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키에서 찾은 다음을 고려:
羿 (唐堯),传说中帝尧时的一位壯士,曾在十日並出時射下多个太阳
后羿 (夏朝),夏代部落東夷部落有窮氏首领,掌控夏朝的政權,不久被自己的手下寒浞所杀.
寒浞(「浞」,拼音:zhuó,注音:ㄓㄨㄛˊ),一作韩浞。[1]夏朝東夷族伯明氏(今山东省濰坊市寒亭區)人,妘姓,任有穷氏部落首领羿的相,后杀死羿和夏朝国君相安,夺取了夏朝和有穷氏大权,最后被夏朝大臣靡杀死.
竹書紀年 -> 帝相: 八年,寒浞殺羿,使其子澆居過
寒浞子,多力,能陸地行舟.
逄蒙是后羿的徒弟,他是五帝帝尧时期一个善于射箭但品行不端的小人.
백익(伯益)이 단군왕검 (壇君王儉)
몇일 전(October 1, 2017)에 올렸던 “진서 본기 (晉書 帝紀)-1”를 교정하다 보니,
백익(伯益)이 제사권과 정치적 통치권을 합당히 받은 단군왕검 (壇君王儉)으로 나타나서 다시 올립니다.
진서 본기 (晉書 帝紀)-1:
진서 본기에는 첫쩨로 (晉書 帝紀第一) 사마의(司馬懿, 179년 ~ 251년)를
다루었다. 서진서(西晉)을 세운 사마씨(司馬氏)는 그 선조가 전욱 고양씨의 아들 중려 (高陽之子重黎) 즉 축융(祝融)의 후손이라고 했다 . 후손들이 산서성 해지-분수 계곡 연안에 살면서 하 상 주 시대에 관료로 일했다. 그 일대에서 단군조선이 탄생 하여 백익 (伯益)이 뒤를 이었다. 옛적에 당숙우(唐叔虞)를 봉했다는 서주의 제후국 진(晉)의 연역이 본향이라 하여 조선(朝鮮)과 같은 뜻을 이미하는 글자 으로 택했다 .
앞서(Aug 28-28, 2017)에 걸처 “산서성 역사 진세가(晉世家)와세 쩻 장: 산서성 사람들이 한글 어순을 썼다: 첫 장: 부루무송백(附無松柏),:이란 제목”으로 약간 다루었다. 사마의(司馬懿)란 이름은 후한서와 특히 삼국지에 많이 나타난다. 이 두 사서에 나온 기록을 함께 다루기로 한다.
태평광기(太平廣記) 악일(樂一) 한고(韓臯, 韓皐)편에; 위진(魏晉)시대라는 위(魏)자는 같은 음 위(衛)자가 옳다고 했다. 서진(西晉)의 건국기반을 닦은 사마의(司馬懿)가 조위(曹魏)로 부터 황제자리를 찬탈하려는 모략을 꾸리자 그에 반대 했던 관구검 (毋丘儉) 문흠 제갈탄(文欽, 諸葛誕)을 이라고 했다 .
그 내용을 살펴보면, 조위는 <더 높은 사람을 지킨다는 뜻의 지킬 위(衛)자를, 같은 음으로 발음 되는, 제일 높다는 뜻의 글자(魏)로 바꾸어 시경 (詩經)위풍(魏風)이 나타난 지역이 조씨(曹氏)의 본향이라고 바꾸었다. 간웅 조조는 한나라 때 제상을 지냈던 조참(漢相曹參)의 후손으로 산동성 패현(沛國, 沛縣)이 본향이다 . 그의 아버지 조고(曹嵩)가 후한 영제(靈帝; 재위 168년 ~ 189년) 때에 서원전 일억만 (西園錢一億萬)을 뇌물로 바쳐 대위 (太尉)벼슬을 받았다 . 조고(曹嵩)의 혈통을 더올라 가면 하후씨의 후손으로 하왕조가 나타났던 산서성 해지연안, 즉 시경 (詩經)위풍(魏風)이 나타 났던 곳이라 하여 조위(曹魏)로 했다. 아들 조비(曹丕)가 제단에 올라 대관식을 마치고 위왕 (魏王)이라 붙인 이유를 순임금이 우왕에게 양위 했던 사실를 인용하여 설명했다 . 자기 자신이 무력으로 빠앗은 왕관을 상대방이 주어서 받았다고 발표 했다.
위진(魏晉)두 왕조는 출발부터 권모술수에 특출한 제능을 가진 자들이 세운 나라로 그들은 중원에서 큰 전쟁을 하면서도 남만주-발해만 연안에 살던 고조선의 원주민을를 사기와 기만의 권모술수로 다루었다.
필자는 앞서 고 논증했다. 강희자전(康熙字典 | 毋部)에는 글자 꼴이 비슷한 “毋,毌,母,”자를 위장 관구검 (魏有毌丘儉)의 발음을 자세하게 설명 했다; 정현(鄭玄)이 말하기를 고문모위무 (古文毋爲無)라 했다. 금인언모(今人言莫)혹 그 새 이름을 무(武) 라하고 산서성 에서는모(毋)라 하지만 부모란 어미 모(母)자와는 다른 글자다. 같은 음으로 읽던 글자 “ ; 音牟”가 “”자다 . 이를 종합해 보면란 뜻이다 .
검(儉)자는 라는 뜻이다. 상서에는 요 임금이 <우(禹)에게 치수사업을 맡아 보는 사공(司空)에 임명하고, 백익 (伯益)을 동음이자 백이(僉曰伯夷)로 기록하여 조정에서 행하는 제사의식 (朕三禮)을 맡아 보게했다. 백익 (伯益)이 제사장, 즉 단군(壇君)의 직책을 요임금으로부터 일임 받고, 정치적 지휘권은 도산 총회의에서 그의 동료였던 우왕으로부터 물러 받았다 . 이 두분이 단군조선의 첫 두 지도자다.
백익(伯益)이 제사권과 정치적 통치권을 합당히 받은 단군왕검 (壇君王儉)이다.
도덕경의 저자로 알려진 노자(老子)란 이름이 여러 시대에 나타 나듯, 백이(僉曰伯夷)란 이름의 동명 이인이 여러 시대에 나타난다.
예기(禮記坊記)에 좋고 나뿐 법을 비교 하면서, 그 첫쩨로 백익 살해사건을 원망한 뜻이라 했다. 다음사전에 허물 구, 성 고, 큰 북 고 (咎)라고 읽는 글자는 [성(姓). 죄과(罪過). 과실. 재앙(災殃)이라고 풀이 했다. 고요(咎繇, 臯陶) 또는 구단(咎單) 이라 하는 이 글자는 옥황상제가 내려 보낸(天降之咎) 지도자 백익을 뜻한 글자다 .
중원 문화권에서는 이렇게 단군조선의 시조부터 은밀하게 감추려고 노력 했다.
끝, 다음에 계속
October 1, 201 Revised October 4, 20177.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