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기록에서 찾아본 공손도의 혈통:
대방의 어원에서:
앞에서 산해관 북쪽에 있던 가라국 (加羅國)왕 하지(荷知)가 한무제 원년
(建元元年)인 기원전 479년에 사절단을 보내 선물을 바쳤다는 새로운 사실을 밝혔다. 이지역을 광개토대왕 비문 2면에; “왜를 뒤 쫓아 임나가라 (任那加羅) 종발성(從拔城) 에까지 이르니 성은 즉각 항복하여 신라인으로 지키게 하였다”한 곳이다. 대륙백제와 가야연맹, 왜의 출생지가 발해만 서쪽 연안에 있던 낙랑 대방 일대에서 나타 났다는 증거다. 백제왕 우구대가 그 곳 태수 공손도의 딸을 부인 으로 맞아 (공손도와 같이) 동이의 강국을 이루었다 . 이곳에 살던 여러 한(可汗, 汗, 干, 翰, 韓, 馯)이 해상권을 잡고 바닷길로 흐터저 나갔다 하여 한해(翰海)란 말이 생기고, 백제(百濟)의 어원을 많은 사람들이 바다를 건너와 자리잡았다는 뜻의 백가제해 (百家濟海)에서 유래 했다는 설도 있다. 대륙는 학설이 정설이다. 공손도가 원주민(夫餘)의 지도자에게 딸을 시집보낸 이유는 (발해만 동서에 수도를 두어 해상교류를 장악 했던)원주민(南夫餘,百濟)의 협조를 적극 요구했다는 흔적이 진서(晉書)에 많이 있다 .
중국에서 공손(公孫)씨는 황제의 직계라고 알려저 있고, 그들의 주 활동 무대는 발해만 서남 연안 연나라와 산동 반도 일대였다. 황제 아들이왜 공(公)의 후손(孫)
이란 성씨를 사용했는지 의심이든다. 중국사람들이 이라고 생각 된다.
사마천의 사기에서 찾다:
사기에 따르면 공손홍(公孫弘)이 한무제(漢武帝; 재위 기원전 141년-기원전 87년. 元狩二年-기원전121년) 집권 20년에 벌써 60세에 이르러 승상직을 떠났다. 그가 노 제상으로 있을 당시,서기전 128년에 예맥(穢貊)의 군장 남려(南閭) 등이 28만인 요동군(遼東郡)에 피란을 와서 창해군(蒼海郡;滄海之郡)을 설치하였다.
그의 후손 공손도(公孫度)가 산양(山陽) 태수가 된지 10년 만에 죄를 저서 작위를 잃었다 . 공손도(公孫度)가 사마천이 살아 있을 때에 작위를 삭탈 당했다는 풀이가 되나 정확한 년대와 산양(山陽)이라는 장소는 알수 없다. 같은 사건을 제후년표에는 어느 후손 경(侯慶)이 원봉 4년(元封 四)인 기원전 107년에 “일설에는 사통 또는 근친 강간”이라는 경미한 죄로 작위와 봉지를 잃었다 . 일설에는혹한 벌이 무서워 도둑의 소굴이였던 현토땅으로 도망을 갔다고 한다. 사기에는 제후년표에 적힌 후경(侯慶)이 공손홍전에는 공손도 (公孫度)로 기록되였다. 어느누가 글자가 비슷하다는 핑개로 도를 경 강 “度, 慶, 康”으로 적었다. 이를 진수는 정당화 하려고 강(康)이 공손도의 아들이라고 했다. 한무제가 처음으로 년호를 쓰면서 “시작이다, 처음이다, 으뜸이다”하는 뜻 글자로 시작 된 연호를 많이 써서 바꾸어 “원(元)자가 들어간 년호 풀이에도 혼란이 오고 있다.
사기 평진후열전에는 “태사공왈(太史公曰)하고 사마천이 글을 끝낸 다음에 “반고칭왈 (班固稱曰) 공손홍(公孫弘)”하는 긴 문구로 끝냈다.
반고(班固, 32-92년)는 태사공 보다 근 100년 후에 난 사람으로 한서(漢書)의 저자다. 한서에서는 공손홍(公孫弘)과 동중서를 한무제의 정잭을 인도한 정신적 지주로 추앙한다. 공손홍은 진시황이후 황실 외척이 아닌 사람으로서 처음으로 봉작을 받은 사람이다. 필자는 이 두 유가의 거성을 공자의 충서 (忠恕)란 뜻을 달리 풀이한 “신흥유학파”라고 불렀다. 그러한 업적을 남긴 후손이 남만주에서 못된 짓을 하던 공손도란 사실을 은패 했다고 본다. 그 후로는 공손홍의 후예에 관한 기록이 없다. 오직 반고의 의견이라며 어느 태상황후가 공손홍의 후손을 찾아 한나라 서울에 살게 하라고 지시 했지만 조정에서는 는 기록을 첨가 했다 .
평진헌후(平津獻侯) 공손홍(公孫弘)이 봉지로 받았던 지역은 천진 일대, 창해군을 설치했던 곳이다. 남만주 역사에는 공손홍의 후손이 실려 있어야 한다. 공손도의 직책을 손자가 되는 공손연 (公孫淵, ?-238년)이 형으로부터 강탈 했다고 하나, 필자가 풀이한 결과 공손강(公孫康)은 공손도 (公孫度)를 은패 하려는 가공 인물 이다. 그의 아들이라는 공손연은 공손도의 두쩨 아들이다. 공손도가 통치하던 땅은 천자관활 영역 밖 (天子為其絕域) 이라고 했다 . 삼한땅이였다는 뜻이다. 삼한의 후예를 다룬 한국 역사에 실려 있어야 한다. 그 원조는 진수의 삼국지다.
조조의 아들 조비(曹丕, 제위 220년 – 226년 ) 가 후한의 마지막 집권자인 효헌황제 (漢 孝獻皇帝, 189년-220년)로 부터 옥새를 이어 받고 조위(曹魏, 220년-266년) 의 첫 황제가 되였다. 그가 아버지 조조의 참모로 일하던 노장 사마휘(司馬懿, 仲達, 179년 -251년)를 시켜 238년에 공손연을 토벌 했다 . 사마중달이 조위 조정에서 세력을 쌓아 그의 아들이 조위(220년 – 265년)를 밀어 내고 서진 (西晉, 265년-317년)을 새웠다. 진수 (陳壽, 233-297)는 조위가 망하고 서진이 들어서서 다시 사양길에 들어가는 시대에 살았다. 공손도 또한 진수와 비슷한 시대에 살던 사람이다. 그러나 진수의 삼국지 공손도전에는 미묘하게 기록 했다.
공손도의 아버지가 현토 땅에 들어가 고을 관리가 되였다. 태수로 있던 공손역 (公孫琙)이 표범(豹)이라고 부르던 아들이 18살에 죽었다. 어려서 공손도 별명이 표범(豹)이였고, 나이도 동갑이라 현토 태수는 공손도를 사랑했고 글을 가르쳐 주고 장가 까지 드렸다 . 의문이 많은 묘한 설명이다. 삼국사기 신라 본기에는 정권을 찬탈한 일화를 실으면서 를 들어 논평 했다 . 필자가 찾아낸 너그러운 군주라는 뜻의 간(衎)자는 옛적 삼국사기에 실려 있다. 그러나 요지음 흔히 읽는 “http://ctext.org/”에 실린 삼국사기에는 여러 글자가 빠지거나 마멸 되여 진의를 알수가 없다. 사마천이 이 다시 삼국지에 나타났다.
다음에 계속, 끝
April 2, 2017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