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전(夫餘傳)-1:
서론-1: 부여(夫餘)의 발생지와 영역:
사기 소진열전에 연 문공(燕文公;?-기원전 333년)이 연의 영역을 설명 했다:
고 했다. 전국책(戰國策 燕策)에도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
같은 저자가 화식 열전에서는 고 밝혔다 : 같은 지역에 살던 사람들을 흉노열전 에는 동호 호(東胡, 胡)라 했고 좀더 세분 하여 오제본기에서는 발 산융 숙신 (山戎、 發、息慎), 발해만 서쪽 해안에는 기조선(暨朝鮮)이라 했다. 그 곳을 관자에서는 발조선(發朝鮮), 그 지도자를 북주후 (北州侯)라 했다 . 이를 상서정의에서는 중원 구주 (九州) 밖이라 하여 여주(餘州, Extra-state) 라고도 했다 . 전국시대 까지는 부여(夫餘)란 이름이 없다가 흉노 모둔선우가 기원전 208년에 동호왕을 살해한 이후에 처음으로 나타 났다. 전국시대에 임호와 다락 루 번거로울 번(林胡、樓煩) 이라 하던 이름이 오환과 부여(夫餘)로 바뀌었다 . 루번(樓煩)이 부여(夫餘)의 전신이란 추리가 된다. 산서성 태원(太原)에서 연경 (燕京)에 이르는 지역에 있었다 .
중원이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빠진 동안 고조선 원주민들은 저나름대로 무리를 이루어 중원 세력에 반항하던 시절을 위지 30편에 남겼다. 그중 한편이 부여전 (夫餘傳)이다.
진수는 “부여”란 이름을 로 나누어 기록 했다. 문자의 귀제가 남긴 기록이라 글자 선택에는 숨은 뜻이 있다고 본다. 사내 부(夫)자 부여 (夫餘)란 이름은 사마천이 만들었고, 도을 부(扶)자 부여(扶餘)란 이름은 진수가 새로 만든 이름이다. 한서는 사마천이 만든 부여(夫餘)란 이름을 그대로 인용 했다.
사마천이 한무제 영역의 주위에 살던 여러 부족을 비하하여 기록했던 실례와 북쪽에 살던 부족을 부여(烏桓, 夫餘)라 한 글자를 살펴 보면, 이는 발조선 이름을 쓰지 않고 북주(北州) 또는 여주(餘州)라 부르 듯, 북쪽에는 이라는 뜻으로 비하 하여 붙인 이름이 부여(夫餘)다.
천손의 후예(烏孫)들이 동쪽에 와서 산다 하여 동호(東胡) 라고 부르던 사람들이다. 그들이 우왕을 도와 치수사업을 성공시키고 산서성 해지(解池) 분수(汾水) 유역에서 쫓겨난 부족이다. 중국 기록에는 단군왕검이 치수사업에 성공한 우왕으로 나타 났다는 논증을 했다. 우왕을 물길을 다루던 귀신이라 하여 하백(河伯)이라고도 했다. 고구려 시조 주몽이 하백의 외손이다. 단군조선의 후손들이 한 때는 분산되기도 하고 단합 되기도 했었다. 부여 (夫餘)연맹체를 이루고 살던 부족들도 단합과 분산을 거듭해 왔다.
전사사 (前四史)에 나타난 고조선 지역에 살던 부족 이름을 추적해 보면, 모두 동양문화의 발생지인 산서성 해지연안에 살았었다. 그러한 증거가 각종 사료가 있다 . 이들이 역사의 흐름에 따라 만주 땅으로 옮겨 와서 새로 정착한 곳의 지리지형에 적응 했다 . 그에 따라 한서 지리지에는 대흥안령을 경계로 동쪽과 서쪽을 따로 기술 했다. 동쪽 지역은 전쟁이 없던 낙원이라, 공자님이 가서 살고 싶다고 했다 . 대흥안령 서쪽은; 고 기록 했다 .
예맥(濊貃)의 서쪽에 살던 부여선우(扶餘單于)가 다른 여러 국가 지도자들과 같이 중국 삼국시대 위나라의 초대 황제 문황제 조비(曹魏 高祖 文皇帝 曹丕, 187년-226년) 취임식에 사신을 보냈다 . 전통적으로 선우(單于)란 이름은 흉노의 여러 부족장이 선출한 부족 연맹체의 총지도자란 뜻이다. 부여선우(扶餘單于)란 문구 에는 는 뜻이 잠겨 있다. 앞에서 하왜왕(假倭王)을 설명 할때 인용한 견초(牽招)전에 에서 부여(扶餘)란 글자를 썼다 .
끝, 다음에 계속
July 15, 2017
서론-1: 부여(夫餘)의 발생지와 영역-계속:
부여의 북쪽 끝이란 약수(弱水)의 정체:
진수는 삼국지 부여전에서 북쪽에는 약수가 있다고 했다. 그는 약수(弱水)란 이름을 동쪽과 서쪽 두곳에 있다고 했다. 동쪽은 부여전에 서쪽은 왜(倭), 즉 동이 (東夷, 汗, 韓)가 서쪽에서 부터 중원을 지나 동쪽으로 왔다는 설명을 왜인전에 다루면서 서역에 약수(弱水)가 있다고 했다 . 그러나 부여 동북쪽에 읍루전에는 그 나라가 제일 북쪽이라 하면서 약수란 말은 없다 . 서쪽에 있다는 약수는 상서, 산해경, 수경주 등등 여러 곳에 설명을 구구하게 했다. 중황하문명의 발생지인 해지 연안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 한전(漢典)을 보면 고 말을 바꾸었다 .
부여의 북쪽에 있던 약수의 숨은 내력이 진서(晉書)에서 나타났다.
약수이남(弱水以南) 여러 나라에서240년(魏正始元年)에 조위 (曹魏)의 마지막 황제 (齊王曹芳) 대관식에서 사신을 보냈다. 그러나 숙신씨를 설명 하면서 약수 (弱水)란 이름을 동북아시아 끝 제일 먼 곳으로 서술 했다 . 그러난 부여전에
영토가 2,000리(方可二千里), 동쪽은 앞록강에 이르지 못하였고, 서쪽은 대흥안령 가까이 선비와 오환을 경게로 했다. 북쪽 경계라고 한 이였다.
이를 진수는 선비전에서 단석괴가 발해만 서남쪽 옛적 창해군 지역에서 그물로 생선을 잘잡는 한인(汗人)을 오후가 사는 진수(烏侯秦水)유역으로 이주 시켰다 .
진수(秦水)란 글자를 쫓아가 보면 이 글자 또한 해지연안에 있던 고국국과 수양산(首陽山)을 동쪽으로 밀어 버렸드시, 진수(秦水)와 약수(弱水)란 이름을 점차로 너나먼 서쪽으로 몰아 버렸다.
끝, 다음에 계속.
July 18, 2017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