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扶餘)의 어원:
전국시대 이전에도 사마천이 부여(夫餘)라고 불렀던 부족은 있었서야 한다. 이를 필자는 첫 영문본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Chapter 9. Trail of Gija Clan 箕子族” 에서 <상나라의 제23대 왕 무정(武丁, 高宗: 기원전 1250년 -기원전 1192년)이 산서성 해지 연안 부암(傅巖,不咸山)에서 노예로 성을 쌓던 사람을 찾은 즐거움이라 하여 그에게 부열(Buyuel傅說. 傅說 Fùyuè )이란 별명을 주었다. 그를 등용하여 상나라는 크게 번성했다. 부열의 후손들이 상나라 서울 근교에 살면서 높은 직책을 맡았다. 마지막 제상을 지냈던 부열의 후손이 기자(箕子) 였다. 상나라가 망하자 피난민들은 기자(箕子)를 따라서 기원전 1046년경에 천진-당산 일대에 무능한 단군이 다스리던 조선 땅으로 올라와 살았다. 그 난민 수용소에 옛 고향 이름을 붙여 부여(傅說 Fùyuè)이 부여(扶餘)의 어원 이라고 풀이 했다 . 어떻게 부암에서 구한 즐거움(傅說;Buyuel/ Fùyuè)이라 했던 글자에서 부여(夫餘, 扶餘)란 나라 이름이 나왔나 하는 답이 북송(北宋; 1007년-1008년)시대에 편찬 된 광운 (廣韻)에 있다 . 부여씨(傅餘氏)를 설명 하며 나타난 세 복합글자 “傅, 說, 餘” 에는 이해 할수 없는 설명을 했다:
이 있다. 옛적에 산서성에 있던 제후국 진(晉)나라에 여외/위(餘頠)란 성씨가 있었다. 그 지역에 있던 한선자(韓宣子) 의 후손에 여자(餘子)가 있었는데, 그가 제(齊)나라로 도망을 가서 한여씨(韓餘氏)가 되였다. 두세글자 성씨로 여문중(餘文仲) 양여 (梁餘) 부여(夫餘)가 있다. 또 부여씨 (傳餘氏)는 옛적에 부열에서 나왔다는 설(傅說說)이 있다. 모두 제상(相)을 지냈다. 그후에 부암(傅巖)에 남아 있던(餘) 자들 만이 부여씨라고 불렀다(號傅餘氏). 진한 시대의 혼란기에 본향으로 돌아간 자는 여씨(餘)가 되였고, 돌아 가지 못한 자를 부씨(傅氏)라 했다. 그들이 오군(吳郡)에 있는 부씨(傅氏)성씨다. 오공자 부개 (吳公子夫摡)가 초(楚)나라로 도망을 가서 그 후손이 부여(夫餘)가 되였다. 그 성이 당시(今)백제왕 부여씨 (百濟王夫餘氏)다 . 산서성 해지 연안 부암(傅巖)에서 중원으로 나온 부열(傅說)의 후손이 부여(夫餘) 란 이름이 되였다. 또한 부여씨 (夫餘氏)는 하씨(何氏) 한씨(韓), 여(餘)씨, 양씨(梁) 부씨 (傅,夫,否, 溥 등등)와 같이 모두가 같은 혈통으로 산서성 해지 연안 (晉)이 본향이란 뜻이다.
Another smoking gun(今百濟王夫餘氏)
또 하나 흥미로운 사실은, 부여가 수나라 초기 까지 중국 대륙에 있었다는 결정적 증거가 당백제왕부여씨(今百濟王夫餘氏)란 문구다. 글자 대로 풀이 하면,
백제왕부여씨(夫餘氏)가 새운 대륙백제의 일부가 송나라 학자들이 1008년에
광운(廣韻)을 편찬 한 때 까지 양자강 일대에 있었다는 증거다. 아니면 운서의 시발점이 되는 수(隋)나라 때 편찬한 절운 (切韻)에 실린 내용을 인용 했다고 풀이 하더라도 백제왕 부여씨가 육법언(陸法言)이 절운을 발표한 601년에 백제는 중원 땅에 있었다. 주서(周書)에는 대륙백제가 577년경에도 양자강 하구에 (據江左) 있었다는 묘한 기록을 남겼다 . 남제서(南齊書 )에는 495년 (建武二年)에 대륙백제가 동위(東魏) 세력을 발해만 연안에서 대파 했다는 기록이 있다 .
이를 종합해 보면, 공손연 멸망이후 진대(晉代)에는 번작위를 받아 (중원 땅에) 백제군(百濟郡)을 다스렸고,동진 시절에는 망강한 세력이였다. 수나라가 고구려를 침략하려 계획할 때에 백제가 도와 주겠다고 했지만 수나라는 백제가 딴 마음을 먹지 않았나 의심스러워 받아 드리지 않았다> 는 기록은 백제가 양자강 하구에 있었다는 확실한 사료다 . 이문제는 앞서 대륙백제 편에서 다루었다.
앞에서 인용한 상서정의 우공 (尚書正義卷第六) 편에, “차주제도 부열경계; 此州帝都不說境界,以餘州所至則可知”라, 즉 갈석산 북쪽에 ‘중국 구주 이외에 또 다른 하나의 주가 있었는데’ 하는 기록이 있다. 상나라 유민들이 북주의 수도에 많이 살면서 그들의 선조 부열(傅說, 不說)과 고향을 그리면서 새로 정착한 곳에 같은 이름을 썼다는 증거다.
지난해 출판된 한글본 “古朝鮮 찾기”에서는 두 쩨 영문본 내용과 결합하여 이 또하나의 어원이라고 풀이 했다 . 이 부족은 산서성 해지연안에서 분수(汾水, 汾河)를 따라 내몽고 동쪽으로 이어지는 옛적 통로를 중심으로 하여 북경 북부지역에 살았다. 산해경에는 이 부족이 숙신씨(肅慎氏)와 같이 나타났다. 산서성 해지연안을 본향으로 하는 부여(夫餘, 浮游)족은 이렇게 두 갈래로 만주 땅에 들어 왔다. 이를 진수는 필요에 따라 뜻이 다른 “扶餘, 夫餘”로 기록 했다. 그가 삼국지에 남긴 부여 (不與)란 명사를 후세 사람들이 로 훈역하여 삼한의 후예들에 관한 역사문제 풀이에 혼동이 오고 있다.
끝, 다음에 계속.
July 20, 2017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