록도(綠圖, 錄圖)란 두 다른 글자는 동이의 수장으로 알려진 전욱고양씨와 관계가 있다 . 단군조선을 세운 단군왕검과 깊은 관계가 있는 문구라 단군왕검 백익과의 관계는 백이량부 (柏夷亮父)란 문구로 은밀하게 남겼다.
지리지형과 풍토의 차이로 단군조선이 대흥안령을 경계로 동서로 분산 되면서 한 부족국가 였던 부여 (夫餘)가 뚜렸한 가시국가로 나타났다.
대흥안령 서남쪽 일대에서 나타난 홍산문화는 동호(東胡)로 알려진 고조선의 문화유산 이다. 고고학 분야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일면이 동양 철학의 근간이 되는 도교(道敎)다. 선비족, 글안족은 고구려 부여와 같이 고조선의 후예다. 선비족이 만든 당나라는 도교(道敎)경전을 고구려에 전해 주었다.
유가에서는 단군조선에 관한 여러 사실들을 신선(神仙)에 비유하여 기록에 남겼다. 평양(平壤)을 선인 왕검이 살던 곳(仙人王儉之宅)이라 했다. 갈홍(葛洪, 283년 ~ 343년?)의포박자(抱朴子)에는 <황제가 청구땅 풍산을 지나다 자부선생을 만나 삼황 내문을 받았다>는 문구가 있다:
“昔黃帝東到靑丘 過風山 見紫府先生 受三皇內文”
이를 사기 오제본기에는 황제가 신표(符)를 부산 (釜山, 富山)에서 확인 했다고 기록 했다. 황제가 자부선인을 의무려산에서 만났다는 뜻이다.
이렇게 부(符)자는 대쪽으로 만든 신표 였다. 제왕세기에는 황제와 치우천왕과의 전장에서 신표를 사용했다. 윳서음의에서는 도을 부(扶)라 했다. 만주 땅에 있던 고조선의 후예, 즉 부여를 상징 하기도 한다 .
반고는 동이의 수령으로 알려진 단군왕검 백익 또는 그의 후손을 은밀하게 백이량부 (柏夷亮父)란 문구로 남겼다. 록도문(鹿圖文)은 백익이 치수 사업에 관여 했던 낙수 유역에서 나타났다 . 그림 글자라 처음부터 해석이 분분하여 정위를 가리는 시비가 나타났다 . 상서에 나온 큰 사슴이란 뜻의 대록(大麓)이란 글자가 기록할 록(錄)라고 했다 . 부여와 사슴의 관계는 앞에서 의무려산의 어원을 다루면서 설명 했다. 록(綠)자는 또한 음에 따라 여러 글자 (䩮: 祿。籙。簶. 𩌫)로 기록 했다. 이 글자를 루(𩌫;lù)로 발은 했다 . 사슴을 뜻한 글자와 어음이 같다. 진시황에게 알렸던 록도서(奏錄圖書)가 록도문(鹿圖文)으로 기록 되었다.
사슴록의 어음에서 부도 (符圖)가 나왔다. 황노사상을 따르는 도교(道教) 에서는 이를 종이에 그려 붙였다 하여 부적(符籍) 이란 낱말이 나타났다. 이 글자는 공자 시대 이전인 관자 칠법 (管子七法)에 나타난다 . 앞에 고왈(故曰) 하는 글자는 전왈(傳曰)과 같은 뜻이다:
常令不審則 百匿勝, 官爵不審則 姦吏勝, 符籍不審則 姦民勝, 刑法不審則 盜賊勝
이를 의역하면 <누구나가 알수 있는 상식적인 법률을 지키지 않아 백닉이 날뛰고(百匿勝), 고급관리가 지키지 않아 간신이 날뛴다. 부적이 지켜지지 않아 간사한자들이 날뛰고, 형법이 지켜지지 않아 도적이 날뛴다>는 뜻이다.
“숨을 닉, 사특할 특, 숨길 닉, 사악할 특” 으로 읽는 글자(匿)는 도둑이란 글자와 같이 고조선 사람들을 비하한 글자다. 고조선 영역에 들어온 서주(西周)는 고조선 사람들을 선비 (鮮卑) 또는 사(斯)라는 글자로 기록 했다. 사(斯)자는 시경에 고조선 사람들을 뜻한 호(胡)자와 같이 많이 나오는 글자다.
문심초롱(文心雕龍)에 따르면, 요임금이 록도를 만들었다(堯造綠圖)는 등 하늘이 명한 기록이라 앞으로 생길 일을 미리 적어 감추어 둔 글이란 뜻의 부참(符讖)이란 글자가 나타났고, 이에서 참위설이 후한 조정에 인용되었다.
동북아시아에서는 부적(符籍)을 여러 형태로 썼다. 한국에서는 주로 스님의 손을 빌려 부적을 만들어 사용 했다. 강릉에서 단오절은 사월 초파일과 같이 가장 큰 년중 행사의 하나였다. 액을 물리친다고 하여 문기둥에 붙이는 단오부적 (端午符籍)을 단오부(端午符), 치우부적(蚩尤符籍) 또는천중 부적(天中符籍)이라 했다. 하늘 나라와 관계가 깊다는 뜻이다. 만주사람들은 신령의 힘을 받아 드린다는 뜻에서 신부(神符)라고도 했다.
고조선의 황금시대에 쓰이던 화패가 명도전이라고 잘못 알려진 칼모양의 철전이다. 그 안에 세겨진 글자가 고조선의 문자다. 진수는 부여의 문자를 도둑들이 쓰던 말이라 하여 훔칠절 말씀어 절어(竊語)를 땅에 손으로 긁어 소식을 전한다고 했다 . 러시아의 극동 항구 우라지 보스톡의 우라지가 도둑이란 뜻이다.
남사(南史)에는 남만주를 떠나 한반도 동남쪽에 세로 수도를 정한 신라 (新羅)는 문자가 없어 나무 쪽에 금을 그어 의사소통 (刻木為信)을 했다. 인사법은 고구려와 비슷하고, 신라왕 성이 모 (王姓募名泰, 法興王)라는 사람이521년 (梁普通二年) 에 백제 사신을 따라 와서 그의 통역으로 조공을 시작 했다 .
북방 세력을 견제하려는 의도에서 송나라는 고려와 연맹체를 구성하려고 사신을 보냈다. 김부식의 안내를 받고 돌아간 서긍이 남긴 현대판 비밀보고서인 고려 도경에는 삼한의 후예 중에 고려만이 중국의 문화를 받아드려 중국과 같은 글자를 쓰고, 만주와 일본은 종횅 또는 상하로 나무판에 긁어 의사를 전한다고 했다.
광개토대왕 비문과 영일만에서 발굴된 비문등 500년대 이전에 만들어진 예서 (隸書)체 비문이 있다. 신라 뿐만 아니라 삼한의 후예들은 고려 시대에도 옛적 방법으로 나무에 칼로 긁어 만들어 편지 형태로 의사를 전달 했다. 그 변형이 향찰(鄕札)이다.
August 23rd, 2018.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