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하(東夏)가 대륙백제-3 끝:
남북조(南北朝)를 통일한 수나라:
한국 상고사의 핵심이 되는 삼국지 동이전에 나타난 는 새로운 학설을 발표 했다. 이를 입증 하는 과정에서 는 단서를 찾았다 . 조위의 뒤를 이은 사마씨의 왕조를 다루면서, 진서(晉書)에 고 풀이 했다. 지금 훈고학(訓詁學)이란 이름을 옛적에는 고훈 (古訓, 故訓)이란 글자를 많이 써고 풀 해자를 써서 해고 (解故, 解誥, 解詁)라 하는 등, 같은 뜻을 여러 글자로 기록해 왔다. 같은 현상이 수지(數至)이다. 한전(漢典)에 至数가(至數)와 같다고 했다 . 진서 동이열전에는 문제가 제상으로 임명 했다는 사람을 옛적에 주 무왕에게 활을 선물 했던 숙신씨(周武王時,獻其楛矢)의 후손으로 기록 했다 . 서진 문제(晉 文帝)로부터 제상의 직위를 받은 사람들이 발해만 연안에서 여러 나라를 세웠던 고구려와 같은 고씨(高氏)였다. 그들이 세운 나라를 비하 하여 주서(周書) 에는 “齊氏擅東夏”라고 불렀다. 그 나라가 북제(北齊; 550년 -577년)라고 한 대륙 백제의 최고 전성기 였다. 그보다 앞서 서진(西晉, 265년 ~ 317년)은 남쪽으로 쫓겨 갔다. 옛 서진 땅을 비류왕의 후손이 차지하고 고구려와 영토 분쟁에 들어 갔다. 백제의 13대 근초고왕(近肖古王, 재위: 346년 – 375년 )이 고구려의 왕을 살해하고 평양성(平壤城)을 빼았었다. 이렇게 치열한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많은 삼한의 후예들이 남만주를 떠났다. 해외로 도망 가서 신라가 갑자기 커졌다는 시기다 . 이 시대에 백제의 역사서 서기 (書記)를 고흥 (高興)이 저술했다. 수서 북사 통전등 중국 여러 사서에는 백제의 왕은 성이 부여(夫餘)라 하고 대성8족(大姓有八族) 이 있다고 했다 . 그러나 한반도에는 그 성씨가 극소하다. 더더욱 고기에 이르기를; 근초고왕(近肖古王; 346년 – 375년) 전 까지는 개국이래 문자로 사실을 기록하지 못했다. 그때에 이르러 박사 고흥(高興)을 얻어 서기(書記)를 시작 했다. 고흥이 다른 책에는 나타나지 않아 그가 어떠한 사람인지 신분을 알수 없다(不知其何許人)고 했다 . 冬十一月,王薨。古記云:百濟開國已來,未有以文字記事。至是,得博士高興,始有『書記』。」然高興未嘗顯於他書,不知其何許人也。
이 시대에 고구려와 백제가 진에 조공을 했다(如晉朝貢)는 진나라는 강남 으로 쫓겨 갔던 동진이 분명 하다. 이렇게 삼국사기에 나타난 백제와 고구려의 영토 분쟁으로 신라가 성장했다는 기록은 오호 십육국 시대(五胡十六國時代: 304년 ~ 439년)와 남북조 시대의 혼란기에 나타났던 현상이다. 여러 사료를 근거로 역사의 흐름을 보면 고흥(高興)은 마땅히 발해만 서남쪽 연안의 맥국(貊國)사람이다.
뒤에 중원을 통일한 역사서에 <중국 동부 해안에 대륙백제의 잔여 세력이 남아 있었다는 단서(Smoking Gun)를 수서에서 찾았다.
수서(隋書)는 남북조 (南北朝)를 통합 하고 몰락한 수 나라(隋, 581년-619년)의 38년 역사를 목격한 당 나라 위징(唐. 魏徵, 580년 – 643년)이 편술 했다. 거의 같은 시대에 이대사와 그의 아들 이연수(李延壽)가 북사를 내놓았다.
대륙백제가 중원이 있었다는 결정적 단서(Smoking Gun):
수서(隋書)와 북사 (北史)에는 “부여왕 동명의 후손인 (夫餘王東明之後) 백제왕이 공손도 딸을 부인으로 받아드려 (公孫度以女妻) 동이의 강국이 되였다”는 기록을 남겼다 . 그러나 북사에는 수서에 실린 대신중국(代臣中國)이란 문구를 남기지 않았다. 수당 시절에 편찬된 의림 한자 (隋唐. 意林 韓子二十卷)에 대신(代臣)이란 문구를 설명 했다. 집권자의 질문에 재상 (宰人)이; 했다 . 수서에 실린 대신중국(代臣中國) 이란 문구는 는 뜻이다.
이연수(李延壽)는 남사(南史, 659년?) 이백(夷貊下)편에 진수의 한전(韓傳)을 인용하여 백제의 기원을 삼한의 후예라고 했다 .
이연수(李延壽)의 생몰이 알려지지 않았다. 당나라가 백제를 점령하기 이전이다. 내용을 보면 삼국지 변진전을 설명했다. 발해만 연안에서 시작한 대륙백제를 다루었다. 그들의 후손이 남북조 말기에는 양자강 하구에 있었다. 스스로 백제군을 두었다 (自置百濟郡)는 문구는 수서(隋書)에 도백제(度百濟)라는 지역이다 . 마한(馬韓)의 옛 땅이란 하북 평원을 뜻했다. 중원에 살던 기마유목민족 (騎馬遊牧民國家,The Eurasian Steppe) 을 “소가 우는 소리, 馬/牟;móu mù mào”라는 글자로 기록 했다. 그들이 부르던 노래, 즉 모시(毛詩)를 모은 시집이 시경이다. 그들이 살던 들판에서 싸운 전쟁을 목야전 (坶野, 牧野之戰)이라고 풀이 했다. 한국의 여러 선학들이 마한(馬韓)의 실체를 찾으려고 끊임없는 노력을 했다는 증거가 뚜렸하다. 삼국유사에는
산서성 해지 동북쪽에서 단군조선을 세워 살던 유목민이 화북 평원 전역에 살다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남만주로 올라가 살았던 사실을 요약한 문구다. 그러나 삼국지 한전에 나오는 금조선(今朝鮮)이 남만주 였다는 사실을 인식치 못하여 명주 (溟州) 와 평양(平壤)이 한반도에 있었다고들 풀이 했다.
남사(南史)에 실린 백제와 왜(倭):
대륙백제가 수도를 중국 동해안에 두었다는 증거가 수서(隋書)에 실려 있다.
지난주(Oct 15, 2017 )에 올린 “진서 본기 (晉書 帝紀)-5: 진무제(晉武帝)를 방문한 마한왕(馬韓王)이 대륙 백제왕”에서 간략 하게 다루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태평어람에서는 기록이 있고, 남사(南史)를 인용 하여 하고, 송나라 때 신라, 또는 사라(斯羅)등 여러 이름으로 기록 했었다 . 그러나 위서에는 신로(新盧)란 이름을 볼수 없다. 변진전을 비롯한 삼국지 동이전에 실린 이름이 음과 뜻을 이리저리 뒤섞어 기록 했다는 증거다. 또한 그 지역 사람들은 일월성(日月星) 삼신(三辰)숭배 사상이 강 했다는 증거다.
수서(隋書)에 실린 도백제 행지 죽도(度百濟 行至竹島) 하는 문구가 smoking gun이다. 북사(北史)에도 똑 같은 문자로 기록 되였다. 같은 표현으로 쓰인 도(度)자가 염철론에 가 보인다. 한서 왕망전(漢書 王莽傳上)에도 보인다. 설문해자와 옥편, 강희자전에서는 모두; 설명 했다 .
중국에서 왜국(倭國)으로 가는 해상로에 나오는 죽도(竹島)가 고려도경 (宣和奉使高麗圖經)에 송나라 사신이 택했던 뱃길에 나오는 죽도(竹島)와 같은 섬이다. 한반도 서남 해상에 흑산군도(黑山群島)의 하나다 . 이 섬에 이르기 전에 중국 동해안에 있던 백제(百濟)는, 먼 바다로 떠나기 전에 나타난 이름이 분명 하다.
수서(隋書)에는 이를 보증 하는 Smoking gun이 하는 문구다. 수 문제가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진나라를 평정할 시절(隋文帝, 平陳之歲588-589년)에 탐라국(耽牟羅國) 즉 제주도에 표류 했던 수나라 전함을 돌려 보냈다. 이 사건은 삼국사기와 수서에 실렸다 . 제주도에 표류한 중국 배를 백제 사람들이 한반도를 경유하여 중국에 돌려 보냈다는 풀이는 합당성이 약하다. 후에 수나라가 고구려를 치려 계획 할때에도 산동성에서 요동반도에 이르는 북해(北海) 즉 한해 (翰海)의 해로를 안내해 주겠다고 제언 했지만 수나라는 백제의 속샘이 의심스러워 거절 했다. 혹시 (수나라가 통일한 영역에 백제가 다시 들어 올까 두려워)하여 백제의 제안을 받아 드리지 않았다. 중원에서 일본으로 떠나는 배들이 지나 간 곳은 중국 해안선에 있던 대륙백제(自置百濟郡)라고 한 지역의 어느 한 도시가 분명 하다.
이와 같이 대륙백제가 중원을 석권하다가 최후로 중국 동해안에 있었던 증거가 삼국사기 최치원 (崔致遠)전에 실렸다. 남북조 말기에 수나라가 중원을 통일하기 전에 나타났던 고구려와 백제의 전성기를 설명 했다 :
수서에; “백제는 서쪽으로 부터3일을 가면 맥국(百濟自西行三日,至貊國云) 에 이른다는 등등”하는 문구를 남겼다 . 여기에 실린 이다. 짧은 기간 동안 중원이 대륙백제의 영역이였다 .
이를 신구당서에는 백제의 옛 북쪽 영역은 나타내지 않고 “서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월주(越州)에 이르고 남으로는 왜(倭) 모두다 바다 건너(皆踰海)에 있다”고 백제의 전성 시대를 설명 했다 .
서긍의 고려 도경에는 가 옛적부터 사용하던 뱃길이라 했다. 그 일대 섬에는 신라인의 전설이 전해 온다. 지금도 홍콩에는 장보고가 그지역을 관장 했다는 전설이 있다.
잎서 이서국을 설명 할때 나타났던 청도가 중원의 해변가에 있었다고 논증 했다.
같은 내용이 통전에도 있다. 수서와 통전에 실린 문장을 깊히 고찰 비교해 보면 , 삼국지 왜인전에 나오는;
한해(瀚海, 翰海)가 삼한의 후예들이 장악:
한해(瀚海, 翰海)가 삼한(三韓,汗, 韓)의 후예들이 장악 했다는 뜻이 글자 속에 있다고 논증 했다. 뚜렷한 증거는 삼국지 동이전과 수서(隋書)에 있다.
삼국지 동이전에서는, 발해만에서 떠나 요동 반도를 돌아 한반도 서남 해안을 따라 일본 서남쪽 구주일대 여러 섬들을 설명 하면서, 남쪽으로 2,000여리 떠러진 곳에 남자가 다스리는 나라 (男子為王)가 있다고 했다 . 그 섬나라를 수서 유구국 (流求國)편에 자세히 설명 했다 :
호(胡)자는 고 본다. 곤륜인(昆侖人) 은 전장에 같이 갔던 제사를 드리는 종군신부 또는 군목과 같은 사람이다.
신구 당서와 태평어람에는 일본이 부 신라(附新羅)하는 문구가 있다. 신라에 접해 있었다. 또는 신라의 속국이였다는 뜻이다 . 앞서 논한 신라와 백제가 일본을 키웠다는 문구와 같은 뜻이다. 진수가 단석괴전에서 <발해만 서남쪽에 살던 한인 한국(汗人, 汗國)이라 하던 글자를 후한서에서 왜인 왜인국(倭人, 倭人國)으로 바꾸었 듯, 남사(南史)에 나오는 왜( 倭)자는 발해만 연안 옛 대방 땅에 비류가 수도를 정했던 대륙 백제를 뜻했던 한인(汗人)이 흐터저 나가 살던 사람들을 뜻한 글자다 . 하여 높다(禹, 魏, 衛, 宇)는 뜻을 훈역한 고씨(高氏)가 건국했던 대륙백제를 다룬 북제서 (北齊書)에는 왜(倭)자가 없다 .
끝. October 31, 2017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