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 대표님 그리고 이강산 님:
옳은 말씀입니다. 그래야 학문은 발전 합니다. 그래서 학문하는 사람은 여러분들의 의견을 듣고자 하여 책을 출판하고 논문을 씁니다.
저가 짧은 한마디 한마디로 회답한 이유는, 두 영문본에 이어 이번 한글본, 그리고 “한사모 website Face Book”에 몇차래 올렸기 때문입니다.
저의 글 내용이 너무나 상상 밖이라 여러분들이 눈여겨 보시지 못한듯 합니다.
옛적에는 함곡관이 좁아 황하수가 미처 빠지지 못해, 함곡관 서쪽은 거꾸로 흐르는 역수로 수해가 심하고 택지가 넓었다. 이곳이 옛 九州다. 洪範九疇의 출처 다. 이 물목을 넗힌 사람이 절대 다수의 존경을 받던 우왕, 단군 왕검이다. 이 일대가 단군조선의 발생지로 뒤에는 “고구려, 부여, 숙신”라는 이름을 쓰는 여러 부족의 먼 선조가 살았다.
이 당시 우왕을 도와준 사람들의 이름을 산 언덕 (積石山?) 돌 위에 이름을 새겼다 하여 황하 유역에 갈석산(碣石山)이 있었다는 예기를 한다.
“呂氏春秋 慎行論 求人: 堯傳天下於舜,禮之諸侯。伊尹,庖廚之臣也;
傅說,殷之胥靡也。皆上相天子,至賤也。禹東至榑木之地,九津、青羌之野,
攢樹之所,北至人正之國,夏海之窮,衡山之上,犬戎之國,夸父之野,禺彊之所,積水、積石之山。得陶、化益、真窺、橫革、之交五人佐禹,故功績銘乎金石,著於盤盂.” “呂氏春秋求人篇云「功績銘乎金石,著於盤盂」, 高注云「金,鍾鼎也;石,豐碑也。盤盂之器,皆銘其功。”
사기 하 본기와 소진열전에 나온다.
“史記 列傳 蘇秦列傳: 去游燕. 南有碣石、鴈門之饒,北有棗栗之利”
옛적에 연은 산서성 해지 북쪽 으슥한 곳(幽州)에 있었다.
史記 本紀 夏本紀: 鳥夷皮服。夾右碣石,入于海。入于海는入于解池란 뜻이다.
해지 연안에 있는 회계라는 곳에 단군왕검 (우왕)이 묻혔다.
論衡 偶會: 鴈鵠集於會稽,去避碣石之寒. 禹葬會稽. 避熱北去,復之碣石。象耕靈陵.
치수에 성공하고 새운 단군조선의 첫 수도 평양(平壤)이 산서성 서남쪽 해지(解池) 동북연안에 있었다. 이를 중국 문헌에는 평양(平陽)이라 했다. 분수를 따라 동북으로 올라와 북경 서남쪽에서 발해만 연안으로 나와 상나라 유민을 만났다. 이 경로에 삼국유사에 실린 고조선의 세 수도 가 있었다고 풀이 했다.
“汾水可以灌安邑,絳水可以灌平陽” “頹唐城, 唐都, 弓(一作方)忽山”
해지 연안 평양 가까이에 산성이 있었다. 이 산성을 한국 역사에서는 왕검성이라 하고 중국기록(易經 ䷜坎)에는 왕공이 나라를 방어하기 위하여 쌓았다고 했다.
“習坎,重險也。水流而不盈,行險而不失其信。維心亨,乃以剛中也。行有尚,往有功也。天險不可升也,地險山川丘陵也,王公設險以守其國,坎之時用大矣”
서주 초기에 왕 공(王公)이란 칭호는 없었다. 이를 선인 (仙人)으로 취급했다.
중국과는 달리 고조선의 후예들은 수도 가까이 산성을 갖고 그곳으로 피난을 갔다.
이 곳에서 노예로 일하던 사람을 상 무정(武丁, 기원전1250-1192년)이 부암 (傅巖) 에서 노예로 일하던 사람을 등용하여 상의 중흥을 이르켰다고 하여 부암에서 구한 즐거움 이란 뜻의 부열 (Buyuel傅說) 이란 이름을 주었다. 그가 기자의 먼 조상이다. 기자를 따라 고조선 땅에 온 상 유민들이 그들의 옛 조상 이름을 따서 그들이 살던 곳을 부여라 했다. 그가 부여의 어원이다. 유가에서는 기자가 무왕의 호의를 차버리고 도망 갔다하여 나뿐 사람(수미 Xumi胥靡) 으로 평하여, 부암에서 얻은 즐거움에 반대되는 “죄인을 얻은 즐거움, 죄인 조언자 adviser”라는 뜻이 “수여, 또는 수유, 서여, Xuyu/Suyu 胥餘”라는 별명을 붙였고, 이를 부족 이름으로도 사용 되였다고 두 영문본에서 부여의 어원을 밝혔다. 箕子가 한 말이 한글 어순이라는 설명도 했다. “且吾聞箕子見唐叔之初封,曰『其後必當(唐)大矣』”
글자를 보면 필당(必當)중 한 글자는 필요 없는 글자(衍字)다.
이번에 한글본을 쓰다보니 “부암(傅巖)에서 노예로 일하던 곳”이 해지 유역이 분명하고 그 일대에 숙신씨가 살았고 다리가 긴 사람(長), Totem과 같은 목각을 새웠고, 불함산(不咸山)이 그 가까이에 있었다.
“大荒之中,有山名曰不咸。有肅慎氏之國”“長股之國在雄常北,被髮。一曰長腳”
우왕의 아버지(鯀)와도 관계가 깊은 곳이다. “有榆山。有鯀攻程州之山”
그 일대에 동호도 있고 맥국 “東胡在大澤東” “貊國在漢水東北”
산해경 (山海經 )에는 조선이 두 곳에 있다. 해내경 (海內經) 첫 구절에 조선을 설명 했고 끝 구절에 우왕 치수성공을 실었다. 같은 사람이란 뜻이다.
천독(天毒)의 독자는 글자가 비슷하다는 이유로 그 본 뜻을 숨긴 글자다.
“ 東海之內,北海之隅,有國名曰朝鮮、天毒,其人水居,偎人愛人”
“洪水滔天。鯀竊帝之息壤以堙洪水,不待帝命。帝令祝融殺鯀于羽郊。鯀復生禹。帝乃命禹卒布土以定九州。”
본 뜻은 천시(天)하늘에 떠 있는 햇님의 자손이란 뜻이 있는 천해 (天xié xī xí/; 해, 巂,,,)를 뜻한다.
“酅說文東海之邑一曰阪險名通作巂姓也一曰闖梁四公子名或作纗說文維網中繩或作”
단군 왕검 우왕을 휴자(攜子)라고도 기록 했다. 이를 중국사람들은 순 임금이 “아들 손을 잡고”라 풀이 했다. 장자 양왕(莊子 讓王)편에 있다:
舜以天下讓其友石戶之農,石戶之農曰:「捲捲乎后之為人,葆力之士也。」
以舜之德為未至也,於是夫負妻戴,攜子以入於海,終身不反也。
“入於海”는 “入於解”로 해지로 갔다는 뜻이다. 단군왕검에게 선양을 했다. 이를 중국 이록에는 우 임금에게 선양 했다고 한다.
“동쪽 바다(염호, 해지)안쪽에 북쪽 호숫 가에 조선”이란 나라가 있었다.
당산 쪽으로 옮겨와 기자를 따라온 상 유민을 만났던 때의 조선은 해내 북경에 있다.
山海經 海內北經: 朝鮮在列陽東,海北山南。列陽屬燕。
“大荒之中,有山名曰不咸。有肅慎氏之國”
“有榆山。有鯀攻程州之山” “有胡不與之國,烈姓,黍食”
그 지역에 살던 사람들이 활과 화살을 개발한 부족 이라고 순자에 있다.
“荀子:倕作弓,浮游作矢,而羿精於射;奚仲作車,乘杜作乘馬”
이 부유(浮游,fú yóu)라는 부족이 분수를 따라 승덕 적봉일대에 자리잡아 그들을 산해경에서 “山海經 大荒北經: 有胡不與之國,烈姓,黍食”라한 또하나의 부여 라 본다. 이들이 삼국지 한전에 나오는 부여 (不與)라 본다.
해지연안에 단군조선 발생지에 있던 부여족의 일부가 상 무정때에 하북평원에 내려가 상나라의 중흥을 이르키고 상 왕실을 보좌하며 살다가, 상 나라가 망하자 발해만 서아느로 올라 왔다. 부여의 다른 부족은 분수를 따라 흥안령일데에 올라와 다른 부족 국가를 이루어 두 부류의 부여가 나타났다고 본다.
“鮮卑自為冒頓所破,遠竄遼東塞外,不與餘國爭衡,未有名通於漢”
“因冒姓韓氏。準王海中,不與朝鮮相往來。其後絕滅”
“其俗,語不與中國同,及羌雜胡同”
이들이 발해만에서 한반도 서해를 따라 뱃길로 내려와 강화도 마니산에 첨성단을 쌓았다. 필자가 실은 “강화도 (江華島)의 어원”을 참조 바람.
“又有州胡在馬韓之西海中大島上,其人差短小,言語不與韓同”
강화도는 중원 냄새가 짙은 이름이라 “마니섬”으로 한각을 한강(韓江) 서울을 옛적에 한성(漢城)이라 하던 글자를 한(韓城)으로 바꾸는 길이 동북공정에 대은 하는 첫 길이라 했다.
기자를 따라 고조선 땅에들어온 부열의 후손은 산해관을 거처 조양 동쪽에 있는 의무려산 일대에 자리잡아 그들이 사는 고을을 “북쪽에 자리잡고 사는 상나라 유민들”이란 뜻이 있다. 현도군의 고구려현, 西蓋馬현과 같이 있었다.
“玄菟郡,戶四萬五千六, :高句驪,上殷台,西蓋馬”
여기서 부여와 고구려 건국에 나오는 “ 해모수 해부루”하는이름이 나왔고, 모계 쪽은 치수사업에 성공한 우왕의 후손이라 하여 모하백여랑(母河伯女郞) 이라 했다.
주몽의 어머니와 주몽은 모두 오늘의 요하 서쪽에서 왔다.
의무려산에 살다가 약간 북쪽으로 밀려가 나라를 세었다하여 북부여라 하고, 북 부여의 동쪽이란 뜻에서 “주몽의 어머니가 동부여 운 운 ”하는 예기가 나왔다.
하여 부여의 사람들은 자기들은 도망온 사람들(亡人)이라 했습니다
“國之耆老自說古之亡人。作城柵皆員”
“其印文言「濊王之印」,國有故城名濊城,蓋本濊貊之地,而夫餘王其中,自謂「亡人」,抑有似也。魏畧曰:舊志又言,昔北方有高離之國者”
부여의 마지막 수도가 요양, 이를 평양성이라 했다. 이곳이 고구려와 백제가 부여의 종주권을 놓고 싸우다 백제는 망하고, 어부지리로 남만주에 있던 신라가 성장”했다.
갈길이 멀어 두서없이 적었습니다.
자새한 내용은 저가 Face Book에 올린 내용과,
저의https://www.ancienthistoryofkorea.com/삼한 (三韓)의 후예 (後裔)들/
를 보아 주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이틀전, 11월 10일 날자로 실은 저의 “6-1. 춘추시대 (기원전 770- 403년) 전기 제 환공과 관자”를 보아 주시기 바랍니다.
November 22, 2016
모솔, 드림.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