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손도(公孫度)의 최후:
진수는 공손도(公孫度)가 자라온 과정을 은미하게 기술 하고, 그가 글을 쓸 당시에 사라진 공손도의 최후에 관해서는 기록이 없다. 필자가 가공인물이라고 보는 공손강은 출생과 사망에 관한 아무런 기록이 없다. 공손도와 간웅 조조는 같은 시대 사람이다. 삼국지 무제기에는 공손도 (公孫度)란 이름이 없고 공손강으로 나타난다. 건안 18년에는 공손양(公孫陽)을 생포하여 돌아 왔다 . 공손도(公孫度)의 최후를 공손양(公孫陽)이란 이름으로 바꾸어 남쪽에서 잡혔다고 연막을 친듯하다.
건안 18년(建安十八年, 213년)에는 백낭산(白狼山)에 숨었던 원소(袁紹, 153년-207년)의 두 아들 원상(袁尙,? ~ 207년 11월) 원희(袁熙, ? ~ 207년 11월) 형제가 공손강 영역으로 갔다. 공손강은 그들을 죽여 목을 조조에게 전했다. 무제기에는 북쪽을 공격 하니 원소의 이질(甥) 고간(高幹)이 남쪽으로 도망 갔다 잡혀 죽었다. 무제기와 원소전에는 207년(建安十二年)에 공손강이 원상 원희의 머리를 바쳤다 . 이 사건이 후한서에는 효헌제(漢 孝獻皇帝, 189년-220년) 12년 (202년)에 원희 원상 형제가 요동태수 공손강 영역으로 도망을 가니 강(康)이 그들을 죽여 수급을 바쳤다 . 삼국지 무제기에는 는 기록이 있다 .
후한서에는 조조가 50세 때에 동탁과 원소가 공모하여 자기를 치려는 계획을 알고 유수구(濡須口)전쟁에서 공을 세워 위공(魏公)으로 봉해졌다 . 같은 사건 발생 년도가 삼국지와 후한서에 다르게 기록 되였다. 조조가 30살 때인184년(光和末)에 황건적 난을 피하여 동한은 수도를 조조의 영역으로 옮겼다 . 조조가 50살이던 해는204년이 된다. 그 해에 공손양 (公孫陽)을 잡았다. 그자가 공손강(公孫康)이 될수 밖에 없다. 공손도(公孫度)가 204년에 죽었다 하나, 그의 사망 원인과 장소가 기록에 없다.
뒤돌아 보면 앞에서 밝힌 사마천이 사기에 묘하게 기록 했던 문구와 관계가 된다: “子度嗣為平津侯。度為山陽太守十餘歲, 坐法失侯”의 뜻이 밝혀졌다.
즉는 기록과 일치 한다.
진수는 산양(山陽)에 숨어 있던 공손(公孫)씨를 잡았다 하여 공손양 (公孫陽)으로 기록 했다. 사기뿐 아니라 한서에도 공손도(公孫度)가 한무제의 정책을 주도 했던 평준후 공소홍(平津侯主)의 아들로 기록 되였다 .
대륙백제 등에 업혀 급성장 했던 공손씨 (公孫氏)의 선조는 한무제 당시 승상 이였던 평준후 공손홍 (公孫弘為丞相,平津侯)의 후손이다. 사마천은 “度, 慶, 康”으로 기록에 남겼고, 진수는 공손도(公孫度)를 공손강 (公孫康), 또는 공손양 (公孫陽)으로 기록하여 실체를 밝히기 어렵게 만들었다. 그를 조조(曹操)가 204년에 오나라와 유수(濡水) 입구에서 싸울 때에 , 북쪽에서 어느누가 공손양 (公孫陽)을 체포 했다.
공손연(公孫淵)의 최후:
삼국지 공손도전(公孫度傳)에 공손도에 관한 기록은 미약 하고 공손연(公孫淵)의 최후를 여러 사료를 인용하여 자세히 설명했다. 진수가 살았을 당시에 존제 했던 사료뿐만 아니라, 그가 죽은 후에 편찬된 사료 까지 인용하여 복잡하게 기록 했다. 삼한 땅 에서 발생했던 사건이라 삼국사기에도 보인다.
조위는 237년 (景初, 237年三月-239年)에 관구검을 선봉장으로 공손연을 정벌하려고 출병했다. 공손연도 출병하여 맏섰다. 일기관계로 관구검이 회군하니 공손연은 연왕이라 칭했다. 다음 해에는 사마중달을 총관으로 하여 공손연을 토벌 했다. 그 다음 해에 천자가 사망 했다 . 이 사건을 삼국사기 백제편에는 제8대 고이왕(古爾王,재위 : 234년-286년) 13년 (246년)에 있던 일로 기록 되였다: “조위의 유주자사 관구검이 낙랑태수 유무와 대방(삭방)대수왕준(궁준)을 대리고 고구려를 친입했다.왕은 낙랑이 허술한 틈을 타서 좌장 진충(左將眞忠)을 보내 낙랑인을 잡아 왔다. 낙랑태수가 노했다는 소리를 듣고 포로를 돌려 보냈다.”
고구려 동천왕(東川王: 227년-248년)편에 조위와의 관계를 자세히 기록했다 .
제위 8년(234년)에 조위에 사신을 보내 화친 했다. 2년후인 237년 봄에는 손권이 통화(通和)사신으로 호위 (胡衛)를 보냈다. 그해 7월에 호위를 참수하여 수급을 조위에 보냈다. 다음해에 또 사신을 보내 경초로 연호를 바꾸어 축하 한다는 뜻을 전했다 . 다음 해인 238년에는 조위 사마선왕(사마중달)이 대군을 이끌고 공손연 토벌 작전을 실시 했다. 이에 주부와 대가를 지휘관으로 1000여명의 군사를 보내 협조 했다.
삼국지에는 공손연 토벌에 관한 여러 문헌을 참조하여 자세히 실었다 .
청룡원년(青龍233年二月-237年二月)10월에 공손연은 을 조위에 바쳤다. 조위는 공손연을 대사마 낙랑공에 임했다. 4년 뒤(237년)에는 고구려가 손권 보냈던 사신 호위(胡衞)등 몇 수급을 유주로 보냈다. 경초원년(景初, 237년 3월-239년)인 237년 가을에 손권이 남쪽 강하군을 처들어 왔다가 형주자사 호질이 격파 했다. 한편 손권은 뱃길로 고구려와 내통하여 요동을 습격하려 했다. 유주자사 관구검이 선비 오환등 대군을 인솔하고 요동 남계에 진을 치고 “새서징(璽書徵) 즉옥새가 찍힌 편지로 공손연을 불렀다. 공손연이 반대하고 군사를 동원 했다. 관구검이 싸우다 비가 10일 계속 많이와 요수가 크게 불어 퇴군을 명했다. 우부평 오환 선우, 요서 오환도독 호유등이 모두 군사를 대리고 관구검에 내부 했다. 공손연(公孫淵)은 를 발표 했다. 남쪽에서는 “손권이233년
가을에 장미 허안(張彌、許晏)” 등을 사신으로 보내면서 각종 보물을 선물로 공손연에게 주면서 그를 연왕(燕王)으로 봉했다 . 일년도 못되여 공손연은 양평 (襄平)성에서 도망하려다 잡혀 그의 아들 공손수(公孫脩)등 전 가족이 처형 되였다 .
삼국지의 “조위, 남오, 여러 열전, 그리고 삼국사기 고구려와 백제 편의 기록”에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분명한 점은 손권이 고구려를 설득시켜 양쪽에서 조위를 공격 했다. 삼국사기 중국본에는 공손도를 공손강으로 바꾸어 기록 했다 . 삼국지 한전 (韓傳)에는 대방군을 공손강이 설치 했다지만, 진서(晉書)에는 고 밝혔다 . 삼국지 공손도전에 공손연전이 붙어 있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삼국지에는 공손연전이 없다.
자기를 아들 같이 돌보아 주던 현토태수 공손역(公孫琙)을 죽이고 태수 자리를 빼았은 공손도(玄菟太守公孫度)는 공손양(公孫陽) 이라는 수수께끼 인물로 간웅 조조 손에 죽었다 . 그의 아들 공손연은 사마중달의 전략에 걸려 살해 되였다.
다음에 계속, 끝
April 4, 2017.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