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진전 (弁辰傳)-추가: 임나 일본부설의 발생지
변진전에 다른 지역이 임나 일본부설의 발생지다. 이 문제는
임나 일본부설의 핵심이 되는 광개토왕릉비의 신묘(391)년 조는 모든 사료와 지리지형을 감안 하여 풀이 해야 한다:
필자는광개토왕릉비문에 실린 격전지가 한반도가 아니라 남만주에서 발해-요동만 연안이라고 고증 했다.
일본 학자들은 비문의신묘(391)년조를 근거로 제시한다. 이는 옛적에 사용하던 지명과 글자 이(而, 以)를 잘못 풀이한 결과 라고 논증 했다. 이를 요야하여 다시 설명한다.
지명: 帶方, 襄平, 富山, 鹽水上은 모두 발해만 서안에 있었다.
帶方은 공손도가 낙랑 남쪽 일부를 잘라 새로帶方郡을 만들었다는 곳으로 비류가 세운 백제의 서쪽 수도가 있던 곳이다.
襄平은 사마천이 새로 만든 글자로 고조선의 수도 평양(平壤)을 은패한 글자다. 연나라 장성이 동쪽에서 끝났다고 한 오늘의 당산 일대다:
“燕亦筑長城,自造陽至襄平”
富山은 고구려 신대왕(新大王, 재위 165년~179년) 5년에 현토 태수 공손도를 도와 부산(富山)에 숨은 적을 섬멸했다는 곳으로 이라고 본다 .
鹽水上이란 표현은 염전(鹽田, Salt Farm)이 성행 하던 곳으란 뜻으로 발해만 서쪽 연안을 뜻한다.
한 무제 때 에 남여가 피란민을 대리고 와서 창해군이 생겼던 곳이다. 삼한(三韓)의 후예 피난민이 살던 곳에서 “왜, 가야 연맹, 대륙백제가 나타 났다. 진수는 그들을 汗人 한국(汗國)이라 했자. 이를 후한서에는 왜인(倭人) 왜국(倭國)이라고 바꾸어 적었다.
옛적에 사용하던 지명과 글자 이(而, 以)를 잘못 풀:
한일간의 역사 논쟁에서 일본 사람들이 “한반도 남단을 지배했었다”고 주장하는 중요한 사료가 신묘년 조에 나오는 이왜이 (而倭以)란 문구다. 모두들 “이로 발음 하는 而, 以”자 풀이가 문제다. 문제가 되는 이왜이 (而倭以)의 이(而)자는 형용사로 “편안할 능, 능숙한 능”의 뜻이고, 이(以)자를 “다스리다. 거느리다, 쓸용用,使用…을 이용하여” 하는 뜻으로 사용한 흔적이 삼국지 한예전 (韓濊傳) 에도 보인다. 비문에는 또한 지금도 한국 말에 쓰이는 이후 또는 이래(以後, 以來) 하는 글자를 쓰기도 했다 .
특히 이(而)자는 글자 풀이의 새로운 학설이다 . 설문해자에서는 이 글자의 원 뜻이 턱수염의 모형 글자(象形)라고 했다 . 한자 문화권에서 한국만이 이 글자를 “편안할 능, 능히 능”이라고 풀이 했다는 근거가 “Daum 한자 사전” 에 실려 있다. 글자의 내력을 살펴 보면 “여유 있고 능력 있는 융족의 지도자, 너/당신(猶)이라 쓰던 뜻”에서 유래된 글자다. 이 글자는 논어(論語)에 많이 쓰였다. 흔히 인용하던 “사십이 불혹 (四十而不惑)은 나이 사십이 되니 능히(能) 불혹이라”는 뜻이다. 논어 학이(學而) 편은 마땅히 학능(學能)이란 뜻으로 풀이 된다. 이렇게 “능히 능”자라고 풀이 하면, 논어를 비롯한 여러 선진시대 고전의 본문이 자연 스럽게 풀려 나간다 .
이 글자(而)가 비문 몇 곳에 쓰이였다. 이를 “편안할 능, 능할 능 (能)”으로 읽으면 풀이가 부드럽다. 생능유성덕 (生而有聖德)이라 “날때 부터 천부의 능력을 타고 났고 성덕이 있었다”는 뜻이다. 삼국사기에서도 광개토왕 출생을 같은 “능할 능자 (生而雄偉)로 묘사” 했다. 대왕이 전쟁에 승리하여 돌아 왔다는 문구 끝에 전렵능환 (田獵而還)이라 했다. 쫒겨 온게 아니라 사냥도 하면서 편안한 마음으로 돌아 왔다는 뜻이다. 고구려가 신라를 신민같이 받아드리고(新羅以爲臣民) 난 후에, 대왕이 순행하여 남쪽으로 내려가 평양에 이르니 신라왕이 아무런 두려움 없이(而) 사신을 보내 협조를 요구 했다는 표현을 “巡下平穰而新羅遣使”라고 새겨 넣었다.
다음은 비문에서 제일 문제시 되는 원문구절이다: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 渡海 破百殘□□新羅 以爲臣民.
비문 전체를 보면, 첫 면“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 까지는 대왕의 업적을 종합하여 실었다. 이 문구는 한글 어순의 문장이라,“백제와 신라는 永樂五年 부터 속민이였다. 그래서(由) 매년 와서(來) (고구려에)조공을 바첬다” 는 뜻이다.
그 뒤 “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新羅以爲臣民”부터는, 대왕이 그렇게 공을 세운 자초지종을 설명 했다. 이 문구를 일본 사람들이 풀이한 대로 “신묘년(대왕 원년, 391년)부터 지금까지 (年來) 왜가 바다를 건너와 (渡海), 백잔을 깨트리고, 신라를 신민(臣民)으로 삼았다”로 풀이 하면, 다음 문구부터 자세한 업적을 설명한 내용과는 문맥이 맞지 않아요. 어찌 하여 일본 사람들이 정벌한 백제(百殘)를 광개토대왕이 오랜 시간을 두고 공격하여 백제(百殘)왕의 항복을 받고 백제의 각료들을 인질로 잡아 고구려로 돌아 갔는데, 백제(百殘)의 상관이 였서야 할 왜 (倭)는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았나요? 어느 누가 조상의 업적을 기리는 비문에 숙적으로 싸우던 집안의 업적을 새겨 넣겠습니까? 앞뒤가 맞지 않는 풀이 입니다.
백잔과 신라 사이에 두 글자가 손실되여 분명치는 않으나, 신라 부터는 다른 문구로 봄이 타당 하다. 앞에서 설명한 능(而)자와 여기 나오는 이위(以爲)는 논어에 실린 “온고능지신 (溫故而知新)하면 가위사이여 (可以為師矣)라는 문구에서와 같은 용도”로 썼다 . 하여, 그 다음 문구는 “신라가 고구려의 시민이 되였다고 생각 해서 (以為) 그들을 써서 (以) 대왕 6년에는 ….”하는 뜻으로 풀이된다.
문제의 문구는 “능왜이 신묘년 래(而倭以辛卯年來)로 읽어, 연래(年來)을 “xx년 부터 계속하여”란 숙어로 풀이 하지 말고, 두 글자를 떼여 순서 대로 풀이 해야 한다. 그 전의 전쟁에서 얻어온 왜인 포로 중에 바다에서 배를 잘 다를 수 있는 제능(才能)이 있는 자들(而)이 드디어 “신묘년 (年)에 대왕의 군영에 와서 (來)” 이들을 사공으로 사용(以)하여 노를 젓는 배를 타고 고구려 군사가 바다를 건너 발해만 동남쪽 요동 반도 끝에 이르러 백제가 가장 중요시 하던 통상로에 있는 성을 함락 했다는 뜻이다. 이 사실이 삼국사기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대왕 원년 겨울 10월에 백제의 관미성(關彌城)을 쳐서 함락 시켰다. 그 성은 사방이 험준하고 바닷물에 둘러 싸여서 왕은 군사를 일곱 갈래로 나누어 공격 한지 20일 만에야 함락 시켰다”고 했다 .
고 본다.
야생 동물의 싸움에서와 같이, 강적을 공격할 때는 적의 주 무기를 해소 시킴이 급선무다. 대왕은 그러한 작전을 펴서 성공 했다. 발해만을 지나 한반도 끝까지 살펴보아도 이 설명에 합당한 지형은 없다. 관미성은 요동 반도 끝에 있던 요새가 분명 하다.
그후에도 왜와 백제는 사력을 다해 계속 고구려에 덤벼 들었지만, 이빠진 호랑이 였다. 삼국사기에는 이 전쟁 통에 고구려와 백제에 살던 사람들이 신라로 피란을 가서 신라가 갑짜기 커젔다고 했다 . 결국 백제와 왜는 고구려에 패망하여 남만주를 떠나 뱃길로 한 줄기는 산동 반도를 지나 중국 동해안으로, 또한 줄기는 한반도 서해 연안을 따라 남쪽 바다로 내려 갔다 . 이들이 요동만과 황해를 처음으로 횅단 했다고 본다. 그 중에 신라가 제일 마지막으로 500년경에 남만주를 떠나 한반도 동남 해안 지역으로 수도를 옮겼다.
끝,
June 7, 2017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