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천독(天毒)이란 글자는 뒤에 설명 하기로 하고, 산해경(山海經)을 먼저 다룬다.
산해경의 저자와 성서 기간: 산해경은 오랫동안 여러사람이 가필 증정한 지리 풍물서다. 우(禹)와 같이 치수사업을 했던 백익(伯益)이 첫 저자다 .
사료의 출처는 태평어람에는 오월춘추라 밝혔고 그를 따라가면 여씨춘추 (吕氏春秋)가 된다 . 우가 노총각으로 잂은 시문이 도산가(涂山歌)란다. 오월춘추에는 그에 (候人兮猗)란 구절이 남쪽사람들의 언어(南音, 語順)이라고 했다. 아전 인수격이다. 시경 조풍에 후인( 詩經 國風 曹風 候人)이란 편명이 있다. 후인의 시문을 본받아 주공과 소공이 읊은 시문이 주남과 소남(周南, 召南) 이라 한다 . 조풍에 부여의 어원인 부유(蜉蝣)란 편명이 있다 . 조풍은 모두 치수사업을 하던 지역이 무대다. 이지역에서 산해경과 그지역 사람들(梁, 斯)이 부르던 민요가 시경에 실려 있다. 순임금은 “歌南風” 하나라 초기에는 “五子之歌”가 있었다
시서 (詩書) 산해경에 잃어 버린 단군조선의 역사가 숨어 있다.
전국시대를 지나 중원의 영역이 통일 되자 전한의 유향(劉向; 기원전 77년 ~ 기원전 6년)과 서진(西晋; 266- 316년)의 곽박 (郭璞; 276-324년)이 주(註)를 달았다. 삼국지의 저자 진수 (陳壽 233-297)가 곽박 보다 한 세대 앞선 사람이다. 곽박이 가필 된 최종 시기에 영가의 난(永嘉之亂)으로 서진이 강남으로 도망갈 때다. 뒤를 이어 오호십육국시대란 혼란기를 격었다. 오호란 고조선(東胡)의 후손들 특히 선비족이 득세한 시절이다. 곽박이 단군조선의 발생지를 읊은 시문이 염지부(鹽池賦)다.
대황서경 첫 줄에는: “不周負子” “濕水” “禹攻共工國山”이란 문구가 있고, 맨 끝에 한 경제의 휘를 피해 하 왕조의 시조 제개(帝啟)의 글자를 바꾸었다 . 이편을 유향 이전에 어느누가 가필 했다.
부주부자(不周負子)란 문구는 장자 양왕편에 순임금의 덕이 다하여; <해지연안에 있던 지도자에게 양위하고 돌아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달리 표현 한 문구>다 . 해지연안에 있던 지도자가 단군이다. 백익은 순임금으로 부터 사제권을, 우로 부터는 통치권을 인수 받았다. 제정일치를 처음 시작한 사람이 단군왕검이다.
우가 공공국(共工國)을 공격 했다는 지역은 홍범구주를 논한 지역으로 해지 연안이다. 그 일대에 습수(濕水)가 있었다.
습수(濕水)는 장안의 주석(張晏注)에(洌水、汕水)와 같이 조선 땅에 있었다 . 그 밖에도 고조선의 습수(濕水)는 수경주 태평어람(太平御覽). 대청일통지 등 중국의 수많은 사서에 기록되어 있다 . 열수는 남쪽으로 흘러 도산 (注于列塗)을 지난다 . 도(塗)자를 “涂 凃”라고도 적었다. 산해경에는 선수 (鮮水) 도산 가까이 지난다고 했다. 죽서기년에는 백익을 죽이고 왕위를 빼앗아 하나라를 시작했다 하여 제개(帝啟)란 직위를 받은 자가 하수인 살인범 맹도를 법정에 보냈다(八年,帝使孟涂如巴涖訟).
이사건은 논형전허(論衡雷虛)편에 남아 있다 : <하왕조가 이루어지던 시절에 살인 사건이 일어 났다. 이를 세간에는; 세워 놓은 나무(장승)를 자른 사람이 하늘에 용을 얻었다고 하는데, 그가 살인자야> 라고 했다. 백익을 죽이고 지도권을 빼았었던 사건을 그렇게 기록 했다.
같은 뜻을 묘사한 상형자를 이리저리 많이 바꾸었다. 산해경(山海經)에서도 여러 글자를 바꾸었다. 선수(鮮水) 또한 아래와 같이 달리 설명 했다 . 선수, 낙수, 이수, 열수, 수양산은 모두 홍수로 범람하던 구주안에 있던 이름들이다. 모든 중국 사서가 고조선과 관계 깊은 이름들은 모두 동쪽으로 밀어 버렸다. 산해경도 예외가 아니다.
대황서경 끝 줄에는 (漢景帝 劉啓, 기원전 188년-기원전 141년)의 이름자 개(啓)를 피해서 백익을 살해한 일당의 두목으로 하 왕조를 열었다 하여 제계(帝啟)라고 부르는 “夏后啓를 夏后開” 로 바꾸었다 .한무제 이전이다.
해내동경과 해외동경은 기원전 6년 4월(建平元年四月丙戌)에 작성 했다 . 그 내용에 발해 “入渤海 注于渤海”란 표현을 했다. 이편 또한 유향이 가필 했다.
해외서경에는 단군조선의 근간이 되는 <숙진국(肅慎之國)북쪽 언덕에 선인 대제를 뜻하는 웅상(雄常)을 세워 놓았다>
“肅慎之國在白民北,有樹名曰雄常,先入代帝,於此取之”
웅상(雄常)은 환웅(桓雄)천왕 모형을 뜻한 글자다. 桓자를常”자로 바꾸었다는 기록이 항산(恒山)을 상산(常山)이라 했다는 설명에 있다.
고조선의 대명사로 나타나는 숙진씨(肅慎) 가 활을 들고 순임금을 찾았다. 그 이웃에 현도(玄都)가 있었다 . 황하문명의 발생지에 숙진씨가 살았다. 현도란 글자는 산해경에 실린 부도산(臯塗山)의 다른 글자다. 이 곳에서 융우가 부인을 구(禹娶塗山氏女)했다 . 그들이 남만주로 와서 우거왕의 경기 지역에 살았다.
오환산(烏丸山): 옛적 부터 오환(烏桓)의 성산(聖山)을 진수가 오환산(烏丸山) 이라고 바꾸었다. 오환(烏桓)의 환(桓)자는 상산(常山)의 상(常,上, 商)자를 피휘(漢文帝 劉恆; 재위 : 기원전 180년 기원전 157년)한 글자다 .
그러나 상산(常山)이란 이름은 진시황 이전에 전국책 조책에 나온다 . 항산 (恆山, 恒山, Héng Shān)은 북악이라고도 하던 오악(五嶽)의 하나로 상서 우공편과 산해경에 실렸다 . 이곳의 계곡을 상구(商丘)라 했다. 상의 시조가 하우씨 영역의 오지였던 곳에서 나타나 이곳을 상구라 했다 . 오환족의 본거지다. 이사람들이 쓰던 언어를 공자의 사위 공야장(公冶長)이 이해 했다. 오환(烏桓, 烏丸)의 말을 이해 했다는 오어(烏語)자를 모양이 비슷해 보이는 새 조자 조어(鳥語)로 바꾸었다. 북쪽 사람들이 볼 때는 너무 속들여다 보이는 글자 작난이라 생각 되여서 였던가, 같은 새란 뜻의 새 금자로 바꾸어 조어라 하던 글자를 금어(禽語)로 바꾸어 공자님 사위가 새소리(禽語) 까지도 해석했다고 전해 온다 . . 백익이 같은 언어를 썼다 (伯翳綜聲于鳥語), 갈로가 소우는 소리를 식별(葛盧辨音于鳴牛)했다. 이들은 한 때 하북평원 전역을 누리던 유목민이였다.
산해경은 치수사업을 목적으로 백익이 요순시대의 12주라 하던 지역의 산하를 그려 놓은 개발 설계도가 원조다. 그 후로 한 무제시절에 확장된 영역에 맞도록 은미하게 보충 수정 되였다.
서진 초기인279년(太康元年)에 급총죽간 (汲冢竹簡)이 발굴 되었다. 구전해 오던 설화가 사실로 판단 되여 백익을 추모한 사람들이 291년에 백충장군 현령비 (百蟲將軍顯靈碑)를 깎아 세우고 (刻石立頌) 295년(晉元康五年) 에는 조당 (堂廟)을 지었다 . 이러한 사료를 근거로 서진(西晋; 266- 316년)의 곽박(郭璞; 276-324년)이 기존의 자료를 모아 편찬하여 주(註)를 달았다. 그러나 현존하는 산해경(山海經) 에는<주(註)를 달았다>는 부분을 확인 할수가 없다.
중산경에 끝에는 동서남북 그리고 중앙에 있는 산을 합쳐 五臧山經을 만들어 글자가 15,503자라고 했다 . 사마천이 사기를 마치고 총 글자가 “凡百三十篇,五十二萬六千五百字,為太史公書” 남긴 표현과 같다. 사마천은 우본기(禹本紀)가 거짓말이라 하고 상서 내용이 더 사실에 가깝다. 그러나 산해경에 관헤서는 논하지 않겠다고 했다 . 그가 본 산해경은 유향이 가필 하기 이전의 기록이라 본다.
오림(吳林之山)이란 글자가 산해경 중산경에 실렸다 . 같은 내용을 설문해자 초부에서 인용 했다. 부종사 오림은 <간사할 간, 간음할 간姦>의 뜻이 있다.
삼국지에는 한전에, 통전에는 변진전에 부종사오림이 낙랑본통 한국 (部從事吳林以樂浪本統韓國) 하는 문구가 있다 .
이 문구에서 써 이(以)자는 동사; <생각하다, 認爲, Believe>는 뜻으로 사용 했다. 본통(本統)이란 문구는 <옛적 부터, 본래부터 전통적으로>하는 뜻이다.
한전에 실린 이 간사한 자가 꾸민 사기극은 한국 사서에는 없다. 후에 마한왕에게 물어 보아도 모르겠다는 답이 나왔다.
결론: 산해경의 내용은 치수사업을 하던 당시에 단군왕검 백익이 그려 놓은 설계도를 계속 수정 보충하여 한국상고사와 관계되는 지역과 이름이 많이 포함 되여 있다. 고조선의 후예들이 제기 하던 우진 시대에 곽박(郭璞; 276-324년)이 남만주 발해만 연안을 넣어주(註)를 달았다. 요하 동쪽 백두산과 압록강을 지난 한반도에 관한 기록은 실릴수가 없었다.
여기저기 흐트러진 사료를 두서 없이 정리해 보았습니다. 산해경은 백익이 처음 치수 사업을 설계한 자료에서 곽박이 끝맺었다는 시대와 저자의 관계를 설명 했습니다. 다음에 계속 하겠습니다.
September 4, 2018
천독(天毒)이란 글자는 뒤에 설명 하기로 하고, 산해경(山海經)을 먼저 다룬다.
산해경의 저자와 성서 기간: 산해경은 오랫동안 여러사람이 가필 증정한 지리 풍물서다. 우(禹)와 같이 치수사업을 했던 백익(伯益)이 첫 저자다[1].
사료의 출처는 태평어람에는 오월춘추라 밝혔고 그를 따라가면 여씨춘추 (吕氏春秋)가 된다[2]. 우가 노총각으로 잂은 시문이 도산가(涂山歌)란다. 오월춘추에는 그에 (候人兮猗)란 구절이 남쪽사람들의 언어(南音, 語順)이라고 했다. 아전 인수격이다. 시경 조풍에 후인( 詩經 國風 曹風 候人)이란 편명이 있다. 후인의 시문을 본받아 주공과 소공이 읊은 시문이 주남과 소남(周南, 召南) 이라 한다[3]. 조풍에 부여의 어원인 부유(蜉蝣)란 편명이 있다[4]. 조풍은 모두 치수사업을 하던 지역이 무대다. 이지역에서 산해경과 그지역 사람들(梁, 斯)이 부르던 민요가 시경에 실려 있다. 순임금은 “歌南風” 하나라 초기에는 “五子之歌”가 있었다[5]
시서 (詩書) 산해경에 잃어 버린 단군조선의 역사가 숨어 있다.
전한의 유향(劉向; 기원전 77년 ~ 기원전 6년)과 서진(西晋; 266- 316년)의 곽박
(郭璞; 276-324년)이 주(註)를 달았다. 삼국지의 저자 진수 (陳壽 233-297)가 한 세대 앞선 사람이다. 가필 된 최종 시기에 영가의 난(永嘉之亂)으로 서진이 강남으로 도망갈 때다. 뒤를 이어 오호십육국시대란 혼란기를 격었다. 오호란 고조선(東胡)의 후손들 특히 선비족이 득세한 시절이다. 곽박이 단군조선의 발생지를 읊은 시문이 염호부(鹽池賦)다.
대황서경 첫 줄에는: “不周負子” “濕水” “禹攻共工國山”이란 문구가 있고, 맨 끝에 한 경제의 휘를 피해 하 왕조의 시조 제개(帝啟)의 글자를 바꾸었다[6].
이편을 유향이 가필 했다.
부주부자(不周負子)란 문구는 장자 양왕편에 순임금의 덕이 다하여; <해지연안에 있던 지도자에게 양위하고 돌아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달리 표현 한 문구>다[7]. 해지연안에 있던 지도자가 단군이다. 백익은 순임금으로 부터 사제권을, 우로 부터는 통치권을 인수 받았다. 제정일치를 처음 시작한 사람이 단군왕검이다.
우가 공공국(共工國)을 공격 했다는 지역은 홍범구주를 논한 지역으로 해지 연안이다. 그 일대에 습수(濕水)가 있었다.
습수(濕水)는 장안의 주석(張晏注)에(洌水、汕水)와 같이 조선 땅에 있었다[8]. 그 밖에도 고조선의 습수(濕水)는 수경주 태평어람(太平御覽). 대청일통지 등 중국의 수많은 사서에 기록되어 있다[9]. 열수는 남쪽으로 흘러 도산 (注于列塗)을 지난다[10]. 도(塗)자를 “涂 凃”라고도 적었다. 산해경에는 선수 (鮮水) 도산 가까이 지난다고 했다. 죽서기년에는 백익을 죽이고 왕위를 빼앗아 하나라를 시작했다 하여 제개(帝啟)란 직위를 받은 자가 하수인 살인범 맹도를 법정에 보냈다(八年,帝使孟涂如巴涖訟).
이사건은 논형전허(論衡雷虛)편에 남아 있다[11]: <하왕조가 이루어지던 시절에 살인 사건이 일어 났다. 이를 세간에는; 세워 놓은 나무(장승)를 자른 사람이 하늘에 용을 얻었다고 하는데, 그가 살인자야> 라고 했다. 백익을 죽이고 지도권을 빼았었던 사건을 그렇게 기록 했다.
같은 뜻을 묘사한 상형자를 이리저리 많이 바꾸었다. 산해경(山海經)에서도 여러 글자를 바꾸었다. 선수(鮮水) 또한 아래와 같이 달리 설명 했다[12]. 선수, 낙수, 이수, 열수, 수양산은 모두 홍수로 범람하던 구주안에 있던 이름들이다. 모든 중국 사서가 고조선과 관계 깊은 이름들은 모두 동쪽으로 밀어 버렸다. 산해경도 예외가 아니다.
대황서경 끝 줄에는 (漢景帝 劉啓, 기원전 188년-기원전 141년)의 이름자 개(啓)를 피해서 백익을 살해한 일당의 두목으로 하 왕조를 열었다 하여 제계(帝啟)라고 부르는 “夏后啓를 夏后開” 로 바꾸었다[13].
해내동경과 해외동경은 기원전 6년 4월(建平元年四月丙戌)에 작성 했다[14]. 그 내용에 발해 “入渤海 注于渤海”란 표현을 했다. 이편 또한 유향이 가필 했다.
해외서경에는 단군조선의 근간이 되는 <숙진국(肅慎之國)북쪽 언덕에 선인 대제를 뜻하는 웅상(雄常)을 세워 놓았다>
“肅慎之國在白民北,有樹名曰雄常,先入代帝,於此取之”
웅상(雄常)은 환웅(桓雄)천왕 모형을 뜻한 글자다. 桓자를常”자로 바꾸었다는 기록이 항산(恒山)을 상산(常山)이라 했다는 설명에 있다.
고조선의 대명사로 나타나는 숙진씨(肅慎) 가 활을 들고 순임금을 찾았다. 그 이웃에 현도(玄都)가 있었다[15]. 황하문명의 발생지에 숙진씨가 살았다. 현도란 글자는 산해경에 실린 부도산(臯塗山)의 다른 글자다. 이 곳에서 융우가 부인을 구(禹娶塗山氏女)했다[16]. 그들이 남만주로 와서 우거왕의 경기 지역에 살았다.
오환산(烏丸山): 옛적 부터 오환(烏桓)의 성산(聖山)을 진수가 오환산(烏丸山) 이라고 바꾸었다. 오환(烏桓)의 환(桓)자는 상산(常山)의 상(常,上, 商)자를 피휘(漢文帝 劉恆; 재위 : 기원전 180년 기원전 157년)한 글자다[17].
그러나 상산(常山)이란 이름은 진시황 이전에 전국책 조책에 나온다[18]. 항산 (恆山, 恒山, Héng Shān)은 북악이라고도 하던 오악(五嶽)의 하나로 상서 우공편과 산해경에 실렸다[19]. 이곳의 계곡을 상구(商丘)라 했다. 상의 시조가 하우씨 영역의 오지였던 곳에서 나타나 이곳을 상구라 했다[20]. 오환족의 본거지다. 이사람들이 쓰던 언어를 공자의 사위 공야장(公冶長)이 이해 했다. 오환(烏桓, 烏丸)의 말을 이해 했다는 오어(烏語)자를 모양이 비슷해 보이는 새 조자 조어(鳥語)로 바꾸었다. 북쪽 사람들이 볼 때는 너무 속들여다 보이는 글자 작난이라 생각 되여서 였던가, 같은 새란 뜻의 새 금자로 바꾸어 조어라 하던 글자를 금어(禽語)로 바꾸어 공자님 사위가 새소리(禽語) 까지도 해석했다고 전해 온다[21]. . 백익이 같은 언어를 썼다 (伯翳綜聲于鳥語), 갈로가 소우는 소리를 식별(葛盧辨音于鳴牛)했다. 이들은 한 때 하북평원 전역을 누리던 유목민이였다.
산해경은 치수사업을 목적으로 백익이 요순시대의 12주라 하던 지역의 산하를 그려 놓은 개발 설계도가 원조다. 그 후로 한 무제시절에 확장된 영역에 맞도록 은미하게 보충 수정 되였다.
서진 초기인279년(太康元年)에 급총죽간 (汲冢竹簡)이 발굴 되었다. 구전해 오던 설화가 사실로 판단 되여 백익을 추모한 사람들이 291년에 백충장군 현령비 (百蟲將軍顯靈碑)를 깎아 세우고 (刻石立頌) 295년(晉元康五年) 에는 조당 (堂廟)을 지었다[22]. 이러한 사료를 근거로 서진(西晋; 266- 316년)의 곽박(郭璞; 276-324년)이 기존의 자료를 모아 편찬하여 주(註)를 달았다. 그러나 현존하는 산해경(山海經) 에는<주(註)를 달았다>는 부분을 확인 할수가 없다.
중산경에 끝에는 동서남북 그리고 중앙에 있는 산을 합쳐 五臧山經을 만들어 글자가 15,503자라고 했다[23]. 사마천이 사기를 마치고 총 글자가 “凡百三十篇,
五十二萬六千五百字,為太史公書” 남긴 표현과 같다. 사마천은 우본기(禹本紀)가 거짓말이라 하고 상서 내용이 더 사실에 가깝다. 그러나 산해경에 관헤서는 논하지 않겠다고 했다[24]. 그가 본 산해경은 유향이 가필 하기 이전의 기록이라 본다.
오림(吳林之山)이란 글자가 산해경 중산경에 실렸다[25]. 같은 내용을 설문해자 초부에서 인용 했다. 부종사 오림은 <간사할 간, 간음할 간姦>의 뜻이 있다.
삼국지에는 한전에, 통전에는 변진전에 부종사오림이 낙랑본통 한국 (部從事吳林以樂浪本統韓國) 하는 문구가 있다[26].
이 문구에서 써 이(以)자는 동사; <생각하다, 認爲, Believe>는 뜻으로 사용 했다. 본통(本統)이란 문구는 <옛적 부터, 본래부터 전통적으로>하는 뜻이다.
낭랑 이란 이름이 나타난 갈석산에서 조양에 이르는 지역으로 요하 서쪽이다. 이곳 사람들이 뱃길로 한반도 서해안을 따라 유구까지 퍼저 나갔다. 이들이 마한 땅 서쪽에 있는 큰 섬(有州胡,在馬韓之西,海中大島上)강화도에 첨성단을 쌓은 고조선 사람들 東胡다.
한전에 실린 이 간사한 자가 꾸민 사기극은 한국 사서에는 없다. 후에 마한왕에게 물어 보아도 모르겠다는 답이 나왔다.
산해경의 내용은 치수사업을 하던 당시에 그려 놓은 설계도를 걔속 수정 보충하여 곽박(郭璞; 276-324년)이 주(註)를 달았다는 부분이 남만주 발해만 연안을 넣어 끝냈다. 한국상고사와 관계되는 지역이 포함 되여 있지만, 요하 동쪽 백두산과 압록강을 지난 한반도에 관한 기록은 실릴수가 없었다.
여기저기 흐트러진 사료를 두서 없이 정리해 보았습니다. 산해경은 백익이 처음 치수 사업을 설계한 자료에서 곽박이 끝맺었다는 시대와 저자의 관계를 설명 했습니다. 다음에 계속 하겠습니다.
September 4, 2018
끝.
[1]. 太平御覽 會稽東越諸山: 禹乃齋,登石簣山,鑿龍門,通伊闕,遂周行天下,使伯益記之,名為《山海經》。
[2]. 吳越春秋越王無余外傳:遂巡行四瀆。與益、夔共謀,行到名山大澤,召其神而問之山川脈理、金玉所有、
鳥獸昆蟲之類,及八方之民俗、殊國異域、土地里數:使益疏而記之,故名之曰「山海經」吕氏春秋:禹行功,見塗山之女,
禹未之遇而巡省南土。塗山氏之女乃令其妾待禹于塗山之陽,女乃作歌,歌曰「候人兮猗」,實始作為南音。周公及召公取風焉,以為周南、召南. 至於塗山歌於候人,始為南音
[3]. 《候人》:曹君多任非人,國人諷之,首章賦也,後三章比也
《候人》云:「維鵜在梁。」傳曰:「梁,水中之梁。」《候人》傳曰:「荷,揭也。」
[4]. 水經注 伊水: 又有《百蟲將軍顯靈碑》,碑云:將軍姓伊氏,諱益,字隤敳,帝高陽之第二子伯益者也。
晉元康五年七月七日,順人吳義等建立堂廟,永平元年二月二十日,刻石立頌,讚示後賢矣。
[5]. 通典 歌:帝王世紀曰:「舜恭己無為,歌南風之詩。詩曰:南風之時兮,可以阜吾人之財兮;南風之薰兮,
可以解吾人之慍兮。」夏太康失道,畋游十旬弗反。其弟五人,待于洛汭,述大禹之戒,作五子之歌。
[6]. 山海經 大荒西經: 西北海之外,大荒之隅,有山而不合,名曰不周負子。有兩黃獸守之。有水曰寒暑之水,
水西有濕山,水東有幕山。有禹攻共工國山。按:夏后開即啟,避漢景帝諱云.
[7].莊子 雜篇 讓王: 舜以天下讓其友石戶之農,石戶之農曰:「捲捲乎后之為人,葆力之士也。」以舜之德為未至也,
於是夫負妻戴,攜子以入於海,終身不反也.
[8].三國志 魏書三十 韓傳:部從事吳林以樂浪本統韓國,分割辰韓八國以與樂浪,吏譯轉有異同,臣智激韓忿, 攻帶方郡崎離營。時太守弓遵、樂浪太守劉茂興兵伐之,遵戰死,二郡遂滅韓. 通典 邊防一 弁辰: 部從事吳林以樂浪本統韓國,分割辰韓八國以與樂浪。晉武帝咸寧中,馬韓王來朝,自是無聞。三韓蓋為百濟、新羅所吞并.
[9].太平御覽 東夷一 朝鮮: 《史記》曰:朝鮮。張晏注曰:朝鮮有濕水、洌水、汕水,合為洌水。又東五百里,曰夷山,
無草木,多沙石,湨水出焉,而南流注于列塗 水經注 -> 卷十四 沽河:濕水入焉,俗謂之合口也。
[10].三國志 魏書三十 韓傳:部從事吳林以樂浪本統韓國,分割辰韓八國以與樂浪,吏譯轉有異同,臣智激韓忿, 攻帶方郡崎離營。時太守弓遵、樂浪太守劉茂興兵伐之,遵戰死,二郡遂滅韓. 通典 邊防一 弁辰: 部從事吳林以樂浪本統韓國,分割辰韓八國以與樂浪。晉武帝咸寧中,馬韓王來朝,自是無聞。三韓蓋為百濟、新羅所吞并.
[11]. 論衡 雷虛 :盛夏之時,雷電迅疾,擊折樹木,壞敗室屋,時犯殺人。世俗以為「擊折樹木、壞敗室屋」者,
天取龍;其「犯殺人」也,謂之陰過
[12].鮮水出焉,而西北流注于涂吾之水. 曰鮮山,多金玉,無草木。鮮水出焉,而北流注于伊水
[13].大荒西經:西北海之外,大荒之隅,有山而不合,名曰不周負子。有兩黃獸守之。有水曰寒暑之水,水西有濕山,水東有幕山。有禹攻共工國山. 按:夏后開即啟,避漢景帝諱云.
[14].海外東經:: 建平元年四月丙戌,待詔太常屬臣望校治,侍中光祿勳臣龔、侍中奉車都尉光祿大夫臣秀領主省
[15].竹書紀年 帝舜有虞氏: 元年己未,帝即位,居冀。作《大韶之樂》二十五年,息慎氏來朝貢弓矢.四十二年,
玄都氏來朝,貢寶玉.冀:九州名。《爾雅》云:兩河閒曰冀州續漢書安平國故信都郡.
[16].山海經:天帝山之西南曰臯塗之山. 又塗山,國名。在壽春界巢縣東北. 書·益稷:娶于塗山。《連山易》禹娶塗山氏女.
[17].項羽本紀: 趙相張耳素賢,又從入關,故立耳為常山王,王趙地,都襄國. 孝武本紀: 復至泰山修封,還過祭常山.
說文解字 : 鄗:常山縣。丗祖所卽位,今為高邑。从邑高聲. 史記 漢興以來諸侯王年表: 自雁門、太原以東至遼陽,
為燕代國;常山以南,大行左轉,度河、濟,阿、甄以東薄海,為齊、趙國.《前漢·地理志》常山郡。《註》恆山在西,
避漢文帝諱,故改曰常山。 史記·夏本紀》常衞旣從。《註》常水,出常山上曲陽縣。《書·禹貢》作恆。
[18]. 戰國策 趙策 蘇秦從燕之趙始合從;西有常山,南有河漳,東有清河,北有燕國。秦攻楚,齊、魏各出銳師以佐之
,韓絕食道,趙涉河漳,燕守常山之北。秦攻韓、魏,則楚絕其後,齊出銳師以佐之,趙涉河漳,燕守云中。
說文解字 – 卷二 示部: 燒祡燓燎以祭天神。从示此聲。《虞書》曰:「至于岱宗,祡。
[19]. 史記 世家 鄭世家:平公曰:「卜而曰實沈、臺駘為祟,史官莫知,敢問?」對曰:「高辛氏有二子,長曰閼伯,
季曰實沈,居曠林,不相能也,日操干戈以相征伐。后帝弗臧,遷閼伯于商丘,主辰,商人是因,故辰為商星。
遷實沈于大夏,主參,唐人是因,服事夏、商,其季世曰唐叔虞.
[20]. 史記 世家 鄭世家:平公曰:「卜而曰實沈、臺駘為祟,史官莫知,敢問?」對曰:「高辛氏有二子,長曰閼伯,
季曰實沈,居曠林,不相能也,日操干戈以相征伐。后帝弗臧,遷閼伯于商丘,主辰,商人是因,故辰為商星。
遷實沈于大夏,主參,唐人是因,服事夏、商,其季世曰唐叔虞.
[21].罕漫而已,非己咎也。昔伯翳綜聲于鳥語,葛盧辨音于鳴牛. 舊說冶長解禽語,故繫之縲絏
[22]. 水經注 伊水: 又有《百蟲將軍顯靈碑》,碑云:將軍姓伊氏,諱益,字隤敳,帝高陽之第二子伯益者也。
晉元康五年七月七日,順人吳義等建立堂廟,永平元年二月二十日,刻石立頌,讚示後賢矣。
[23].山海經 中山經: 又東百二十里,曰吳林之山,其中多葌草. 右《五臧山經》五篇,大凡一萬五千五百三字.
[24].史記 大宛列傳:太史公曰:《禹本紀》言「河出崑崙。崑崙其高二千五百餘里,日月所相避隱為光明也。其上有醴泉、瑤池」。今自張騫使大夏之後也,窮河源,惡睹本紀所謂崑崙者乎?故言九州山川,《尚書》近之矣。至《禹本紀》、《山海經》所有怪物,余不敢言之也。《史記》曰:《禹本紀》言:河出昆侖,其上有澧泉華池
[26].三國志 魏書三十 韓傳:部從事吳林以樂浪本統韓國,分割辰韓八國以與樂浪,吏譯轉有異同,臣智激韓忿, 攻帶方郡崎離營。時太守弓遵、樂浪太守劉茂興兵伐之,遵戰死,二郡遂滅韓. 通典 邊防一 弁辰: 部從事吳林以樂浪本統韓國,分割辰韓八國以與樂浪。晉武帝咸寧中,馬韓王來朝,自是無聞。三韓蓋為百濟、新羅所吞并.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