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한(三韓)의 후예가 통치한 해안선이 한해(翰海):
중원의 내륙 지방은 대흥안령 서쪽에 살던 고조선의 후손들이 통치 했고, 대흥안령 동쪽에 살고 있넌 삼한의 후예들이 해안선을 따라 배길로 교역을 했다. 이를 한해(翰海)라 했다. 삼한의 후예들이 바다를 통치 했다. 뱃길을 처음 시작한 곳을 숙신씨의 고향이라 했고 그들이 새운 나라를 산해경에서는 해국(蓋國)이라 했고, 다른 사서에는 맥국(貊國)이라 했다. 왜(倭) 북쪽에 있다고 했다. 한서에는 조선이 바다 한가운데 있다고 했다 . 천진시 일대에서 발해 서북쪽 해안을 따라 조양에 이르는 지역이 삼한 (三韓)의 출발 점이고 한무제 친입으로 이들이 흐터져 중국 동해안으로도 내려 갔다는 뜻이다. 그들이 사는 곳을 강 하류에 있는 섬(海河洲中) 또는 바닷속에 읍과 시(邑,市)를 이루고, 그 바다에는 봉래산(蓬萊山) 이 있다고 했다. 발해만에서 해안을 따라 양자강 하구에 이르는 지역을 그렸다.
오호 십육국 시대 때 초기에는고구려의 왕족 출신인 고운 (高云, 慕容云)이
후연(後燕)을 멸망시키고 북연(北燕, 407년-436년)을 건국하고 낙랑공주
(樂浪公主)란 칭호를 썼다. 오호 십육국 시대 말기에는 고씨(高氏)가 산동성에서 20여년 동안 북제(北齊, 550년-577년)를 건국했다. 24사의 하나인 북제서(北齊書)
에는; “첫쩨 황제는 고씨(高氏) , 발해수인(渤海蓚人) 이다. 6세조 은(隱)은 현토태수였다 . 하여 북변 지역 풍속은 선비와 같았다” 고 했다. 태평어람
(太平御覽)에도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그 글자 속에는 고씨의 숨은 내력이 있다 . 그 이외에도 한국역사에 관한 기록이 많이 실려 있다.
낙랑지역에서 서쪽으로 진출한 조선의 후예들이 대흥안령 서쪽에 살던 부족들과 세력 다툼이 일어 났다. 연 (燕)이란 나라 이름을 쓰던 사람들이 동호의 후손이라 하여 간략하게 호 (胡)라 했다. 고조선을 동호라 했고, 한무제가 친입한 지역을 조선호(朝鮮胡) 또는조선호국(朝鮮胡國)이라고 불렀다. 동호의 후손들이 세운 나라를 모아 위지 (魏志) 권30 오환선비동이전(烏丸鮮卑東夷傳)을 만들었다.
후한말에 나타난 “위, 촉, 오 세나라 전쟁”을 명나라 초기에 나관중(羅貫中,
1280년? – 1360년)이 소설로 만들어 삼국연의 (三國演義)를 남겼다. 그 시대의 유명한 전략가 였던 간웅 조조의 아들이 새운 나라를 조위(曹魏,220-265년)라 하고 그 뒤를 이어 조조를 보필했던 사마중달의 후손이 새운 나라가 (西晉, 265-316년) 이다. 하남성 허창(許昌)에서 나타난 세력이 서쪽에 있던 천년의 고도 낙양(洛陽) 을 수도로 정하고서 100년도 못되는 기간 동안 중원땅을 통치 하면서 동서남북 사방에서 밀어 닥치는 세력 속에 시달렸다. 서남쪽에 세력을 펴고 있던 유비와 강남에 있던 동오의 손권 세력을 견제 하려고 동북쪽에 사는 고조선 후예들의 세력을 이용했다. 삼한의 후예들은 그들의 모사술에 너머가 희생을 당했다. 이를 인식하고 있던 삼한의 후예들은 모사꾼의 앞잡이 였던 공손연이 238년에 처형 당하자 족쇠에서 풀려났다. 동서로 분리 되였던 고조선의 후예들이 함께 일어나 316년에는 모사꾼들을 강남(江南)으로 쫓아 버렸다. 중국 사가들은 강남으로 도망가 새운 나라를 동진(東晉,317-420년)이라 한다. 이 96년 동안에 삼한의 후예들과 모사꾼들은 발해만 서안 길목(Land Bridge, 靑丘)의 소유권을 놓고 치열한 경쟁이 있었다. 이 현상을 당 태종은 “개 샘이 퍼저 홍수가 났다”고 표현 했다 . 이 짧고 고달펐지만 만주 땅에 중원의 입김이 서렸다는 역사를 과장 하여, 동진 100년을 더해 위진시대 (220~420년)라 부르고, 그 시대에 요동 반도는 물론 한반도 북쪽 까지 중원의 세력이 미쳤다고 주장한다. 그 뒤를 이은 남북조시대(439-589년) 까지 합처서 오랫동안 요동반도를 통치 했다고 한다.
동진 시대에 이르러서는 양자강 이북 전역이 옛 고조선의 후예들이 다스리던 오호십육국시대로 이어젔다. 이들을 동호(胡)의 한 분파인 선비족 (鮮卑族)이
애용한 국호가 국호 연(燕)이란 글자였다. 이 글자는 산서성 해지 동북쪽 연안에서 처음 나타 났던 이름이다. 단군조선, 동호, 조선, 선비, 오환, 단석괴, 연, 낙랑이 오래동안 인접하여 살면서 혈연관계를 맺고 있었다.
제후국 진(晉)이란 상형 글자는 옛적 부터 그 곳에 있던 조선(朝鮮)의 뜻을 달리 표현하여 만든 글자라고 필자는 앞에서 설명 했다. 사마중달이 어떻게 하여 진(晉)이란 국호를 택했나는 알려 지지 않았지만,그의 혈통은 해지 연안 옛 고조선 지역 사람이다. 옛 고조선 부족의 지도자를 선우(鮮于)라 부른다. 그 지도자가 천손의 후예라 하여 오환(烏丸)이라고 불렀다. 필자는 이 두 이름의 어원을 2013년에 제출한 “글안의 어원”에서 자세히 설명 했다 . 그 부족의 “웃사람/ 지도자”란 뜻이다. 설문해자(說文解字)에 실린 비(裨)자 풀이가 죽서기년에 실린 내용이다. 빛(해, sun-ray)의 사음(寫音, 象聲, PLCs)자 라고 했다 . 같은 지역에서 조선이란 뜻을 또 다른 글자로 적은 이름이 선비(鮮卑) 라는 글자다. 그 근거가 사마천이 인용 했다는 국어진어 (國語 晉語)에 있다 . 비(卑)자는 노예를 뜻하는 뜻으로 옛 조선(朝鮮)의 후예를 비방한 글자다. 이 글자는 다른 여러 비“裨bì pí/bei1 pei/bhiɛ; 㘩, 比, 費,肥,非,丕,毗, 妣”자들과 같이 “해, 햇볓(sun, sun-ray)의 사음”자다. 북제서 시조 고씨(高氏)다. 관자에 실린 비이지계(卑耳之谿)는 해를 숭상하던 사람(耳)들, 즉 “해씨”들이 살던 지역을 뜻했다 . 여러 해 부족의 지도자란 뜻 (裨諸侯)의 어느 한 제후가 하우씨의 후손으로 알려진 비후(費侯)라고 했다 . 광개토대왕이 염수 북쪽(鹽水上)에서 싸웠다고 비문에 나오는 비려(碑麗)
는 조양에서 산해관으로 가는 곳에 있던 비이지계 (卑耳之溪)에 살던 비이씨 (卑耳氏)의 동음이자로, 선비(鮮卑)족 이였다 . 이러한 비자를 뜻으로 풀이 하여 옛적 조선 영역에 살던 한 부족 이름으로 선비(鮮卑)란 명사가 후한 말기 부터는 만리 장성이 흐르는 태행산맥을 따라 여러 곳에서 나타 났다. 비슷한 시절에 유향(劉向, 기원전 77년- 기원전 6년)이 전국시대에 남쪽 사람들이 읊은 시문을 묶어 편집한 초사(楚辭)에서는 산서성을 노예들이 살던 곳(隸省)이라 했다. 조선 땅에 살던 에서 그들을 선비(鮮卑), 즉 아름다운 비첩이란 뜻으로 시문에 올렸다 . 선비(鮮卑)와 진(晉)이란 글자는 조선(朝鮮)이란 글자와 같은 뜻을 지니고, 오환(烏桓, 烏亘)은 오손 (烏孫) 이라고 부르던 사람들이 동쪽으로 와 살면서 “지상에서 영원의 세계를 연락 하는 삼족오 (三足烏)의 알(烏丸)이라 뜻”이다. 천손의 후예란 뜻이다.
오늘의 형제가 다음 세대에는 사오촌으로 이웃에 살게 되고, 이웃간에는 전쟁이 자주 일어 났었다. 그러한 전쟁이 중국에서는 “오호 십육국 시대”로 나타 났고, 흥안령 동쪽에서는 삼한에 이어 한국역사에 나타나는 삼국시대로 이어 젔고, 계속하여 일본 열도로 건너가서 여러 부족국가를 미루어 살았다. 이들이 점차로 좀더 큰 정치 집단으로 변해 가는 전쟁이 계속되여 “일본 전국시대”를 거처 동북지역에 살던 원주민을 정벌하는 장군이란 뜻의 동정장군(東征將軍, 征夷大將軍)이 통일국가를 이룩 했다. 이(夷)자는 옛적에“모인(毛人) 또는 하이(蝦夷)이라고 하던 일본 열도 북부의 원주민” 즉 현 아이누족을 뜻한 글자다. 이들과 같은 부족이 신라가 울릉도를 처음 발견 했슬 때 나타난 원주민이라보 본다. 멀리 중국 서쪽에서 오손 (烏孫)이라 부르던 부족이 해지 연안에서는 호 (胡, 豪, 東胡)로 기록된 부족이다. 이들이 동북으로 옮겨 극동으로 갔던 사람들이다. 그들이 단군왕검의 형상을 가장 많이 닮은 체형이였다고 본다.
진시황 이후부터, 중원을 통일한 자는 언제나 삼한의 영역을 침략해 왔다. 한무제가 그 첫 쩨다. 기원전 109년에 만주 서남쪽 청구(靑丘)을 지나 조양에 이르는 지역을 친입한 여파로 삼한의 후예들이 오랫동안 전화 (戰禍)에 시달렸다.
삼한(三韓)의 후예가 한해(翰海)를 통치 하면서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밀려 바다에 나갔던 남쪽 사람들이 도착한 섬에서 만났다. 이러한 사연이 오호십육국 시절을 기록한 역사서에 숨어 있다.삼한(三韓)의 후예가 한해(翰海)를 통치 하면서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밀려 바다에 나갔던 남쪽 사람들이 도착한 섬에서 만났다. 이러한 사연이 오호십육국 시절을 기록한 역사서에 숨어 있다.상나라 말기에 기자를 따라 발해만으로 올라오지 못하고 옛 고향 땅에서 삼감의 난에 동조하던 부열(傅說)의 후손들이 반항하다 모두들 양자강 하류 늪지대로 쫒겨났다 . 이들이 뒤에나타나는 (東吳)의 원조다. 이들과 한해(翰海)를 통치 하면던 삼한(三韓)의 후예가 동오(東吳)를 강국으로 만들었다. 오(吳)란 뜻은 동쪽에 와 자리잡은 우왕(大禹)의 후손이 새운 나라다.
끝
February 12, 2017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