜之,名曰東明,常令牧馬。東明善射,王恐奪其國也,欲殺之。東明走,南至施掩水,以弓擊水,魚鼈浮為橋,東明得渡,魚鼈乃解散,追兵不得渡。東明因都王夫餘之地
[28].論衡 吉驗: 北夷橐離國王侍婢有娠,王欲殺之.東明走,南至掩淲水,以弓擊水,魚鱉浮為橋,東明得渡。魚鱉解散,
追兵不得渡。因都王夫餘,故北夷有夫餘國焉。東明之母初妊時,見氣從天下。及生,棄之,豬馬以氣吁之而生之。長大,王欲殺之,以弓擊水,魚鱉為橋。天命不當死,故有豬馬之救;命當都王夫餘,故有魚鱉為橋之助也
[29].神異經: 東方外有東明山,有宮焉,左右有闕而立,其高百尺,畫以五色,青石為墻..
[30].顏氏家訓: 王籍入若耶溪詩云:「蟬噪林逾靜,鳥鳴山更幽。」江南以為文外斷絕,物無異議。簡文吟詠,不能忘之,
孝元諷味,以為不可復得,至懷舊志載於籍傳。范陽盧詢祖,鄴下才俊,乃言:「此不成語,何事於能?」魏收亦然其論。詩云:「蕭蕭馬鳴,悠悠旆旌。」毛傳曰:「言不諠譁也。」吾每歎此解有情致,籍詩生於此耳。
[31].論衡 吉驗: 北夷橐離國王侍婢有娠,王欲殺之。王疑以為天子,令其母收取,奴畜之,名東明,令牧牛馬。東明善射,
王恐奪其國也,欲殺之。東明走,南至掩淲水,以弓擊水,魚鱉浮為橋,東明得渡。魚鱉解散,追兵不得渡。因都王夫餘,故北夷有夫餘國焉。太平御覽 橋:王充《論衡》曰:高麗國侍婢有氣如雞子來下之有娠,生子名東明。東明善射,王恐其害國,欲殺之。東明走至淹水,以弓擊水,魚鱉為梁,既度而魚鱉解散.藝文類聚:論衡曰:高麗國有侍婢,自云有氣如雞子,來下我,故有身,後生子,曰東明,東明善射,王恐害其國,欲殺之,東明走至掩水,以弓擊水,魚鱉浮而為橋梁。
[32].三國史記 東明聖王: 我是河伯之女,名柳花。與諸弟出遊,時有一男子,自言天帝子解慕漱,誘我於熊心山熊神山下鴨●
鴨綠邊室中.十四年,王母柳花薨於東扶餘。其王金蛙以太后禮,葬之,遂立神廟。冬十月,遣使扶餘饋方物,以報其德
[33].金史 卷二十四 志第五 地理上:咸平路:柳河本渤海粵喜縣地,遼以河為名。有狗河、柳河.
東京路: 遼陽倚。東梁河、國名兀魯忽必剌,俗名太子河
[34]. 三國遺事: 改號百濟。其世系與高句麗同出扶餘。故以解為氏。後至聖王。移都於泗泚. 國號高句麗。因以高為氏本姓解也。今自言是天帝子。承日光而生。故自以高為氏.
[35]. 三國遺事: 壇君記云。君與西河河伯之女要親。有產子名曰夫婁。今按此記。則解慕漱私河伯之女而後產朱蒙。
壇君記云產子名曰夫婁。夫婁與朱蒙異母兄弟也.
[36].三國史記: 東海之濱有地,號曰迦葉原。可都也。’」阿蘭弗遂勸王,移都於彼,國號東扶餘。其舊都有人,不知所從來,
自稱天帝子解慕漱,來都焉。及解夫婁薨,金蛙嗣位。於是時,得女子於太白山南優渤水. 金色蛙形。蛙,一作蝸
[37].荀子 正論; 語曰:「淺不足與測深,愚不足與謀智,坎井之蛙,不可與語東海之樂。」此之謂也.
世俗之為說者曰:「堯舜擅讓。《史記·范睢傳》擅國之謂王。又《增韻》据也。《戰國策》趙攻中山,取扶柳,五年以擅呼沱。《註》擅言固有之. 太平廣記 釋道安:釋道安姓魏氏,常山扶柳人也。
[38]. 晉書 慕容皝:襄平令王冰、將軍孫機以遼東叛于皝,東夷校尉封抽、護軍乙逸、遼東相韓矯、玄菟太守高詡等棄城奔還。仁於是盡有遼左之地,自稱車騎將軍、平州刺史、遼東公。宇文歸、段遼及鮮卑諸部並為之援.使陽裕、唐柱等築龍城,構宮廟,改柳城為龍城縣。
[39]. 晉書 : 改《巫山高》為《屠柳城》,言曹公越北塞,歷白檀,破三郡烏桓於柳城也。改《上陵》為《平南荊》,
言曹公平荊州也。改柳城為龍城縣. 作鎮遼東,高句麗不敢為寇.
[40].三國史記 高句麗本紀第六:長壽王:十五年,移都平壤 魏攻燕白狼城,克之。王遣將葛盧、孟光,將衆數萬,
隨陽伊至和龍,迎燕王。葛盧、孟光入城,命軍脫弊褐,取燕武庫精仗,以給之,大掠城中。五月,燕王率龍城見戶東徙,焚宮殿,火一旬不滅. 《十六國春秋·慕容皝傳》曰:柳城之北,龍山之南,所為福德之地也。
可營制規模,筑龍城,構宮室。改柳城為龍城縣,遂都之,改曰和龍宮。
[41].蛙:〔古文〕䵷,音哇。《說文》蝦蟆屬。《本草》今處處有之,似蝦蟆而背靑綠色,尖觜細腹,俗謂之靑蛙。亦有背作黃路者,謂之金線蛙。《尹文子·大道上篇》路逢怒蛙而軾之。《前漢·五行志》武帝元鼎五年秋,蛙與蝦蟆羣鬭。 《前漢·王莽傳》紫色蛙聲。《註》淫蛙之聲。又烏蝸切,音哇。義同。本作䖯。或書作鼃。別詳黽部. 珪(左:王,右:圭):《玉篇》古文圭字。
[42].莊子 :北海若曰:「井蛙不可以語於海者,拘於虛也; 人處一焉;人卒九州,穀食之所生,舟車之所通,人處一焉。
此其比萬物也,不似豪末之在於馬體乎?五帝之所連,三王之所爭,仁人之所憂,任士之所勞,盡此矣。伯夷辭之以為名,仲尼語之以為博,此其自多也,不似爾向之自多於水乎?」河伯曰:「然則吾大天地而小毫末可乎?」北海若曰:「否。夫物,量無窮,時無止,分無常,終始無故.
[43]. 史記 表 建元以來侯者年表: 元封四年,侯慶坐為山陽太守有罪,國除 .后為山陽太守,坐法失侯.
漢書 表 外戚恩澤侯表: 會上亦興文學,進拔幽隱,公孫弘自海瀕而登宰相,於是寵以列侯之爵.
平津獻侯公孫弘 | 以丞相詔所褒侯,三百七十三戶。 | 元朔三年十一月乙丑封,六年薨。 | 元狩三年,侯度嗣,十三年,元封四年,坐為山陽太守詔徵鉅野令史成不遣,完為城旦。 | 高城 |
[44]. 漢書 : 元鳳四年九月, 其五年六月,發三輔郡國少年詣北軍。五年四月, 占曰「有土功,胡人死,邊城和。」
其六年正月,築遼東、玄菟城。昭帝紀:六年春正月,募郡國徒築遼東玄菟城。
[45]. 史記 平津侯主父列傳: 太皇太后詔大司徒大司空:「蓋聞治國之道,富民為始;富民之要,在於節儉。
《孝經》曰『安上治民,莫善於禮』。弘子度嗣爵,后為山陽太守,坐法失侯。夫表德章義,所以率俗厲化,聖王之制,不易之道也。其賜弘後子孫之次當為後者爵關內侯,食邑三百戶,徵詣公車,
[46]. 漢書 高惠高后文功臣表:元始二年,侯慶忌以敖玄孫紹封,千戶.
[48].後漢書: 十二年,曹操征遼西,擊烏桓。尚、熙與烏桓逆操軍,戰敗走,乃與親兵數千人奔公孫康於遼東。
建安十二年,曹操自征烏桓,大破蹋頓於柳城,斬之,首虜二十餘萬人。袁尚與樓班、烏延等皆走遼東,遼東太守公孫康並斬送之。其餘眾萬餘落,悉徙居中國云。
[49].三國志 武帝紀: 袁紹以甥高幹領并州牧,公之拔鄴,幹降,遂以為刺史。幹聞公討烏丸,乃以州叛. 後漢書 孝獻帝紀: 曹操破高幹於并州,獲之并州刺史高幹,袁紹甥也。素貴有名,招致四方遊士,士多歸附 資治通鑑: 會董卓入關,
紹還軍延津,使外甥陳留高幹及馥所親潁川辛評. 於是以中子熙為幽州刺史,外甥高幹為并州刺史.
曹操自將擊高幹,留其世子丕守鄴,使別駕從事崔琰傅之。高幹自入匈奴求救,單于不受。幹獨與數騎亡,欲南奔荊州
[50].太平御覽 :《魏志》:公孫康死,子晃、淵皆小,眾以康弟恭詞。恭陰消為閹人,劣弱不能治國,淵脅奪恭位.
[51].晉書:景初元年七月,公孫文懿叛。二年正月,遣宣帝討之。三年正月,天子崩。四年三月已巳,太白與月俱加景晝見,月犯太白。占同上。 三國志: 丙寅,司馬宣王圍公孫淵於襄平,大破之,傳淵首于京都,海東諸郡平.
[52].三國史記 : 東川王:十年,春二月,吳王孫權,遣使者胡衛通和。王留其使,至秋七月,斬之,傳首於魏.
[53]. 三國史記 高句麗國本紀第五: 東川王: 十一年,遣使如魏,賀改年號。是景初元年也.十二年,
魏大傅太尉司馬宣王率衆,討公孫淵。王遣主簿大加,將兵千人助之. 十六年,王遣將,襲破遼東西安平. 十九年,春三月,東海人獻美女,王納之後宮。冬十月,出師侵新羅北邊
[54].三國史記 東川王:二十年,魏遣幽州刺史毋丘儉,將萬人,出玄●來侵。王將步騎二萬人,逆戰於沸流水上,敗之,斬首三千餘級. 三國志 毌丘儉:正始中,儉以高句驪數侵叛,督諸軍步騎萬人出玄菟,從諸道討之。句驪王宮將步騎二萬人,
進軍沸流水上,大戰梁口,梁音渴。宮軍破走。儉遂束馬縣車,以登丸都,屠句驪所都,斬獲首虜以千數。初,其臣得來,見王侵叛中國,數諫,王不從。得來嘆曰:「立見此地,將生蓬蒿。」遂不食而死。毋丘儉令諸軍,不壞其墓,不伐其樹,得其妻子,皆放遣之
[55].三國志 毌丘儉: 儉引軍還。六年,復征之,宮遂奔買溝。儉遣玄菟太守王頎追之,世語曰:頎字孔碩,東萊人,
晉永嘉中大賊王弥,頎之孫。過沃沮千有餘里,至肅慎氏南界,刻石紀功,刊丸都之山,銘不耐之城
[56].三國史記 東川王: 二十一年,王以丸都城經亂,不可復都,築平壤城,移民及廟社。平壤者本仙人王儉之宅也。
或云王之都王儉.二十二年,新羅遣使結和。王薨。葬於柴原,號曰東川王。國人懷其恩德,莫不哀傷。近臣欲自殺以殉者衆,嗣王以為非禮,禁之。至葬日,至墓自死者甚多。國人伐柴,以覆其屍,遂名其地曰柴原.
[57]. 三國志 倭人傳:正始六年,詔賜倭難升米黃幢,付郡假授。其八年,太守王頎到官。倭女王卑彌呼與狗奴國
男王卑彌弓呼素不和,遣倭載斯、烏越等詣郡說相攻擊狀.
[58].三國志毌丘儉:儉引軍還。六年,復征之,宮遂奔買溝。儉遣玄菟太守王頎追之,世語曰:頎字孔碩,東萊人,晉永嘉中大賊王弥,頎之孫。過沃沮千有餘里,至肅慎氏南界,刻石紀功. 《魏晉世語》:吳人作曹瞞傳及郭頒世語並云
[59].三國史記 : 西川王;十一年,冬十月,肅愼來侵,屠害邊民氓。王謂群臣曰:「寡人以●未末之軀,謬襲邦基,德不能綏,
威不能震,致此●敵,猾我疆域。思得謀臣猛將,以折遐衝,咨爾群公,各擧奇謀異略才堪將帥者。」群臣皆曰:「王弟達賈,勇而有智略,堪為大將。」王於是,遣達賈往伐之。達賈出奇掩擊,拔檀盧城,殺酋長,遷六百餘家於扶餘南烏川,降部落六七所,以為附庸。王大悅,拜封達賈為安國君,知內外兵馬事,兼統梁貊、肅愼諸部落。
[60]. 三國史記 新羅本紀第四: 智證麻立干 四年,冬十月,群臣上言:「始祖創業已來,國名未定,
或稱斯羅,或稱斯盧,或言新羅。臣等以為新者德業日新,羅者網羅四方之義,則其為國號,宜矣.
十年,春正月,置京都東市. 十三年,夏六月,于山國歸服,歲以土宜為貢。于山國在溟州正東海島,或名鬱陵島
[61]. 三國史記 高句麗本紀第六:故國原王.十二年,修葺瓦都城丸都城,又築國內城。移居丸都城。燕王●遷都龍城。
三十九年,王以兵二萬,南伐百濟,戰於雉壤,敗續績. 四十一年, 百濟王率帥兵三萬,來攻平壤城。
王出師拒之,為流矢所中。是月二十三日,薨。葬于故國之原。百濟蓋鹵王表魏曰:「梟斬釗首。」過辭也.
[62]. 三國史記 小獸林王:五年,始創肖門寺省門寺,置順道;又創伊弗蘭寺,以置阿道。此海東佛法之始。攻百濟水谷城。
六年,侵百濟北鄙.七年,百濟將兵三萬,來侵平壤城。南伐百濟。遣使入符秦●秦朝貢. 八年, 契丹犯北邊,陷八部落
[63]. 三國史記 故國壤王: 二年, 王出兵四萬,襲遼東。先是,燕王垂命帶方王佐,鎭龍城。佐聞我軍襲遼東
六年,百濟來侵,掠南鄙部落而歸.七年, 百濟遣達率眞嘉謨,攻破都押城,虜二百人以歸.
九八年春,遣使新羅修好,新羅王遣姪實聖為質
[64].三國遺事:帝中興(辛巳) 已上為上古已下 為中古.第二十五虎寧王 名斯摩即東城 第二子南史云 名扶餘隆誤矣隆 乃寶藏王
[65].魏書 帝紀第一 序紀:國有大鮮卑山,因以為號。其後世為君長,統幽都之北,廣漠之野。畜牧遷徙.黃帝以土德王,
北俗謂土為托,謂後為跋,故以為氏
[66].三國史記 百濟本紀第二:近肖古王,比流王第二子也:二十六年,高句麗擧兵來。王聞之,伏兵於浿河上,俟其至,
急擊之,高句麗兵敗北。冬,王與太子帥精兵三萬,侵高句麗,攻平壤城。麗王&斯由釗,力戰拒之,中流矢死,王引軍退. 移都漢山. 二十七年,遣使入晉朝貢. 二十八年,遣使入晉朝貢。秋七月,築城於靑木嶺。禿山城主率三百人,奔新羅.
三十年,秋七月,高句麗來攻北鄙水谷城,陷之。王遣將拒之,不克。王又將大擧兵報之,以年荒不果。冬十一月,王薨。古記云:「百濟開國已來,未有以文字記事。至是,得博士高興,始有『書記』。」然高興未嘗顯於他書,不知其何許人也
[67].晉書 帝紀第一: 宣皇帝諱懿.魏正始元年春正月,東倭重譯納貢,焉耆、危須諸國,弱水以南,鮮卑名王,皆遣使來獻
帝紀第三: 武皇帝諱炎,字安世,文帝長子也.十一月己卯,倭人來獻方物。並圜丘、方丘於南、北郊,二至之祀合於二郊.
列傳第六十七: 四夷.東夷夫餘國馬韓辰韓肅慎氏倭人裨離等十國.漢末,倭人亂,攻伐不定,乃立女子為王,名曰卑彌呼
[68].三國志 魏書三十 倭人傳:今使譯所通三十國。從郡至倭,循海岸水行,歷韓國,乍南乍東,到其北岸狗邪韓國.
“使譯是傳譯的信使”
[69].晉書 帝紀第一: 宣皇帝諱懿.魏正始元年春正月,東倭重譯納貢,焉耆、危須諸國,弱水以南,鮮卑名王,皆遣使來獻
帝紀第三: 武皇帝諱炎,字安世,文帝長子也.十一月己卯,倭人來獻方物。並圜丘、方丘於南、北郊,二至之祀合於二郊.
列傳第六十七: 四夷.東夷夫餘國馬韓辰韓肅慎氏倭人裨離等十國.漢末,倭人亂,攻伐不定,乃立女子為王,名曰卑彌呼
[70]. 晉書 “百濟”: 咸安 二年春正月辛丑,百濟、林邑王各遣使貢方物。六月,遣使拜百濟王餘句為鎮東將軍,領樂浪太守. 六月,遣使拜百濟王餘句為鎮東將軍,領樂浪太守。夏四月,以百濟王世子餘暉為使持節、都督、鎮東將軍、百濟王。代王拓拔珪始改稱魏. 分遣使者徵兵於鮮卑、烏丸、高句麗、百濟及薛羅、休忍等諸國,並不從。晉書 載記第九 慕容皝: 句麗、百濟及宇文、段部之人,皆兵勢所徙,非如中國慕義而至,咸有思歸之心。
[71].通典: 部从事吴林以乐浪本统韩国,分割辰韩八国以与乐浪。晋武帝咸宁中,马韩王来朝,自是无闻。
[72].晉書 汗國:肅慎氏一名挹婁,在不咸山北,去夫餘可六十日行。東濱大海,西接寇漫汗國,北極弱水。
其土界廣袤數千里,居深山窮谷,其路險阻,車馬不通。裨離國在肅慎西北,馬行可二百日,領戶二萬。養雲國去裨離馬行又五十日,領戶二萬。寇莫汗國去養雲國又百日行,領戶五萬餘。一群國去莫汗又百五十日,計去肅慎五萬餘里。其風俗土壤並未詳.
[73].晉書 列傳: 東夷,夫餘國、馬韓、辰韓、肅慎氏、倭人、裨離等十國:漢末,倭人亂,攻伐不定,乃立女子為王,
名曰卑彌呼 宣帝之平公孫氏也,其女王遣使至帶方朝見,其後貢聘不絕。及文帝作相,又數至。泰始初,遣使重譯入貢
[74].南齊書: 牟大又表曰:「臣所遣行建威將軍、廣陽太守、兼長史臣高達,行建威將軍、朝鮮太守、兼司馬臣楊茂,
行宣威將軍、兼參軍臣會邁等三人,志行清亮,忠款夙著。往泰始中,比使宋朝,今任臣使,冒涉波險,尋其至效,宜在進爵,謹依先例,各假行職。詔可,並賜軍號,除太守。為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鎮東大將軍。使兼竭者僕射孫副策命大襲亡祖父牟都為百濟王。曰:「於戲!惟爾世襲忠勤,誠著遐表,滄路肅澄,要貢無替。式循彞典,用纂顯命。往欽哉!其敬膺休業,可不慎歟!制詔行都督百濟諸軍事、鎮東大將軍百濟王牟大今以大襲祖父牟都為百濟王,即位章綬等玉銅虎竹符四。王其拜受,不亦休乎!」是歲,魏虜又發騎數十萬攻百濟,入其界,牟大遣將沙法名、贊首流、解禮昆、木干那率眾襲擊虜軍,大破之。建武二年,牟大遣使上表曰:「臣自昔受封,世被朝榮,忝荷節鉞,剋攘列辟。往姐瑾等並蒙光除,臣庶咸泰。去庚午年,獫狁弗悛,舉兵深逼。臣遣沙法名等領軍逆討
[75].南齊書 :是歲,魏虜又發騎數十萬攻百濟,入其界,牟大遣將沙法名、贊首流、解禮昆、木干那率眾襲擊虜軍,大破之。
建武二年,牟大遣使上表曰:「臣自昔受封,世被朝榮,忝荷節鉞,剋攘列辟。往姐瑾等並蒙光除,臣庶咸泰。去庚午年,獫狁弗悛,舉兵深逼。臣遣沙法名等領軍逆討,宵襲霆擊,匈梨張惶,崩若海蕩。乘奔追斬,僵尸丹野。由是摧其銳氣,鯨暴韜兇。今邦宇謐靜,實名等之略;尋其功勳,宜在褒顯。今假沙法名行征虜將軍、邁羅王,贊首流為行安國將軍、辟中王,解禮昆為行武威將軍、弗中侯,木干那前有軍功,又拔臺舫,為行廣威將軍、面中侯。伏願天恩特愍聽除。」又表曰:「臣所遣行龍驤將軍、樂浪太守兼長史臣慕遺,行建武將軍、城陽太守兼司馬臣王茂,兼參軍、行振武將軍、朝鮮太守臣張塞,行揚武將軍陳明,在官忘私,唯公是務,見危授命,蹈難弗顧。今任臣使,冒涉波險,盡其至誠。實宜進爵,各假行署。伏願聖朝特賜除正。」詔可,並賜軍號。
[76].北史:改封燕郡;从兄泰为安东将军、朝鲜侯. 晉書:慕容皝,字元真,廆第三子也。 雄毅多權略,尚經學,善天文。
廆為遼東公,立為世子。建武初,拜為冠軍將軍、左賢王,封望平侯,率眾征討,累有功。太寧末,拜平北將軍,進封朝鮮公。廆卒,嗣位,以平北將軍行平州刺史.
[77].資治通鑑 ●卷第九十七: 燕王皝以為古者諸侯即位,各稱元年,于是始不用晉年號,自稱十二年.初,夫餘居于鹿山,
為百濟所侵,部落衰散,西徙近燕,而不設備。燕王皝遣世子俊帥慕容軍、慕容恪、慕輿根三將軍、萬七千騎襲夫餘。俊居中指授,軍事皆以任恪。遂拔夫餘,虜其王玄及部落五萬餘口而還。皝以玄為鎮軍將軍,妻以女
東魏勃海獻武王歡卒。歡性深密. 世子澄秘不發喪. 魏大赦。東魏高澄慮諸州有變,乃自出巡撫。
[79]. 通典 慕容氏: 時燕代多冠步搖冠,護跋見而好之,乃斂髮襲冠,諸部因呼之為「步搖」,其後音訛,遂為「慕容」焉
[80].山上王;二十一年,秋八月,漢平州人夏瑤,以百姓一千餘家來投,王納之,安置柵城.
[81].逸周書 王會解 :解隃冠,發人。麃麃者,若鹿,迅走,俞人雖馬,青丘狐九尾,周頭煇羝,羊也。黑齒白鹿白馬。白民乘黃,乘黃者,似狐,其背有兩角,正北方。義渠以茲白,茲白者,若白馬,鋸牙食虎豹。北唐以閭,閭似隃冠
[82].漢書 : 趙王彭祖,帝異母兄也.充衣紗縠襌衣,曲裾後垂交輸,冠襌纚步搖冠,飛翮之纓. 充為人魁岸,容貌甚壯。
帝望見而異之,謂左右曰:「燕趙固多奇士。」既至前,問以當世政事,上說之. 通典 慕容氏 時燕代多冠步搖冠,
護跋見而好之,乃斂髮襲冠,諸部因呼之為「步搖」,其後音訛,遂為「慕容」焉
[83]. 晉書 慕容廆: 昌黎棘城鮮卑人. 永嘉初,廆自稱鮮卑大單于.時平州刺史、東夷校尉崔毖自以為南州士望,
意存懷集,而流亡者莫有赴之。毖意廆拘留,乃陰結高句麗及宇文、段國等,謀滅廆以分其地
[84]. 三國史記 高句麗 美川王.晉平州刺史刺使崔毖來奔。初,崔毖陰說我及段氏、宇文氏,使共攻慕容●,三國進攻棘城.
[85].十六国春秋: 太康六年又率众东伐扶馀扶馀王依虑自杀子弟走保沃沮廆夷其国城驱掠万馀人而还太康七年廆寇辽东
故扶馀王依虑子依罗求.建武将军邓羌攻信都丁丑桓率鲜卑五千奔龙城戊寅散骑侍郎馀蔚等率扶馀髙句骊及上党质子五百馀人. 扶馀王馀蔚为太傅左光禄大夫段崇为太保.
[86]. 太平廣記 靈異 程顏: 程颜:越詶扶馀县赵明经之女。父母配事前扶馀尉程颜.
[87].三國史記 雜志第六: 『舊唐書』云:「百濟,扶餘之別種,東北新羅,西渡海至越州,南渡海至倭,
北&高麗高句麗,其王所居,有東西兩城。」『新唐書』云:「百濟西界越州,南倭,皆踰海,北高麗。」
[88].史記 本紀 呂太后本紀: 太后欲侯諸呂.呂平為扶柳侯,張買為南宮侯.
後漢書: 後徙封損扶柳侯. 志 郡國:有絳水、呼沱河。阜城故昌城。南宮扶柳下博武邑觀津.
[89].晉書: 慕容廆,字弈洛瑰,昌黎棘城鮮卑人也。其先有熊氏之苗裔,世居北夷,邑於紫蒙之野,號曰東胡。
從宣帝伐公孫氏有功,拜率義王,始建國於棘城之北。時燕代多冠步搖冠,莫護跋見而好之.廆以大棘城即帝顓頊之墟也,元康四年乃移居之. 顏氏家訓 音辭:古今言語,時俗不同;著述之人,楚、夏各異。蒼頡訓詁,反稗為逋賣,
反娃為於乖;戰國策音刎為免,穆天子傳音諫為間;說文音戛為棘
[90].詩經:葛生蒙棘、蘞蔓于域。予美亡此、誰與獨息
[91]. 晉書 慕容皝 :使陽裕、唐柱等築龍城,構宮廟,改柳城為龍城縣. 咸康七年,皝遷都龍城.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