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익(伯益)의 업적-1:
중국문헌에는 백익(伯益)을 여러 글자로 기록에 남겨 정확한 면모를 엿보기 어렵게 되였다. 청나라때에 편찬된 독서잡역(讀書雜釋) 요순시절 이름자를 훈과 음이 섞여 풀이하기 어렵다고 “益為翳. 契之為卨,皋之為咎”란 예를 들어 자세히 설명 했다 . 또한 백충장군 허령비(百蟲將軍顯靈碑) 내용도 인용 했다.
촤씨춘추의 초안자로 알려진 좌구명(左丘明)의 국어(國語)에는 정어(鄭語) 편에 백이(伯夷)가 진나라의 선조로 요 임금을 도왔고, 백예(伯翳)가 순임금 옆에서 매사를 상의하여 도왔다고 했다 . 열자(列子 湯問)에 [대우는 행동으로 보여 주었고, 백익(伯益)은 지식으로 이름이 알려 졌다 (大禹行而見之, 伯益知而名之)
고]한다. 치수 사업을 성공하고 우로 부터 통치권을 위임 받아 제정일치 시절의 첫 지도자로 선출 되였다 . 그는 박식하고 다제다능 했다. 백충 장군이라고도 했다. 울타리(虞)를 만들고, 우물을 개발 하여 여러 사람들이 사용하여 커다란 마을이 생겼다 . 납향 납(臘)자와 사냥 렵(獵)자는 하(夏)나라 때 진역(震)으로 알려진 중국 제일 서쪽 진(秦)에서 군사훈련의 목적으로 권장 하기 시작 했다 . 그가 동양문화의 출발점(Dawn of the Far Eastern Civilization)이 된다. 그의 업적은 앞으로 깊히 살펴 보아야 하나 아래와 같은 몇가지를 찾았다.
백익의 실체를 은미하게 측백나무(柏益)와 같은 사람이라고 기록 했던 한서(漢書) 에는 그를 지극히 높히 평가 했다 . 지리지에는 고 했다. 율력지(漢書 律曆志)에는 백익 (伯益)은 화익 (化益) 이라 했다. <수왕(壽王, 彭城靖王恭)이 말하기를 “ 壽王言化益為天子代禹” 백익이 천자가 되여 우왕을 대신 했다 . 백익이 화인(化人)이 되였다 . 화인(化人) 이란 표현은 아직도 논란이 많은 불교 전례와 관계된다. 문제는 우리민족 고유의 일월성 (日月星)을 숭배 하던 삼신 숭배사상 (三辰, 三神崇拜)의 핵심이 되는 하는가에 따라 불교 전례를 한무제 이전으로 설명 하려 한다. 필자가 찾아본 바로는 김씨 시조로 알려진 김일제 (金日磾)가 금인(金人)을 놓고 기도 했다는 기록은 그가 환웅천왕 (桓雄天王)께 빌었다는 뜻이다. 한서에서 화익 (化益)이란 글자는 백익 (伯益)이 환웅천왕 (桓雄天王)과 같은 성인(聖人)이란 뜻이다 .
동양역사의 초기에 나타난 인물이라 그의 후손이 넓은 지역에 흐터저 살면서 여러 성씨를 사용 했다. 한국성씨 “趙,司馬, 裴, 江, 馬”와 산서성에 많이 나타났던; 높다는 뜻의 우(禹) 또는 위(衛,圍,魏) 이를 훈역한 고(高) 최(崔, 最) 으뜸 원(元), 해 해비씨(解, 解批, 解毗氏, 解枇氏)씨, 박씨(朴,博, 樸,薄),옛적에는 같은 발음이였던 사씨(谢氏, 谢批氏),비자와 정백(非子,井伯) 이 모두 백익의 후손(本伯益之後) 이라고 한다 .
이렇게 다제다능하고 후손이 많은 백익(伯益)을 신흥 유가에서는 <지도권이 혈통을 이어간다는 이론을 앞세워 혈통이 분명치 않은 요임금의 아들이라고도 알려진 계(啟, 胤子朱啟明)를 우왕의 아들 (娶涂山 生啟)로 둔갑 시켜 우왕의 지도권을 빼았었다. 맹자는 이를 합리화 시키려고 백익을 과소 평가 했다 . 묵자(墨子 非樂上)에 나오는 무능한 탕아 계(啟는 우왕의 아들이 아니다 .
주역에서 익(益)자를 보면(周易 易經) ䷩益: 백익(伯益)의 흥망성쇠를 그렸다 . 역경에 실린 “백익의 10명 친구 거북상은, 불극위(益之十朋之龜,弗克違)라. 원길(元吉)이다. 영정길(永貞吉)이다. 같은 문구가 강희자전 거북이 귀(龜)자에도 있다 . 이윤을 아형(伊尹名阿衡)을 또는 보형(保衡)이라 했다. 형(衡)이 이름이고 아와 보 (阿,保) 는 밝다는 뜻을 지닌 성씨다. 백익 (伯益)이 매사를 좌우에 치우치지 않고 공평하게 처리 하던 사람이란 뜻이다 . 강희자전에 바를 정(正)자 설명에는 [백익 (伯益)이 만든 또는 사용하던 법이 옳바른(正) 시법(諡法)이라 했고, 고무래 정, 장정 정, 또는 소리 형용 정(丁)이라는 글자 설명에는 일주서 익법해( 逸周書 諡法解)의 뜻을 술의불극왈정 (述義不克曰丁)이라]고 했다. 곡량전(穀梁傳)에는 시자소이권선이징악 (諡者,所以勸善而懲惡)이라, 즉 착한 행위는 권하고 악한 행위는 마땅히 (而 , 편안할 능, 능히 능) 징계했다. 백호통론에서도 그렇게 설명 했다 . 시(諡:音示) 라고 읽는 글자를 설문해자에는 “作謚” 라 했고 남북조시대에 편찬된 류편에는 “類篇》或省作𧨦。與謚別” 다른 글자라고 했다 . 시(諡, 謚)자를 살펴 보면[월성(三垂,日月星也) 삼신사상을 믿던, 빛을 숭상 하던 사람들 사이에 태고적 부터 전해오던 말씀]이라고 했다 . 우리 미족의 먼 선조들이 다루던 률법을 시법(諡法)이라 했다는 뜻이 분명하다.
이를 남북조시대에 편찬된 태평어람(太平御覽)에서는 앞으로 당겨 [하우,은탕,주무왕의 설(說)이라고 했다 . 동한 말기에 편찬된 전한기(前漢紀) 효선황제기(孝宣皇帝紀: 기원전 73년 ~ 기원전 49년) 에는 미유시호 (未有諡號) 라는 문구]가 있다. 그 때는 시효를 쓰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 후에 앞에서 인용한 일주서 시법해(諡法解)를 우격다짐으로 풀이 하여 시법 (諡法)이란 뜻은 시호 (諡號)를 쓰는 관례를 만들었다고 풀이 했다 .
산해경(山海經) 대황서경(大荒西經) 맨 끝에는 한무제의 바로 전임 한경제 유계(漢景帝 劉啟;기원전 188-141년)의 이름자를 피하여 하후계(夏后啟)를 하후개(夏后開)라 했다 . 모호한 열개(開)자로 간략하여 남긴 기록은 분별하기가 어렵게 되였다. 산해경 해내동경(山海經 海內東經)에는 기원전 6년 4월 (建平元年)에 명을 받아 대조와 시중(待詔, 侍中)의 직책을 맡은 세 사람이 보필했다는 기록이 있다 . 시호(諡號)를 쓰는 관습은 한무제 때에는 없었고, 후한 시대에 나타났다고 본다.
백익(伯益)을 죽이고 정권을 빼았은 사건은 중국신해혁명(1911~1912년)이후에 양심적인 사학가 고힐강 (顧頡剛, 1893년 ~ 1980년) 나근택(羅根澤)들이 모여 만든 논문집 고사변(古史辯)에 하사삼론 (夏史三論)에서 깊히 다루었다.
이러한 사료를 종합해 보면; 합법적으로 지도권을 이양 받은 다제 다능한 사람을 죽이고 지도권을 빼았은 사실을 은패 하려고 수단과 방법을 다하여 조직적으로 옛 기록을 주물렀다. 국조 단군왕검의 인품과 업적은 우왕을 묘사 했다기 보다는 화익(化益)이라고 불리던 동이부락의 수령 백익(伯益)의 것이다.
끝,
September 15, 2017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