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기(拔奇)가 부여왕위구대(尉仇臺):
부여(夫餘)의 역사를 후한시대 부터 위진시대 까지를 간략히 서술한 내용이 중국 북송 초기에 편찬된 태평어람(太平御覽)에 있다 . 후한서왈(《後漢書》曰) 이라 했지만, 현존하는 후한서의 내용과는 다르다:
<부여는 본래 예맥 땅(本獩地)이다. 동명이 요하를 건너 부여땅에서 왕이 되였다.
49년(建武二十五年)에 찾았다. 후한 초대 광무(光武)황제가 후대 했다.
111년(安帝永初五年)에 부여왕이 7-8천명의 군력으로 낙랑을 습격하여 큰 피해를 입히고 살인을혔가 다시 귀부(歸附) 했다. 120년(永寧元年)에는 (부여 왕위를 이어받을) 사자위구대(嗣子尉仇臺)가 황실을 방문하여 천자가 후대 했다. 136년(順帝永和元年)에 경도를 방문하여 순제(順帝)가 후대 했다. 항제( 桓帝146-167) 때에 다시 방문했고, 헌제(霊帝167-189) 때 요동에 자원해 들어(求屬遼東) 왔다는 등등. >
사자위구대(嗣子尉仇臺)가 (貢獻)한 시기는 고구려 고국천왕(故國川王, 재위:
179년~197년)이 169년에 대가 우거(優居), 주부(主簿) 연인(然人) 등을 보네서 공손도 (公孫度)를 도와 부산적 (富山賊)을 무찌르기 전이다. 후한서에는 <167년 (永康元年)에 왕부대(王夫台)가 20,000여명을 보네 현토성을 공략하여 현토태수 공손역(玄菟 公孫域)이 격파하여 수천급을 잘랐다>고 글자와 내용을 바꾸었다 .
삼국사기 고구려 편에 실린 고발기(高發岐, ? ~ 197년)사건을 <사자위구대 (嗣子尉仇臺)가 헌제(霊帝167-189) 때 요동에 자원해 들어(求屬遼東) 왔다>고 기록 했다. 이를 진수는 부여왕 해부루(扶餘王 解夫婁)의 서손(婁庶孫)이 서자 마여 (孽子麻余)라고 했다. 그가 요동에 다시 돌아간 발기(拔奇, 發岐)다. 그의 아들 박우거 (駮位居)가 졸본부여에 남은 부족을 다스렸다.
다음은 삼국지 부여편을 요약 해 설명 했다 .
<한말에 공손도나 해동에 나타나서 부여왕 위구대가 다시 요동에 돌아와 (更屬遼東)다. 공손도가 종녀(宗女)를 부인으로 택했다. 부여가 동이의 강국이 되였다.
度以夫餘在二虜之間,妻以宗女. 漢遼東太守公孫度以女妻之,遂為東夷强國。
삼국지에 실린 부여왕 (尉仇臺)은 왕자시절에 후한 황실을 찾아 갔다, 왕이 된후에는 자진하여 요동에 예속 되였다.
삼국지, 太平御覽, 삼국사기에 실린 170-180년경에 발생한 고구려의 왕위 계승에 관한 기록의 출처가 모두 위서(魏書)라고 밝혔지만 내용에는 차이가 많다. 고구려 본기에는 8대 신대왕 백고(新大王伯固; 재위 165년~179년)의 첫쩨 아들이 발기(拔奇), 두쩨가 9대 상산왕 연우(山上王, 伊夷模; 재위 197년-227년), 세 쩨가 계수(罽須)다. 발기가 배천(裴川)에서 자살했다. 후에 그의 시신을 배령(裴嶺)에 묻었다는 곳이 고구려 영역이다. 그 당시에는 아직 <고구려 백제, 부여의 영역이 불확실> 하다.
삼국지에 따르면 발기(拔奇)는 다시 요동으로 돌아 가고 아들이 비류수상에 남았다. 진수 (陳壽, 233년 ~ 297년)가 삼국지를 쓰던 시절에 고추가 박위거 (今古雛加駮位居)라 했다. 발기의 동생은 국내성으로 천도 했다. 졸본부여가 유리왕의 후손이 다스리던 영역이 되였다.
삼국지 백제편에 실린 <일설(一云)에는 백제의 선조 우대(優台)라고 한다>는 내용이 글자를 이리저리 휘돌려 비류왕 (沸流王)이 부여왕 위구대(尉仇臺)로 기록된 발기(拔奇)다. 온조형 비류(沸流)와 비류왕 (沸流王)은 다른 사람이다.
백제 본기에는 비류라고 하는 발음을 다른 글자로 적은 비류왕이 세번 나타났다.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