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편: 옛적 한국(汗國)의 풍속:
부여전에는, 현토군에서 나타나 공손도(公孫度, ? ~ 204년) 부터 공손연이 멸망하고 관구검이 고구려 국내성을 분탕치고 돌아간 시기 까지의 역사가 위서 30편 전반에 실려 있다. 부여(夫餘)란 이름이 사기와 한서에 나타나니 늦어도 후한서 동이전에는 부여의 역사가 실려 있어야 한다. 삼국지 부여전의 역사를 되풀이 하면서, 동명왕의 설화와 관련시켜 북이삭리국 (北夷索離國) 에서 나왔다고 했다 . 이 문제는 고구려 편에서 다루기로 하고 이 편에서는 간단히 한국 풍속의 몇가지를 다루기로 한다.
고조선의 동쪽지역에 살던 사람들 한국(汗國)의 고대 풍속이 처음으로 전사사 (前四史)의 마지막이 되는 진수의 삼국지 위서 30( 三國志 魏書三十)동이전 여러 편에 조금씩 실려있다. 이는 편마다 그 지역에 살던 사람들의 특이한 풍속이란 뜻이 아니다. 지도층과 평민, 관혼상제 (冠婚喪祭)및 매장 풍속을 조금씩 여기 저기에 나누어 설명하여 그들이 완전히 다른 풍속을 지녔다는 인상을 심었다. 다른 전사사에는 없으니, 삼국지 위지 30에 나타난 풍속이 고조선의 풍속이라고 본다. 방대한 소제라 그중에 몇몇 가지만 다루고 다음기회에 이 문제를 다루기로 한다.
삼신 (三辰, 三神)신앙:
북송(北宋)시대 편찬(1007년-1008년)된 광운( 廣韻) 에서 까지도 설문해자에서 풀이한 옛적 해(借:jiè 解; jiě jiè xiè . sun, sun-ray사람이란 뜻)를 뜻하던 사음자>를 훈역해 써오고 있다. 삼국지에는 견초(牽招)전에 초왕(峭王)이란 용어를 처음 쓰고 일주서에 나타난 배하(拜假)란 표현을 썼다. 또한 서로 라는 주장을 하면서 하아(假我)란 표현을 썼다 . 서로들 으로 썼다. 비미호(卑彌呼)를 설명하면서 왜왕에게 경패 했다는 표현 을 배하왜왕 (拜假倭王) 이라 했다. 멀 하(假)자에는 이 있다. 한국 말로 는 글자를 환(桓)자로 썼다. 이 글자는 빛의 강도에 따라 훤에서 환으로 발음하게 된다. 문헌에 나타나는 글자들(桓, 恒, 垣, 亘,旦, 日, 玄, 奚 등등)은 하늘에서 반짝이는 물체를 그린 상형(象形)자에서, 또 다른 뜻을 나타내려는 방법으로 만든 회의(會意) 자다. 고조선 (동호)의 후예들을 다룬 문헌에는 하늘에 반짝이는 해와 달, 그리고 별 (북두칠성)을 숭상하던 흔적이 뚜렷하게 나타 난다.
진수는 다른 사람이 남겼다는 위서의 내용을 인용(魏書曰)하여 <오환선비동이가 모두 동호의 후손이라 밝히고, 천지일월성진 앞에 두손 손모아 빈다(示)고 했다. 식사전에는 꼭 기도를 하고 (飲食必先祭) 아침에 일어 나면 다같이 모여 감사의 인사 (旦起皆拜)를 했다. 이를 어기는 자는 엄벌에 처했다 . 사마천은 흉노열전에 고 했다 .
옛적에 인사하던 방법(拜)을 묘사 했다 :
아직도 세계 여러 문화에서 볼수 있는 인사 방법이다.
고구려의 예법에 한 발은 구부리고 다른 한 발은 펴고 인사를 한다(跪拜申一脚) 대흥안령 쪽에 있던 부여(不與)와 동쪽에 고구려와 가까운 곳에 있던 부여와는 다르다(與夫餘異) 한전에 고 했다. 왜인의 인사 법은 부여와 무릅을 꿀코 절(跪拜)한다. 수명이 길어 8-90 백세 사는 자도 있다 .
탈 바가지의 기원:
탈 바가지를 한자로는가면(假面)이라고 적는다. 옛적 부여 풍속을 그린 장면에 나타난 데스 마스크 (Death mask)의 흔적이 탈바가지라고 본다.
동옥저전에서 평민들의 매장 풍속이 있다. 하매(假埋)를 설명한 내용은 단군조선 (하후씨) 시절 부터 전해오던 매장 풍속을 가매장(假埋葬)이라 한다는 뜻이다. .
부여전에도 을 그렸다. 티배트와 조로아스터(Zoroaster) 의 시신 처리 풍속, 중앙 아시아와 서남부 유럽에서 그와 비슷한 매장 풍속을 아직도 찾아 볼수 있다.
죽은 사람 모형으로 나무를 깎아 두었다(刻木如生形)는 문구가 의 기원이라고 본다.
한전(韓傳)과 왜인전 (倭人傳)은 같이 관이 있고 곽은 없다. 왜인전 (倭人傳)에 실린 상주와 상가를 찾는 상객에 관한 기술은 근래 한국장례와 유사한 점이 많이 있다. 십일장에 상주는 육식을 금하고, 곡을 하고, 상객들은 술마시고 노래하며 큰 봉분을 만든다 . 부여와 동옥저에서는 반대로 곽은 있고 관이 없다(有槨無棺). 오환과 선비 풍속에도 관이 있었다(貴兵死,斂屍有棺) . 평민과 집권층의 매장은 다를수 밖에 없었다. 오환과 선비 풍속에도 상주는 곡을 했다. 가까이 지내던 사람이 죽었는데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그 슬품을 이겨내는 방법이 영원의 세계로 갔다고 믿는 종교의식으로 나타 났다.
집권 층에서는 후장 (厚葬)풍속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춘추좌전을 인용하여 후장 풍속은 송 문공 (宋文公; ?기원전 589년) 때에 사작 했다고 인식하지만, 그 보다 앞서 관자(管夷吾, 기원전 725년? -기원전 645년) 는 제 환공과의 대화에서 후장 (厚葬)풍속은 옳치 않다는 말을 했다 . 이러한 풍속이 중원에서는 오래동안 전해 왔지만, 조위 문제는 이를 패지하려고 노력 했다. 산동성에서도 유행 했던 풍속이 부여와 고구려에서는 삼국시대에도 여전히 있었다는 증거가 남만주 일대에 있던 고 했다 . 유교경전 예기단궁(禮記 檀弓)편에 상고시절 매장 풍속을 기술했다 : 태고적에는 시신을 묻지 않고 들에 놓아두고 나무섶을 쌓아두고 봉분도 없었다. 순임금 시절에는 토기를 관(瓦棺)으로, 하후씨지주 (夏后氏堲周)라, 즉 흙을 구워 만든 벽돌로 관 주위를 단들었고, 상나라 시절에는 목곽(棺槨)을 사용했다. 서주 시절에 이르러 직책의 고하에 따라 매장 형식이 다르게 발전 했다. 서주 이후에 후장 풍속이 나타났다.
끝, 다음에 계속.
July 23, 2017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