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수도 거발성(居拔城)은 양자강 하류에 있었다.
삼국사기에 남북조 시대 역사서 북사(北史)와 당서 (唐書)내용을 인용하여 백제의 수도를 거발성(居拔城) 또 고마성 (固麻城), 그 밖에 다섯개의 방성(五方城)있고, 서쪽 바다 건너 월주(越州)에 이른다고 했다. 백제는 부여의 후손이 세웠다. 초기 수도는 형 비류가 정착한 대방고지 미추홀(彌鄒忽)과 동생 온조가 하남 위례성에서 한성으로 옮겨 두 곳에 있었다.중국사서에는 온조왕에 관한 기록이 없다. 비류의 선조를 부여왕 위구대 (夫餘王尉仇台) 라 했다. 우대 (優台)에 원수구(仇)자를 넣고 동명의 가계를 비하 했다. [1] 그후에 옮긴 기록이 있으나 장소가 혼미하다.[2]
삼국시대 부터 수나라가 중원을 통일 하고 고구려와 임유관전쟁이발생 했던 남북조 시대 (南北朝時代: 386 ~ 589) 에는 중원에는 많은 변화가 나타났다. 처음 열 가구가 내려왔다가 위진 혼란기에 많은 사람들이 뱃길로 와서 백가제해(百家濟海)라 했다. 언어가 다른 사람들이 많이 모여 어학 사전이 절실 했다. 그러나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동남아에서 들어온 불교가 황로 사상과 겹하여 세로운 형태의 불교가 나타나기 시작 했다.
제갈 공명과 겨루었던 사마중달의 후손이 발해만 연안에 살던 원주민의 도움으로 그곳 양평성에서 공손연을 토벌 했다. 공손연의 선조가 부여왕 위구대(尉仇台)의 딸을 부인으로 맞아 동이의 강국을 이루었다는 유령 인물 공손도(公孫度, ? ~ 204년)다. 사마씨가 부여씨와 화친을 해써 서진(西晉, 265년 ~ 317년)을 세우고, 곧 이어 왕자의 난을 맞아 강남으로 도망을 갔다. 화친 했던 사실을 문제 작상(文帝作相) 하여 읍에 봉했다(封邑)고 했다.[3] 그 때에 부여씨가 강남에 정착 하여 왜오왕(倭五王)이 다스렸다는 왜 백제 신라 임나가라 진한 모한 “倭百濟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 일곱 나라가 남쪽나라 역사 송서 나타났다. [4] 이러한 이름이 계속 남쪽나라 역사서에 실렸다. 중원을 통일한 수나라 역사서에는 임나가라 진한 모한 (任那加羅 秦韓慕韓)은 사라지고, “倭 百濟 新羅 高麗” 만이 나타났다. 그러한 혼란기에 발해만 연안에 살던 고조선 후예들이 한해(翰海 黃海, 중국 동해) 의 해안을 따라 흐터져 나갔다. 중원 세력은 수나라 때에 처음으로 육법언 (陸法言)이 운서를 만들고, 한해 남쪽 해로를 따라 한반도 남단을 거쳐 일본 열도를 방문 했다. 당태종이 흠모 했다는 위징(魏徵, 580년 – 643년)이 수나라의 역사서 수서(隋書)를 썼다. 수서 백제를 자세히 설명 했다. 삼국중에 백제만이 중원의 황제가 행하는 제천 오제 (王祭天及 五帝之神) 를 모시는 의식을 치루었다. 그러면서 위구대(尉仇台,有仇台)의 후손이라 하고 수도를 거발성 (居拔城) 이라 했다. 거발성은 중원에 있었다.
남사(南史) 북사 (北史)에서도 수서와 같이 백제의 시조를 위구대 로 밝히고 백제의 왕은 동·서 양성(兩城)에서 사는데, 하나는 거발성 (居拔城)이고 또 하나는 고마성(古麻城)이라고 했다. 경기 지역 밖에 다섯 곳에는 (外更有五方) 성도가 있다. 그중 남방에는 구지하성 (久知下城) 이라 했다.[5] 이 두 수도(兩城)의 위치를 찾았다. 같은 중국 사료 북사 내용을 인용한 일연 스님은 한강(漢江) 즉 양자강(揚子江, 長江) 이남 에 있던 수도 거발성을 지방 행정부 군으로 바꾸어 그 군왈 거부성 (其郡曰 居扶城)이라 했다.[6] 성왕 때 까지 남부여(南扶餘)에 관한 내력은 미상이다. 사비(泗泚)는 강이름이라 했다. 발기가 정착 했다 하여 발기진 (拔奇之津) 이라 했던 곳을 거발성 (居拔城) 이라 했다. 오늘의 남경 일대에 있었다.
또 하나는 고마성 (古麻城. 固麻城)이라고 했다. 통전에 마성 (麻城)이 고형주(古荊州)에 실렸다. [7] 양자강 상류 한강(漢江)이 만나는 곳이다. 손견이 동탁군을 무찔렀다는 곳이라고 했다. 비류의 후손이 강남으로 내려가서 양자강을 다스렸다고 본다. 신당서에 백제의 서쪽은 월주에 이른다 “百濟西界越州”라 했고, 삼국사기에도 남쪽으로 오월(南侵吳 越)에 이른다고 했다.또한 백제 한성을 빼앗긴 개로왕(蓋鹵王, 재위:455~475년) 때는 “楚 越之急”란 문구도 있다. 백제는 강남에 영토를 지니고 있었다.[8]
그 밖에 군현에 해당 하는 큰 읍을 담노(擔魯,簷魯)라 하여 왕실의 자손이 가서 다스렸다. 담(擔 簷)이라 적은 글자는 처마를 뜻한 옥담(屋檐) 의 략자다. 담로란 지붕이 서로 붙은 길 (路. 魯; 旅,古作魯),즉 담벽, 담장이 있는 큰 마을 이란 뜻이다. 덕수궁 돌담길과 같은 표현이다.
[사서 여러곳에 실린 담(贍 擔,簷 蟾) 자의 어음은 [노자를 노빙(老聃; 𨈜:同𨈭)이라 불렀듯, 귀가 침침 하여 잘 듣지 못한 사람(𨈭 耽)이란 뜻으로 대화가 잘 않되는 지역]을 모두 “儋耳 贍部洲” 라 했다. 주로 대만등 동남아 여러 섬을 지칭 했다. 한국에는 제주도와 섬진강(蟾津江)이름자에 보인다. added. 2/18/2024.]
수서에는 거(居)발성(拔城)과 (고)마성(麻城)을 연혁을 설명 설명 했다.[9]
양나라 때에 신안(信安)이라 하던 곳이다. 이를 당나라 때에는 새 신자 신안 (新安)으로 바꾸었다. 옛적에 남월(古南越)이라 부르던 강남 지나(支那) 지역에 있었다.[10] 수나라가 마지막으로 정벌 했던 남조의 진(陳)나라 때에 서양(西陽)을 패하고 남정주 계림군(南定州,桂林郡)에 예속 시켰다. 오늘의 계림이 있는 옛 지나라고 부르던 광동성지역으로 옮겨 갔다. 계림(桂林) 또한 지나 영역에 살던 신라의 별명 계림(鷄林; 雞林) 과 관련이 있다.[11] 십육국시대 하북 요동 지역에서 활거 하던 모용수 (慕容垂) 가 강남으로 내려가 계림왕(桂林王慕容鎮)이 되었다.[12]
서진 역사책(晉書)에 나오는 조선(朝鮮)은 발해만 서쪽 갈석산 일대를 의미 했다. 전연(前燕)의 제1대(초대) 황제가 된 모용황 (慕容皝, 297년- 348년)을 조선공 (朝鮮公)으로 봉했다. 高雲고구려 사람 북연 황제 고운 (高雲, ? ~ 409년)이 모용씨가 되었다.[13] 모용씨 (慕容氏)의 어원은 부여란 이름이 와전(冠步搖冠; bù yáo)되여 나타난 사음자라 한다.
진서(晉書)에는 선비족의 풍속에서 나온 음이 와전 되여 모용(慕容)이 되였다 하나, “보요(步摇)라고 읽는 글자는 [bùyáo] 부야오/부여로 발음 되였고 한서와 동관 한기에 나온다. 자서 역명 (字書釋名)에는 귀인의 머리 장시품을 보요 (步摇)했다. 삼국지에는 선비대인 모용 (慕容)이 있다 .
백낙천(白居易, 樂天; 772년 -846년)이 이르기를 만주 길림(吉林)은 신라 발생지인 계림이 와전된 글자라 했다. 그가 읊은 장편 서사시장한가 (長恨歌)에는 “雲鬢花顏金步搖, 芙蓉帳暖度春宵”라 했다. 모용씨(慕容 氏) 는 부여족의 후손으로 대륙 백제(百濟)의 명맥을 이어 갔다. 중국 대륙에 남아 있던 모용(慕容)씨의 후손이 동진시대 부터는 백제(百濟)로 나타났다.
광동성 계림(桂林) 일대는 옛적에 지나(支那)라고 하던 곳이고 백제 (百濟)란 이름이 붙은 곳이 있다.
광개토 대왕 비문에 실린 발성(拔城)이 있다. 고구려 8대 신대왕 백고 (新大王伯固; 재위 165년~179년)의 첫쩨 아들 발기(拔奇)가 왕자의 난에 밀려 요동에 있던 공손도에 갔다. 그가 살았던 곳이 발성이다.
서진말기 291년(晉永康元年)에 발성(拔城)에서 큰 전쟁이 있었다. 국운이 쇠할 증조란 풀이를 했다. 서진 말기에 나타난 팔왕의 난(八王-亂)시작 이다. 사마의(晉 高祖 宣帝 司馬懿, 179년 ~ 251년) 가 공손연을 토벌 하고 비미호(倭)의 후손을 제상으로 임명 했던 발기의 후손이 살던 곳을 발성(拔城)이라 했다. 그곳에 공손도 세력과 인척관계를 맺은 사람들이 남아 살던 곳이란 뜻에서 진유 고씨 (陳留高氏) 라고 했다. 임나가라 (任那加羅)의 발원지다. [14] 박사고흥 (高興)이 백제 서기를 남겼다는 발해고씨의 발생지이도 하다.
조위와 서진 시대에 나타나지 않았던 신라 백제(新羅, 百濟) 란 이름이 북방 세력에 밀려 강남으로 피란을 갔다. 이들이 강남으로 옮겨 갔다. 강남에 발기진(拔奇津)이 나타났다. 양자강 하구 일대에는 왜오왕이 다스렸다는 왜, 백재,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倭、新羅、任那、 伽羅、 秦韓、慕韓六國)하는 이름이 나타났다.[15] 사마씨의 흥망을 기술한 진서에 발기(拔奇)가 살던 성이라 백제 수도 거발성 (居拔城) 이라 했다. [16] 문제가 상으로 만들었다 (文帝作相) 는 비미호(卑彌呼)의 후손이 살던 곳이다. 최치원이 백제 전성기에 월주에 백제가 있었다는 기록과 일치 한다.
발성(拔城)에서 큰 전쟁을 했다는 기록이 진서 (晉永康元年) 300년 조에 실렸다. 오늘의 복건성인 복주(福州) 진안구(晉安郡)에는 신라 (新羅) 온마 (溫麻) 여덟게 현이 있었다. [17] 부견(苻堅)이 요동에서 모용환(慕容桓) 을 파멸한 372년에 남쪽에서는 백제 임파왕(百濟, 林邑王)이 조공을 바쳤다.
자치통감에 발기와 관련 되었던 곳을 숭안현(崇安縣, 崇安陵)이라 했다. [18] 강소 단양 진강(丹阳, 鎮江, 京口), 즉 남경시 일대에 발기가 정착 했었다. [19]
북송 시절에 만든 태평어람(太平御覽)에 북사 내용을 인용 하여 백제 (百濟)역사를 간략히 기록 했다. 삼국 사기 또한 북사 내용을 인용 했다.
굳을 고 삼 마 “고마 固麻”라고 읽는 글자에 역사가 숨었다. [20] 고(固gù)자 는 사방에 요새가 있는 성이란 뜻이다. 마(麻, mā )자는 북방 유목민을 뜻한 글자다. 상나라 말기에 부열의 후손 한 지류가 양자강 남으로 쫒겨가 정착 했던 곳이다. 남아 있던 사람들이 부여(夫餘)를 성씨로 택했다고 한다. 부여씨의 후손이 지나(支那)라고 부르던 가림군 (佳林郡)이 있었다. 정착 하여 거부성(居扶城, 所夫里)이라 하고 그때 부터를 남부여라고 했다. [21]
거발성이 처음 기록된 남조 양(梁, 502년 ~ 557년)때 편술된 금루자 (金樓子)에는 발기의 친구 고대를 손권(孫權)의 형인, 장사환왕 손책(吳 長沙桓王 孫策, 175년 ~ 200년)이 죽였다는 기록이 있다. [22]
거발성이 함락되었던 시기는 동이의 강국을 이루었던 부여씨의 전성기 였다. 해양권을 장악 했던 부여씨가 담로의 하나였던 대동강 하구에 한성 (漢城) 을 수도로 정하고 있던 개로왕이 고구려 장수왕의 급습으로 살해되였다. 이러한 비보를 듣고 열도에서 돌아와 혼란기를 수습하던 곤지의 아들 동성왕(東城王: 479년~501년) 이 다스렸다.
그의 뒤를 이었던 백제 25대 무녕왕 (武寧王,재위: 501년 – 523년)의 아들의 성왕(聖王, ? ~ 554년) 시절에 거발성이 함락 되었다. [23] 대륙 백제 영역에 남방불교가 번성했다. 성왕 (聖王)은 불교에서 부르던 전륜성왕 (轉輪聖王)을 간략한 칭호라 한다. 동성왕을 마모(摩牟) 또는 마제(摩帝)라 한다. 마(摩)란 삼베 (hemp)로 실(絲,fabric)을 만들 듯[손 바닥을 비빈다] 는 표음자로 절실한 불교신자를 뜻했다. 신라에도 같은 칭호를 썼다.
후경(侯景, ? ~ 552년)은 갈족(羯族) 으로 북제를 세원던 발해 고씨와 같이 북위(北魏) 동위(東魏)의 장군이었다. 같은 동위의 장군이었던 고양 (高洋) 이 선양 받아 업(鄴)수도를 정하여 북제(北齊, 550년 ~ 577년)가 나타 났다. 북제 이전 부터 왜오왕이 다스렸다는 여섯 나라가 양자강 하류에 있었다. 삼국사기에는 장수왕이 백제 한성을 점령하여 한반도 남쪽으로 이주하고 남부여라고 국호를 바꾸었다고 했다. 이 때에 북방 세력 후경 (侯景: 503-552년)이 경구(京口)을 점령하고,북제가 나타 났다. 후경에 점령 당했던 백제 수도 거발성은 남경시 가까이에 있었다. 그 때에 성왕이 수도를 잃고 소부리 (聖王移都所夫里)로 옮겼다. 소부리 또한 한반도가 아니라 더 남쪽 흑치상치가 살던 지나 지역에 있었다.
이혼란기를 양서에 석이예란하 (昔夷羿亂夏), 견융액주 (犬戎厄周) 라, 즉 [옛적에 왕검 조선의 주민 들이 우왕의 아들 개가 세운 하나라와 싸웠고, 서주를 괴롭 혔다]는 사실에 비유 했다.[24] 백익 살해 사건은 산해경을 비롯한 선진 문헌 여러 곳에 실렸다.
부여의 왕이 되었던 얼자 마여 (孽子麻余)의 후손이 양자강 하류 거발성에 살다가 더 남쪽으로 내려 가서 복건성에서 해남도에 이르는 지나(支那)라고 부르던 지역에 자리 잡았다. 그들이 동남아 해상원을 장악 했었다.
끝.
[1]. 三國志 夫餘傳: 夫餘本屬玄菟。漢末,公孫度雄張海東,威服外夷,夫餘王尉仇台更屬遼東。時句麗、鮮卑彊,度以夫餘在二虜之間,妻以宗女。尉仇台死,簡位居立。無適子,有孽子麻余。 其印文言「濊王之印」,國有故城名濊城,蓋本濊貊之地. 東明因都王夫餘之地
[2]. 三國史記: 移都於泗●一名所夫里。,國號南扶餘. 『後漢書』云:「三韓凡七十八國,百濟是其一國焉。」『北史』云:「百濟東極新羅,西南俱限大海,北際漢江,其都曰居拔城,又云固麻城,其外更有五方城。」『通典』云:「百濟南接新羅,北距&高麗高句麗,西限大海。」『舊唐書』云:「百濟,扶餘之別種,東北新羅,西渡海至越州,南渡海至倭,北&高麗高句麗,其王所居,有東西兩城。」『新唐書』云:「百濟西界越州,南倭,皆踰海,北高麗。三國遺事:百濟聖王二十六年戊午春。移都於泗泚。國號南扶餘。注曰。其地名所夫里。泗泚。今之古省津也。所夫里者。扶餘之別號也.至二十六世聖王移都所夫里,國號南扶餘
[3]. 晉書: 東倭重譯納貢,鮮卑名王,皆遣使來獻。天子歸美宰輔,又增帝封邑。是歲,扶南等二十一國、馬韓等十一國遣使來獻。 宣帝之平公孫氏也,其女王遣使至帶方朝見,其後貢聘不絕。及文帝作相,又數至。泰始初,遣使重譯入貢.
[4]. 宋書: 宋書 卷九十七列傳第五十七 夷蠻: 世祖大明六年,詔曰:「倭王世子興,奕世載忠,作籓外海,稟化寧境,恭修貢職。新嗣邊業,宜授爵號,可安東將軍、倭國王。」興死,弟武立,自稱使持節、都督倭百濟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七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國王。
[5]. 北史: 東明之後有仇台 漢遼東太守公孫度以女妻之,遂為東夷強國。初以百家濟,因號百濟。其國東極新羅,北接高句麗,西南俱限大海,東西四百五十里,南北九百餘里。其都曰居拔城,亦曰固麻城。其外更有五方:中方曰古沙城,東方曰得安城,南方曰久知下城,西方曰刀先城,北方曰熊津城。王姓餘氏,號「於羅瑕」,百姓呼為「鞬吉支」,夏言並王.王妻號「於陸」,夏言妃也 . 강희자전:《南史·百濟傳》百濟國號王所都城曰固麻,邑曰簷魯,如中國言郡縣也。
[6]. 三國遺事:北史云。百濟東極新羅。西南限大海。北際漢江。其郡曰居扶城。又云固麻城。其外更有五方城。乃作歌。歌亡未詳南扶餘前百濟北扶餘已見上扶餘郡者。前百濟王都也。或稱所夫里郡。按三國史記。百濟聖王二十六年戊午春。移都於泗泚。國號南扶餘. 泗泚扶餘江名
[7]. 通典 州郡十三 古荊州:有蠻中聚,即戎蠻子國,在今縣西南,俗謂之麻城。又漢光武封姬常為周承休公,故城在今縣東古荊州:麻城.即此地也,又孫堅大破董卓軍之所。百濟。其國東極新羅,北接高句麗,西南俱限大海,東西四百五十里,南北九百餘里。其都曰居拔城,亦曰固麻城。其外更有五方:中方曰古沙城,東方曰得安城,南方曰久知下城,西方曰刀先城,北方曰熊津城。王姓餘氏,號「於羅瑕」,百姓呼為「鞬吉支」,夏言並王.王妻號「於陸」,夏言妃也 . 강희자전:《南史·百濟傳》百濟國號王所都城曰固麻,邑曰簷魯,如中國言郡縣也。
[8]. 三國史記:使兼申胥之誠,國有楚、越之急. 百濟,全盛之時,強兵百萬,南侵吳、越.
[9]. 隋書: 開皇初別置廉城縣,尋及州、二郡相次並廢。十八年改縣曰木蘭。麻城梁置信安,又有北西陽縣。陳廢北西陽,置定州。後周改州曰亭州,又有建寧、陰平、定城三郡。有陰山。강희자전:《南史·百濟傳》百濟國號王所都城曰固麻,邑曰簷魯,如中國言郡縣也。
[10]. 通典 古南越:,尋及州、二郡相次並廢。改縣曰木蘭。麻城梁置信安,又有北西陽縣。陳廢北西陽,置定州。後周改州曰亭州,定城三郡。開皇初州郡並廢,十八年縣改名焉。有陰山。巴州今理化城縣。古巴國。宋末於嶺之南置歸化郡,即今郡是也。齊因之。梁置歸化、木蘭二郡
[11]. 大越史記全書:置桂林今廣西明貴縣是也、南海即今廣東、象郡即安南,以任囂為南海尉,趙佗為龍川令龍川,南海属縣,領謫徒兵五十萬人戍五嶺.蒼梧唐曰益州,古甌貉,我越之地、鬱林桂林郡,漢武更名、合浦秦象郡,廉州之屬郡、交趾、九真、日南秦象郡、珠崖、儋耳並在大海中九郡。自是漢始置刺史、太守。.初,帝之先世閩人或曰桂林人有名京者,來居天長即墨鄕
[12].晉書:鬱林郡秦置桂林郡,武帝更名. 晉書慕容垂:垂潛遣其桂林王慕容鎮、驃騎慕容國於黎陽津夜濟,壁于河南。通典:十六國前燕將慕容垂討丁零翟釗於滑臺,次於黎陽津 垂潛遣其桂林王慕容鎮、驍騎慕容國於黎陽津夜濟,壁於河南。桂林、南越之地,
[13]. 고운 (북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14]. 三國史記:高句麗來攻北鄙水谷城,陷之。王遣將拒之,不克。古記云:「百濟開國已來,未有以文字記事。至是,得博士高興,始有『書記』。」然高興未嘗顯於他書,不知其何許人也。
[15]. 梁書: 大戰。日鬥,下有拔城. 永康元年正月癸亥朔,日暈,三重。十月乙未,日闇,黃霧四塞。占曰:「不及三年,下有拔城大戰。」
[16]. 晉書: 漢靈帝光和中,倭國亂,相攻伐歷年,乃共立一女子卑彌呼為王。彌呼無夫婿,故國人立之. 齊建元中,除武持節、督倭、新羅、任那、伽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鎮東大將軍。
[17]. 晉書: 晉安郡太康三年置。統縣八. 原豐新羅宛平同安候官羅江晉安溫麻. 二年春正月辛丑,百濟、林邑王各遣使貢方物。二月,苻堅伐慕容桓於遼東,滅之
[18]. 資治通鑑: 識拔奇才,不拘微賤,隨能任使,皆獲其用。與敵對陳,陳,讀曰陣。好不經之舉,好,呼到翻。經,常也。開拔奇之津,津,江河濟渡之要,故以為喻.建州崇安縣南三十里。今崇安有山名武夷,相傳即神仙所宅。峰戀嚴壑,秀拔奇偉,清溪九曲,流出其間。兩崖絕壁,人迹所不到處,往往有枯查插石罅間,以庋舟船棺柩之屬。柩中遺骸,外列陶器,尚且未壞。夷俗所居,而漢祀者即其君長,蓋亦避世之士,生為眾所臣服,沒而傳以為仙也。武夷山中有道士
[19]. 朱子語類 外任 同安主簿: 亦不能得!又見崇安縣丞用淮西漕使印。」人傑. 维基百科自由的百科全书: 崇安陵是中国南北朝时文惠太子萧长懋的陵墓. 位于江苏丹阳市. 鎮江市:,簡稱鎮,古稱京口、位於江蘇省南部,長江南岸。梁書: 賊黨有欲自拔者,聞之咸止. 景至京口,將渡, 慮王質為梗 俄而質無故退,景聞之尚未信也,乃密遣覘之. 馬步三萬發自京口,直據鐘山.
[20]. dictionary :固麻: 固:堅也,一也,常也,故也,四塞也. 《南史·百濟傳》百濟國號王所都城曰固麻,邑曰簷魯,如中國言郡縣也。又《山海經》有壽麻國。晉師及秦師戰于麻隧。《註》秦地.
[21]. 宋明 廣韻:餘:殘也,䞉也,皆也,饒也,又姓晉有餘頠 晉卿韓宣子之後有名餘子者奔於齊號韓餘氏又傳餘氏本自傅說說旣爲相其後有留於傅巖者因號傅餘氏秦亂自淸河入吳漢興還本郡餘不還者曰傅氏今吳郡有之風俗通云吳公子夫摡奔楚其子在國以夫餘爲氏今百濟王夫餘氏也
[22]. 金樓子 雜記上:成湯誅獨木,管仲誅史符,呂望誅任卨,魏操誅文舉,孫策誅高岱,黃祖誅禰衡,晉相誅嵇康,漢宣誅楊惲,此豈關大盜者,深防政術,腹誹心謗,不可全也
[23]. 三國史記: 諱牟大或作摩牟摩帝。文周王弟昆支之子.靺鞨襲破漢山城,移都於泗●一名所夫里。國號南扶餘。冬十月,王不知梁京師有寇賊,遣使朝貢。使人旣至,見城闕荒毀,●號泣於端門外,行路見者,莫不灑淚。侯景聞之,大怒,執囚之。及景平,方得還國. 梁書:不知京師寇賊,猶遣使貢獻;既至,見城闕荒毀,並號慟涕泣.侯景怒,囚執之,及景平,方得還國。
[24]. 梁書:不知京師寇賊,猶遣使貢獻;既至,見城闕荒毀,並號慟涕泣.侯景怒,囚執之,及景平,方得還國。梁書:夫道不恆夷,運無常泰,斯則窮通有數。若乃侯景小豎,叛換本國”昔夷羿亂夏. 雖曰人事,抑乃天時。昔夷羿亂夏,犬戎厄周,漢則莽,晉則敦,玄構禍,方之羯賊,有逾 酷.
끝.
Revised September 2nd. 2022
백제 수도 거발성(居拔城)이란
백제는 542년 (梁大同七年) 남조 양나라에 사신을 보냈다. 당시 기록을 북방어에 능숙한 용서 이씨 이대사의 아들 이연수가 부친의 뒤를 이어 완성된 남북조시대 역사인 북사 (北史)에 백제의 수도는 거발성 (居拔城) 이다 혹 고마성 (固麻城) 이라고 한다.[1] 왕을 (於羅瑕) 백성들이 부르기는 건길지(鞬吉支)라 하고, 왕후를 어륙 (於陸) 이라 한다. 요동에 있던 공손도 를 찾아 갔던 고구려 왕자 발기가 양자강 하류에 정착 했다.[2] 발기(拔奇)가 살던 성이라 백제 수도 거발성 (居拔城) 이라 했다.[3] 발기란 이름이 손책 (孫策)활동기에 나타났다.
발성(拔城)이란 글자가 진서에 실렸다.[4] 그러나 진서 지리지에는 발성 (拔城)이 없다. 진안군(晉安郡)은 서진 시대에 신설하여 진 시대까지 존재했던 중국의 옛 군이다. 오늘의 복건성 의 복주(福州)의 지명인 진안구(晉安郡)에는 신라 (新羅) 온마(溫麻) 여덟게 현이 있었다.[5] 부견(苻堅)이 요동에서 모용환(慕容桓)을 파멸한 372년에 남쪽에서는 백제 임파왕(百濟, 林邑王)이 조공을 바쳤다. 진문제가 상으로 만들었다 (文帝作相) 는 비미호의 후손이 살던 곳이다. 중국 땅 월주(越州)에 있었다.
조위와 서진 시대에 나타나지 않았던 신라 백제(新羅, 百濟) 란 이름이 북방 세력에 밀려 강남으로 피란을 갔던 동진 말기에 복건성 이남 지역에 나타났다. 사마씨의 흥망을 기술한 진서에 실였다.
서진말기 291년(晉永康元年)에 발성(拔城)에서 큰 전쟁이 있었다. 국운이 쇠할 증조란 풀이를 했다. 서진 말기에 나타난 팔왕의 난(八王-亂)시작이다. 사마의(晉 高祖 宣帝 司馬懿, 179년 ~ 251년) 가 공손연을 토벌하고 비미호(倭)의 후손을 제상으로 임명 했던 발기의 후손이 살던 곳을 발성(拔城)이라 했다.[6] 당시 발성(拔城)은 강북에 있었다. 광개토 대왕 비문에 실린 발성(拔城)을 맡길 임자 임나(任那) 라고 했다. 그곳에 공손도 세력과 인척관계를 맺은 사람들이 남아 살던 곳이란 뜻에서 진유고씨 (陳留高氏) 라고 했다. 임나가라(任那加羅)의 발원지다.[7] 박사고흥이 백제 서기를 남겼다는 발해고씨의 발생지이도 하다.
이들이 강남으로 옮겨 갔다. 발기(拔奇) 친구 고대(高岱)를 죽였다는 기록이 오록 (吳錄)에 있고 강남에 발기진(拔奇津)이 나타났다.[8] 자치통감에 발기에 관한 설명에 장소를 숭안현이라 했다.[9] 남제서에 숭안능 (崇安陵)이 있다. 강소성 단양 (江苏丹阳市)에 발기가 정착 했었다.[10]
북송 시절에 만든 태평어람(太平御覽)에 북사 내용을 인용 하여 백제 (百濟)역사를 간략히 기록 했다. 삼국 사기 또한 북사 내용을 인용 했다.
다른 이름 고마성:굳을 고 삼 마 “固麻”라고 읽는 글자에 역사가 숨었다.[11] 고(固gù)자는 사방에 요새가 있는 성이란 뜻이다. 마(麻, mā )자는 북방 유목민을 뜻한 글자다. 상나라 말기에 부열의 후손 한 지류가 강남으로 쫒겨가 정착 했던 곳이다. 남아 있던 사람들이 夫餘씨를 택했다고 한다.[12]
삼국지 문소황후 견씨(文昭皇后 甄氏, 183년- 221년) 편에 황후가 눈문을 흘리면서 청하 면서 꼭 임지(任地)로 떠나 겠다다. 고청(固請)이라 했다.[13] 꼭 떠나겠다는 곳이 발해고씨가 남아 진을 치고 있었다. 한때 마부였던 자가 살던 곳이라 하여 어현(圉縣) 사람이라 부르던 원소의 외조카가 발해 고씨다. 병주 일대에 있었던 임나(任那)다.
거발성이 처음 기록된 남조 양(梁, 502년 ~ 557년)때 편술된 금루자 (金樓子)에 발기의 친구 고대를 손책이 죽였다는 기록이 있다.[14]
담노를 두 글자“檐鲁 簷魯” 로 썼다. 처마를 뜻한 옥담(屋檐) 의략자
지붕이 서로 붙은 길 도시를 뜻한 글자다. 음과 뜻을 살린 어휘가 [처마를 뜻한 옥담(屋檐),길 로(路) ,담벽, 담장, 덕수궁 돌담길]하는 표현이다.
용서이씨 이연수 (李延壽;?-?년)는 부친 이대사(李大師; 570年-628年 ) 의 유업을 이어 받아 남북조 시대(439년 – 589년)의 송(宋)나라, 제(齊) 나라, 양(梁)나라, 진(陳)나라의 역사인 남사(南史)와, 북조 역사서인 북위, 서위, 동위, 북제, 수나라의 역사를 서술 했다 . 그의 역사서는 다른 사서 에는 볼수 없는 내용도 여러 곳에 보인다.
거발성이 함락되었던 시기는 동이의 강국을 이루었던 부여씨의 전성기 였다. 양 태청삼년(梁太清三年;550년)에 점령 당했던 백제 수도 거발성은 강하류에 있었다. 그 지역에 남방불교가 성했다.
해양권을 장악 했던 부여씨가 담로의 하나였던 대동강 하구에 한성(漢城) 을 수도로 정하고 있던 개로왕이 고구려 장수왕의 급습으로 살해되였다. 이러한 비보를 듣고 열도에서 돌아와 혼란기를 수습라던 곤지의 아들 동성왕(東城王: 479년~501년) 이 다스렸다. 그의 뒤를 이었던 백제 25대 무녕왕 (武寧王,재위: 501년 – 523년)의 아들의 성왕(聖王, ? ~ 554년) 시절에 거발성이 함락 되었다.[15] 거발성을 빼았은 승자는 알려지지 않았다 후경의 난이란 문구가 양서와 백제 본기에 실렸다.
후경(侯景, ? ~ 552년)은 갈족(羯族) 으로 북제를 세원던 발해 고씨와 같이 북위(北魏) 동위(東魏)의 장군이었다. 같은 동위의 장군이었던 고양 (高洋)이 선양 받아 업(鄴)수도를 정하여 북제(北齊, 550년 ~ 577년)가 나타났다. 부여씨의 후손이 강남으로 내려가 정착 했던 곳에서 중원의 부여(夫餘)씨가 나타 났다.[16] 북제 이전 부터 왜오왕이 다스렸다는 여섯 나라 “倭、新羅、任那、伽羅、秦韓、慕韓六國”가 양자강 하류에 부여 가라 신라가 있었다. 백제 거발성을 점령 했던 북방세력 장군이 양서에 후경 열전에 실렸다.[17]
양서의 저자는 이 전환기를 백의 추종자들이 하의 세력에 밀렸고, 그 곳의 원주민이 서주를 괴롭 혔다(昔夷羿亂夏, 犬戎厄周)다라고 비유 했다.
끝.
[1]. 梁書: 東明之後有仇台,晉世句驪既略有遼東,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地矣,自置百濟郡. 號所治城曰固麻,謂邑曰簷魯,如中國之言郡縣也。其國有二十二簷魯,皆以子弟宗族分據之。其人形長,衣服凈潔。其國近倭,頗有文身者。今言語服章略與高驪同。呼帽曰冠,襦曰復衫,褲曰褌。其言參諸夏,亦秦、韓之遺俗云。中大通六年、大同七年,累遣使獻方物;并請《涅盤》等經義、《毛詩》博士,並工匠、畫師等,敕並給之。太清三年,不知京師寇賊,猶遣使貢獻;既至,見城闕荒毀,並號慟涕泣。侯景怒,囚執之,及景平,方得還國。
[2]. 三國志 策傳:吳錄曰:時有高岱者.岱字孔文,吳郡人也。受性聦達,輕財貴義。其友士拔奇,取於未顯,所友八人,皆世之英偉也。金樓子 雜記上: 魏操誅文舉,孫策誅高岱,晉相誅嵇康.
[3]. 北史: 東明之後有仇台,篤於仁信,始立國於帶方故地。漢遼東太守公孫度以女妻之,遂為東夷強國。初以百家濟,因號百濟。其國東極新羅,北接高句麗,西南俱限大海,處小海南,東西四百五十里,南北九百餘里。其都曰居拔城,亦曰固麻城。其外更有五方:中方曰古沙城,東方曰得安城,南方曰久知下城,西方曰刀先城,北方曰熊津城。王姓餘氏,號「於羅瑕」,百姓呼為「鞬吉支」,夏言並王也。王妻號「於陸」,夏言妃也
[4]. 晉書:大戰。日鬥,下有拔城。日戴者,形如直狀,其上微起,在日上為戴。戴者,德也,國有喜也。永康元年正月,日暈,三重。十月乙未,日闇,黃霧四塞。占曰:「不及三年,下有拔城大戰。」十二月庚戌,日中有黑氣。京房《易傳》曰:「祭天不順茲謂逆,厥異日中有黑氣。
[5]. 晉書: 晉安郡太康三年置。統縣八. 原豐新羅宛平同安候官羅江晉安溫麻. 二年春正月辛丑,百濟、林邑王各遣使貢方物。二月,苻堅伐慕容桓於遼東,滅之
[6]. 晉書: 東倭重譯納貢,鮮卑名王,皆遣使來獻。天子歸美宰輔,又增帝封邑。是歲,扶南等二十一國、馬韓等十一國遣使來獻。 宣帝之平公孫氏也,其女王遣使至帶方朝見,其後貢聘不絕。及文帝作相,又數至。泰始初,遣使重譯入貢.
[7]. 北史: 東明之後有仇台,篤於仁信,始立國於帶方故地。漢遼東太守公孫度以女妻之,遂為東夷強國。初以百家濟,因號百濟。其國東極新羅,北接高句麗,西南俱限大海,處小海南,東西四百五十里,南北九百餘里。其都曰居拔城,亦曰固麻城。其外更有五方:中方曰古沙城,東方曰得安城,南方曰久知下城,西方曰刀先城,北方曰熊津城。王姓餘氏,號「於羅瑕」,百姓呼為「鞬吉支」,夏言並王也。王妻號「於陸」,夏言妃也
[8].三國志:吳錄曰:時有高岱者. 岱字孔文,吳郡人也。受性聦達,輕財貴義。其友士拔奇,取於未顯,所友八人,皆世之英偉也。
[9].資治通鑑: 識拔奇才,不拘微賤,隨能任使,皆獲其用。與敵對陳,陳,讀曰陣。好不經之舉,好,呼到翻。經,常也。開拔奇之津,津,江河濟渡之要,故以為喻.建州崇安縣南三十里。今崇安有山名武夷,相傳即神仙所宅。峰戀嚴壑,秀拔奇偉,清溪九曲,流出其間。兩崖絕壁,人迹所不到處,往往有枯查插石罅間,以庋舟船棺柩之屬。柩中遺骸,外列陶器,尚且未壞。夷俗所居,而漢祀者即其君長,蓋亦避世之士,生為眾所臣服,沒而傳以為仙也。武夷山中有道士
[10].朱子語類 外任 同安主簿: 亦不能得!又見崇安縣丞用淮西漕使印。」人傑. 维基百科自由的百科全书: 崇安陵是中国南北朝时文惠太子萧长懋的陵墓. 位于江苏丹阳市.
[11]. dictionary:固麻: 固:堅也,一也,常也,故也,四塞也. 《南史·百濟傳》百濟國號王所都城曰固麻,邑曰簷魯,如中國言郡縣也。又《山海經》有壽麻國。晉師及秦師戰于麻隧。《註》秦地
[12]. 宋明 廣韻:餘:殘也,䞉也,皆也,饒也,又姓晉有餘頠 晉卿韓宣子之後有名餘子者奔於齊號韓餘氏又傳餘氏本自傅說說旣爲相其後有留於傅巖者因號傅餘氏秦亂自淸河入吳漢興還本郡餘不還者曰傅氏今吳郡有之風俗通云吳公子夫摡奔楚其子在國以夫餘爲氏今百濟王夫餘氏也
[13]. 三國志 文昭甄皇后:袁紹為中子熈納之。熈出為幽州,后留養姑。及兾州平,文帝納后於鄴,有寵,生明帝及東鄉公主. 帝曰:「任性狷急不婉順,前後忿吾非一,是以遣之耳。」后流涕固請曰:「妾受敬遇之恩,衆人所知,必謂任之出,是妾之由。
[14]. 金樓子 雜記上:成湯誅獨木,管仲誅史符,呂望誅任卨,魏操誅文舉,孫策誅高岱,黃祖誅禰衡,晉相誅嵇康,漢宣誅楊惲,此豈關大盜者,深防政術,腹誹心謗,不可全也
[15]. 三國史記 百濟本紀第四: ,諱牟大或作摩牟摩帝。文周王弟昆支之子.靺鞨襲破漢山城,移都於泗●一名所夫里。,國號南扶餘。冬十月,王不知梁京師有寇賊,遣使朝貢。使人旣至,見城闕荒毀,●號泣於端門外,行路見者,莫不灑淚。侯景聞之,大怒,執囚之。及景平,方得還國. 梁書:太清三年,不知京師寇賊,猶遣使貢獻;既至,見城闕荒毀,並號慟涕泣.侯景怒,囚執之,及景平,方得還國。
和帝中興辛巳已上為上古已下為中古第二十五虎寧王名斯摩即東城第二子
炤知一云毗處。麻立干立,慈悲王長子:十五年春三月,百濟王牟大遣使請婚,王以伊伐飡比智女送之。將軍實竹等與高勾麗戰薩水之原,不克,退保犬牙城。高勾麗兵圍之,百濟王牟大遣兵三千救觧圍。
[16]. 宋明 廣韻:餘:殘也,䞉也,皆也,饒也,又姓晉有餘頠 晉卿韓宣子之後有名餘子者奔於齊號韓餘氏又傳餘氏本自傅說說旣爲相其後有留於傅巖者因號傅餘氏秦亂自淸河入吳漢興還本郡餘不還者曰傅氏今吳郡有之風俗通云吳公子夫摡奔楚其子在國以夫餘爲氏今百濟王夫餘氏也
[17]. 梁書 侯景: 朔方人,或云鴈門人,臣昔與魏丞相高王並肩戮力,共平災釁,扶危戴主,史臣曰。昔夷羿亂夏,犬戎厄周,漢則莽、卓流災,晉則敦、玄構禍,方之羯賊,有逾其酷,悲夫.
끝
The original was in the face book: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