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에 실린 “高齊後主拜王”란 문구:
북제후주가 백제왕에게 절을 하고 (高齊後主拜王) 하는 문구:
북제에 옥새를 넘겨준 위서(魏書)에는 신라 (新羅)란 글자는 없고, 대륙백제의 전신을 왜(倭)로 바꾸어 노양왕 왜노(魯陽王倭奴)라고 했다 . 진수가 단석괴 (檀石槐:137 ~ 181)를 설명 할때 나온 발해만 서남쪽 해안에 살던 한인 한국(汗人. 汗國)을 사음 하여 왜(倭)자로 기록 했다 . 한반도 서쪽 해안에 있던 국가를 백제 (百濟)라 하여21대 개로왕(蓋鹵王:재위: 455년~475년) 이 북위에 사신을 보네 장문의 표를 올려 도와 달라고 했다 .
그 내용에는: “延興二年,其王餘慶始遣使上表曰:「臣建國東極,豺狼隔路.”
하는 문구로 시작 했다. 472년 (延興二年)에 백제 개로왕 경(蓋鹵王, 慶)이 사신을 보니기 시작 하여 표를 올렸다. “신이 동쪽 끝에 나라를 세워 늑대 패들이 길을 막아 …”하는 뜻은 그가 고구려와의 영토 분쟁에서 실패 하여 남만주 땅을 잃고 반도 백제로 옮겨 왔다는 뜻이다. 편지 내용에는 <낙랑에 살던 사람들이 옛 땅을 찾아 가려는 마음이 가득 했다는 뜻에서“樂浪諸郡,懷首丘之心”란 문구가 있다 . 비장한 각오를 하고 아들을 신라에 보내 구원군을 청했지만 신라에서 구원병이 오기전에 한성(漢城)은 이미 함락되였다 .
결국 그는 옛 도읍지 한성 (漢城)을 고수 하였다 전사 했다 . 온조왕이 정한 옛 도읍지 한성 (漢城)은 남만주 해성시 일대에 있다가 대동강 하류로 옮겼다 . 그가 전사한 곳은 옛 부터 동백제의 수도 였던 대동강 하류 평안도 강서군이다. 이곳에서 유적이 많이 출토 되여 낭랑군 평양설이 나왔다 .
위서에는 낙랑(樂浪)을 물수 (氵)변이 없는 낙량(樂良good, virtuous, respectable) 군을 한무제 때에 설치 했다. 전후한(前後漢)과 진(晉)나라 때에는 (오늘 쓰는 글자) 낙랑(樂浪)으로 바꾸었다 폐지 되였다. 정광 말(正光末; 520년-525年六月)에는 연성(連城)에서 다스렸다. 그 곳에는 호성과 예수(豪/朝鮮胡城、濊水)가 있다. 연성에는 항우사당(項羽祠)이 있다 . 조선은 전후한과 진나라 때는 낙랑에 속했었다. 북위 정하 원년 (北魏延和元年, 432년)에 조선 사람들이 비려현 (肥如)으로 옮겨 갔다 . 대륙백제의 주류가 되는 비류왕이 인도하던 조선족이 옛 부터 예맥 (濊貊)족이 살던 , 천진 당산 일대 땅으로 옮겨 갔다는 뜻이다 . 서진 말기 2대 혜황제 사마충(西晉 惠皇帝 司馬衷, 259년 ~ 307년) 때 팔왕의난 (八王之亂, 291년 ~ 306년)이 발생하여 그 곳에 조선후(朝鮮侯)를 두었다 .
백제 비류왕의 후손들이 세운 나라가 북제(北齊; 550년 -577년)라고 한 대륙 백제의 최고 전성기 였다. 이를 삼국사기의 내용과 비교해 본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제(齊), 남제(南齊), 고제(高齊)란 글자가 있다. 제(齊)자가 나타난 때는 중원이 남북으로 갈라진 시기다. 남제는 북제가 설립되기 50년전에 망하고 양(梁;502-557년)나라가 되였다. 남조의 양나라 말옆에 북조에는발해군 수현(渤海郡 蓨縣) 사람고양(北齊 文宣帝 高洋, 526년 ~ 559년)이 550년에 동위 (東魏)로 부터 선양을 받아 북제(北齊, 高齊)가 나타났다. 북제가 성립 하기전에 벌써 백제 세력이 대륙에 확장 했다는 근거가 남제서(南齊書)에 실렸다 .
남제(南齊; 齊, 479년 ~ 502년)는 고구려와 백제가 교류를 했다. 북제(北齊)가 탄생 하기 전에 진동대장군 백제왕 모대가 (鎮東大將軍 百濟王牟大) 북위의 군사 10만명으로 친입 하여 이들을 격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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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魏虜又發騎數十萬攻百濟), 조선태수 신 장새(朝鮮太守臣張塞) 와 낙랑태수 (樂浪太守)등을 다스렸다는 기록이 있다 .
백제왕 모대 (百濟王牟大)는 무슨 뜻인가?:
모대(牟大)에 관해 여러설이 있다 . 유목민의 지도자(摩牟,摩帝)란 뜻이 있다.
통전에는 모자는 강제로 빼았다(牟,取也. 則反本)는 뜻으로 는 뜻이라 했다 . 사기 평준서에 있다. 강희자전에 따르면 모자는 사음자가 분며와여 때때로 음이 같은 다른 글자로도 기록 했다. 맥족을 모자로도 기록(牟,麥也) 했다 . 모대란 뜻은 무법천지를 만들어 놓고 마음대로 많이 빼았아 갔다는 뜻이다. 그러한 지역의 유목민 지도자(摩牟,摩帝)를 모대 또는 여대(牟大, 牟都, 餘大)라고 기록 했다 .
대조영이 처음에 나라 이름을 진국(震國)이라 하였다가 713년 안전한 동모산 (東牟山)에 자리잡고 밝게 해뜨는 나라란 발해로 바꾸었다. 산동 반도에고 동모산(東牟山)이 있었다. 한 때는 유목민들이 하북 평원에서 만주에 이르는 넓은 지여에 흐터저 살았다는 증거다.
<<미추홀 宜家宜人. 마땅할 의 宜자는 꼴 먹일 추자와 같다.𠣨:《唐韻》古文宜字.
北魏孝明帝正光二年 521年: 逝世: 東魏孝靜帝武定 … 因此高澄在武定六年(548年).高澄(521年-549年),字子惠,北魏、東魏權臣高歡之子,父親死後,任大丞相。北齊追尊為文襄帝.
古邾國,帝顓頊之後所封。从邑芻聲.鄒:《唐韻》《正韻》側鳩切《集韻》《韻會》甾尤切,𠀤音騶。《說文》魯縣,古邾婁國,帝顓頊之後所封。《徐曰》《孟子題辭》邾國至孟子時,魯穆公攺曰鄒。又通作騶。《史記·孟軻傳》孟子,騶人也。又姓。《廣韻》漢有鄒陽。又《字彙補》從娶切,音聚。《史記·孔子世家》如顏濁鄒之徒。《正義》鄒,音聚。俗省作邹。互詳前郰字註. 草食曰芻.
古邾 邾國(又名邾婁國、鄒國)
대륙백제를 다룬 북제서 (北齊書)에는 왜(倭)자가 없다. 북제라는 이름을 붙인 뒷면에는 고 본다. 대륙 밖의 이들 세력은 왜국(倭國)으로 표기 했다. 북제는 고제 또는 제씨(멋대로 할)천 동하(齊氏擅東夏)라고 비하 하여 부루고, 남제는 간략히 제(齊, 479년 ~ 502년) 라고도 부른다 .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에만 나온다. 중국사서에 고 했다. 위덕왕이 북제의 성립에서 패망을 목격한 사람이다. 제27대 위덕왕(威德王: 재위: 554년~598년) 17년(570년)에는 고제 후주가 백제왕에게 절을 하고 (高齊後主拜王) 하는 문구가 있다. 그를 북제서에는 황제 본기 8에 애기 황제(北齊書 卷八帝紀第八後主,幼主) 라고 실었다 . 같은 내용이 백제 본기 위덕왕 편에도 실렸다 . 이 문구를 1983년에 출판된 한글 번역 본에는;<북제의 후주가 왕을 임명하여 황제 측근의 시중을 보내 거기대장군 대방군공 백제왕 (車騎大將軍帶方郡公百濟王)이라 하고, 다음 해에 또 다시 특절도독으로 청주 동쪽 모든 군사를 맏아보는 청주자사(使持節都督東靑州諸軍事東靑州刺史)로 했다.
위덕왕의 선조가 발해만 연안에서 산동반도일대를 통치했었다는 증거다.
제의 황제(齊帝)란 표현은 고구려본기 (高句麗本紀第七), 문지명왕 3년 (494년) 과 5년에 만 나온다 . 남제(南齊)를 뜻했다. 고구려는 중국 남북왕조와 모두 교류 했다. 뒤를 이었던 큰아들 안장왕(安臧王, 재위 : 519년 ~ 531년)이 죽고 아들이 없서 동생이 뒤를 이어 23대 안원왕(安原王, 재위 : 531년 ~ 545년)이 되였다. 모두 남북조와 교류 했다. 그의 아들이 제24대 양원왕(陽原王, 재위 : 545년 ~ 559년)
이다. 그가 백제 위덕왕과 같은 시대 사람으로 북제의(北齊; 550년 -577년) 시작과 종말을 목겪했던 사람이다. 제위 6에 북제 창건에 사절을 보내, 북제는 시중이 인도한 특별 사절단(持節侍中)을 보내 표기대장군령호 동위 교위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 (驃騎大將軍領護東夷校尉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이란 칭호를 받았고, 7년, 11년에도 북제와 교류가 있었다 . 중원에서 특별 사절단(持節侍中)을 보냈다는 기록은 당시 고구려와 백제본기에 단 두번 실렸다. 중원의 지도자를 고구려 본기에는 “北齊封王爲” 라 하고 백제 본기에는 “高齊後主拜王為”라고 했다.
북제(北齊)를 고제(高齊)라 했다. 고제후주 (高齊後主)는 북제서(北齊書)에 실린
마지막 애기 황제(卷八帝紀第八後主 幼主)가 분명하다.
고구러는 양원왕(陽原王)의 뒤를 이어 장남 평원왕(平原王, 재위 : 559년 ~ 590년) 이 고구려의 제25대 왕이 되였다. 그를 평강상호왕 (平崗上好王)이라고도 한다. 이 당시 고구려왕들의 별호에는 국토가 확장되였고 평화가 유지 되였다는 뜻이 있다. 장수왕이후 부터 임유관 전쟁 발생 시 까지가 고구려 영토가 가장 확대 되였던 고구려의 황금시대 였다. 평원왕(平原王) 19년에는 북제의 뒤를 이는 북주에 사신을 보냈다. 북주의 고조가 배왕위 개부의 동삼사 대장군 요동군 개국공 고구려왕 (拜王為開府儀同三司大將軍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의란 칭호를 주었다 .
이 시대에 중원의 집권자가 삼한의 후예 지도자에게 경의(敬意)를 나타내는 접두어 배왕위(拜王為)란 문구를 썼다. 이시기에 중원에서는 막강 했던 북위가 동서위로 갈라지고 고씨가 동위로 부터 선양 받아 북제(高齊)가 되였다. 동북 아시아 역사상 이 시기에 한해(翰海)의 동서 남북 연안에 커다란 풍파가 일어 났다. 남북조를 통일한 수 문제(隋 文帝, 541년 ~ 604년.제위: 581년 ~ 604년)는 고구려와 신라에 사신을 보내 면서 경의(敬意)를 나타내는 배왕위(拜王為)란 문구를 썼다 .
신라는 북제와의 교류가 없었다. 오히려 남만주에서 밀려나 한반도 동쪽 끝에 자리 잡고, 고구려와 백제가 넓은 영역을 통치 하느라 뒤가 허술한 점을 이용하여 고구려의 동남쪽, 한반도의 북부를 공략 했다.
한반도 서남 쪽으로 수도를 옮긴 백제는 신라와 합세하여 반도 서북쪽 고구려 세력을 맞아 싸웠다. 이러한 영토 분쟁이 장수왕과 뒤를 이는 문자명왕(文咨明王) 시대 기록에 나타난다 .
백제의 옛날 수도 였던 충청도 부여에 있던 왕흥사 유적지(王興寺)에는 백제왕 창, 즉 위덕왕이 전사한 (맏)아들 항(恒)을 추모하여 577년에 세웠다는 사실이 최근에 발굴된 사리함 몸통에 “丁酉年二月 十五日百濟 王昌爲亡王 子爲刹本舍 利二枚葬時 神化爲三” 라고 음각되어 있다고 한다. (출처:위키리크에서)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실린 고제 후주(高齊後主)가 북제서(北齊書)에 실린 북제의 마지막 애기 황제 후주(後主,幼主) 가 분명 하다.
끝, November 8, 2017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