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쪽 사람들은 간웅 조조의 후손을 삼국의 종주국으로 기록한 삼국지에 불만을 품었다. 명나라 나관중(羅貫中, 1320년-1400년)은 역사 소설 삼국지연의 (三國志演義, Romance of the Three Kingdoms)를 역어 종주국을 촉한(蜀漢, 221년 -263년) 으로 바꾸었다. 고조선 영역의 서쪽에서 활동 하던 세력은 남쪽 세력과 서로 견제하며 기록을 수정했지만, 바다로 퍼저 나갔던 삼한의 후예들에 관한 기록은 아무도 이론을 제기한 사람이 없고, 그들이 남겼던 기록마저 소멸 되였다 . 옛 부터 중원에서는 “하우시(夏禹氏)의 후손이 새운 나라를 높다, 천손의 후예라는 뜻을 나라 이름”으로 했다. 하우시(夏禹氏)의 후손이 하북평원에 살면서 발음이 비슷한 하후(夏侯)를 성씨로 했다. 진수와 같은 시절에 하후담(夏侯湛, 243년-291년)이 삼국지 보다 먼저 위서(魏書)를 편찬 했다고 하나 그 내용은 알수 없다. 그 내용에는 단군신화가 실려 있었다고 본다. 담(湛)자는 단군(壇君)이라는 뜻이 있는 글자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우본기(禹本紀)란 편명이 있다 .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우(禹)의 혈통은 서쪽에서 왔다는 뜻이 숨어 있다. 삼국지에는 동이의 혈통을 왜인전에 실었다. 동이의 뿌리가 서역에서 왔다는 정황이 뚜렸하다. 백제왕실에서 쓰던 이름이 하언( 夏言)이란 기록도 있다. 삼국지에는 조위의 역사를 기록한 위서(魏書)의 처음 이름은 위지(魏志)였다. 이를 위서라고 바꾸었다. 위서(魏書)라는 이름으로 편찬 되었다는 사서는 무려 10여종에 가깝다. 어느 책을 인용 했는지 알수가 없다. 또한 삼국지에 “魏書云, 魏書曰, 魏略, 魏略曰” 하는 출처를 밝혔으나, 확인할 길이 없다. 위(魏)나라의 역사서 “위서(魏書)를 가짜 기록이란 뜻”으로 위서(僞書)라고 부르기도 하고, 더러운 기록이란 뜻으로 예서 (隸書, 穢書)라고 부르기도 했다. 예군 남려(濊君 南閭)가 28만명을 인솔하고 요동에 와서 그곳에 난민 수용소를 만들었다. 이를 창해군(蒼海郡)이라 했다 . 후에는 그 곳에 맥/예맥국(貊穢國)이 있었다. 발해만 서남쪽 늪지대다. 이러한 사실을 고려하여 삼국지에 실린 예전(濊傳)을 풀이 하고, 그들이 활동 지역이 어떻게 변해갔는가를 풀이 하고자 한다. 위지(魏志)의 내용에 실린 특히 “삼한의 후예들”에 관한 기록은 진수가 살았던 위진시대에 그들을 괴롭혔던 “오환,선비,동이”의 활동을 춘추필법에 따라 은미하게 남겼다는 증거가 이렇게 여러 곳에 보인다.
기원전 209년에 흉노 모두선우가 대흥안령을 너머 “동호왕 비”를 살해 하던 때에 고조선 영역에 살다 한무제의 친입을 받고 대흥안령을 너머 서쪽으로 갔던 오한 선비(烏丸 鮮卑) 분파와 동북쪽으로 피란 갔던 부족들(東夷)에 관한 기록은 사기 조선열전과 함께 동북아시아 상고사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사료다. 서쪽으로 갔던 분파는 기마유목민족 (騎馬遊牧民國家, The Eurasian Steppe)의 역사로 서양 사학계에서도 다루어 졌다. 중국 사서에느 “위진, 삼국시대, 오호16국시대, 남북족 시대” 역사서에서 많이 다루어 졌다. 그러나 동이(東夷)의 후손들은 자기들의 역사인 동이에 관한 역사를 정리해 보았다는 근거가 희박하다.
동이(東夷)의 입장에서 동이 역사의 출발점이 되는 조선열전과 삼국지 위지 30 (三國志 魏書三十)을 위주로 간단히 다루기로 한다.
끝
March 26, 2017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