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한 (三韓)땅 청구(靑丘)의 새로운 고찰:
한국 상고사를 되찾아 가는 경과보고 “Research in Progress” -2.
개론: 고려시대 부터 삼한 (三韓)땅 청구(靑丘) 란 문구 를 한반도 (韓半島,
Korean peninsula)에 적용 했다. 소중국 (小中國)이란 별명 까지 붙었던
이씨조선 말기에 동학 (東學) 개혁 운동이 나타났다. 갑신정변 (甲申政變,
Coup 1884 년)이 실패했지만, 1897 년에 고종이 대한제국 (大韓帝國)이란
새로운 국호를 선포 했다. 중원으로 망명 했던 사람들이 만주에서 발표한
대한독립선언서에 대한민주 (大韓民主)란 문구가 나타났다고, 상해(上海)
에 나타났던 임시정부에서는 대한민국(大韓民國)란 이름을 썼다. 일본이
멸망하고 미군정시기 초, 1948 년 제헌국회 에서 국호선정을 다루었다.
오랫적 부터 써오던 조선(朝鮮), 고려 (高麗)의 유래를 깊히 토론 끝에
대한제국을 대한민국(大韓民國;Republic)으로 바꾸어 선포했다.
1
유교 사상이 정립 되던 시기에 원시 불교가 고조선의 마지막 수도 금미달
(今彌達) 에 알려 졌다.
2 새로운 종교관이 고조선 토속 신앙을 믿고 있던
미지의 세계(SMa-Out)에 가미 (added)되여 나타난 생활상을 중원 세력이
기록으로 남겼다. 기록 부터 풀이에 이르기 까지 많은 혼란이 나타났다.
한(韓) 삼한 (三韓) 한국(韓國) 청구(靑丘) 하는 개념은 치수사업을 하던
황하문명 발생지에서 처음 나타났다. 이러한 개념을 이름자로 만들어 중원
세력이 영토를 확장 하면서 미지의 세계 (SMa-Out) 였던 산동 반도와
만주에 접붙였다. 순자정론(荀子正論)에는 난세의 어려움을 다루면서
<왕옥산 요새에 숨었던 사람이 어떻게 동쪽에 있는 낙원 땅을 알수
있겠느냐 면서,이를 우물안의 개구리 우화 (坎井之蛙) 로 다루었다. 황하
문명의 발생지에서 요순임금이 양위(堯舜擅讓) 를 했다. 아사달 (阿斯達)
1
. 여자 독립군 정정화의 낮은 목소리 녹두꽃 未完.1987 3 월. 상하이 일기. 김자동 (지은이)
두꺼비 2012-12-05.대한민국 건국절 논쟁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2
.三國遺事: 都平壤城今西京始稱朝鮮。又名弓一作方忽山。又今彌達。御國一千五百年。周虎王
即位己卯封箕子於朝鮮。壇君乃移於藏唐京: 後還隱於阿斯達為山神。壽一千九百八歲。唐裴矩傳
云。高麗本孤竹國今海州. 周以封箕子為朝鮮. 漢分置三郡。謂玄菟樂浪帶方北帶方.
살삼묘우삼위(殺三苗于三危) 하는 이름이 나탄 곳에서 왕검의 칭호를
받았던 백익이 관여 했던 치수(治水)란 이름이 나타났다.
3
마지막 수도 금미달 (今彌達) 지역을 흐르는 여울을 호타하(滹沱河),
상간하 (桑乾河) 라고도 불렀다. 상간(桑乾) 이란 “유목민 지도자 (木)를
돕는 세 보좌관”이란 뜻이다.
4 금미달이 함락 당한 시기에 “흉노, 북부여,
고구려” 로 분산 되었다. 이를 사마천은 미지 수천리 (彌地數千里) 를
빼앗고 장성을 쌓았다고 했다. 진시황이 죽고 중원 세력이 약화 되여
북쪽으로 밀려 갔던 고조선 세력이 되 돌아와서, 수도를 빼앗긴 책임을
문책 했다. 사기에는 서쪽에 있던 흉노가 오만한 동호왕을 죽였다고 기록
했다. 싸움의 원인을 구탈 (甌脱)이라 하고, 대현 (代縣)을 구대지 (歐代地)
란 다른 글자로 기록 했다.
5
한서(漢書)와 전한기 (前漢紀) 에는; <예맥군 또는 동이 예맥군 남여
(穢貊君南閭)라는 지도자 이름이 나오고, 그가 280,000 명을 인솔하고
요동에 와서 살았다>고 기록한 창해군이 생겼다. 그곳이 백제 임나가
신라의 발생지다. 밭을 갈다 예왕인 (濊王印)을 얻었다. 고허촌 (高墟村)
이라던 곳이다. 거서간(居西干) 혁거세가 “조선(朝鮮) 의 유민이 여섯
마을에 살고 있던 곳” 에 나라를 세웠다. 신라가 수도를 한반도를로 옮기고
이름 또한 한반도에 나타났다. 광개토대왕비문에 신라(新羅) 임나가라
(任那加羅), 한예 (韓穢)란 글자가 실렸다. 금미달에서 내려와 창해군에
정착했던 사람들이 한해의 북동서 해안을 따라 세곳에 정착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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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孟子 告子下: 白圭曰:「丹之治水也愈於禹。」. 康熙字典:丹:赤色丹砂也。《書·禹貢》礪砥
砮丹。《山海經》丹以赤爲主,黑白皆丹之類。《博物志》和氣相感,則陵出黑丹。仁主壽昌,
民延壽命,天下太平。又以朱色塗物曰丹。又州名。本赤翟地,元魏置汾州,後改丹州。又《山
海經》鳳凰產于丹穴。又竊丹,鳥名。爲九鳳之一。又木丹,梔子花別名。紫丹,茈草別名。史
記 夏本紀: 堯求能治水者,群臣四嶽皆曰鯀可.
4
. 康熙字典 叒:《唐韻》而灼切,音若。榑桑,叒木。《說文》日初出東方暘谷,所登榑桑叒木
也。《徐曰》叒亦木名。東方自然之神木。又《精薀》叒,順也,道相似也。古人發明取友之
義,从三又會意,同心同德,而後可相與輔翼也。桑字从此,象衆手之形,非取其義。《正譌》
二又爲友,三又爲叒,所助者多,故爲順也。會意。
5
. 史記 匈奴傳:中有棄地,莫居千餘里,各居其邊爲甌脫.史記 趙世家: 二十六年,取東胡歐代地.
6
.漢書 郊祀志: 燕昭使人入海求蓬萊、方丈、瀛洲。此三神山者,其傳在勃海中,去人不遠。蓋嘗
有至者,諸僊人及不死之藥皆在焉.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 – 取韓穢二百廿家.
중원에 살던 사람들은 오랜 전란통에 다른 곳으로 옮겨 다녔고, 시대가
지나면서 같은 글자라도 지역에 따라 훈과 음이 다르게 사용 되었다.
발해만에 있던 신라와 백제의 수도 이전이 “삼한 (三韓)땅 청구(靑丘)의
한반도 이전” 그 주 원인이다.
삼한 (三韓)땅 청구(靑丘)의 어원:
조선을 삼한 (三韓)땅 청구(靑丘)라고 쓰는 어휘는, 고조선 발생지에서
부터 발해만 서남쪽 해안에 이르는 지역에서 찾아야 한다.
삼 (三, 參,蔘)자의 출원지는 풍백우사운사(風伯雨師雲師) 세 보좌관을
대데리고 (북쪽에서) 내려와 정착 했다는 분수 하류에고 치수를 하던
곳이다.
부여시조 동명(東明)에 관한 같은 내용이 후한서와 태평어람에 사수
(掩㴲音斯水)를 건넜다고 했다. 삼국유사에는 고구려 시조 주몽이 건너온
강이 어느 강인지 모르겠다(行至淹水今未詳)고 했다. 사수(斯水)의 사(斯;
sī/si1/siɛ) 자는 사음자가 분명 하다. 같은 음을 “虒,媤 斯 絲,㴲”란
글자로도 기록 했다. 시경 등 각종 고전에 많이 나오는 글자다
설문에 바다 해(海)자를 천지(天池)라 했다.
7 천독(天毒)이 사는 호수(池)
란 뜻이다. 광운(廣韻)에는 설문해자에 실린 천지를 해주(海州)라했다.
8
단군조선의 발생지인 해지(解池; 治也)연안에 고죽국있었다고 했다.
이 지역을 한원(韓原) 이라 했다. 주성왕(成王)이 고조선의 후예가 살던
곳을 빼앗고 강 건너편에 한성(燕師城韓)을 쌓았다.
9 성을 빼앗긴 사람을
읊은 시문이 시경에 실린 사간(斯干)이다. 그가 희발을 도와서 목야전에
7
.三國遺事: 意在斯焉古朝鮮王儉朝鮮. 都平壤城. 又名弓一作方忽山。又今彌達。御國一千五百
年。周虎王即位己卯封箕子於朝鮮。壇君乃移於藏唐京: 後還隱於阿斯達為山神。壽一千九百八
歲。唐裴矩傳云。高麗本孤竹國今海州. 周以封箕子為朝鮮. 漢分置三郡。謂玄菟樂浪帶方北帶方.
8
. 說文解字 水部: 海:天池也。以納百川者。从水每聲. 治也. 廣韻 海:《說文》曰:天池也,以
納百川者亦州禹項徐州之域七國時屬楚秦爲薛郡漢爲東海郡後魏爲海州亦姓
9
. 竹書紀年 成王: 十二年,王帥、燕師城韓。王錫韓侯命.
깃발을 들고 선봉을 달렸던 백어(白魚)필공(畢;bì 公) 이다. 고죽군의
부친이라 본다. 그에게 “용작전공보존 이 用乍旜公寳尊彜”란 글자가
세겨진 이괘를 선물로 주었다.
10 그가 백익(彜)의 후손임이 분명 하다.
시경에 많이 실린 천할 시 또는 어조사(斯)로 풀이 하는 글자는 아사달
(阿斯達)에 실렸고, 신라(新羅)의 옛 이름을 사로(斯盧, 斯羅)라고 했다.
일연스님이 위서를 인용(魏書云)하여 남긴 문구“意在斯焉” 가 태사공이
아들에게 남긴 유언 “意在斯乎!意在斯乎!”으로 실려있다.
11
어조사(斯)를 시로 발음 하여 죽음시 시라(尸羅)로도 기록 했다. 금미달
에서 해안으로 내려와 정착한 부락 이름이 광개토대왕 비문에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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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진언성선(尸羅秦言性善)이라 했다. 근위병으로 장렬히 싸우다 죽은
사람(valor)을 뜻했다. 여러 글자로 여러 곳에 나탄 신라(新羅)와 가라/야는
불교 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13 동남아와 중앙 아시아에도 있었다. 동쪽 땅을
진단(震旦)이라 했다. 진언(秦言)을 진언(辰言)이라 했다.
14 진한(秦韓)을
진한(辰韓) 또는 진국(辰國, 震國)으로 바꾸어 한반도에 접붙였다.
10
. 利簋銘文: 利簋銘文: 珷征商,隹甲子朝,歲鼎克昏,夙有商。 辛未,王才闌啟,易又吏利
金,用乍旜公寳尊彜. 1976 年出土於陝西臨潼縣(今西安市臨潼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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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史記 太史公自序: 太史公曰:「先人有言:『自周公卒五百歲而有孔子。孔子卒後至於今五百
歲,有能紹 明世,正易傳,繼春秋,本詩書禮樂之際?』意在斯乎!意在斯乎!小子何敢讓焉。」
12
.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 – Wikisource
13
.尸羅: Śila,又云尸怛羅,正譯曰清涼,傍譯曰戒。身口意三業之罪惡,能使行人焚燒熱惱,戒
能消息其熱惱,故名清涼。又,舊譯曰性善。大乘義章一曰:「言尸羅者此名清涼,亦名為戒,
三業之非,焚燒行人,事等如熱。戒能防息,故名清涼。清涼之名,正翻彼也。以能防禁,故為
戒。」義林章三本曰:「尸羅梵語,此言清涼。」華嚴玄談三曰:「或名尸羅,具云翅怛羅,此
云清涼,離熱惱因得清涼果故。」行事鈔中一曰:「尸羅此翻為戒。」智度論十三曰:「尸羅秦
言性善,好行善道不自放逸,是名尸羅。」. 譯曰戒光。道琳法師在梵之名也。見求法高僧傳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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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遺事: 按三國史云。新羅稱王曰居西幹。辰言王也。或云。呼貴人之稱。或曰。次次雄。或
作慈充金大問云。次次雄方言謂巫也。世人以巫事鬼神尚祭祀.三國史記 新羅本紀第一:號居西干。
國號徐那伐。先是,朝鮮遺民分居山谷之間,為六村:二曰突山高墟村,是為辰韓六部。高墟村
長蘇伐公望楊山麓,蘿井傍林間,有馬跪而嘶,則徃觀之,忽不見馬,只有大卵。六部人以其生
神異,推尊之, 至是立為君焉。辰人謂瓠為朴,故以朴為姓。居西干,辰言王。或云呼貴人之稱。
논란이 많은 또 한 이유는 [단군조선의 발생지인아사달에 살던 사람들의
후예가 아시아여러 곳에 흩어져 살았다. 선조들이 내려온 길을 딸 올라가
정착 했던 마지막 수도 금미달(今彌達) 에서 발해만으로 내려와 여러
소읍국가를 세웠다. 그후 점차로 한해의 동서 연안을 따라 세 곳에
흐터져서 같은 이름이 나타났다]는 사실을 몰라 이러한 잘못이 나타났다.
그 전통을 이어온 사람들이 한반도에 이르러 고조선 첫 수도에서 마지막
수도 금미달 지역에 붙였던 이름이 한반도에 나타났다. 임나 (任那)는 의역
(意譯) 이요 신라(新羅)와 가라(加羅)는 음역 (音譯)한 글자다.
1. 삼한 (三韓)의 어원: 삼한 (三韓)이란 글자는 진수의 삼국지 한전에 유
삼종 (有三種)에서 유래 되어 한중 여러 문헌에 나타났다. 진수는 동호왕을
조선왕부(朝鮮王否)라고 했다. 그 아들(其子)이 한(韓) 땅에서 왕이 되었다.
위만 땅으르 나누어 군을 만든 곳을 마한(馬韓)이라 했다. 그곳 만주에
남아있던 가족은 모성 한씨(因冒姓韓氏)라 했다. 모두 유목민을 뜻한
사음자다. 삼국사기 백제전에 온조가 마한 (馬韓)왕을 밀어 내고 수도로
정했다. 삼국유사 에 삼국의 전신을 설명 했다. 그러나 그 시원이 석갈렸다.
그 아들(其子)이란 글자를 잘못 기자(箕子)로 풀이 하여 평양에 기자가
와서 나라를 새웠다고 한다. 대동강 하구, 강서 고분군이 나타난 지역에
온조가 정착했다.
15 형 비류가 세웠던 대륙백제와 교류가 활발 했다.
지도자에는 “세 종류가 있다”란 뜻이다. 그러나 세 종류를 “馬韓, 辰韓,
弁韓” 다른 글자로 기록 했다. 지도자 한 (韓, Khan)이 다스리던 천할 시
(斯, 離也)자를 떠나 버린 부족이란 뜻으로 조 제 진 조선 (趙齊𨻰鮮)의
선자로 풀이 했다.
16 이러한 글자로 기록된 나라들이 중원에 있었다.
상나라가 망한 전투 장소를 “목야전쟁;坶野.牧野之戰”이라 했다.
15
. 三國遺事:朝鮮王準率宮人左右。越海而南至韓地。開國號馬韓。甄萱上大祖書云。昔馬韓先
起。赫世勃興。於是百濟開國於金馬山。崔致遠云。馬韓。麗也。辰韓。羅也據本紀朝鮮王準率
宮人左右。越海而南至韓地。開國號馬韓. 三國志 韓傳:準與滿戰,不敵也。將其左右宮人走入
海,居韓地,自號韓王。魏略曰:其子及親留在國者,因冒姓韓氏。準王海中,不與朝鮮相往來.
16
. 康熙字典 斯:《說文》析也。《爾雅·釋言》斯,離也。《註》齊𨻰曰斯。《呂覽·報更篇》趙
宣孟見桑下餓人,與之脯一朐,曰斯食之。《註》斯,析也。又《爾雅·釋詁》斯,此也。《易·
解卦》朋至斯孚。《詩·召南》何斯違期。又《詩·小雅》鹿斯之奔。又與鮮同。《詩·小雅》有兔
斯首。《箋》斯,白也。今俗語斯白之斯作鮮.三國志 魏書三十 韓傳: 韓在帶方之南,東西以海
為限,南與倭接,方可四千里。有三種,一曰馬韓,二曰辰韓,三曰弁韓。辰韓者,古之辰國
也。馬韓在西。辰王治月支國. 康熙字典:《唐書·東夷傳》新羅,弁韓苗裔也,居漢樂浪地。
왕검조선의 발생지 한원(韓原)에 살던 사람들이 중원에 살아 한국(韓國)
이란 글자가 남아 았다.
17 삼한(三韓)이란,중원을 석권했던 (桓公彌亂
今國彌亂, 既彌留,彌:益也) 발조선 시대에, 고조선 사람들을 뜻했다.
그들이 전국시대 말기에 중원에 있었다는 역사 기록이 이사가 한왕에게
올린 글(李斯往詔韓王)에 실렸다. 다섯 제후(五諸侯) 국이 같이 한을 공격
하니 진이 구해 주어(秦發兵以救之)한이 중국에 살았다. 후에 한(韓)이
배반하고 안문(鴈關) 관에서 진(秦)을 공격 했다. 진한 전란 통에 한(韓)이
이끄는 무리들이 동쪽 진국으로 가서 나라를 세웠다. 하여 동쪽에 있다는
뜻의 진(辰 震)국 을 한국(韓國)이라 했다.
18 묵자한고,후한서 동이전,
진수의 위만조선의 연혁에, 또 삼국사기 신라본기 에도 그 렇게 실렸다.
19
강희자전에 따르면, 삼한(三韓)의 이름자(辰韓,示韓,馬韓)를 (글자
속에 잠긴 지역의 한계를 바꾸려고) 후한 광무제 (漢光武) 때에 다른
글자로 바꾸었다는 사료가 있다 . 앞에 인용한 후한서 동이전을 보라고
했다. 꼬까리 변(弁)자를 음과 뜻이 비슷한 법 변(卞)자로 바꾸었다 . 변한
(弁韓)이란 글자를 오직 한국에서 만이 변한 (卞韓)이라고 기록 했다.
Byeon-hahn 弁韓, 卞韓 Shee-hahn 示韓은 모두 법 변(卞)자는 이아
설문해자등 자서(字書)와 주역 주례(周易. 周禮)에는 없다. 초씨역림에는 두
글자를 “羔羊皮弁, 非卞氏”다른 뜻으로 썼다. 비변씨보(非卞氏寶)란 문구가
17
.漢書 高帝紀下: 以太原郡三十一縣為韓國,徙韓王信都晉陽。漢書 魏豹田儋韓王信傳: 乃更以太
原郡為韓國,徙信以備胡,都晉陽。信上書曰:「國被邊,匈奴數入,晉陽去塞遠,請治馬
邑。」上許之. 韓非子 飾邪:今者韓國小而恃大國,主慢而聽秦魏、恃齊荊為用,而小國愈亡. 韓非
子 存韓: 李斯往詔韓王,未得見,因上書曰:「昔秦、韓戮力一意以不相侵,天下莫敢犯,如此
者數世矣。前時五諸侯嘗相與共伐韓,秦發兵以救之。韓居中國,地不能滿千里,而所以得與諸
侯班位於天下、君臣相保者,以世世相教事秦之力也。先時五諸侯共伐秦,韓反與諸侯先為鴈行
以嚮秦軍於關下矣。諸侯兵困力極,無奈何,諸侯兵罷。杜倉相秦,起兵發將以報天下之怨而先
攻荊,荊令尹患之曰:「夫韓以秦為不義,而與秦兄弟共苦天下。已又背秦,先為鴈行以攻關。
韓則居中國,展轉不可知。」天下共割韓上地十城以謝秦,解其兵。
18
. 論衡 對作: 楊、墨之學不亂傳義,則孟子之《傳》不造;韓國不小弱,法度不壞廢,則韓非之
書不為.後漢書 東夷列傳: 辰韓,耆老自言秦之亡人,避苦役,適韓國,馬韓割東界地與之
19
.墨子閒詁 兼愛中: 職方氏有九貊,漢書高帝紀,顏注云:「貉在東北方,三韓之屬皆貉類
也。」. 三國史記 新羅本紀第一: 馬韓王薨。或說上曰:「西韓王前辱我使. 前此中國之人苦秦
亂,東來者衆,多處馬韓東,與辰韓雜居,至是寢盛,故馬韓忌之,有責焉。瓠公者,未詳其族
姓。本倭人,初以瓠繫腰,渡海而來,故稱瓠公. 三國志 魏書三十 濊傳:。陳勝等起,天下叛秦,
燕、齊、趙民避地朝鮮數萬口。燕人衞滿,魋結夷服,復來王之。
있다. 굴욕을 당하고 아무런 소득이 없다고 했다. 주족은 빛을 숭상하던
비변씨 (非卞氏)를 삭제했다. 시경과 주례에는 꼬까리 변(弁: 冠弁,弁師)
으로 실렸다. 이 두 글자는 각종 선진문헌에 나타난 글자다. 세 글자(弁, 卞,
示韓)는 모두 중원에서 써오던 글자로 같은 이름이다. 진수가 왜인전에
시라국 속 안식 (斯羅國屬安息), 월씨국 (月氏國)이란 문구를 불교 전래
설명에 남기고, 변진한 (弁辰韓)이란 편명을 만들어 었다.
옛적에 거괴 (渠魁)라 하던 거수(渠帥)와 신지 (臣智)란 관명이 삼국시대
이후에까지 중원에도 있었다 . 신라와 고구려 초기 본기에는 예맥거수
(濊貊渠帥, 貊渠帥)란 글자가 있다. 통전에는 변방 동이 진한과 변진(辰韓,
弁辰)편에 같은 관명이 실렸다. 전국시대 기록에는 서언왕 (徐偃王)에 관한
기록이 있고, 사기 진본기에는 서언왕작란(徐偃王作亂)이 있다.
20 동이들이
한해의 동북서 해안에 살았다는 증거다.
대만을 동이가 사는 섬이라 이주(夷洲)라고 했다. 그곳 사람들은 진시황이
방사 서복(方士徐福)의 말을 듣고 불사초를 찾아 오라고 젊은이 수천명을
발해만에서 바다로 보냈다는 사람들의 후손이라 했다. 발해만 동남쪽
연안에 나타났던 창해군 (滄海之郡)이 2 년후에 사라젔다. 배를 타고 다른
곳으로 떠났다는 증거다. 당시 한해의 동서 해안으로 흐터져 나갔다.
동오의 손권이 고구려와 공모하여 조위를 치려고 사신을 보냈다. 고구려와
동오의 사신은 해상로를 관장하던 대륙백제 사람들이었다. 후에는 강동에
살던 부족이 중원의 옥쇄를 잡아 북제를 건국 했다.
당태종이 백암성을 정복하고 남긴 극고려백암성소 (克高麗白巖城詔)에 반
삼한지사“反三韓之士, 編列弁辰之野, 燕碣土風, 晉後苦湧水之災”란 문구가
있다. 삼한(三韓)이란 글자는 하북평원에서 남만주로 이어지는 지역이였다.
그들이 통치 하던 바다라 한해 (翰海 瀚海)라 했다. 동북서 세 해안에 한
(韓)이 이끄는 사람들이 살았다는 뜻이다. 고려를 다녀간 서긍의 고려도경
에 삼한(三韓)이실렸다. 삼국지에 실린 내용으로 설명 했다.
21
20
. 荀子 非相: 且徐偃王之狀,目可瞻馬. 韓非子 喻老: 夫治國者以名號為罪,徐偃王是也. 康熙字
典 九: 《韓非子·喩老篇》白公勝慮亂,罷朝,倒杖而策,銳貫顊,血流至于地而不知 史記 秦本
紀: 徐偃王作亂,造父為繆王御,長驅歸周,一日千里以救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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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高麗圖經: 晉史謂三韓之人初生子便以石壓其頭令扁非也葢繇種類資稟而然未必因石而扁.
2. 청구(靑丘)의 어원: 청구(靑丘)란 청산 (靑 靑山) 이 있는 지역(青州)의
어느 계곡을 뜻했다.
22 푸를 청(靑 青)자 설명은 더더욱 혼잡 하다.
편의상 “달월(月) 변 청 青자, 붉을 단(丹) 변 청 靑자” 라고 부르겠다.
붉을 단(丹) 변 청 (靑)자는 선진시대 문헌에는 보이지 않는다.
설문해자에도 없다. 사기에는 “붉을 단(丹) 변 청 (靑)자가 없고, 모두
달월(月) 변 청 青”자로 썼다. 단(丹)자는 앞서 설명한 단수(丹水)에 설명한
치수(治水) 사업을 하던 지역에서 나타났다. 요제의 장남을 단주(丹朱)라
한다. 그를 가르치려고 비북을 고안 했다고 한다. 그러나 바둑은 단군왕검
백익이 고안 했다고 논증 했다. 뚝섬에서 전쟁 연습을하여 그곳을 치우기
섬(둑도; 纛島)이라고 했다. 치우기(纛; 上:毒,下:縣)는 “산해경에 실린
천독 (天毒)의 고을(顯),영토를 뜻한 글자”다. 바둑 용어에 약우란 용어가
있다. 상서(尙書)를 비롯한 여러 고전에는 약(若)자가 많이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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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적 강희자전에는 산해경에 실린 청구(靑丘)란 글자가 여러곳에 보이고
낙랑 (樂浪)을 설명할때 인용한 물 맑을 영(渶)자가 청구산(靑丘山)에서
시작 한다고 했다. 그러나 현제 쓰는 강희자전에는 모두 “붉을 단(丹) 변 청
靑자”청구 (靑丘) 를 달월(月) 변 청구(青丘)로 기록” 했다. 내력을 살펴
보면 붉을 단(丹) 변 청(靑)자가 원조다.
진시황 이전에 편잔된 여씨춘추에는 대우가 인물을 구하려고 동쪽으로
갔다는 지명에 조곡(鳥谷)、청구지향(青丘之鄉), 흑치지국(黑齒之國)이란
이름이 있다. 조곡은 까마귀 오자 오곡(烏谷)으로 오씨가 살던 곳이고,
22
.《廣韻·下平聲·靑·靑》靑:東方色也,亦州名九州之一禹貢曰海岱惟靑州又男靑女靑皆木名出
羅浮山記亦姓出何氏姓苑又漢複姓三氏風俗通云漢有靑烏子善數術又有靑牛氏靑陽氏。倉經切.
《康熙字典·青部·青部》靑:〔古文〕𡴑𡴏𡴐𡗡寈《唐韻》《集韻》《韻會》𠀤倉經切,音鶄。
《說文》東方色也。《釋名》靑,生也。象物之生時色也。《書·禹貢》厥土靑黎。《荀子·勸學
篇》靑出之藍而靑於藍。又神名。《史記·封禪書》秦宣公作密畤于渭南,祭靑帝。又州名。《書·
禹貢》海岱惟靑州。又鳥名。《禮·曲禮》前有水,則載靑旌。《註》靑,靑雀,水鳥。又木名。
《庾信·步虛詞》空靑爲一林。《註》雲笈七籤,玉淸天中有樹,似松,名曰空靑之林。《廣韻》
出何氏姓苑。又複姓三氏,漢有靑烏子。又有靑牛氏,靑陽氏。與菁同。《詩·衞風》綠竹靑靑。
《傳》靑靑,茂盛貌。《釋文》靑,子丁反。本亦作菁。又《小雅》其葉靑靑.
23
.丹朱 – 维基百科,自由的百科全书 (wikipedia.org). 바둑에 숨은 상고사-보충 설명: « Lee Mosol’s
Book Collection (ancienthistoryofkorea.com).약우 (若愚) « Lee Mosol’s Book Collection
(ancienthistoryofkorea.com).
흑치국의 흑자는 해(sun, sun-ray,亥, 奚, 解)의 사음자로 단군조선의 한
부족이 살던 곳을 뜻한다. 그 한 지류가 남쪽으로 내려 갔다. 하여 구미호
(九尾狐) 흑치(黑齒)이름이 지나 (支那) 영역에도 나타났다.
삼한(三韓)은 금미달이 있던 “쌍건하 (桑乾河)에서 설명한 세 지도자
중에서 흉노나 고구려가 아니라 부여의 후손” 이란 뜻이다. 금미달 지역
사람들이 중국 해안을 따라 남쪽 내려간던 사실을 신미제국 (新彌諸國)이란
문구로 진서 (晋書) 장화열전(張華列傳)에 나온다.
그로 인하여 남조 역사서에 백제여왕 비미호(卑彌呼)의 후손 왜오왕
(倭五王)이 다스렸다는 倭,新羅,任那,伽羅, 秦韓慕韓”이 실렸다. 중원
동해안에 산제해 있던 나라다. 신라(新羅)는 487 년에 한반도에 수도를
옮기고 502 년에 처음으로 중원에 사신을 보냈다. 불교를 숭산 했던 남조
양(梁)나라의 초대 황제가 같은 행사에서 加羅과 倭王을 맞았다. 加羅의
통치권을 두 사람에게 부여 할수는 없다. 진한 모한 (秦韓慕韓) 하는 나라
이름은 한반도나 일본 열도에는 없었다. 같은 글자 신라 임나 가라
(新羅任那加羅)라는 이름이 남만주와 한반도에 나타났다.
전한 말기,한고조의 후손 유향 (劉向, 77 년 ~ 기원전 6 년; 詔光祿大夫
劉向校經傳諸子詩賦)이 어명에 따라 경전과 시부를 정리 했다. 그의 저서
신서(新序),설원(說苑),열녀전(列女傳), 전국책(戰國策) 등을 비롯 하여,
금미달이 점령 당한 전국시대 후기 부터 많은 학자들이 저술한 일차 사료가
전해 온다. 그때에 양자 방언(方言)이 나타났다. 그러나 언어 변화에는
시간이 많이 걸렸다. 특히 회하(淮河)를 경계로 남북의 언어는 청나라 말기
까지 계속 되었다. 위진 혼란기에 불교가 번창 하고, 많은 사람들이 북쪽
에서 남쪽으로 피란 했다. 동진때 하동 (河東) 사람 곽박 (郭璞;276-324)이
여러 고전에 주를 달았다. 푸를 청(靑 青)자를 달리 쓴 기록이 나타났다.
필자는 여러 차례에 구주의 영역과 크기를 설명 했다. 해 “解를 海”로,
때로는 누르 황 붉을 적(赤, 比) 아무아물 하다는 뜻에 가물 현(玄), 거물
흙(黑), 햇볓을 사음한 비(非, 費, 肥), 해비씨 (解枇氏), 등 빛을 숭상 하는
사람들의 수령 백익의 후손을 뜻한 글자(非子伯益之後)로 바꾸어 기록
했다. 앞서 고죽군이 이(李)씨 라 했다. 그 밖에도 “江, 共, 𨛬, 裴, 秦”등
많은 성씨가 백익의 후손이다. 이렇게 처음 만들어진 글자의 뜻과 어음을
돌려 여러 글자로 기록 했다. 고죽군이 살았다는 중산국이 있던 지역을
대현이라 한다. 같은 부여의 후손들이 남방불교를 받아드리고 한해의 동서
연안에 살았지만 한반도에서 만이 붉을 단변 청(靑)자로 쓰고 있다.
황제 헌원이 찾아온 풍산(風山)은 청산 계곡(青山 靑丘) 또는 그 가까이에
있었다. 고조선 영역이었던 국어 진어(晉語)에 실렸다.
24 산서성에서
발원하여 황하로 이어지는 상군(上郡)이라 부르던 지역으로, 옛 제후국
진(晉)의 영역에 있었다. 청산 청구(青山 靑丘) 또한 그 지역에 있었다
여러 선진문헌에 기록된 청주 (青州)는 구주의 동북 쪽 (燕曰 幽州)에서
분하 북쪽으로 올라가서 새로 빼았은 땅(SMa-Out)에 나타난 지역에 접
붙였다. 주례직방씨(周禮職方氏) 남쪽 오나라에서는 공손연을 청주목
요동태수연왕 (青州牧遼東 太守燕王)칭호를 주었다.
25 푸를 청(靑州)자를
바꾸어 청주 (青州)라 했다.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옛 청주(古青州)로
옮겼다는 기록이 통전에 있다. 기록이 남아 있지 않는 발해와 고려 왕건이
모두 남만주에서 나타났다는 기록도 있다.
부여 공손씨(不與公孫氏)의 후손이 만주 땅에 올라와 우거왕의 경기 지역
에 자리잡아 현토 태수 공손역(玄菟太守公孫琙)이 나타났다. 현토 태수가
대륙백제의 시조가 된다. 하여 백제의 성씨를 부여(扶餘)라 한다. 고구려와
백제는 부여에서 나와 고(高)씨 해(解)씨를 성씨로 쓰고 고려에서는 왕씨
(王氏)라 했다. 서긍은 왕씨의 혈통을 모르겠다고 발뺌 했다. 송(宋) 휘종
(徽宗)이 1123 년 고려(高麗)에 사신(國信使)를 보낼 때에 따라 왔던 서긍
(徐兢;1091-1153)이 황실에 바친 비밀문서에는 청(靑)자가 없다. 모두
달월 변 청 (青)자로 실렸다. 서긍 일행을 안내하고 후에 삼국 사기를 남긴
김부식은 청구(靑丘)를 청구(青丘)로 단 한번, 불교 신자 사찬 수미산
(沙飡須彌山)을 특사로 보내서 고구려 사자 안승(嗣子安勝)을 후고구려
24
. 國語 晉語八: 風德以廣之,風山川以遠之,風物以聽之,修詩以詠之,修禮以節之. 水經注 河
水:河水南逕北屈縣故城西,西四十里有風山,上有穴如輪,風氣蕭瑟,習常不止. 河側有兩山相
對,水出其間,即上河峽也,世謂之青山峽。河水歷峽北注,枝分東出.後漢書 馮岑賈列傳:青山
胡率萬餘人降異。異又擊盧芳將賈覽 匈奴薁鞬日逐王 破之。上郡 安定皆降 異復領安定太守事.
25
.字書 急就篇: 朋黨謀敗相引牽。欺誣詰狀還反真. 字書 說文解字:假:非眞也。从人叚聲。一曰
至也。《虞書》曰:「假于上下。」. 眞:僊人變形而登天也。
왕으로 봉한 문서에 사용 했다.
26
앞서 본 바와 같이 달월변 청(青)자는
불교국가 월지(月支)와 관계가 깊은 글자다.
27 중원 세력은 글자를
이리저리 바꾸어 영역을 바꾸어 확장해 나갔다. 청(靑 青)자 참 진(眞; 真),
계림(鷄林 桂林) 하는 글자들이 그 한 본보기다.
필자는 옛적에 산해경(山海經)해내경(海內經)의 첫 문구가 왕검조선을 뜻
한 문구라고 설명 했다. 천독의 본 글자는 <규 (圭) 를 든 유목민 (母)의
지도자을 뜻한 상형 글자>다. 본 글자는 “𣫴;圭, 母, xié/시애/쉐” 라고
읽었다. 하늘로 부터 규를 소유할 권한을 위임 받은 단군을 뜻한 글자다.
시애 (xié xī xí/해, 解, 解批, 巂,𦋅,𡸔,𣫴)라고 부르는 여러 성씨가 산서성
해지 연안에서 나왔다.
28 뒤에 어느 누가 모양이 비슷한 독(毒)자로 바꾸고,
었다. 북해지우(北海之隅)라 한 곳은 산서성 해지(解池) 북쪽 연안이란
뜻이다. 풀 해자 (解:曉也)를 새벽 하늘에 밝은 물체”라고 했다.
설문해자에서는 휴 동해지읍(酅 Xi:東海之邑)이라, 즉 하동 해지 (解/海池)
옆에 있는 마을 이라고 했다. 천시애 (天𣫴)가 살던 지역에 있던 호수라
하여 염지 (鹽池) 라는 보통 명사를 쓰지 않고 고유명사로 시애지(xié chi,
解池,해지) 라고 기록 했다. 글자 “𣫴, xié/시애/쉐”와 같은 발음의 글자가
해지 연안에 살았던 휴자(攜, xié 子)다. 그에게 순임금이 양위를 하고 돌아
오지 않았다.
천시애(天𣫴 攜子)를 천독(天毒)이라고 바꾸듯, 독 독(毒)자에서 어미모를
달월 변의 청 (青)자와, 붉을 단 변 청 “靑”자로 바꾸었다. 제터 단자 단군
(壇君) 을 박달나무 단(檀 善木)자를 선목이라 했다. 세워놓은 나무 (서낭당
Totem pole, 雄常)란 뜻이다. 상서 미자편에 <하늘 나라 (天毒) 에서 재앙
을 내렸다 (降災), 즉 천벌을 받았다는 문구를 하늘이 독한 마음을 품고
26
.三國史記: 命高勾麗嗣子安勝:公太祖中牟王,積德比山,立功南海,威風振於青丘,仁教被於
玄菟。子孫相継,本支不絶,開地千里,年將八百.
27
.康熙字典:《內典》薄佉羅,卽月支也. 國名。玄應音義四曰:「月氏國,薄佉羅國應是也。在
雪山之西北也。」梵 Bhuḥkhāra
28
.解:曉也,又解廌仁獸似牛一角亦姓自唐叔虞食邑於解今解縣也,晉有解狐解楊出鴈門又虜複姓
魏書有解批氏
재앙을 내려>라고 풀이 한다.
29 단군왕검 백익의 후손이 통치하는 북쪽
세력에 시달렸다는 사실을 이렇게 기록 했다.
해지연안에 살던 사람들이 금미달이라 한 청주(靑州)에서 고난을 격다
못해 만주로 옮겨 왔다. 순임금을 찾아 갔던 숙진씨(息慎氏)와 현토씨
(玄都氏)의 후손이 만주로 올라와 위만조선 영역에 살았다. 부여전에
선조를 사람(亡人)이라 했다. 그들은 전과 같이 하늘에 제사를 드렸다.
그들의 제천 의식이 삼국지 동이전에 여러 모로 실렸다. 한전에는 천시애
(天𣫴)를 “천신께 天神 제사를 드리는 사람을 천군 天君” 이라고 실렸다.
30
위진 시대 불교가 고조선 토속신앙과 유사 했다는 표현이 아래와 같은
기록이다. 信鬼神,國邑各立一人主祭天神,名之天君。又諸國各有別邑。
名之為蘇塗。立大木,縣鈴鼓,事鬼神。諸亡逃至其中,皆不還之,好作
賊。其立蘇塗之義,有似浮屠.
어렴풋할 외, 가까이할 외( 偎;亻,畏 wēi)자는 사랑이란 뜻이 있는 나라
이름 (偎:愛也,亦國名)이다. 물가에 사는 잠길 외, 더러워질 외, 빠질 외,
흐릴 위(渨 ) 와 같은 글자로 예맥( 渨. 《博雅》穢也)이라고 했다. 외인
(偎人) 이란 글자는 한예왈 외왜(汙穢曰渨涹), 모예위건(冒禮為諐) 하는
문구도 있다.
31 열자 황제편(列子·黃帝篇)을 인용 하여 외(偎)자를 선성
(僊聖, 仙聖) 의 신하로 지역은 발해만 서안 고사산(列姑射山)국과 관련
시겨 설명 했다.
32 장자 내장편에는고사산(姑射山)이 있던 곳의 시대와
장소를 밝혔다. 요 임금이 해지연안을 뜻한 해내(海內, 河東)를 다스릴 때에
산서성 분수연안 (汾水之陽)을 신인이 살던 곳(神人居)이라고 했다.
33
29
. 尚書 微子:父師若曰:「王子!天毒降災荒殷邦,方興沈酗于酒,乃罔畏畏,咈其耇長舊有位人
30
. 三國志 韓傳: 信鬼神,國邑各立一人主祭天神,名之天君。又諸國各有別邑。名之為蘇塗。
立大木,縣鈴鼓,事鬼神。諸亡逃至其中,皆不還之,好作賊。其立蘇塗之義,有似浮屠.
31
.書叙指南: 汙穢曰渨涹劉向九歎又曰冒禮為諐. 《魏略》曰: 偎以蒙鄙之姿,得睹希世之寶.
32
.偎《列子·黃帝篇》不偎不愛,僊聖爲之臣。《字林》偎,仿佛見,不寡也。列子 黃帝:列姑射
山在海河洲中,山上有神人焉,吸風飲露,不食五穀;心如淵泉,形如處女,不偎不愛,仙聖為
之臣;不畏不怒,愿愨為之使;不施不惠. 虞書》曰:「假于上下。」. 眞:僊人變形而登天也。
33
.莊子: 藐姑射之山, 有神人居焉 堯治天下之民, 平海內之政, 往見四子藐姑射之山, 汾水之陽」
둥근 알과 같은 상형이 붙은 “靑: 龶,下:円.丹與円同”청자라고 읽는
글자는 옛적 구주의 제일 북쪽 청양씨가 자리 잡았다는 청주(靑州,靑陽氏)
를 뜻해 다.
34 청구가 삼한 땅이라는 어음의 원조는 “붉을 단, 둥글원자”를
붙인 글자가 원조다. 서쪽에서온 까마귀 알, 오환(烏桓, 烏丸)족이 청구에서
살았다. 그들이 북쪽에 살던 곳을 오골성 (烏骨城), 그 일대를 지나는 여울
을 오천(烏川) 이라 했다.
한글 위키에서 “푸를(靑)를 설명한 내용은 해지 연안에 살았던 휴자(攜,
xié 子),즉 “𣫴, xié/시애/쉐”로 읽던 글자다. 그 후손이 분수 계곡을 따라
올라가서 살던 지역에 마지막 수도 금미달이 있었다. 그 지역 청구(靑丘)
에서 황제가 자부선인(紫府仙人)으로 부터 삼황내문 (三皇內文) 을 받았다.
청구(靑丘)란 글자는, 삼국사기에 “靑丘之表,靑丘道行軍” 실렸다. 고구려
멸망이후 안승을 책봉 하며 내린 문구에“우풍진 어청구 威風振於青丘, 즉
위풍이 청구에 떨쳤다”. 옛적 고구려 땅을 청구라 했다. 두 글자 사용의
한계가 모호하다. 답이 삼국 유사에 있다. 모두 청구 소문(青丘沙門) 또는
청구불(青丘佛)과 같이 청구란 어음의 기원을 불교와 관련 되었다.
홍산문화권에서 내려오는 통로에 불교가 전래 되어 “붉을 단자를 붙인
청구”를 불교국을 뜻한 달월자를 붙인 청구(青丘) 로 바꾸었다.
현제 중국과 일본에서는 “青”으로, 한국에서는 “靑”자로 기록 한다. 북쪽
사람들이 내려가 세운 월남 역사서 (大越史記全書)에는삼국사기에서와
같이 “靑 青”두 글자로 기록 했다.
청진“青 真”두 글자는 불교 전래와 관계가 있다.
청나라 초기에 만든 강희자전은 모든 글자의 설명을 일획 상형자 여섯
“一丨丶丿乙亅”으로, 청자는 달월 변 청 “青” 자, 청부(青部) 에서 설명
했다. 시서경등 많은 고전에 는 “海岱惟靑州”와 같이 “靑” 로 기록 했었다.
고전에 상형자는 각자 제나름 대로 형태가 변해 갔다. 참 진 (真:同眞
俗字) 자가 그 한 본보기다. 삼국사기에는 이 두 글자(真 眞)를 혼용했다.
일연 스님은 모두 “青”와 한일 홱을 똑바로 그린 진(真)자로 적었다. 이 두
글자는 금미달 지역에 전래된 불교와 관계가 있다고 본다.
34
. 廣韻·下平聲·靑·靑》靑:東方色也,亦州名九州之一禹貢曰海岱惟靑州又男靑女靑皆木名出羅
浮山記亦姓出何氏姓苑又漢複姓三氏風俗通云漢有靑烏子善數術又有靑牛氏靑陽氏
고전백과 “https://ctext.org/zh 사전” 이라 판단되는 자서(字書)편에 글자
설명이 실려있다. 중국 한나라의 사유(史游)가 편찬한 급취편 (急就篇)에서
참 진(真 眞)자와 푸를청 (靑 青)자의 편형을 찾아 볼수 있다. 진(真; 眞의
俗字)자와 달월 변의 청 (青)자는 실리지 않았다. 또한 불교국이 되었던
원나라 때에 주백기 (周伯琦; 1298-1369) 가 편술한 육서정와(六書正譌)
에는 달월 변의 청 (青)자는 있고, 붉을 단 변 청 “靑”자와 참 진 “眞” 두
글자가 없다. 원나라때 편찬된 원사 (宋史) 또한 참진(真), 여진 (女真) 으로
기록 했다. 일홱부수 한일형을 곧게 그은 두 상형글자 “靑 真”가 처음에
북쪽 사람들이 만들어 쓰던 글자다. 이는 태어 났다(靑,生也)는 뜻으로
우키패디아에서 설명 했다. 강희 자전에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고 풀이
했다. 광운(廣韻)에서도 글자 설명에 청출(靑出)이란 글자를 썼다.
그러나 금미달 에서 흐터져나가 제국을 이루었던 나라의 역사서 요사
금사 글안국지(遼史 金史 契丹國志)에는 붉을 단 변 청(靑)는 었다. 모두
달월자 변 청주 (青州) 란 기록이 있다.
현제 사용 되는 한자(漢字)에는 뜻과 음이 같으나 글자 꼴이 다른 글자가
많이 있다. 산서성을 조선과 같은 뜻 글자 진 (晉)이라 했다. 그 곳 사람들을
노예로 썼다. 제후국 진의 별명을 성(省)란 뜻에 간략 해서 “省作, 俗作,
隸作. 今變隸作” 이라 했다. 변할 변,또는 바를 변 이라고 읽는 변예(變隸)
란 글자는, 변한(弁韓)지역 사람들을 뜻했다. 고조선 마지막 수도 금미달
지역을 변한이라 불렀다고 앞서 논증 했다.
35 금미달 영역에서는 허진
(許愼:58 – c. 148 CE)이 활동하던 시절(今)에도 고유의 글자를 사용하고
있었다. 고전 “詩, 書, 春秋, 禮記, 論語” 에서 없을 무(無)자를 4 획
“无”자로 사용했었다. 그 출처를 불가의 자서전 “釋典, 釋文”이라 했다.
本用无字,變篆者變爲無,惟易、周禮盡用无。然論語亡而爲有,我獨亡,
諸無字,蓋變隸時誤讀爲存亡之亡,故不改也。又《廣韻》莫胡切,音模。
南无,出《釋典》。蓋變隸 无音無. 南无,出《釋典》
35
. Lee Mosol :· Lee Mosol: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 Second Edition.2020 by Xlibris. P
212: 說文解字: 凡廾之屬皆从廾。今變隸作廾. 庖犧所結繩以漁。从冂,下象网交文。凡网之屬皆
从网。今經典變隸作䍏. 康熙字典 无部: 无:〔古文〕𠑶《唐韻》武夫切,音巫。《說文》𣞣,亡
也。奇字,无通𣞣。王育說,天屈西北爲无。《易·乾卦》无咎。《釋文》无音無。易內皆作此
字。《藝苑雄黃》无亦作亡。古皆用亡无,秦時始以蕃橆之橆爲有無之無。詩、書、春秋、禮
記、論語本用无字,變篆者變爲無,惟易、周禮盡用无。然論語亡而爲有,我獨亡,諸無字,蓋
變隸時誤讀爲存亡之亡,故不改也。又《廣韻》莫胡切,音模。南无,出《釋典》.
현제 동북아에서 쓰는 상형 글자 기원을 창힐이 육서 원칙에 따라 글자를
만들었다고 한다. 고조선 사람들이 그에 앞서 문자를 사용 했다는 증거다.
불경 기록에의 거루/가라선인(Khara; 佉盧. 佉樓仙人) 이 창힐 이전에 글자를
만들어 썼다는 기록이 있다.
36 급총죽간이 모두 검은 옷칠로 그려진 과두자
(漆書皆科斗字)로 적힌 위나라 역사서에 실렸다.
나라 이름 또는 신 이름이라고 읽는 가(佉)자가 실린 박가라(薄佉羅)란
나라는 월지(卽月支)국이름 이라 했다. 월지란 이름이 여러 지역에
나타났다. 삼국지 한전에는 월지국이 백제국(伯濟國)가까이, 여러 전치사를
붙인 모로국 (莫盧國)이 신소도국 (臣蘇塗國)과 같이 실렸다. 월지국
(月支國)을 진왕(辰王)이 다스렸다. 이는 삼국 사기 신라 본기에 실린
내용이다. 거서간 (居西干) 이란 서쪽에 살던 지도자란 뜻이다.
신라(新羅)를 변한의 후예(弁韓苗裔也)로 한 낭락에 살았다고 했다.
삼국지 변진전에 신라 (新羅)의 옛 이름 사로국 (斯盧國)이 조선의 유민이
살았다는 뜻의 주선국 (州鮮國,조선이 바다에 있다) 과 같이 창해군이 있던
곳을, 같은 시대에 살았던 두 사람, 즉 진수와 장화는 조선을 “州鮮國,
為鮮國” 라고 기술 했다. 당나라 때 불교 스님들이 편술한 법원주림
(法苑珠林)에 실린 “佉盧 Khara,仙人名” 문구는 광개토 대왕 비문에
임나가라 (任那加羅)가 분명 하다. 나라를 다스리도록 가라 선인 에게 일임
36
.康熙字典: 佉:《正韻》丘於切,音區。與祛同。又國名。《內典》薄佉羅,卽月支也。又人
名。《法苑珠林》造書凡三人,長曰梵,其書右行。次書佉盧,其書左行。少者倉頡,其書下
行。又《廣韻》丘伽切《集韻》《類篇》去伽切,𠀤恰平聲。姓也。又佉沙國,卽疏勒也。見
《唐書·異域志》又神名。《釋書》佛說彌勒成佛經,其先轉輪聖王,名儴佉。有四種兵,不以威
武,治四天下。又《陀羅尼經》佉佉。《註》文殊眷屬。《又》佉呬佉呬。《註》普賢眷屬。◎
按佉,梵音去佐切,見就形門。今不从,只以音和門,丘伽切,釋之爲是. 佉:《正韻》丘於切,
音區。與祛同。又國名。《內典》薄佉羅,卽月支也。又人名。《法苑珠林》造書凡三人,長曰梵,
其書右行。次書佉盧,其書左行。少者倉頡,其書下行。又《廣韻》丘伽切《集韻》《類篇》去伽
切,𠀤恰平聲。姓也。又佉沙國,卽疏勒也。見《唐書·異域志》又神名。《釋書》佛說彌勒成佛
經,其先轉輪聖王,名儴佉。有四種兵,不以威武,治四天下。又《陀羅尼經》佉佉。《註》文殊眷
屬。《又》佉呬佉呬。《註》普賢眷屬。◎按佉,梵音去佐切,見就形門。今不从,只以音和門,丘
伽切,釋之爲是。」
했다는 뜻이다. 금관가라 수로왕이 나이 많은 박식한 사람이라 했다.
거로(佉盧)란 선조를 모시고 살던 금미달을 조나라에 빼앗기고 떠난
사람이란 뜻에 양거(儴佉 ráng-qū) 라하고, 이름을 모르는 그의 선조를
미륵성불경(彌勒成佛經)에 전륜성왕(轉輪聖王)이라고 했다.
37
한국에서 한자사전의 대명사로 부르는 옥편(玉篇) 에는 “𡴑” 자가 푸를
청자로 씌었다고 한다. 옥편은 옛적 부터 전해 오던 이상한 글자 기자
(奇字)에 능통한 고야왕 (顧野王; 519-581)이 만들었다. 북쪽 사람들이
“옥돌에 새겨 놓았던 글자들을 모아 정리한 자전”이란 뜻이다. 하여 해편
(解 亥 海篇, 篇海) 이라고도 한다. 고야왕 때 만들어진 옥편(玉篇) 이 한해
남방 통로를 따라 남방불교와 함께 한반도에 이르러 이조시대 까지 전해
오고 있다.
38 북쪽사람들이 만들어 쓰던 글자 꼴을 남쪽 사람들이 바꿨다.
푸를청 (靑 青)이라고 읽는 두 다른 형태의 글자는 8 획 이다. 청나라 때
훈고학자 단옥재 (段玉裁; 1735-1815)는 설문해자주 에서 이 두 글자는
“靑 青 𡴑 𡴏 𡴐 𡗡 寈”와 같이도 씌였다고 한다. 상형글자의 기본이 되는
획수가 다르다.
39
대당서역기에는 “靑 眞”자가 보이지 않는다. 모두“青 真”로 기록 했다.
송고승전(高僧傳) 또한 “靑 眞”자가 실리지 않는다. 송나라 사람 서긍이
남긴 고려도경 또한 모두 “青”와 진(真)자로 적었다.
40
37
. 康熙字典 人部 三:《家語》古之王者,易代攺號,取法五行。又不還曰代。又國名。趙之先有
代國《釋書》佛說彌勒成佛經,其先轉輪聖王,名儴佉.」
38
. Lee Mosol :· Lee Mosol: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 Second Edition.2020 by Xlibris. P
212: The Jade dictionary in Korea. 康熙字典 一部 六: 𠀡:《玉篇》古文天字。註詳大部一畫。𠀢:
《海篇》音資。定也.一部 -五: 丟:《篇海》丁羞切。《揚子·方言》一去不還也。俗作丟,非.
39
. 康熙字典一部:·寈:《集韻》靑古作寈。註詳部首。亦作𡗡𡴏𡴐,玉篇作𡴑。說文解字注寈: 注
解:東方色也。考工記曰:東方謂之靑。木生火,從生丹。丹,赤石也。赤,南方之色也。倉經
切。十一部。丹靑之信言必然。俗言信若丹靑,謂其相生之理有必然也。援此以說從生丹之意。
凡靑之屬皆從靑。□,古文靑。注□、□、寈、□、□,亦古文靑。
40
. 高麗圖經:·寈契丹復謹修貢且乞降尊號頒正朔又求封冊真宗皇帝初欲俯從議者難之遂寢止從班
詔而已天聖中使人屢與女真偕來貢方物天子加恩報禮優異後詢卒子隆立優柔不斷. 東方之旗青色
강희자전에 실린 단청(丹靑)이란 글자는 도교와 불가에서 성스러운
건물을 호화롭게 분장한 기록에 나타난다. 단청(丹靑)이란 글자의 다른
표현이 청홍(靑紅)색 이다. 청실 홍실이란 가사가 있다.
같은 문화권에서도 한 일 중 세 나라가 다른 글자를 쓰고 있다.
단청(丹靑)은 한국, 달월변의 단청(丹青)은 중국에서 쓰는 글자다.
이는 천독(天毒)이란 글자에서 설명했던 “규를 든 여자 지도자”란 뜻
글자에서 유래 했다고 본다. 달월 변의 청 (青)자는 불교 발생지 월지국
(月支國)영향 영역에서, 알을 뜻한 붉을단 변의 청(靑)자는 고조선의
후예인 한국에서 사용 하고 있다.
청구(青丘)에서는 구미호(狐九尾)를 선물 했다. 사기에 실린 미지 (彌地)
와 동호(東胡)란 글자에서 그 관계를 찾을수 있다.
청나라 때 편술된 묵자 한고에 죽일 도 자 도하(屠何)를 동호의 선조
(東胡之先) 라 했다.
41 모둔 선우의 급습에 피살 당한 동호왕을 朝鮮 왕
부/비(朝鮮王否)라 했다. 그 곳에 노관의 아들을 봉했다.
42 옛왕공 대인의
수도에 사는 자비롭고 인자한 사람은 이방인 (慈仁他) 이다. 그를 가까이
있던 곽씨와 초씨(郭焦)가 점령 했(破滅胡)다.
43
서주 성왕이 상나라 잔여 세력을 소탕하고 실시한 사상 가장 성대 했던
후에 왕들의 모임 설명(王會解)에 가 지역에서 참가한 사절단을 방위에
따라 기록 했다. 분수 연안에 있었던 첫 공공국 중심으로 그 일대에서
갖고온 선물과 지역(나라)이름이 실렸다. 고리(高夷)옆에 공공(邛邛) 라 그
일대를 고죽거허(孤竹距虛), 그 옆에 우령지(不令支) 부도하(不屠何), 동호
41
. 墨子閒詁 非攻中: 不著何亦北胡國,周書王會篇云「不屠何青熊」,孔晁注云「不屠何,亦東
北夷也」《管子·小匡》篇「敗胡貊,破屠何」,尹注云「屠何,東胡之先也」
42
. 史記 匈奴列傳: 東胡初輕冒頓,不為備。及冒頓以兵至,擊,大破滅東胡王,而虜其民人及畜
產. 以匈奴東胡王降,故燕王盧綰子侯. 三國志 韓傳:及秦并天下,使蒙恬築長城,到遼東。時
朝鮮王否立,畏秦襲之,略服屬秦,不肯朝會。否死,其子準立
43
. 字書 急就篇: 公孫都。慈仁他。郭破胡. 焦滅胡
(東胡)라했다.
44 옛적에 서쪽 월지국(胡)에서 이방인 고조선 사람들 늙은
이(彌年壽考 曰胡)을 뜻한 상형자다.
45 하여 이를 다음 사전에는 “오랑캐
호, 목 호, 되 호, 오랑캐 이름 호, 수염 호”라 했다. 도하(屠何)와 호(胡)
동호(東胡)는 단군왕검 피살 이후 명조(鳴條)에서 지도를 들고 북쪽
흉노땅에 가서 선우가 되었다는 고조선 사람들 미달(彌達)의 후예다.
46
옛 청구 (青丘)의 현 위치: 앞서 고 죽(孤竹)을 설명한 바와 같이 푸른
구릉이란 뜻의 청구(靑丘) 또한 오랫동안 여러 지역을 지칭 했다.
일주서 왕회해에는 청구에서는 “북쪽에서 해유관을 바친 발인과 가까이
청구에서 구미호(青丘 狐九尾), 즉 꼬리가 아홉인 여우를” 바쳐다고 했다.
그 일대에 동북방에 사는 “고리 공공 고죽 부령지 高夷, 邛邛, 孤竹, 不令支”
등등 여러 부족 이름이 실렸다. 해지 연안과 삼수를 정벌하고 청구에서
구미호 (狐九尾)를 얻었다. 태평어람에는 치수 사업을 하던 우의
여자들(禹妃)을 설명 했다. 그가 북쪽 부쌍(婚於臺桑)이라는 곳에서
결혼식을 할때 꼬리가 아롭인(白狐九尾)흰여우가 나타났다.
47 이는 모두
글자 그대로 풀이 하여 받아 드릴수는 없다. 있었던 사실을 상직적으로
비유해서 기록 했다. 상후(商侯)는 고유 명사가 아니라 상나라의 지도자를
뜻했다. 청구(靑丘)란 이름은 황하 문명 발생지에서 멀리 떠러진 잘 아려
지지 않았던 (SMa-Out) 동북쪽 영역을 뜻했다. 같은 지역을 불교 전래
이후에 “청구(靑丘)글자를 달월변 청 (青丘) 자로 바꾸어 그에 따라 북쪽에
있던 이름자 “狐九尾, 黑齒, 儋耳”가 중국 동해연안을 따라 내려가, 동남아
지역에 나타났다.
44
. 逸周書: 解隃冠,發人。麃麃者,若鹿,青丘狐九尾。黑齒白鹿白馬. 北方臺正東,高夷嗛羊,
嗛羊者。獨鹿邛邛,邛邛善走者也。孤竹距虛。不令支玄模。不屠何青熊。東胡黃羆。山戎戎菽.
諡法解:彌年壽考曰胡. 保民耆艾,𠀤曰胡. 字書 急就篇: 公孫都。慈仁他。郭破胡. 焦滅胡
45
. 廣韻·下平聲·靑·靑》靑:東方色也,亦州名九州之一禹貢曰海岱惟靑州又男靑女靑皆木名出羅
浮山記亦姓出何氏姓苑又漢複姓三氏風俗通云漢有靑烏子善數術又有靑牛氏靑陽氏
46
. 焦氏易林 大畜之: 大畜:朝鮮之地,箕伯所保。宜人宜家,業處子孫,求事大喜. 焦氏易林 明
夷之: 升:鳴條之郊/鳴條之圖,北奔犬胡。左衽為長,國號匈奴。王君旄頭,立尊單于.
47
. 竹書紀年 帝杼: 帝即位,居原. 五年,自原遷于老丘. 八年,征于東海及三壽,得一狐九尾. 商
侯冥死于河.. 太平御覽 禹妃:考工記曰:《帝王世紀》曰:禹始納涂山氏女,曰女媧,合婚於臺
桑,有白狐九尾之瑞,到至是為攸女.
북쪽 지역을 사기 오제본기에는 청양강거강수(青陽降居江水)라, 즉 청양이
내려와서 강수연안에 살았다.
48 이곳에서 처음으로 치수 사업을 하느라고
첫 공동체가 나타났다. 강수 연안이 고조선의 발생지다. 이들을 북적(北狄)
白狄 赤狄 蓋狄)적이라 부르던 백의민족 시원지다. 이 지역을 여주, 발조선,
통치자를 북주후 모라 했다. 청구란 이름은 홍산 문화권 사람들이 내려오던
분수 계곡 북부지역을 뜻했다.
맺음 말:
삼한 (三韓)땅 청구(靑丘)의 어원을 살펴 보았다. 청진“青 真”두 글자는
불교 전래와 관계가 있다. 같은 고저선의 후손으로 동북아시아에 흐터져
살면서 불교 문화권에 속하는 한 일 중 세 나라가 다른 글자를 쓰고 있다.
붉을 단 변의 단청(丹靑)은 한국, 달월변의 청(青)자는 중국과 일본에서
쓰는 글자다. 금미달 에서 흐터져나가 제국을 이루었던 나라의 역사서 요사
금사 글안국지(遼史 金史 契丹國志)에도 붉을 단 변 청(靑)자는 없다. 모두
달월자 변의 청주 (青州) 란 기록이 있다.
중국문헌을 종합해 보면,황제가 청구에 이르러 자부선인으로 부터 도교
경전의 핵심이 되는 삼황 내문(三皇内文)을 받았다는 곳은 수경주, 역수
연안, 당시 연나라 수도(燕都)가 있던 청구(靑丘,青丘)다. 자부선인은
산신이 되었다는 단군이다. 불교에서는 미륵(彌勒)으로, 또는 안문관을
지키던 안왕 (雁王) 이라 했다. 여러 단군의 가름침을 종리한 경전이
도덕경(道德經)이다. 그러나 현존하는 모든 도가경전에는 붉은 단 변
청(靑)자는 보이지 않는다.
금미달 에서 흐터져나가 나타난 나라 중에 단군왕검을 국조로 모시는
한국(韓國)에서 만이 붉을 단(丹) 변 청(靑)자를 쓰고 있다. 그 명맥이
금미달을 떠나 발해만에 정착 해서 신라(新羅) 임나가라 (任那加羅)로 기록
되었던 거루 선인“佉盧 仙人名, 首露(盧)王” 의 후손이 한반도에 정착 했다.
48
. 史記 五帝本紀:黃帝居于軒轅之丘, 而娶于西陵之女, 是為嫘祖為黃帝正妃生二子:其一曰玄囂,
是為青陽,青陽降居江水。史記 本紀 周本紀: 武王營之,成王使召公卜居,居九鼎焉,而周復都
豐、鎬。 史記 秦始皇本紀:於是始皇以為咸陽人多,先王之宮廷小,吾聞周文王都豐,武王都
鎬,豐鎬之閒,帝王之都也
오랫동안 기록에 나타나지 않았던 지역(SMa-Out)이 었던 한반도에서도
글자가 새겨진 석판이 발견 되었다. 이러한 글자들은 금미달 (今彌達)에서
돌아가 산신이 되었다는 고조선의 단군(壇君) 만든 글자로 풀이된다.
끝
May 3rd, 2023. Revised. May 5th, 2023
삼한 (三韓)땅 청구(靑丘)의 새로운 고찰:
한국 상고사를 되찾아 가는 경과보고 “Research in Progress” -2.
개론: 고려시대 부터 삼한 (三韓)땅 청구(靑丘)란 문구를 한반도 (韓半島, Korean peninsula)에 적용 했다. 유교국 모화사상 (vasal states of Sinocentric system)에 젖어 소중국 (小中國)이란 별명 까지 붙었던 이씨조선 말기에 동학 (東學) 개혁 운동이 나타났다. 김옥균 서재필·등이 주동 했던 갑신정변 (甲申政變, Coup 1884년)이 실패했다. 결국 이씨 왕조는 일본이 흡수 했다. 일본이 멸망하고 미군정기 시기 초, 1948년 제헌국회 에서 국호선정을 다루었다. 오랫적 부터 써오던 조선(朝鮮), 고려 (高麗)의 유래를 깊히 토론 하고 대한민국(大韓民國)으로 결정했다. [1]
유교 사상이 정립 되던 시기에 원시 불교가 고조선의 마지막 수도 금미달 (今彌達) 에 알려 졌다. [2] 새로운 종교관이 고조선 토속 신앙을 믿고 있던 미지의 세계(SMa-Out)에 가미 (added)되여 나타난 생활상을 중원 세력이 기록으로 남겼다. 기록 부터 풀이에 이르기 까지 많은 혼란이 나타났다.
한(韓) 삼한 (三韓) 한국(韓國) 청구(靑丘) 하는 개념은 치수사업을 하던 황하문명 발생지에서 처음 나타났다. 이러한 개념을 이름자로 만들어 중원 세력이 영토를 확장 하면서 미지의 세계 (SMa-Out) 였던 산동 반도와 만주에 접붙였다. 전국시대 유학자 순자정론(荀子正論)에는 난세의 어려움을 다루면서 <왕옥산 요새에 숨었던 사람이 어떻게 동쪽에 있는 낙원 땅을 알수 있겠느냐 면서,이를 우물안의 개구리 우화 (坎井之蛙, 不可與語 東海之樂)로 다루었다. 황하 문명의 발생지에서 요순임금이 양위(堯舜擅讓) 를 했다. 마지막 수도 금미달 (今彌達) 지역을 흐르는 여울을 호타하(滹沱河), 치수(治水), 상간하(桑乾河) 라고도 불렀다. 상간(桑乾) 이란 “유목민 지도자 (木)를 돕는 세 보좌관”이란 뜻이다. [3] 금미달이 함락 당한 시기에 “흉노, 북부여, 고구려”로 분산 되었다. 이를 사마천은 미지 수천리 (彌地數千里) 를 빼앗고 장성을 쌓았다고 했다. 진시황이 죽고 세력이 약화 되여 북쪽으로 밀려 갔던 고조선 세력이 되 돌아와서, 빼앗긴 책임을 문책 했다. 사기에는 서쪽에 있던 흉노가 오만한 동호왕을 죽였다고 기록 했다. 싸움의 원인을 구탈 (甌脱) 이라 했다. 대현 (代縣)을 구대지(歐代地) 란 다른 글자로 기록 했다. [4]
진수는 동호왕을 조선왕부(朝鮮王否)라고 했다. 후에 그가 마한 땅에서 왕이 되었다. 그 마한왕을 온조가 밀어 내고 수도로 정했다. 대동강 하구, 강서 고분군이 나타난 지역다. 이는 백제 유적이다.
한서(漢書)와 전한기 (前漢紀) 에는; <예맥군 또는 동이 예맥군 남여 (穢貊君南閭)라는 지도자 이름이 나오고, 그가 280,000명을 인솔하고 요동에 와서 살았다>고 한다. 창해군이 생겼던 곳이다. 그곳에서 밭을 갈다 예왕인 (濊王印)을 얻었다는 곳이고, 고허촌(高墟村) 이라던 곳이다. 거서간(居西干) 혁거세가 “조선(朝鮮) 의 유민이 여섯마을에 살고 있던 곳” 에 나라를 세웠다. 신라가 수도를 한반도를 옮기고 이름 또한 한반도에 나타났다. 광개토대왕비문에 한예 (韓穢)란 글자가 실렸다. 금미달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한해의 북동서 해안을 따라 세곳에 정착 했다. [5]
삼한 (三韓)땅 청구(靑丘)의 어원:
조선을 삼한 (三韓)땅 청구(靑丘)라고 쓰는 어휘는, 고조선 발생지에서 부터 발해만 서남쪽 해안에 이르는 지역에서 찾아야 한다.
같은 글자라도 시대와 지역에 따라 훈과 음이 다르게 사용 되었다.
부여시조 동명(東明)에 관한 같은 내용이 후한서와 태평어람에도 실렸다. 사수(掩㴲音斯水)를 건넜다고 했다. 삼국유사에는 고구려 시조 주몽이 건너온 강이 어느 강인지 모르겠다(行至淹水今未詳)고 했다. 사수(斯水)의 사(斯;sī/si1/siɛ) 자는 사음자가 분명 하다. 같은 음을 “虒,媤 斯 絲,㴲”란 글자로도 기록 했다. 시경 등 각종 고전에 많이 나오는 글자다
설문에 바다 해(海)자를 천지(天池)라 했다. [6] 천독(天毒)이 사는 호수(池) 란 뜻이다. 광운(廣韻)에는 설문해자에 실린 천지를 해주(海州)라했다. [7] 단군조선의 발생지인 해지(解池; 治也)연안에 고죽국있었다고 했다.
이 지역을 한원(韓原) 이라 했다. 주성왕(成王)이 고조선의 후예가 살던 곳을 빼앗고 강 건너편에 한성(燕師城韓)을 쌓았다. [8] 성을 빼앗긴 사람을 읊은 시문이 시경에 실린 사간(斯干)이다. 그가 희발을 도와서 목야전에 깃발을 들고 선봉을 달렸다. 하여 이괘를 선물로 받았다. 그가 필공 (畢公) 이다. 고죽군의 부친이라 본다. 스님이 위서를 인용(魏書云)하여 남긴 문구 “意在斯焉”가 사기에 “意在斯乎!意在斯乎!”로 실려있다. [9]
시경에 많이 실린 천할 시 또는 어조사(斯)로 풀이 하는 글자는 아사달 (阿斯達)에 실렸고, 신라(新羅)의 옛 이름을 사로(斯盧, 斯羅)라고 했다.
어조사(斯)를 시로 발음 하여 죽음시 시라(尸羅)로도 기록 했다. 금미달 에서 해안으로 내려와 정착한 부락 이름이 광개토대왕 비문에 실렸다. [10]
시라진언성선(尸羅秦言性善)이라 했다. 근위병으로 장렬히 싸우다 죽은 사람을 뜻했다. 여러 글자로 여러 곳에 나탄 신라(新羅)와 가라/야는 불교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11] 동남아와 중앙 아시아에도 있었다. 진언(秦言)을 진언(辰言)이라 했다. [12] 진한(秦韓)을 진한(辰韓) 또는 진국(辰國, 震國)으로 바꾸어 한반도에 접붙였다.
논란이 많은 또 한 이유는 [단군조선의 발생지인 해지(解池)연안에 살던 고조선의 후예들이 사방으로 흐터져다. 마지막 수도 금미달(今彌達)에서 발해만으로 내려와 여러 소읍 국가를 세웠다, 점차로 한해의 동서 연안을 따라 세 곳에 흐터저서 같은 이름이 나타났다] 는 사실을 몰라 이러한 잘못이 나타났다. 간략 하면 임나 (任那)는 의역 (意譯) 이요 신라(新羅)와 가라(加羅)는 음역(音譯)한 글자다. 단군이 고조선을 개국할 때의 도읍지 아사달에 살던 사람들의 후예가 아시아여러 곳에 흐터져 살았다. 그 전통을 이어온 사람들이 한반도에 이르러 고조선 첫 수도에서 마지막 수도 금미달 지역에 붙였던 이름이 한반도에 나타났다.
왕검조선의 발생지 한원(韓原)에 살던 사람들이 중원에 살아 한국(韓國) 이란 글자가 남아 았다. [14] 삼한(三韓)이란,중원을 석권했던 (桓公彌亂 今國彌亂, 既彌留, 彌:益也) 발조선 시대에, 고조선 사람들을 뜻했다. 그들이 전국시대 말기에 중원에 있었다는 역사 기록이 이사가 한왕에게 올린 글(李斯往詔韓王)에 실렸다. 다섯 제후(五諸侯) 국이 같이 한을 공격 하니 진이 구해 주어(秦發兵以救之)한이 중국에 살았다. 후에 한(韓)이 배반하고 안문관 (鴈關)에서 진(秦)을 공격 했다. 진한 전란 통에 한(韓)이 이끄는 무리들이 동쪽 진국으로 가서 나라를 세웠다는 뜻에 한국(韓國)이라 했다. [15] 직방씨내용을 인용한 묵자한고,후한서 동이전, 진수의 위만조선의 연혁에, 또 삼국사기 신라본기 에도 그 렇게 실렸다.[16]
강희자전에 따르면, 삼한(三韓)의 이름자(辰韓,示韓,馬韓)를 (글자 속에 잠긴 지역의 한계를 바꾸려고) 후한 광무제 (漢光武) 때에 다른 글자로 바꾸었다는 사료가 있다 . 앞에 인용한 후한서 동이전을 보라고 했다 . 꼬까리 변(弁)자를 음과 뜻이 비슷한 법 변(卞)자로 바꾸었다 . 변한 (弁韓)이란 글자를 오직 한국에서 만이 변한 (卞韓)이라고 기록 했다.
Byeon-hahn 弁韓, 卞韓 Shee-hahn示韓은 모두 법 변(卞)자는 이아 설문해자등 자서(字書)와 주역 주례(周易. 周禮)에는 없다. 초씨역림에는 두 글자를 “羔羊皮弁, 非卞氏”다른 뜻으로 썼다. 비변씨보(非卞氏寶)란 문구가 있다. 굴욕을 당하고 아무런 소득이 없다고 했다 . 주족은 빛을 숭상하던 비변씨 (非卞氏)를 삭제했다. 시경과 주례에는 꼬까리 변(弁: 冠弁,弁師) 으로 실렸다. 이 두 글자는 각종 선진문헌에 나타난 글자다. 세 글자(弁, 卞, 示韓)는 모두 중원에서 써오던 글자로 같은 이름이다. 진수가 왜인전에 시라국 속 안식 (斯羅國屬安息), 월씨국 (月氏國)이란 문구를 불교 전래 설명에 남기고, 변진한 (弁辰韓)이란 편명을 만들어 었다.
진수의 삼국지 한전과 변진전에 여러 작은 별읍(別邑)이 있고 각각 거수 (渠帥)가 존재하는데 큰 것은 신지(臣智)라 하고 그 다음은 험측(險側), 그 다음은 번예(樊濊)가 있다 . 옛적에 거괴 (渠魁)라 하던 거수(渠帥)와 신지 (臣智)란 관명이 옛부터 삼국시대 이후에까지 중원에도 있었다 . 신라와 고구려 초기 본기에는 예맥거수 (濊貊渠帥, 貊渠帥)란 글자가 있다 . 통전에는 변방 동이 진한과 변진(辰韓, 弁辰)편에 같은 관명이 실렸다. 동이의 영역이 서언왕 (徐偃王)이 다스리던 중국 동해안선에 퍼져 아홉 종류가 있다고 했다 . 동이들이 한해의 동북서 해안에 살았다는 뜻이다.
삼한의 한 부류가 중국 동해안에 살았다는 증거가 여러 곳에 있다.
대만을 동이가 사는 섬이라 이주(夷洲)라고 했다. 그곳 사람들은 진시황이 방사 서복(方士徐福)의 말을 듣고 불사초를 찾아 오라고 젊은이 수천명을 발해만에서 바다로 보냈다는 사람들의 후손이라 했다. 발해만 동남쪽 연안에 나타났던 창해군 (滄海之郡)이 2년후에 사라젔다. 배를 타고 다른 곳으로 떠났다는 증거다. 당시 한해의 동서 해안으로 흐터져 나갔다.
동오의 손권이 고구려와 공모하여 조위를 치려고 사신을 보냈다. 고구려와 동오의 사신은 해상로를 관장하던 대륙백제 사람들이었다. 후에는 강동에 살던 부족이 중원의 옥쇄를 잡아 북제를 건국 했다.
명나라때 편찬된 욱리자(郁離子)에는 삼한부여(三韓扶餘)라 했다. 삼한(三韓)은 “쌍건하 (桑乾河)에서 설명한 세 지도자 중에서 흉노나 고구려가 아니라 부여의 후손” 이란 뜻이다. 이조 후기 이규경(李圭景)의 삼한시말 변증설(三韓始末辨證說)에는 고연무의 일지록 내용을 인용하여 고구려 부여 한예(駒麗、扶餘、馯、貊之屬)가 모두 해동제리라 했다. 후에는 일지록(日知錄)에 삼한이 한반도 남쪽과 구주열도에 살고있다고 했다. 중원 해안에서 한해의 동남쪽 도서에 흐터져 살았다는 뜻이다.
진수는 천진 당산 일대에서 중국 본토 해안에 있던 고조선의 후예들은 무시하고 한반도와 만주영역을 삼한 땅으로 묘사 했다. 변한을 뜻한 시한 “弁韓.示韓”은 다같이 일월성 삼신에 예식을 치루던 한(韓) 이란 뜻이다.
당태종이 백암성을 정복하고 남긴 극고려백암성소 (克高麗白巖城詔)에 반 삼한지사“反三韓之士, 編列弁辰之野, 燕碣土風, 晉後苦湧水之災”란 문구가 있다. 삼한(三韓)이란 글자는 하북평원에서 남만주로 이어지는 지역이였다. 그들이 통치 하던 바다라 한해 (翰海 瀚海)라 했다. 동북서 세 해안에 한 (韓)이 이끄는 사람들이 살았다는 뜻이다. 고려를 다녀간 서긍의 고려도경 에 삼한(三韓)이실렸다. 삼국지에 실린 내용으로 설명 했다. [17]
편의상 “달월(月) 변 청 青자, 붉을 단(丹) 변 청 靑자” 라고 부르겠다.
황하 문명 발생지 구주에 있던 이름을 새로 획득한 동북지역(SMa-Out)에 접 붙여 남만주, 산동성 동부, 그리고 한반도에 나타났다. 이들이 해안을 따라 동남아로 진출 했다. 붉을 단(丹) 변 청 (靑)자는 선진시대 문헌에는 보이지 않는다. 설문해자에도 없다. 사기에는 “붉을 단(丹) 변 청 (靑)자가 없고, 모두 달월(月) 변 청 青”자로 썼다.
옛적 강희자전에는 산해경에 실린 청구(靑丘)란 글자가 여섯 곳에 보이고 낙랑 (樂浪)을 설명할때 인용한 물 맑을 영(渶)자가 청구산(靑丘山)에서 시작 한다고 했다. 그러나 현제 쓰는 강희자전에는 모두 “청구 (靑丘) 를 (青丘)로 기록” 했다. 내력을 살펴 보면 붉을 단(丹) 변 청(靑)자가 원조다.
진시황 이전에 편잔된 여씨춘추에는 대우가 인물을 구하려고 동쪽으로 갔다는 지명에 조곡(鳥谷)、청구지향(青丘之鄉), 흑치지국(黑齒之國)이란 이름이 있다. 조곡은 까마귀 오자 오곡(烏谷)으로 오씨가 살던 곳이고, 흑치국의 흑자는 해(sun, sun-ray,亥, 奚, 解)의 사음자로 단군조선의 한 부족이 살던 곳을 뜻한다. 그 한 지류가 남쪽으로 내려 갔다. 하여 구미호 (九尾狐) 흑치(黑齒)이름이 지나 (支那) 영역에도 나타났다.
부여의 후손이 중원의 동쪽 해안을 따라 내려가서 많은 나라를 이루고 살았다. 복건성(福建省)이란 남북조 시대에 신미제국(新彌諸國)이란 지역 일부를 표현한 글자다.
삼한의 후손들이 중국 해안을 따라 남쪽 지나(支那)영역으로 내려 갔다. 신미제국(新彌諸國)이란 문구가 진서 (晋書)와 장화열전(張華列傳)에 나온다. 그로 인하여 남조 역사서에 백제여왕 비미호(卑彌呼)의 후손 왜오왕 (倭五王)이문구가 진나라 역사서 (晋書) 장화열전(張華列傳)에 나온다. 그로 인하여 남조 역사서에 백제여왕 비미호(卑彌呼)의 후손 왜오왕 (倭五王)이 다스렸다는 倭,新羅,任那,伽羅, 에 나오는 구주(九州)의 분포도와 그에서 떠러져 나간 여러 주(州)자다. 신라(新羅)는 487년에 한반도에 수도를 옮기고 502년에 처음으로 중원에 사신을 보냈다.
불교를 숭산 했던 남조 양(梁)나라의 초대 황제가 같은 행사에서 加羅과 倭王을 맞았다. 加羅의 통치권을 두 사람에게 부여 할수는 없다. 진한 모한 (秦韓慕韓) 하는 나라 이름은 한반도나 일본 열도에는 없었다. 같은 글자 신라 임나 가라 (新羅任那加羅)라는 이름이 남만주와 한반도에 나타났다.
百濟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倭國 나라는 중원 동해안에 산제해 있던 나라다.
전한 말기,한고조의 후손 유향 (劉向, 77년 ~ 기원전 6년; 詔光祿大夫 劉向校經傳諸子詩賦)이 어명에 따라 경전과 시부를 정리 했다. 그의 저서 신서(新序),설원(說苑),열녀전(列女傳), 전국책(戰國策) 등을 비롯 하여, 금미달이 점령 당한 전국시대 후기 부터 많은 학자들이 저술한 일차 사료가 전해 온다. 그때에 양자 방언(方言)이 나타났다. 그러나 언어 변화에는 시간이 많이 걸렸다. 특히 회하(淮河)를 경계로 남북의 언어는 청나라 말기 까지 계속 되었다. 위진 혼란기에 불교가 번창 하고, 많은 사람들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피란 했다. 동진 때 산서성 (山西省) 하동 (河東) 사람 곽박 (郭璞;276-324)이 여러 고전에 주를 달았다. 푸를 청(靑 青)자를 달리 쓴 기록이 나타났다.
필자는 여러 차례에 구주의 영역과 크기를 설명 했다. 하동에 있는 작은 염호 해지(解池)연안에 동이 수령 백익이 수도를 정하여 고조선을 왕검 조선이라 했다. 백익 또는 그와 관계되는 뜻은 여러 글자로 기록 되었다. 해 “解를 海”로,때로는 누르 황 붉을 적(赤, 比) 아무아물 하다는 뜻에 가물 현(玄), 거물 흙(黑), 햇볓을 사음한 비(非, 費, 肥), 해비씨 (解枇氏), 등 빛을 숭상 하는 사람들의 수령 백익의 후손을 뜻한 글자(非子伯益之後)로 바꾸어 기록 했다. 앞서 고죽군이 이(李)씨 라 했다. 그 밖에도 “江, 共, 𨛬, 裴, 秦”등 많은 성씨가 백익의 후손이다. 이렇게 처음 만들어진 글자의 뜻과 어음을 돌려 여러 글자로 기록 했다. 고죽군이 살았다는 중산국이 있던 지역을 대현이라 한다. 대(代)자 를 산위에 올려 “岱로 維 밧줄 유, 벼리 유, 惟 생각할 유”로 바꾸어 산동반도에 접붙였다.
같은 부여의 후손들이 남방불교를 받아드리고 한해의 동서 연안에 살았지만 한반도에서 만이 붉을 단변 청(靑)자로 쓰고 있다.
황제 헌원이 찾아온 풍산(風山)은 청산 계곡(青山 靑丘) 또는 그 가까이에 있었다. 고조선 영역이었던 국어 진어(晉語)에 실렸다. [19] 산서성에서 발원하여 황하로 이어지는 상군(上郡)이라 부르던 지역으로, 옛 제후국 진(晉)의 영역에 있었다. 청산 청구(青山 靑丘) 또한 그 지역에 있었다
여러 선진문헌에 기록된 청주 (青州)는 구주의 동북 쪽 (燕曰 幽州)에서 분하 북쪽으로 올라가서 새로 빼았은 땅(SMa-Out)에 나타난 지역에 접 붙였다. 주례직방씨(周禮職方氏) 남쪽 오나라에서는 공손연을 청주목 요동태수연왕 (青州牧遼東 太守燕王)칭호를 주었다. [20] 푸를 청(靑州)자를 바꾸어 청주 (青州)라 했다.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옛 청주(古青州)로 옮겼다는 기록이 통전에 있다. 기록이 남아 있지 않는 발해와 고려 왕건이 모두 남만주에서 나타났다는 기록도 있다.
부여 공손씨(不與公孫氏)의 후손이 만주 땅에 올라와 우거왕의 경기 지역 에 자리잡아 현토 태수 공손역(玄菟太守公孫琙)이 나타났다. 현토 태수가 대륙백제의 시조가 된다. 하여 백제의 성씨를 부여(扶餘)라 한다. 고구려와 백제는 부여에서 나와 고(高)씨 해(解)씨를 성씨로 쓰고 고려에서는 왕씨 (王氏)라 했다. 서긍은 왕씨의 혈통을 모르겠다고 발뺌 했다. 송(宋) 휘종 (徽宗)이 1123년 고려(高麗)에 사신(國信使)를 보낼 때에 따라 왔던 서긍 (徐兢;1091-1153)이 황실에 바친 비밀문서에는 청(靑)자가 없다. 모두 달월 변 청 (青)자로 실렸다. 서긍 일행을 안내하고 후에 삼국 사기를 남긴 김부식은 청구(靑丘)를 청구(青丘)로 단 한번, 불교 신자 사찬 수미산 (沙飡須彌山)을 특사로 보내서 고구려 사자 안승(嗣子安勝)을 후고구려 왕으로 봉한 문서에 사용 했다. [21] 앞서 본 바와 같이 달월변 청(青)자는 박구라(薄佉羅)국이라도 하던 불교국가 월지(月支)와 관계가 깊은 글자다. [22]
이렇게 중원 세력은 글자를 이리저리 바꾸어 영역을 바꾸어 확장해 나갔다. 청(靑 青)자 참 진(眞; 真), 계림(鷄林 桂林) 하는 글자들이 그 한 본보기다. 글자를 보면 신미제국(新彌諸國)은 지나 (支那)영역이었던 복건성 (福建省) 에 있었다. 지나에 신라와 가야가 있었다. 후에 한해 남쪽 항로를 개발 하고 남방 불교를 한반도에 전했다.
필자는 옛적에 산해경(山海經)해내경(海內經)의 첫 문구가 왕검조선을 뜻 한 문구라고 설명 했다. 천독의 본 글자는 <규 (圭) 를 든 유목민 (母)의 지도자을 뜻한 상형 글자>다. 본 글자는 “𣫴;圭, 母, xié/시애/쉐” 라고 읽었다. 하늘로 부터 규를 소유할 권한을 위임 받은 단군을 뜻한 글자다.
시애 (xié xī xí/해, 解, 解批, 巂,𦋅,𡸔,𣫴)라고 부르는 여러 성씨가 산서성 해지 연안에서 나왔다. [23] 뒤에 어느 누가 모양이 비슷한 독(毒)자로 바꾸고, 었다. 북해지우(北海之隅)라 한 곳은 산서성 해지(解池) 북쪽 연안이란 뜻이다. 풀 해자 (解:曉也)를 새벽 하늘에 밝은 물체”라고 했다. 설문해자에서는 휴 동해지읍(酅Xi:東海之邑)이라, 즉 하동 해지 (解/海池) 옆에 있는 마을 이라고 했다. 천시애 (天𣫴)가 살던 지역에 있던 호수라 하여 염지 (鹽池) 라는 보통 명사를 쓰지 않고 고유명사로 시애지(xié chi, 解池,해지) 라고 기록 했다. 글자 “𣫴, xié/시애/쉐”와 같은 발음의 글자가 해지 연안에 살았던 휴자(攜, xié 子)다. 그에게 순임금이 양위를 하고 돌아 오지 않았다.
전국시대 기록에 그 사연이 실렸다. 장자 “왕의 직위를 이양 했다는 양왕편, 여씨춘주, 고사전”등 많은 고전에 실려 있다. [24] 왕의 직위를 이어 받은 사람을 순임금의 친구 북인 무택 (北人無擇)이다. 무택이 와전 되어 고죽국 묵태씨(墨胎氏)라 한다. 순임금이 기(冀)주에 살았다. 이를 구주 중에서 북쪽 지역이라 했다. 제왕의 도읍지(帝王所都)가 있던 지역이다. 제순(舜) 이 등극 하자 여러 곳에서사절단 을 보냈다. 서왕무(西王母)가 찾아왔고, 숙진씨(息慎氏)는 활을 북쪽 에서 현토씨(玄都氏)는 보옥(寶玉)을 바쳤다. 아들 의균(子義鈞封于商)를 북쪽 상(商丘)에 봉했다. [25] 제위 49년에 명조(鳴條)에 가서 살다 죽었다. 영역이 넓어 져서 연(燕)이북을 잘라 유주(幽州)를 만들었다. [26] 그 지역을 청주(靑州)라 했다. 붉을 단(丹) 변 청(靑)자는, 왕검조선 탄생 시대 하동 동북부에 붙여진 글자다.
천시애(天𣫴)를 천독(天毒)이라고 바꾼 시기는 제터 단자 단군 (壇君)을 박달나무 단(檀 善木)자를 선목이라 했다. 상서 미자편에 <하늘 나라(天毒) 에서 재앙을 내렸다(降災), 즉 천벌을 받았다는 문구를 하늘이 독한 마음을 품고 재앙을 내려>라고 풀이 한다.[27] 단군왕검 백익을 천시애(天攜, xié 子) 로 이를 집권자는 천자(天子), 제사장은 “天君, 禮君” 이라고 했다.
해지연안에 살던 사람들이 금미달이라 한 청주(靑州)에서 고난을 겼다 못해 만주로 옮겨 왔다. 숙진씨(息慎氏)와 현토씨 (玄都氏)의 후손이 만주 위만조선 영역에 살았다. 그들은 전과 같이 하늘에 제사를 드렸다. 그들의 제천 의식이 삼국지 동이전에 여러 모로 실렸다. 한전에는 천시애 (天𣫴)를 “천신께 天神 제사를 드리는 사람을 천군 天君” 이라고 실렸다.[28]
위진 시대 불교가 고조선 토속신앙과 유사 했다는 표현이 아래와 같은 기록이다. 信鬼神,國邑各立一人主祭天神,名之天君。又諸國各有別邑。名之為蘇塗。立大木,縣鈴鼓,事鬼神。諸亡逃至其中,皆不還之,好作賊。其立蘇塗之義,有似浮屠.
어렴풋할 외, 가까이할 외( 偎;亻,畏wēi)자는 사랑이란 뜻이 있는 나라 이름 (偎:愛也,亦國名)이다. 물가에 사는 잠길 외, 더러워질 외, 빠질 외, 흐릴 위(渨 ) 와 같은 글자로 예맥( 渨. 《博雅》穢也)이라고 했다. 외인 (偎人) 이란 글자는 한예왈 외왜(汙穢曰渨涹), 모예위건(冒禮為諐) 하는 문구도 있다. [29] 열자 황제편(列子·黃帝篇)을 인용 하여 외(偎)자를 선성 (僊聖, 仙聖) 의 신하로 지역은 발해만 서안 고사산(列姑射山)국과 관련 시겨 설명 했다. [30] 장자 내장편에는고사산(姑射山)이 있던 곳의 시대와 장소를 밝혔다. 요 임금이 해지연안을 뜻한 해내(海內, 河東)를 다스릴 때에 산서성 분수연안 (汾水之陽)을 신인이 살던 곳(神人居)이라고 했다. [31]
둥근 알과 같은 상형이 붙은 “靑: 龶,下:円.丹與円同”청자라고 읽는 글자는 옛적 구주의 제일 북쪽 청양씨가 자리 잡았다는 청주(靑州,靑陽氏) 를 뜻해 다. [32] 청구가 삼한 땅이라는 어음의 원조는 “붉을 단, 둥글원자”를 붙인 글자가 원조다. 서쪽에서온 까마귀 알, 오환(烏桓, 烏丸)족이 청구에서 살았다. 그들이 북쪽에 살던 곳을 오골성 (烏骨城), 그 일대를 지나는 여울 을 오천(烏川) 이라 했다.
한글 위키에서 “푸를(靑)를 설명한 내용은 해지 연안에 살았던 휴자(攜, xié 子),즉 “𣫴, xié/시애/쉐”로 읽던 글자다. 그 후손이 분수 계곡을 따라 올라가서 살던 지역에 마지막 수도 금미달이 있었다. 그 지역 청구(靑丘) 에서 황제가 자부선인(紫府仙人)으로 부터 삼황내문 (三皇內文) 을 받았다.
청구(靑丘)란 글자는, 삼국사기에 “靑丘之表,靑丘道行軍” 실렸다. 고구려 멸망이후 안승을 책봉 하며 내린 문구에“우풍진 어청구 威風振於青丘, 즉 우퐁은 청구에 떨쳤다”. 옛적 고구려 땅을 청구라 했다. 두 글자 사용의 한계가 모호하다. 답이 삼국 유사에 있다. 모두 청구 소문(青丘沙門) 또는 청구불(青丘佛)과 같이 청구란 어음의 기원을 불교와 관련 되었다. 홍산문화권에서 내려오는 통로에 불교가 전래 되어 “붉을 단자를 붙인 청구”를 불교국을 뜻한 달월자를 붙인 청구(青丘) 로 바꾸었다.
현제 중국과 일본에서는 “青”으로, 한국에서는 “靑”자로 기록 한다. 북쪽 사람들이 내려가 세운 월남 역사서 (大越史記全書)에는삼국사기에서와 같이 “靑 青”두 글자로 기록 했다.
청진“青 真”두 글자는 불교 전래와 관계가 있다.
청나라 초기에 만든 강희자전은 모든 글자의 설명을 일획 상형자 여섯 “一丨丶丿乙亅”으로, 청자는 달월 변 청 “青” 자, 청부(青部) 에서 설명 했다. 시서경등 많은 고전에 는 “海岱惟靑州”와 같이 “靑” 로 기록 했었다. 고전에 상형자는 각자 제나름 대로 형태가 변해 갔다. 참 진 (真:同眞 俗字) 자가 그 한 본보기다. 삼국사기에는 이 두 글자(真 眞)를 혼용했다. 일연 스님은 모두 “青”와 한일 홱을 똑바로 그린 진(真)자로 적었다. 이 두 글자는 금미달 지역에 전래된 불교와 관계가 있다고 본다.
고전백과 “https://ctext.org/zh사전” 이라 판단되는 자서(字書)편에 글자 설명이 실려있다. 중국 한나라의 사유(史游)가 편찬한 급취편 (急就篇)에서 참 진(真 眞)자와 푸를청 (靑 青)자의 편형을 찾아 볼수 있다. 진(真; 眞의 俗字)자와 달월 변의 청 (青)자는 실리지 않았다. 또한 불교국이 되었던 원나라 때에 주백기 (周伯琦; 1298-1369) 가 편술한 육서정와(六書正譌) 에는 달월 변의 청 (青)자는 있고, 붉을 단 변 청 “靑”자와 참 진 “眞” 두 글자가 없다. 원나라때 편찬된 원사 (宋史) 또한 참진(真), 여진 (女真) 으로 기록 했다. 일홱부수 한일형을 곧게 그은 두 상형글자 “靑 真”가 처음에 북쪽 사람들이 만들어 쓰던 글자다. 이는 태어 났다(靑,生也)는 뜻으로 우키패디아에서 설명 했다. 강희 자전에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고 풀이 했다. 광운(廣韻)에서도 글자 설명에 청출(靑出)이란 글자를 썼다.
그러나 금미달 에서 흐터져나가 제국을 이루었던 나라의 역사서 요사 금사 글안국지(遼史 金史 契丹國志)에는 붉을 단 변 청(靑)는 었다. 모두 달월자 변 청주 (青州) 란 기록이 있다.
현제 사용 되는 한자(漢字)에는 뜻과 음이 같으나 글자 꼴이 다른 글자가 많이 있다. 산서성을 조선과 같은 뜻 글자 진 (晉)이라 했다. 그 곳 사람들을 노예로 썼다. 제후국 진의 별명을 성(省)란 뜻에 간략 해서 “省作, 俗作, 隸作. 今變隸作” 이라 했다. 변할 변,또는 바를 변 이라고 읽는 변예(變隸) 란 글자는, 변한(弁韓)지역을 뜻했다. 고조선 마지막 수도 금미달 지역을 변한이라 불렀다고 앞서 논증 했다. [33] 금미달 영역에서는 허진(許愼:58 – c. 148 CE)이 활동하던 시절에도 고유의 글자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 예로 불가에서 쓰는 나무(南无, 南無)아비타불 뜻이다. 고전 “詩, 書, 春秋, 禮記, 論語” 에서 없을 무(無)자를 4획 “无”자로 사용했었다. 그 출처를 불가의 자서전 “釋典, 釋文”이라 했다. 그러나 현제 많이 인용하는 고전 연구에 https://ctext.org/zh는 4획 “无”자는 모두 없을 무(無)자로 나타난다.
本用无字,變篆者變爲無,惟易、周禮盡用无。然論語亡而爲有,我獨亡,諸無字,蓋變隸時誤讀爲存亡之亡,故不改也。又《廣韻》莫胡切,音模。南无,出《釋典》。蓋變隸 无音無. 南无,出《釋典》
현제 동북아에서 쓰는 상형 글자 기원을 창힐이 육서 원칙에 따라 글자를 만들었다고 한다. 고조선 사람들이 그에 앞서 문자를 사용 했다는 증거다. 불경 기록에의 거루/가라선인(Khara; 佉盧. 佉樓仙人) 이 창힐 이전에 글자를 만들어 썼다는 기록이 있다. [34] 급총죽간이 모두 검은 옷칠로 그려진 과두자 (漆書皆科斗字)로 적힌 위나라 역사서에 실렸다.
나라 이름 또는 신 이름이라고 읽는 가(佉)자가 실린 박가라(薄佉羅)란 나라는 월지(卽月支)국이른 이라 했다. 월지란 이름이 여러 지역에 나타났다. 삼국지 한전에는 월지국이 백제국(伯濟國)가까이, 여러 전치사를 붙인 모로국 (莫盧國)이 신소도국 (臣蘇塗國)과 같이 실렸다.
월지국(月支國)을 진왕(辰王)이 다스렸다. 이는 삼국 사기 신라 본기에 실린 내용이다. 거서간 (居西干) 이란 서쪽에 살던 지도자란 뜻이다. 신라(新羅)를 변한의 후예(弁韓苗裔也)라 했다. 삼국지 변진전에 신라 (新羅)의 옛 이름 사로국 (斯盧國)이 조선의 유민이 살았다는 뜻의 주선국 (州鮮國,조선이 바다에 있다) 과 같이 창해군이 있던 곳을, 같은 시대에 살았던 두 사람, 즉 진수와 장화는 조선을 “州鮮國, 為鮮國” 라고 기술 했다. 당나라 때 불교 스님들이 편술한 법원주림(法苑珠林)에 실린 “佉盧 Khara,仙人名” 문구는 광새토 대왕 비문에 임나가라 (任那加羅)가 분명 하다. 나라를 다스리도록 가라 선인 에게 일임 했다는 뜻이다. 금관가라 首露王謂金官國首露王年老多智識
청구, 즉 해하 상류 오대산 공원이 있던 지역에 살던 금미달 사람들이 발해만 연안으로 나와 여러 소읍 국가를 이루고 살다가 한해의 동서 해안을 바다로 흐터져 나갔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南無阿彌陀佛 觀世音菩薩)은 불교에 대한 믿음으로 부처와 보살님의 배움을 받으며 신앙을 키우겠다는 다짐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한국에서 한자사전의 대명사로 부르는 옥편(玉篇) 에는 “𡴑” 자가 푸를 청자로 씌었다고 한다. 옥편은 옛적 부터 전해 오던 이상한 글자 기자 (奇字)에 능통한 고야왕 (顧野王; 519-581)이 만들었다. 북쪽 사람들이 “옥돌에 새겨 놓았던 글자들을 모아 정리한 자전”이란 뜻이다. 하여 해편 (解 亥 海篇, 篇海) 이라고도 한다. 고야왕 때 만들어진 옥편(玉篇) 이 한해 남방 통로를 따라 남방불교와 함께 한반도에 이르러 이조시대 까지 전해 오고 있다. [35]
동한 시대에 만든 자서(字書) 에는 천독(天毒)이라 부르던 독자 밑의 무/모(毋, 母)자를 달월자 비슷한 글자“青:龶:月” 로 바꾼 글자 뿐이다.
허신의 설문해자(說文解字)에는 “靑 𡴑 𡴏 𡴐 𡗡 寈”자가 없다. 이상한 글자, 기자 (奇字)는 옥편에 실렸었다. 북쪽에서 쓰던 글자라 본다.
북쪽사람들이 만들어 쓰던 글자 꼴을 남쪽 사람들이 바꾸었다. 푸를청 (靑 青)이라고 읽는 두 다른 형태의 글자는 8획 이다. 청나라 때 훈고학자 단옥재 (段玉裁; 1735-1815)는 설문해자주 에서 이 두 글자는 “靑 青 𡴑 𡴏 𡴐 𡗡 寈”와 같이도 씌였다고 한다. 상형글자의 기본이 되는 획수가 다르다. [36]
대당서역기에는 “靑 眞”자가 보이지 않는다. 모두“青 真”로 기록 했다. 송고승전(高僧傳) 또한 “靑 眞”자가 실리지 않는다. 송나라 사람 서긍이 남긴 고려도경 또한 모두 “青”와 진(真)자로 적었다. [37]
강희자전에 실린 단청(丹靑)이란 글자는 도교와 불가에서 성스러운 건물을 호화롭게 분장한 기록에 나타난다. 단청(丹靑)이란 글자의 다른 표현이 청홍(靑紅)색 이다. 청실 홍실이란 가사가 있다.
같은 문화권에서도 한 일 중 세 나라가 다른 글자를 쓰고 있다. 단청(丹靑)은 한국, 달월변의 단청(丹青)은 중국에서 쓰는 글자다.
이는 천독(天毒)이란 글자에서 설명했던 “규를 든 여자 지도자”란 뜻 글자에서 유래 했다고 본다. 독 독(毒)자에서 어미모를 달월 변의 청 (青)자와, 붉을 단 변 청 “靑”자로 바꾸었다. 달월 변의 청 (青)자는 불교 발생지 월지국(月支國)영향 영역에서, 알을 뜻한 붉을단 변의 청(靑)자는 고조선의 후예인 한국에서 사용 하고 있다.
청구(青丘)에서는 구미호(狐九尾)를 선물 했다. 사기에 실린 미지 (彌地) 와 동호(東胡)란 글자에서 그 관계를 찾을수 있다.
청나라 때 편술된 묵자 한고에 죽일 도 자 도하(屠何)를 동호의 선조 (東胡之先) 라 했다. [38] 모둔 선우의 급습에 피살 당한 동호왕을 朝鮮 왕 부/비(朝鮮王否)라 했다. 그 곳에 노관의 아들을 봉했다. [39] 옛왕공 대인의 수도에 사는 자비롭고 인자한 사람은 이방인 (慈仁他) 이다. 그를 가까이 있던 곽씨와 초씨(郭焦)가 점령 했(破滅胡)다. [40]
서주 성왕이 상나라 잔여 세력을 소탕하고 실시한 사상 가장 성대 했던 후에 왕들의 모임 설명(王會解)에 가 지역에서 참가한 사절단을 방위에 따라 기록 했다. 분수 연안에 있었던 첫 공공국 중심으로 그 일대에서 갖고온 선물과 지역(나라)이름이 실렸다. 고리(高夷)옆에 공공(邛邛) 라 그 일대를 고죽거허(孤竹距虛), 그 옆에 우령지(不令支) 부도하(不屠何), 동호(東胡)라했다. [41]
옛적에 서쪽 월지국(胡)에서 이방인 고조선 사람들 늙은 이(彌年壽考 曰胡)을 뜻한 상형자다. [42] 하여 이를 다음 사전에는 “오랑캐 호, 목 호, 되 호, 오랑캐 이름 호, 수염 호”라 했다. 도하(屠何)와 호(胡) 동호(東胡)는 단군왕검 피살 이후 하동 해지 연안 명조(鳴條)에서 지도를 들고 북쪽 흉노땅에 가서 선우가 되었다는 고조선 사람들 미달(彌達)의 후예다. [43]
청구 (青丘)의 현 위치: 앞서 고 죽(孤竹)을 설명한 바와 같이 푸른 구릉이란 뜻의 청구(靑丘) 또한 오랫동안 여러 지역을 지칭 했다.
일주서 왕회해에는 청구에서는 “북쪽에서 해유관을 바친 발인과 가까이 청구에서 구미호(青丘 狐九尾), 즉 꼬리가 아홉인 여우를” 바쳐다고 했다. 그 일대에 동북방에 사는 “고리 공공 고죽 부령지 高夷, 邛邛, 孤竹, 不令支” 등등 여러 부족 이름이 실렸다. 또한
단군왕검을 살해 하고 그 후손이 다스렸다는 전설적 하(夏)나라의 (북쪽을 통치 했다는 뜻이 있는)제저(帝杼)가 한원에 살다 노구(老丘)로 옮기고, 해지 연안과 삼수를 정벌하고 청구에서 구미호 (狐九尾)를 얻었다. 상후 명이 황하 북쪽(商侯冥死于河)에서 죽었다. 태평어람에는 치수 사업을 하던 우의 여자들(禹妃)을 설명 했다. 그가 북쪽 부쌍(婚於臺桑)이라는 곳에서 결혼식을 할때 꼬리가 아롭인(白狐九尾)흰여우가 나타났다. [44] 이는 모두 글자 그대로 풀이 하여 받아 드릴수는 없다. 있었던 사실을 상직적으로 비유해서 기록 했다. 상후(商侯)는 고유 명사가 아니라 상나라의 지도자를 뜻했다. 청구(靑丘)란 이름은 황하 문명 발생지에서 멀리 떠러진 잘 아려 지지 않았던 (SMa-Out) 동북쪽 영역을 뜻했다. 같은 지역을 불교 전래 이후에 “청구(靑丘)글자를 달월변 청 (青丘) 자로 바꾸어 그에 따라 북쪽에 있던 이름자 “狐九尾, 黑齒, 儋耳”가 중국 동해연안을 따라 내려가, 동남아 지역에 나타났다.
북쪽 지역을 사기 오제본기에는 청양강거강수(青陽降居江水)라, 즉 청양이 내려와서 강수연안에 살았다. [45] 이곳에서 처음으로 치수 사업을 하느라고 첫 공동체 공공국(共工, 邛邛, 邛邛, 共工國)가 나타났다. 강수 연안이 고조선의 발생지다. 이들을 북적(北狄) 白狄 赤狄 蓋狄)적이라 부르던 백의민족 시원지다. 이 지역을 여주, 발조선, 통치자를 북주후 모라 했다. 청구란 이름은 홍산 문화권 사람들이 내려오던 분수 계곡 북부지역을 뜻했다.
맺음 말:
삼한 (三韓)땅 청구(靑丘)의 어원을 살펴 보았다. 청진“青 真”두 글자는 불교 전래와 관계가 있다. 같은 고저선의 후손으로 동북아시아에 흐터져 살면서 불교 문화권에 속하는 한 일 중 세 나라가 다른 글자를 쓰고 있다. 붉을 단 변의 단청(丹靑)은 한국, 달월변의 청(青)자는 중국과 일본에서 쓰는 글자다. 금미달 에서 흐터져나가 제국을 이루었던 나라의 역사서 요사 금사 글안국지(遼史 金史 契丹國志)에도 붉을 단 변 청(靑)자는 없다. 모두 달월자 변의 청주 (青州) 란 기록이 있다.
중국문헌을 종합해 보면,황제가 청구에 이르러 자부선인으로 부터 도교 경전의 핵심이 되는 삼황 내문(三皇内文)을 받았다는 곳은 수경주, 역수 연안, 당시 연나라 수도(燕都)가 있던 청구(靑丘,青丘)다. 자부선인은 산신이 되었다는 단군이다. 불교에서는 미륵(彌勒)으로, 또는 안문관을 지키던 안왕 (雁王) 이라 했다. 여러 단군의 가름침을 종리한 경전이 도덕경(道德經)이다. 그러나 현존하는 모든 도가경전에는 붉은 단 변 청(靑)자는 보이지 않는다.
금미달 에서 흐터져나가 나타난 나라 중에 단군왕검을 국조로 모시는 한국(韓國)에서 만이 붉을 단(丹) 변 청(靑)자를 쓰고 있다.
끝
May 3rd, 2023.
[1].字書 急就篇: 朋黨謀敗相引牽。欺誣詰狀還反真. 字書 說文解字:假:非眞也。从人叚聲。一曰至也。《虞書》曰:「假于上下。」. 眞:僊人變形而登天也。
[2].三國遺事: 都平壤城今西京始稱朝鮮。又名弓一作方忽山。又今彌達。御國一千五百年。周虎王即位己卯封箕子於朝鮮。壇君乃移於藏唐京: 後還隱於阿斯達為山神。壽一千九百八歲。唐裴矩傳云。高麗本孤竹國今海州. 周以封箕子為朝鮮. 漢分置三郡。謂玄菟樂浪帶方北帶方.
[3]. 康熙字典 叒:《唐韻》而灼切,音若。榑桑,叒木。《說文》日初出東方暘谷,所登榑桑叒木也。《徐曰》叒亦木名。東方自然之神木。又《精薀》叒,順也,道相似也。古人發明取友之義,从三又會意,同心同德,而後可相與輔翼也。桑字从此,象衆手之形,非取其義。《正譌》二又爲友,三又爲叒,所助者多,故爲順也。會意。
[4]. 史記: 韓王信徙王代,都馬邑. 太尉周勃道太原入,定代地。至馬邑,馬邑不下,即攻殘之. 史記 平準書:彭吳賈滅朝鮮,置滄海之郡,則燕齊之閒靡然發動。及王恢設謀馬邑,匈奴絕和親,侵擾北邊,兵連而不解,天下苦其勞,而干戈日滋.
[5].漢書 郊祀志: 燕昭使人入海求蓬萊、方丈、瀛洲。此三神山者,其傳在勃海中,去人不遠。蓋嘗有至者,諸僊人及不死之藥皆在焉.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 – Wikisource 取韓穢二百廿家.
[6].三國遺事: 意在斯焉古朝鮮王儉朝鮮. 都平壤城. 又名弓一作方忽山。又今彌達。御國一千五百年。周虎王即位己卯封箕子於朝鮮。壇君乃移於藏唐京: 後還隱於阿斯達為山神。壽一千九百八歲。唐裴矩傳云。高麗本孤竹國今海州. 周以封箕子為朝鮮. 漢分置三郡。謂玄菟樂浪帶方北帶方.
[7]. 說文解字 水部: 海:天池也。以納百川者。从水每聲. 治也. 廣韻 海:《說文》曰:天池也,以納百川者亦州禹項徐州之域七國時屬楚秦爲薛郡漢爲東海郡後魏爲海州亦姓
[8]. 竹書紀年 成王: 十二年,王帥、燕師城韓。王錫韓侯命.
[9]. 史記: 太史公曰:「先人有言:『自周公卒五百歲而有孔子。孔子卒後至於今五百歲,有能紹明世,正易傳,繼春秋,本詩書禮樂之際?』意在斯乎!意在斯乎!小子何敢讓焉。」
[10].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 – Wikisource
[11].尸羅: Śila,又云尸怛羅,正譯曰清涼,傍譯曰戒。身口意三業之罪惡,能使行人焚燒熱惱,戒能消息其熱惱,故名清涼。又,舊譯曰性善。大乘義章一曰:「言尸羅者此名清涼,亦名為戒,三業之非,焚燒行人,事等如熱。戒能防息,故名清涼。清涼之名,正翻彼也。以能防禁,故為戒。」義林章三本曰:「尸羅梵語,此言清涼。」華嚴玄談三曰:「或名尸羅,具云翅怛羅,此云清涼,離熱惱因得清涼果故。」行事鈔中一曰:「尸羅此翻為戒。」智度論十三曰:「尸羅秦言性善,好行善道不自放逸,是名尸羅。」. 譯曰戒光。道琳法師在梵之名也。見求法高僧傳下
[12].三國遺事: 按三國史云。新羅稱王曰居西幹。辰言王也。或云。呼貴人之稱。或曰。次次雄。或作慈充金大問云。次次雄方言謂巫也。世人以巫事鬼神尚祭祀.三國史記 新羅本紀第一:號居西干。國號徐那伐。先是,朝鮮遺民分居山谷之間,為六村:一曰閼川楊山村,二曰突山高墟村,三曰觜山珍支村,或云干珍村。四曰茂山大𣗳村,五曰金山加利村,六曰明活山高耶村,是為辰韓六部。高墟村長蘇伐公望楊山麓,蘿井傍林間,有馬跪而嘶,則徃觀之,忽不見馬,只有大卵。剖之,有嬰兒出焉,則收而養之。及年十餘𡻕,岐嶷然夙成。六部人以其生神異,推尊之,至是立為君焉。辰人謂瓠為朴,以初大卵如瓠,故以朴為姓。居西干,辰言王。或云呼貴人之稱。
[13]. 康熙字典 斯:《說文》析也。《爾雅·釋言》斯,離也。《註》齊𨻰曰斯。《呂覽·報更篇》趙宣孟見桑下餓人,與之脯一朐,曰斯食之。《註》斯,析也。又《爾雅·釋詁》斯,此也。《易·解卦》朋至斯孚。《詩·召南》何斯違期。又《詩·小雅》鹿斯之奔。又與鮮同。《詩·小雅》有兔斯首。《箋》斯,白也。今俗語斯白之斯作鮮.三國志 魏書三十 韓傳: 韓在帶方之南,東西以海為限,南與倭接,方可四千里。有三種,一曰馬韓,二曰辰韓,三曰弁韓。辰韓者,古之辰國也。馬韓在西。辰王治月支國. 康熙字典:《唐書·東夷傳》新羅,弁韓苗裔也,居漢樂浪地。
[14].漢書 高帝紀下: 以太原郡三十一縣為韓國,徙韓王信都晉陽。漢書 魏豹田儋韓王信傳: 乃更以太原郡為韓國,徙信以備胡,都晉陽。信上書曰:「國被邊,匈奴數入,晉陽去塞遠,請治馬邑。」上許之. 韓非子 飾邪:今者韓國小而恃大國,主慢而聽秦魏、恃齊荊為用,而小國愈亡. 韓非子 存韓: 李斯往詔韓王,未得見,因上書曰:「昔秦、韓戮力一意以不相侵,天下莫敢犯,如此者數世矣。前時五諸侯嘗相與共伐韓,秦發兵以救之。韓居中國,地不能滿千里,而所以得與諸侯班位於天下、君臣相保者,以世世相教事秦之力也。先時五諸侯共伐秦,韓反與諸侯先為鴈行以嚮秦軍於關下矣。諸侯兵困力極,無奈何,諸侯兵罷。杜倉相秦,起兵發將以報天下之怨而先攻荊,荊令尹患之曰:「夫韓以秦為不義,而與秦兄弟共苦天下。已又背秦,先為鴈行以攻關。韓則居中國,展轉不可知。」天下共割韓上地十城以謝秦,解其兵。
[15].. 論衡 對作: 楊、墨之學不亂傳義,則孟子之《傳》不造;韓國不小弱,法度不壞廢,則韓非之書不為.後漢書 東夷列傳: 辰韓,耆老自言秦之亡人,避苦役,適韓國,馬韓割東界地與之
[16].墨子閒詁 兼愛中: 職方氏有九貊,漢書高帝紀,顏注云:「貉在東北方,三韓之屬皆貉類也。」. 三國史記 新羅本紀第一: 馬韓王薨。或說上曰:「西韓王前辱我使. 前此中國之人苦秦亂,東來者衆,多處馬韓東,與辰韓雜居,至是寢盛,故馬韓忌之,有責焉。瓠公者,未詳其族姓。本倭人,初以瓠繫腰,渡海而來,故稱瓠公. 三國志 魏書三十 濊傳:。陳勝等起,天下叛秦,燕、齊、趙民避地朝鮮數萬口。燕人衞滿,魋結夷服,復來王之。
[17]. 高麗圖經: 晉史謂三韓之人初生子便以石壓其頭令扁非也葢繇種類資稟而然未必因石而扁.
[18].《廣韻·下平聲·靑·靑》靑:東方色也,亦州名九州之一禹貢曰海岱惟靑州又男靑女靑皆木名出羅浮山記亦姓出何氏姓苑又漢複姓三氏風俗通云漢有靑烏子善數術又有靑牛氏靑陽氏。倉經切,
《康熙字典·青部·青部》靑:〔古文〕𡴑𡴏𡴐𡗡寈《唐韻》《集韻》《韻會》𠀤倉經切,音鶄。《說文》東方色也。《釋名》靑,生也。象物之生時色也。《書·禹貢》厥土靑黎。《荀子·勸學篇》靑出之藍而靑於藍。又神名。《史記·封禪書》秦宣公作密畤于渭南,祭靑帝。又州名。《書·禹貢》海岱惟靑州。又鳥名。《禮·曲禮》前有水,則載靑旌。《註》靑,靑雀,水鳥。又木名。《庾信·步虛詞》空靑爲一林。《註》雲笈七籤,玉淸天中有樹,似松,名曰空靑之林。《廣韻》出何氏姓苑。又複姓三氏,漢有靑烏子。又有靑牛氏,靑陽氏。與菁同。《詩·衞風》綠竹靑靑。《傳》靑靑,茂盛貌。《釋文》靑,子丁反。本亦作菁。又《小雅》其葉靑靑。
[19]. 國語 晉語八: 風德以廣之,風山川以遠之,風物以聽之,修詩以詠之,修禮以節之. 水經注 河水:河水南逕北屈縣故城西,西四十里有風山,上有穴如輪,風氣蕭瑟,習常不止. 河側有兩山相對,水出其間,即上河峽也,世謂之青山峽。河水歷峽北注,枝分東出.後漢書 馮岑賈列傳:青山胡率萬餘人降異。異又擊盧芳將賈覽 匈奴薁鞬日逐王 破之。上郡 安定皆降 異復領安定太守事.
[20].字書 急就篇: 朋黨謀敗相引牽。欺誣詰狀還反真. 字書 說文解字:假:非眞也。从人叚聲。一曰至也。《虞書》曰:「假于上下。」. 眞:僊人變形而登天也。
[21].三國史記: 命高勾麗嗣子安勝:公太祖中牟王,積德比山,立功南海,威風振於青丘,仁教被於玄菟。子孫相継,本支不絶,開地千里,年將八百.
[22].康熙字典:《內典》薄佉羅,卽月支也. 國名。玄應音義四曰:「月氏國,薄佉羅國應是也。在雪山之西北也。」梵Bhuḥkhāra
[23].解:曉也,又解廌仁獸似牛一角亦姓自唐叔虞食邑於解今解縣也,晉有解狐解楊出鴈門又虜複姓魏書有解批氏
[24].莊子讓王:舜以天下讓其友石戶之農,石戶之農曰:「捲捲乎后之為人,葆力之士也。」以舜之德為未至也,於是夫負妻戴,攜子以入於海,終身不反也。攜:提也. 呂氏春秋 離俗覽 離俗: 以舜之德為未至也,於是乎夫負妻妻攜子以入於海,去之終身不反。舜又讓其友北人無擇。
[25].竹書紀年 帝舜有虞氏: 西王母來朝.息慎氏來朝貢弓矢. 玄都氏來朝,貢寶玉. 帝居于鳴條.
[26].康熙字典 冀:《玉篇》北方州。《爾雅·釋地》兩河閒曰冀州。《廣韻》九州名。《晉書·地理志》冀州,其地有險有易,帝王所都。舜以南北闊大,分衞以西爲幷州,燕以北爲幽州。《書·禹貢》冀州厥土惟白壤,兗州厥土黑墳,靑州厥土白墳,徐州厥土赤埴墳,揚州荆州厥土惟塗泥,豫州厥土惟壤下土墳壚,梁州厥土靑黎,雍州厥土惟黃壤.
[27]. 尚書 微子:父師若曰:「王子!天毒降災荒殷邦,方興沈酗于酒,乃罔畏畏,咈其耇長舊有位人
[28]. 三國志 韓傳: 信鬼神,國邑各立一人主祭天神,名之天君。又諸國各有別邑。名之為蘇塗。
立大木,縣鈴鼓,事鬼神。諸亡逃至其中,皆不還之,好作賊。其立蘇塗之義,有似浮屠.
[29].書叙指南: 汙穢曰渨涹劉向九歎又曰冒禮為諐. 《魏略》曰: 偎以蒙鄙之姿,得睹希世之寶.
[30].偎《列子·黃帝篇》不偎不愛,僊聖爲之臣。《字林》偎,仿佛見,不寡也。列子 黃帝:列姑射山在海河洲中,山上有神人焉,吸風飲露,不食五穀;心如淵泉,形如處女,不偎不愛,仙聖為之臣;不畏不怒,愿愨為之使;不施不惠. 虞書》曰:「假于上下。」. 眞:僊人變形而登天也。
[31].莊子: 藐姑射之山, 有神人居焉 堯治天下之民, 平海內之政, 往見四子藐姑射之山, 汾水之陽」
[32]. 廣韻·下平聲·靑·靑》靑:東方色也,亦州名九州之一禹貢曰海岱惟靑州又男靑女靑皆木名出羅浮山記亦姓出何氏姓苑又漢複姓三氏風俗通云漢有靑烏子善數術又有靑牛氏靑陽氏
[33]. Lee Mosol :· Lee Mosol: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 Second Edition.2020 by Xlibris. P 212: 說文解字 : 凡廾之屬皆从廾。今變隸作廾. 庖犧所結繩以漁。从冂,下象网交文。凡网之屬皆从网。今經典變隸作䍏. 康熙字典 无部: 无:〔古文〕𠑶《唐韻》武夫切,音巫。《說文》𣞣,亡也。奇字,无通𣞣。王育說,天屈西北爲无。《易·乾卦》无咎。《釋文》无音無。易內皆作此字。《藝苑雄黃》无亦作亡。古皆用亡无,秦時始以蕃橆之橆爲有無之無。詩、書、春秋、禮記、論語本用无字,變篆者變爲無,惟易、周禮盡用无。然論語亡而爲有,我獨亡,諸無字,蓋變隸時誤讀爲存亡之亡,故不改也。又《廣韻》莫胡切,音模。南无,出《釋典》.
[34].康熙字典: 佉:《正韻》丘於切,音區。與祛同。又國名。《內典》薄佉羅,卽月支也。又人名。《法苑珠林》造書凡三人,長曰梵,其書右行。次書佉盧,其書左行。少者倉頡,其書下行。又《廣韻》丘伽切《集韻》《類篇》去伽切,𠀤恰平聲。姓也。又佉沙國,卽疏勒也。見《唐書·異域志》又神名。《釋書》佛說彌勒成佛經,其先轉輪聖王,名儴佉。有四種兵,不以威武,治四天下。又《陀羅尼經》佉佉。《註》文殊眷屬。《又》佉呬佉呬。《註》普賢眷屬。◎按佉,梵音去佐切,見就形門。今不从,只以音和門,丘伽切,釋之爲是. 佉:《正韻》丘於切,音區。與祛同。又國名。《內典》薄佉羅,卽月支也。又人名。《法苑珠林》造書凡三人,長曰梵,其書右行。次書佉盧,其書左行。少者倉頡,其書下行。又《廣韻》丘伽切《集韻》《類篇》去伽切,𠀤恰平聲。姓也。又佉沙國,卽疏勒也。見《唐書·異域志》又神名。《釋書》佛說彌勒成佛經,其先轉輪聖王,名儴佉。有四種兵,不以威武,治四天下。又《陀羅尼經》佉佉。《註》文殊眷屬。《又》佉呬佉呬。《註》普賢眷屬。◎按佉,梵音去佐切,見就形門。今不从,只以音和門,丘伽切,釋之爲是。
」
[35]. Lee Mosol :· Lee Mosol: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 Second Edition.2020 by Xlibris. P 212: The Jade dictionary in Korea. 康熙字典 一部 六: 𠀡:《玉篇》古文天字。註詳大部一畫。𠀢:《海篇》音資。定也.一部 -五: 丟:《篇海》丁羞切。《揚子·方言》一去不還也。俗作丟,非.
[36]. 康熙字典一部:·寈:《集韻》靑古作寈。註詳部首。亦作𡗡𡴏𡴐,玉篇作𡴑。說文解字注寈: 注解:東方色也。考工記曰:東方謂之靑。木生火,從生丹。丹,赤石也。赤,南方之色也。倉經切。十一部。丹靑之信言必然。俗言信若丹靑,謂其相生之理有必然也。援此以說從生丹之意。凡靑之屬皆從靑。□,古文靑。注□、□、寈、□、□,亦古文靑。
[37]. 高麗圖經:·寈契丹復謹修貢且乞降尊號頒正朔又求封冊真宗皇帝初欲俯從議者難之遂寢止從班詔而已天聖中使人屢與女真偕來貢方物天子加恩報禮優異後詢卒子隆立優柔不斷. 東方之旗青色
[38]. 墨子閒詁 非攻中: 不著何亦北胡國,周書王會篇云「不屠何青熊」,孔晁注云「不屠何,亦東北夷也」《管子·小匡》篇「敗胡貊,破屠何」,尹注云「屠何,東胡之先也」
[39]. 史記 匈奴列傳: 東胡初輕冒頓,不為備。及冒頓以兵至,擊,大破滅東胡王,而虜其民人及畜產. 以匈奴東胡王降,故燕王盧綰子侯. 三國志 韓傳:及秦并天下,使蒙恬築長城,到遼東。時朝鮮王否立,畏秦襲之,略服屬秦,不肯朝會。否死,其子準立
[40]. 字書 急就篇: 公孫都。慈仁他。郭破胡. 焦滅胡
[41]. 逸周書: 解隃冠,發人。麃麃者,若鹿,青丘狐九尾。黑齒白鹿白馬. 北方臺正東,高夷嗛羊,嗛羊者。獨鹿邛邛,邛邛善走者也。孤竹距虛。不令支玄模。不屠何青熊。東胡黃羆。山戎戎菽. 諡法解:彌年壽考曰胡. 保民耆艾,𠀤曰胡. 字書 急就篇: 公孫都。慈仁他。郭破胡. 焦滅胡
[42]. 廣韻·下平聲·靑·靑》靑:東方色也,亦州名九州之一禹貢曰海岱惟靑州又男靑女靑皆木名出羅浮山記亦姓出何氏姓苑又漢複姓三氏風俗通云漢有靑烏子善數術又有靑牛氏靑陽氏
[43]. 焦氏易林 大畜之: 大畜:朝鮮之地,箕伯所保。宜人宜家,業處子孫,求事大喜. 焦氏易林 明夷之: 升:鳴條之郊/鳴條之圖,北奔犬胡。左衽為長,國號匈奴。王君旄頭,立尊單于.
[44]. 竹書紀年 帝杼: 帝即位,居原. 五年,自原遷于老丘. 八年,征于東海及三壽,得一狐九尾. 商侯冥死于河.. 太平御覽 禹妃:考工記曰:《帝王世紀》曰:禹始納涂山氏女,曰女媧,合婚於臺桑,有白狐九尾之瑞,到至是為攸女.
[45]. 史記 五帝本紀:黃帝居于軒轅之丘, 而娶于西陵之女, 是為嫘祖為黃帝正妃生二子:其一曰玄囂, 是為青陽,青陽降居江水。史記 本紀 周本紀: 武王營之,成王使召公卜居,居九鼎焉,而周復都豐、鎬。 史記 秦始皇本紀:於是始皇以為咸陽人多,先王之宮廷小,吾聞周文王都豐,武王都鎬,豐鎬之閒,帝王之都也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