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 영토-8-4-대석하(大石河)가 패수(浿水)
산해관을 지나는 대석하(大石河)가 패수(浿水)란 말을 아무도 한적이 없다.
필자는 이를 좀더 설명할 책임이 있다고 느낀다. 사기 조선열전에 나오는 국경이 였던 패수(浿水)가 한반도에 있는 대동강, 또는 남만주 요양을 지나는 태자하 (太子河)의 다른 이름이라고 선전하는, 동물농장(動物農場, Animal Farm)의 경영주, 중국공산당에 학술 토론을 제시 한다.
한국 고기(古記)에 실렸던 패수(浿水)
상형문자로 이방인의 예기를 기록하다 보니 원주민의 말소리를 글쓴 한족에게 유리하게 이리저리 바꾸어 가차 전주(PLCs, rPLCs, PSMCs)하여 기록 했다. 한국 상고사 에 나타나는 의문점을 “전쟁 기록, 한자 풀이, 그리고 시경 속에서” 찾아 설명 해왔다. 그 결과는 막대 했다. 신화라고 선전해 오던 단군이 실존 인물로 치수 사업에 성공한 대우라 밝혀 젓고, 그가 새운조선의 수도 평양이 산서성 해지 연안 운성시 일대였고, 뒤를 이어 받은 두번쩨 단군이 백익(伯益)엿지만 그는 살해 당하여 그의 후손들이 북쪽으로 피해가 살면서 넗리 흐터저 살았다. 한 부족은 멀리 떠나지 않고 북쪽에서 중원을 괴롭혀, 중원 사람들은 방대한 장성을 쌓았다.
우리의 선조는 동북으로 옮겨와 패수(浿水)를 국경으로 하고 살았다는 기록이 누구나 한국 정사라고 인정하는 삼국사기에 고기를 인용한 내용이라고 인용했다. 而古記云:高句麗始居中國北地,則漸東遷于浿水之側
풀이 하면;“고기에 이르기를 고구려가 시작하고 살기를 중국 북쪽 땅에서 했다. 즉점차로 동쪽으로 옮겨와 패수(浿水) 가까이”에 수도를 정했다 고 실려 있다.
중원과 만주의 교통로는 “발해만 연안을 따른 수로와, 산해관에서 발해만 서안을 따라 올라가는(Land Bridge) 두 통로가 있었다. 한무제 이전에 이 지역에서 나타난 전쟁은 앞에서 다룬 “6-1: 제 환공의 고조선 친입”이 처음이다. 두번쩨 전쟁이 연 태자단이 불러 불러 드린 전화다. 세번 쩨 전쟁이 “기원전 209-208년에 발생한 옛 고조선의 동서 부족이 싸워 고조선의 황금시대”가 끝났다. 이는 진시황이 중원을 통일한 이후 혼란기에, 중원 밖에서 나타난 전쟁이라 중국기록에는 간단하게 승자의 이름을 붙여 “흉노열전”에 남겼다.
한국상고사를 다루는 사람들은 이 “고조선의 분산”에 관하여 깊히 연구해야 한다.
진시황이 고조선과의 경계를 다녀간 길을 추적해 보면 두 정치세력의 경계가 나타나야 한다. 사서에는 은미하게 남겨 놓아 유심히 읽어보아야 그 참 뜻을 추리해 낼수 있다.진시황은 북쪽에 살던 살던 고조선 (東胡, 胡)세력의 친입을 막기 위하여 그가 다루던 영역의 북쪽에 장성을 쌓았다. 더 남쪽이였다는 근거도 있지만, 흔히들 예기하는 “진시황의 장성이 경계”였다는 설을 받아드려 풀이 해 본다.
고조선 (東胡, 胡)의 서쪽에는 흉노의 영역이 였다. 이들과의 경계가 조(趙)나라와 연(燕)나라의 경계가 되는 상곡(上谷) 이였다. 이 지역에 선우가 다스리던 자그만 나라 선우국(鮮虞國) 이 산속에 있다하여 중산국 (中山國)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사마천이 구탈 (甌脫)이라 기록한 영역의 남쪽 끝이다 . 산위 높은 전망이 좋은 곳에 마련한 토실(土室)을 의미한다. 고조선 사람들이 쓰던 낱말이다. 옛적에 한국에서 쓰던 말로 안방이란 뜻 “구들/구둘의 어원”이라 본다.
구탈의 소유권 다툼이 발단이 되여 고조선의 마지막 왕 부(否, 丕)는 앝잡아 보던 서쪽 부족(흉노)의 반란으로 방대한 서쪽 영토를 잃었다. 이로 인하여 고조선의 황금시대는 끝나고, 옛 고조선 땅에 “전운이 퍼저 열국 시대”가 나타 났다. 그 여파가 중구기록에 나타나는 중산국 (中山國)지역에 있던 구탈 (甌脫)을 놓고 “흉노, 동호, 중원 세력”이 소유권을 오랫 동안 다투었다 .
진시황 관계 기록에서 찾은 패수(浿水)
제 환공 시대에는 “연산 산맥에 비이씨(卑耳氏)가 살던 곳”을 비이지계 (卑耳之溪) 하였고, 만리장성이 이 곳을 지나 동쪽 끝이 오늘의 산해관 일대 해만 연안이다.
연왕 희 (燕王喜)가이 성곽에서 잡혔다고 본다 . 삼년 후가 되는 제위28년에는 동쪽을 다시 순행 하며, 추역산 (鄒嶧山), 다시 발해(勃海)를 끼고 순행 하며 황(黃)현과 추(腄)현을 지나 성산 정상(窮成山)에 이르고 다시 지부산(登之罘) 올라가 돌에 시황의 공적을 새겨 놓았다하나 그 장소와 비문은 아직 알려 지지 않았다 . 다시 5년후에 동북 쪽을 순행 했다. 진시황이 이곳을 지나면서 갈석문에 글을 세겨 놓고, 그 일대에 있던 성곽을 헐고, 저수지의 물을 흐르게 하라고 지시 했다 . 산해관 시황도 일대에 갈석문(碣石門)이 있었다고 한다. 수행원이 새겨 놓았다는 글의 내용 갈석문사(碣石門辭)에는 무도주살(誅戮無道)하는 문구는 연 태자 단을, 위역멸식 (為逆滅息)하는 문구는 연나라를 멸망 시켰다는 뜻이 분명하다. 그 비문을 새워놓은 고이 반역자의 최후 방어진이 였다. 이를 염철론에서는 연새갈선(燕塞碣石)이라 했다. 그 연의 요새을 제거하고 방축을 터서 고였던 물이 흐르게 했다는 기록이 시황본기 32년조에 실린 괴성곽 결통제방 (壞城郭,決通隄防)하는 문구다. 그 옆으로는 만주로 올라가는 길을 냈다. 이를 연새국도(燕塞國道)라 했고 이곳을 읊은 시문에는 연새호(燕塞湖) 연새산 (燕塞山)하는 글귀를 남겼다고 본다. 필자가 추리한 “산해관을 흐르는 대석하(大石河)가 국경선 패수(浿水)였다”한 대석하의 수원지가 연새호(燕塞湖)다. 가까이에 창려현에 낭랑조를 지어 놓은 갈석산이 있다.
한무제가 우거왕의 땅을 빼앗은 후에 편찬된 염철론(鹽鐵論; 公元前81年-9年 桓寬著)의 집필진은 영토의 동북경계를 더 동쪽으로 밀어 주진(誅秦)편에 영토의 동쪽 경계 였던 패수(浿水)의 글자를 동음이자로 바꾸어 패수(沛水)라 했다 .
삼국지에서 찾은 패수(浿水)
삼국지 (三國志)는 사마천의 사기 조선 열전 같이 진수가 직접 만주에가서 보고 듣ㄱ한 자료를 옛부터 산서성 지역에 전해오던 위서을 첨부하여 편집 했다. 그가 쓴 위서 (魏書三十)에는 “고조선의 황금시대” 말기에 분산되여 나온 동쪽 부족 즉 “동호의 후예”에 관한 역사를 기술 했다. 그 내용에 패수(浿水)란 낱말은 남만주 지역에 살전 한(韓)들의 상황을 그린 한전에 두번 나온다. 패수(浿水)는 남만주에 있었다는 증거다 . 패수(浿水)라는 문구가 들어 있는 구절을 살펴 보았다. 한국 사학계에서는 아직 깊히 다루지 않은 염사치에 관항 기록이 자세하게 실려 맀다. 이는 뒤에 “낭랑 한사군설”을 부정하는 중요한 사료다. 뒤에 깊히 다루기로 약속 한다.
진수는패수(浿水)가 조선과 제후국 연나라 사이에 있던 국경(朝鮮與燕界於” 이라 했다. 전국시대, 기원전 300년경에 제후들이 교만해 저서 (동주 왕실을 앚잡아 보고) 각 제후가 왕이라 칭호를 높혀 제후국 연나라도 왕이라 하며 조선 땅을 친입하려 해서, 조선후도 왕이라 하고 연을 치려 하니 대부 예가 타일러(禮諫) 연나라를 처벌하지 안았다. 연나라는 국경선 패수(浿水)를 지나 조선의 서남쪽에 있었다. 진시황에 관한 기록 또, 염천론을 살펴본 결과과 일치 한다. 흉노의 습격 으로 패망한 고조선의 왕을 모둔선우와 혈통이 같은 조선왕 “소가 우는 소리, 馬/牟;móu mù mào라고 하던 유목민족” 모성한씨(因冒姓韓氏)라 했다.모둔선우가 인도한 흉노가 갑짜기 처들어와 동호왕을 살해하고 많은 가축을 노획물로 갔고 갔다는 기록을 보면, 동호왕의 수도는 흉노 영역에서 멀리 떠러저 있었다 .
삼국사기에서 인용 했다는 고기(古記)에 실렸던 패수(浿水), 사기 흉노열전, 각종 중국사서에 나타난 진시황의 동북 경계선, 삼국지 한전에 나타난 국경선 패수 (浿水) 등을 고려해 보면, 고조선 황금 시대의 수도는 요택 서쪽에 있었서야 한다.
끝
다음에는 사기 조선열전 에서 찾은 패수(浿水)를 다룬다.
December 9, 2016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