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기록에 나타난 증거.
의림(意林)과 맹자 만장편에 실렸다. 백익이 피해 갔던 곳을 기산지음(箕山之陰)이라 했다.
같은 사건을 오월춘추와 사마천의 사기에는 기산지양(箕山之陽)이라 했다.
한중 기록에는 기자가 조선에 갔다는 기록이 있다.
사마천은 자료 수집을 목적으로 산서성 북쪽으로 올라가서 그곳에 살던 노인들로 부터 기자가 남겼다는 문장을 실었다.
한글 어순이다. 전한 시대 유향이 쓴 열선전 유백자(列仙傳 幼伯子)가 또한 한글 어순 이다.
삼국지 종회전(鍾會傳)에 [왕필(王弼, 226년- 249년)의 역주에는 여기저기에 고려언어(注易,往往有高麗言)가 있다]고 했다 . 왕필이 도덕경과 주역에 주(注)를 달았다. 처음에 역서와 고문은 노예로 잡혀 왔던 관노가 작성(隸書) 했다. 초씨역림에 실린 (순임금이 살다 죽었다는 해지연안) 문구가 한글 어순이다.
시경을 비롯한 여러 고전을 살펴 보면, 산서성 사람들이 한글 어순으로 된 언어를 썼다.
평양에 많은 선우씨는 본이 태원이라 한다.
아사달이라 하는 곳이 太原 일대에 있었다.
백익이 단군왕검이 분명하다. 그가 해지 연안으로 내려와 치수 사업을 성공 시키고 우격 다짐으로 폭력을 쓰던 융우가 밀려나고, 부족장 전원이 백익을 세로운 지도자로 뽑이 왕중왕이란 뜻의 왕검이란 칭호를 사용 했다.
孟子 萬章上:禹薦益於天,七年,禹崩。三年之喪畢,益避禹之子於箕山之陰。朝覲訟獄者不之益而之啟,曰:『吾君之子也。』謳歌者不謳歌益而謳歌啟,曰:『吾君之子也。』丹朱之不肖,舜之子亦不肖.意林 典論五卷:禹崩,益避禹子于箕山之陰.史記 本紀 夏本紀:三年之喪畢,益讓帝禹之子啟,而辟居箕山之陽.吳越春秋 越王無余外傳:禹崩,傳位與益。益服三年,思禹未嘗不言。喪畢,益避禹之子啟於箕山之陽,諸侯去益而朝啟,曰:「吾君帝禹子也。」啟遂即天子之位,治國於夏。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