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옥저전(東沃沮傳)-1: 관활 지역:
Abstract: Han Chinese didn’t control the East of Liao River(遼河).
The section East Ok-Jeo in The Records of the Three Kingdoms (東沃沮傳) include the crucial evidence that Han Chinese didn’t control the East of Liao River (遼河).
Soon after Han invasion in 108 BC and set The Four Commanderies of Han (漢四郡) of Han along the south western shore of Balhae Bay connecting to the vicinity of Chaoyang (朝陽) where Old Joseon Capital (王儉城) had been in the west of Liao River , Old Joseon people started to revolt. The Book of Later Han (後漢書) misinterpreted the original text left by Chen Shou (陳壽:233–297) who lived in the Three Kingdoms period and Jin dynasty.
“漢光武六年,省邊郡,都尉由此罷。其後皆以其縣中渠帥為縣侯,不耐、華麗、沃沮諸縣皆為侯國。夷狄更 相攻伐,
唯不耐濊侯至今猶置功曹、主簿諸曹,皆濊民作之。沃沮諸邑落渠帥,皆自稱三老,則故縣國之制也”
진수는 동옥저전 첫 문구에 자신이 논술 하려는 지역의 위치를 설명하면서 그곳의 역사, 풍속, 토산물 등을 다루었다. 그러나 내용을 깊히 살펴 보면, 동옥저전이라 해 놓고 <위만의 손자 우거를 살해하고 그땅에 4군(四郡)을 세웠다. 이 옥저성을 현토군으로 했다. 뒤에 원주민의 친입으로 군을 고구려 서북쪽으로 옮겼다. 지금 말하는 현토가 바로 옛적 청사(故府)다 . 옥저성(沃沮城)이 현토성玄菟城이다. 이편은 옥저의 역사와 풍속을 함께 기록했다.
동옥저전(東沃沮傳)-지역의 위치:
서쪽은 개마대산(蓋馬大山)을 경계로 고구려와 접하고, 동쪽은 큰 바다, 동북은 좁고 서남쪽이 길어 천리가량 된다. 북쪽은 읍루(挹婁)와 부여(夫餘), 남쪽은 예맥(濊貊)과 접했다 . 기름진 땅이 산을 등지고 바다를 향하여 각종 농작물을 제배하기에 알맞 은 토질이다. 소와 말이 흔하지 않다. 그들의 인품은 강직맹하여 창을 들고 전장에 임한다. 음식 가옥 의복 예절은 고구려와(有似) 다를바 없다 . 언어는 고구려와 같다. 그러나 때때로 약간의 차이가 있다(時時小異)는 문구는, 그지방 특유의 방언이 있었다는 뜻으로 풀이 된다. 아니면 멀리 떠러져 사는 사람들이 그 곳에 와서 섞여 살던 현상으로 타지인 (他地人)도 살았다고 풀이 할수도 있다.
이 편에 실린 역사와 풍속, 토산물을 보면,옥저성(沃沮城)이 현토성玄菟城이다.
요하 서쪽에 있던 옥저(沃沮)와 그와 같은 부족이 요동반도 동쪽에 자리잡고 살던 동옥저(東沃沮)를 섞어 기록 하여, 그 내용을 인용한 후한서에서는 요동 반도 전역이 후한의 영토가 되였다고 했다. 결정적 단서가 광무6년 성변군 도위유 (漢光武六年,省邊郡,都尉由此罷)로 시작 한 문구다 . 그 뜻은 다음과 같다:
같은 표현을 예전(濊傳)에도 남겼다 .
이 문구가 중원 세력이 요하(遼河)를 너머오지 못했다는 결정적 단서다. 이를 후한서에서는 글자를 이리저리 뒤석어 풀이 하여 요동반도이동 까지 한낙랑의 동부도위(樂浪東部都尉)영역이였다고 했다 . 광개토대왕 비문에서와 같이 진수가 사용한 옛적 글자를 잘못 풀이 하여 현제 한국 사학계에서는 이를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
남쪽 경계는 예맥과 접했다:
앞에서 예(濊)는 맥( 貊)과 같은 뜻으로 같은 부족을 뜻하고, 그 부족의 지도자를 한(韓)이라 한다고 논증 했다. 동옥저 남쪽이 예맥(濊貊)과 접했다는 뜻은 그 곳이 진한전에서 나타난 한이 다스리는 여러 한국(韓國)이란 뜻이다. 그 곳 옥저(沃沮) 땅에 사냔을 났던 고구려 호동왕자가 낙랑국 (樂浪國)왕 최리를 만났다. 동옥저 남쪽에 예맥(濊貊)이 있었다는 문구를 는 증거라고 밝혔다 .
진수는 관구검의 군사에 쫓겨 고구려왕이 읍루 북쪽에 도망 갔던 곳을 치구루 (置溝婁) 라고 했다. 그 곳에서 부터 남쪽으로 해안이 있는 옥저까지 800라 했다. 같은 지역을 고구려전에서는 구루(溝婁)에 물수자 변을 더하여 구루(溝漊)라 고처 적고 고구려 말로 성(城, Citadel, Fortress)을 뜻한다고 했다. 삼국사기에서는 이 곳을 압록원 (鴨緑原, 鴨綠)이라고 했다 . 압록강에서 멀지 않은 환도성이 있던 곳이 분명 하다. 동옥저의 북쪽 경계는 통화시 북쪽 산맥이 된다 .
길림성 백산시(白山市)일대가 읍루전(挹婁傳)에 실렸다.
모두들 동옥저(東沃沮)가 함경북도 동쪽 끝이라고 풀이 한다. 이는 잘못이다 . 동옥저전(東沃沮傳)을 숙독하면서 지리지형을 감안 하면, 요동반도 수계 (Watershed) 동남쪽 지역을 기술 했다. 동옥저 땅에 내린 빗물은 압록강과 황해로 흘러갔다.
삼국사기에 보면, 관구검(毌丘儉: ?-255년)의 수하 장군, 현토 태수 (玄菟太守) 왕기(王頎)가 동천왕 (東川王: 227년-248년)을 계속 추격하여 동옥저로 피해 갔다. 전쟁이후 고구려는 신라에 감사의 사절단을 보냈다 . 수서에는 는 기록이 있다 . 동천왕 (東川王)이 무구검의 추격에 쫓겨 옥저로 갔다가 다시 북옥저로 갔다. 그 곳을 구루(溝婁)라고도 한다. 구루란 고구려의 성(城)을 뜻한 말이다. 옥저란 이름이 셋이다. 북옥저라 한 곳에 성이 있었다. 이곳을 삼국사기에는 압록원 (鴨淥原)이라 했다 . 이 곳이 오늘의 통화시 일대다. 고구려의 동쪽 경계선에 가까운 국내성이 있었다. 관구검은 국내성을 정복하고 부내성(不耐城, 공격에 참아내지 못한 성) 이라고 비하해서 새겨 불렀다.
삼국지 동옥저전(東沃沮傳)은 요동 반도 동쪽 해안에 있던 사람들의 생활상을 묘사 했다. 이곳을 삼국사기에서는 남옥저(南沃沮)라고 했다 . 북옥저 (국내성) 북쪽에 읍루(挹婁)가 있다고 했다 . 동옥저전(東沃沮傳)은 요동만 수계를 너머 압록강으로 빗물이 흐르는 황해 수계 (Yellow Sea Water shed)에 속하는 지역이다. 이 분수령이 고구려 동쪽에 있는 개마대산 (蓋馬大山)이고 혼하(渾河)와 태자하 (太子河)의 수원이 된다. 분수령 개마대산 (蓋馬大山) 동쪽이 동옥저다.
끝, 다음에 계속
June 9, 2017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