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수도 금미달 (今彌達) 전후 관계:
Abstract: Gija went to Joseon in 1046 BC, came back and met the first king of Western Zhou. No one has yet confirmed the birthplace of Joseon nor the last capital Geummidal(今彌達) which should be the capital during the Period of Warring States. Chinese claimed the capital of Gojoseon was in the current Pyongyang. By casting the conceptual net as wide as it can be under the spectrum of Time, Place and Events, I pull out a firm conclusion that Gojoseon had emerged in the place and era of Epic Flood in China. It was the dividing point of oral history to the written one and dawn of Chinese civilization. Gojoseon people were Scythian from the west, enslaved by alien Zhou clan and left original scripture in the NEA with archaic ideographs. Korean language is the trunk of Tungusic language remained. Chinese excavated Taosi (陶寺) in the Xiangfen County, Shanxi that is a part of the Hong-Shan culture from the North. But they claimed it as a part of Longshan Culture in Shandong Province. We have heard only one-side story from China. There ought to be other voices to assess the event. This essay illustrates the new method to study the history of NEA and trail of migration under panoramic view till Silla Unified Korea and Japan emerged. Gojoseon descendants spread out wide area in the NEA and through the sea rout as well. They left Totem poles in the new places. Sinja Village in Nepal is one example that Buddhism originated from the ancient Korean religion. Author attempt to draw the trail of migration that the people used to live in the Geummidal.
계속되는 소용돌이 속에 많은 사람들이 변두리(SMa-Out)로 흐터져 나갔다. 마지막 수도 금미달 (今彌達)에서 1500년을 다스리다 첫 수도 아사달(阿斯達)로 돌아와 산신이 되었다고 했다. 제헌국회에서는 단기 원년을 다루었다. 물론 그 당시의 관습에 따라 60갑자 산법으로 계산 했다고 본다. 위서가 작성된 시기는 급총 죽간에 실려 있기를 위양왕(魏襄王; 前319年-前296年) 아니면 위안희왕(魏安釐王; 前276年—前243年) 이라 했다. 고조선이 아사달에 수도를 정한 시기를 기원전 2333년이라 함은 합당성이 있다. 그때 부터 400여년 간을 남쪽 세력과 다투다가 금미달에 수도를 정했다는 뜻이다. 역사연구에서 어려운 시대가 알려저 있다. 그전후에 관해 좀더 살펴 보았다.
금미달을 떠난 사람들에 관한 예기가 전국 시대에 관한 기록에 있어야 한다. 사서나 유교경전 이외, 등외시 했던 모든 시록을 살펴 보면 전후 관계가 밝혀 진다. 금미달 이전에 수도는 오늘의 태원이었다.
그곳 산속(中山, 仲山甫 樊侯)에 있는 대원(大原, 太原 代原)이 오랫동안 고조선의 수도였다. [1] 전국시대 제후국 진(晉)의 영역이었다. 진대부 조간자 (趙簡子:?-BC 476)가 지도자로 나타났다. 그가 위 장공 (衛莊公 蒯聵:BC 480-BC 478) 과 철 생산지를 놓고 싸웠다 하여 철지전(鐵之戰)이란 술어가 국어 진어에 보인다. 그때를 기원전 495년(哀公二年) 이라 했다. 관자에도 철을 귀히 여겼다는 문구가 보인다. [2] 관자에는 금국미란(今國彌亂) 문구가 있다. 서주 세력을 쫓아 보린 고조선 사람들이 중원을 석권 했다. 하여 환공이 하소연을 해서 제후들의 협조를 얻어 북쪽에 있던 여주/북주 모가 다스리던 발조선 (發朝鮮)정벌 에 나섰다가 활 한발 못쏘고 도망 쳤다. 그 후에도 미란 (彌亂) 이란 글자가 여러 시대 문헌에 실렸다. [3]
산서성에 살던 고조선 사람들이 그전 보다는 더 좋은 획기적인 기술을 개발하여 좋은 철기를 생산 했다. 이 기술이 중원 전역에 퍼져 전국시대 (戰國時代, 기원전 403년 ~ 기원전 221년)가 시작 되었다. 춘추시대의 말기 에는 철의 공급이 보편화 되면서 산서성 사람들 세 가문이 철(鐵)로 만든 무기로 동주를 압박하여 제후의 반열에 들어 섰다.
장소: 삼국유사 내용을 보면 窮桑之野. 意在斯焉古朝鮮. 孤竹國 세 이름과 같은 또는 관련이 있는 곳으로 풀이 된다. 동진 시대 책으로 알려진 습유기 (拾遺記)에 “窮桑之野”를 설명 했다. [4] 그 내용은 중국에 숨겨진 여러 가지 전설을 모아서 만들어진 지괴서(志怪書)라 한다. 동진 시대는 북쪽 세력이 남쪽으로 진출 하여 정치적 사회적 대 혼란이 나타난 위진남북조 시대다. 남방불교가 도교와 토속 신앙을 압도적으로 누르고 전역에 퍼지던 시절이다.
산해경에는 “湯谷上有扶桑”, 三桑 桑姓, 桑無枝”라는 문구가 있다.
습유기 (拾遺記)와 불교 경전에도 마지막 수도 “금미달 (今彌達)에서 첫 수도 아사달(阿斯達)로 돌아와 산신이 되었다” 는 내용이 은밀하게 남아 있다. 불교를 뜻한 글자와 금미달을 뜻한 “釋” “彌”가 실렸다.
경전에는 백익이 피해 갔던 곳“益避禹之子啟 於箕山之陽”에 기자가 갔었다고 했다. 진양 (晉陽) 일대, 즉 오늘의 태원 (太原)이 고조선의 수도 였다. 그 곳에서 전국 시대에 북쪽으로 올라가 쌍간하가 흐르는 오늘의 대현(代縣, 무엇인가를 대신 했다는 뜻)일대에서 진시황 세력에 접령 당했다. 그 곳으로 옮긴 시절이 조나라의 시조가 나타난 때다. 조앙(趙鞅), 즉 조간자(趙簡子)에 관한 설명이 구구 하다. [5] 제나라의 혈통이 바뀌고 삼가분진 이 나타난 싯점을 전국시대의 시작이라고 했다. [6] 그 때 조나라가 산중에 있던 금미달 지역을 통합 했다. 후에 이리저리 통치 권이 바뀌다가 진시황이 6국을 통일 하고 성을 쌓았다.
금미달 (今彌達)로 논증된 산서성 북쪽 대현에 고조선 수도는 150년 정도 있었다. 진시황이 죽고 세력이 약화 되여 북쪽으로 밀려 갔던 고조선 세력이 되 찾고, 빼앗긴 책임을 문책 했다. 이를 사마천은 미지 수천리 (彌地數千里) 를 빼앗고 장성을 쌓았다고 했다. 진나라가 망하자 동서로 분리 되었던 고조선 후예들은 책임추궁에 들어 갔다. 이를 사기에는 서쪽에 있던 흉노가 오만한 동호왕을 죽였다고 기록 했다. 싸움의 원인을 구탈 (甌脱)이라 했다. [7]
대현 (代縣)을 구대지(歐代地)란 다른 글자로 기록 했다.
진수는 동호왕을 조선왕부(朝鮮王否)라하고 그 아들 준이 바다로 들어 갔다고 했다. 후에 그가 마한 땅에서 왕이 되었다. 그 마한왕을 온조가 밀어 내고 수도로 정했다. 대동강 하구, 강서 고분군이 나타난 지역다. 이는 백제 유적이다.
금미달, 구대지(歐代地)란 곳에서 한고조가 수모를 당했던 안문관 마읍 (雁門馬邑)이다. [8] 금미달 사람들이 이방인 서주의 노예(奴隸)가 되어 구전해 오던 예기(濊記, story)를 글자로 바꾸었던 예맥 (濊貊)족이다. 동이맥군 남려가 280,000명을 이끌고 와서 세운 맥국 (東夷穢君南閭等 降為倉海郡今貊穢國)이 내려와 창해군이 나타났다 사라졌다는 곳이다.
사마천은 이러한 현상을 “燕齊之閒靡然發動” 이란 문구를 남겼다. 조조와 당태종이 갈석산에 올라가서 시를 읊었다. 숙신씨의 본향이라 했다.
그일대 해하(海河, 즉 永定河) 수계에 살던 고조선 사람들이 쓰던 언어를 방언에는 “燕代朝鮮洌水之間”라 했다. 대(代)자가 오늘의 대현(代縣), 즉 금미달 지역을 뜻한 글자다.
신라가 나타난 조선 유민이 6부촌을 만들고 살았다. 밭을 갈다 예왕인 (濊王印)을 얻었다는 곳이 고허촌(高墟村) 이다. 그 곳에는 벌써 조선 (朝鮮) 이 있었다. 동호왕, 즉 조선왕 비(朝鮮王否)가 살던 곳이다. 진수가 남만주 노인들의 예기를 듣고 동이전을 썼다. 위만이 남만주로 되돌아 가서 왕이 되었다고 했다. [9] 남만주와 발해만 교류가 활발 했었다는 증거다.
금미달에 살던 사람들이 발해만으로 내려와 여러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삼국지 동이전과 광개토 대왕 비문에 “xx미彌”가 그를 뜻한다. 이들이 한해의 동서 해안을 따라 흐터져 나갔다.
고조선의 마지막 수도 금미달 (今彌達)사람들이 해하를 따라 해안으로 내려와 창해군이 나타났다. 그 일대에 미추홀(彌鄒忽), 관미성 (關彌城), 미추이사금(味鄒尼師今)과 같은 미자가 많이 나타났다. 그 부터 한해의 동서 해안을 따라 한반도와 중국 동해 연안에서 동남아로 흐터져 나갔다. 남북조 시대에 신미제국(新彌諸國)이란 문구가 진나라 역사서 (晋書) 장화열전(張華列傳)에 나온다. 그로 인하여 남조 역사서에 백제여왕 비미호(卑彌呼)의 후손 왜오왕 (倭五王)이 다스렸다는 倭,新羅,任那,伽羅, 에 나오는 구주(九州)의 분포도와 그에서 떠러져 나간 여러 주(州)자다
끝
[1]. 春秋公羊傳 昭公 &春秋穀梁傳昭公元年: 晉荀吳帥師敗狄於大原。《傳》曰:中國曰大原,夷狄曰大鹵。號從中國,名從主人.詩經: 天監有周, 昭假于下,保茲天子,生仲山甫.
[2]. 國語 晉語九:鐵之戰,趙簡子曰:「鄭人擊我。吾伏弢衉血,鼓音不衰。今日之事,莫我若也。」衛莊公為右. 管子: 美金以鑄戈劍矛戟,試諸狗馬。惡金以鑄斤斧鉏夷鋸欘
[3]. 管子:二年,桓公彌亂,又告管仲曰,鮑叔謂管仲曰:「異日者,公許子霸,今國彌亂,子將何如?」管仲曰。惡金以鑄斤斧鉏夷鋸欘. 管子 輕重甲 管子對曰:「吳越不朝,珠象而以為幣乎!發朝鮮不朝,請文皮毤。服而以為幣乎!禺氏不朝:
[4]. 拾遺記: 拾遺記卷,新稱彌帝隸,梅低梨,迷諦隸,梅怛麗,每怛哩,梅怛麗藥,昧怛[口*履]曳。菩薩之姓也。譯曰慈氏。名阿逸多,譯曰無能勝。或言阿逸多為姓,彌勒為名. 生於南天竺婆羅門家。紹釋迦如來之佛位 為補處之菩薩。光佛入滅 生於兜率天內院.
[5].赵简子 – 维基百科,自由的百科全书 (wikipedia.org):
[6]. 三家分晋 – 维基百科,自由的百科全书 (wikipedia.org).
[7] 史記 匈奴列傳: 東胡使使謂冒頓曰:「匈奴所與我界甌脫外棄地,匈奴非能至也,吾欲有之。」冒頓問群臣,群臣或曰:「此棄地,予之亦可,勿予亦可。」於是冒頓大怒曰:「地者,國之本也,柰何予之!」諸言予之者,皆斬之。冒頓上馬,令國中有後者斬
[8]. 史記: 韓王信徙王代,都馬邑. 太尉周勃道太原入,定代地。至馬邑,馬邑不下,即攻殘之. 史記 平準書:彭吳賈滅朝鮮,置滄海之郡,則燕齊之閒靡然發動。及王恢設謀馬邑,匈奴絕和親,侵擾北邊,兵連而不解,天下苦其勞,而干戈日滋.
[9]. 三國志 魏書三十: 侯準旣僭號稱王,為燕亡人衞滿所攻奪.魏略曰:昔箕子之後朝鮮侯,見周衰,燕自尊為王,欲東略地,朝鮮侯亦自稱為王,欲興兵逆擊燕以尊周室。其大夫禮諫之,乃止。使禮西說燕,燕止之,不攻。後子孫稍驕虐,燕乃遣將秦開攻其西方,取地二千餘里,至滿潘汗為界,朝鮮遂弱。及秦并天下,使蒙恬築長城,到遼東。時朝鮮王否立,畏秦襲之,略服屬秦,不肯朝會。否死,其子準立。二十餘年而陳、項起,天下亂,燕、齊、趙民愁苦,稍稍亡往準,準乃置之於西方。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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