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한 (三韓)땅 청구(靑丘):
개론: 서진 말기부터 고조선 사람들이 새로운 재련술(製鍊術)을 개발하여 질이 좋은 무기를 만들어 중원을 석권하여 이를 발조선 시대라 했다. 선진 기술이 중원에 전파 되여 세력이 전국시대가 나타났다. 다이 여섯 나라는 모두 도량형과 언문이 달라 진시황이 이를 하나로 통일 했다. 한나라가 자리를 잡고 효무황제(孝武皇帝; 기원전 141년 ~ 기원전 87년) 집권기에 이르러 옛 부터 전해 오던 기록을 정리 하기 시작 했다. 그 당시에 왕검조선 의 수도 평양이 있던,산시성 위남시가 본향인 태사령(太史令) 사마담의 아들이 뒤를 이어 태사공(太史公) 사마천(司馬遷;기원전 145년경 – 기원전 86년경)이 사기를 편술 했다. 전한 말기,한고조의 후손 유향 (劉向, 77년 ~ 기원전 6년; 詔光祿大夫 劉向校經傳諸子詩賦)이 어명에 따라 경전과 시부를 정리 했다. 그의 저서 신서(新序),설원(說苑),열녀전(列女傳), 전국책(戰國策) 등을 비롯 하여, 금미달이 점령 당한 전국시대 후기 부터 많은 학자들이 저술한 일차 사료가 전해 온다. 그때에 양자 방언이 나타났다. 그러나 언어 변화에는 시간이 많이 걸렸다. 특히 회하를 경계로 남북의 언어는 청나라 말기 까지 계속 되었다.
계속되는 소용돌이 속에 많은 사람들이 변두리(SMa-Out)로 흐터져 나갔다. 고조선의 마지막 수도 금미달 (今彌達)사람들이 해하를 따라 해안으로 내려와 창해군이 나타났다. 그 일대에 미추홀(彌鄒忽), 관미성 (關彌城), 미추이사금(味鄒尼師今)과 같은 미자가 많이 나타났다. 그 부터 한해의 동서 해안을 따라 한반도와 중국 동해 연안에서 동남아로 흐터져 나갔다. 남북조 시대에 신미제국(新彌諸國)이란 문구가 진나라 역사서 (晋書) 장화열전(張華列傳)에 나온다. 그로 인하여 남조 역사서에 백제여왕 비미호(卑彌呼)의 후손 왜오왕 (倭五王)이 다스렸다는 倭,新羅,任那,伽羅, 에 나오는 구주(九州)의 분포도와 그에서 떠러져 나간 여러 주(州)자다.
필자는 여러 차례에 구주의 영역과 크기를 설명 했다. 하동에 있는 작은 염호 해지(解池)연안에 동이 수령 백익이 수도를 정하여 고조선을 왕검 조선이라 했다. 백익 또는 그와 관계되는 뜻은 여러 글자로 기록 되었다. 해 “解를 海”로,때로는 누르 황 붉을 적(赤, 比) 아무아물 하다는 뜻에 가물 현(玄), 거물 흙(黑), 햇볓을 사음한 비(非, 費, 肥), 해비씨 (解枇氏), 등 빛을 숭상 하는 사람들의 수령 백익의 후손을 뜻한 글자(非子伯益之後)로 바꾸어 기록 했다. 앞서 고죽군이 이(李)씨 라 했다. 그 밖에도 “江, 共, 𨛬, 裴, 秦”등 많은 성씨가 백익의 후손이다. 이렇게 처음 만들어진 글자의 뜻과 어음을 돌려 여러 글자로 기록 했다. 고죽군이 살았다는 중산국이 있던 지역을 대현이라 한다. 대(代)자 를 산위에 올려 “岱로 維 밧줄 유, 벼리 유, 惟 생각할 유”로 바꾸었다.
여러 선진문헌에 기록된 청주 (青州)는 구주의 동북 쪽 (燕曰 幽州)에서 분하 북쪽으로 올라가서 새로 빼았은 땅(SMa-Out)에 나타난 지역에 접 붙였다. 남쪽 오나라에서는 공손연을 청주목 요동태수연왕 (青州牧遼東 太守燕王)칭호를 주었다. [1] 푸를 청(靑州)자를 바꾸어 청주 (青州)라 했다,
1 글자 설명: 대국어 사전과 새우리말 큰사전에는 모두 한자 부수의 하나로 청부(靑部)라고 했다. 한글 위키에는; “푸를(靑)은 한자 부수의 하나로, 음(音)을 나타내는 生(생→청)과 丹(단)이 합하여 이루어진 한자다. 붉은 돌(丹) 틈에서 피어나는 새싹(生)은 더욱 프르러 보인다는 뜻.”이라 했다. 홱수가 4에서 5으로 되었다. 납득 하기 어려운 설명이다.
편의상 “달월 변 청 青자, 붉을 단 변 청 靑자” 라고 부르겠다.
필자는 옛적에 산해경(山海經)해내경(海內經)의 첫 문구가 왕검조선을 뜻 한 문구라고 설명 했다. 처음에는 “𣫴;圭,母, xié/시애/쉐” 라고 적힌 글자를 뒤에 어느 누가 모양이 비슷한 독(毒)자로 바꾸었다. 천독의 본 글자는 <규 (圭) 를 든 유목민 (母)의 지도자을 뜻한 상형 글자>다. 하늘로 부터 규를 소유할 권한을 위임 받은 단군을 뜻한 글자다.
시애 (xié xī xí/해, 解, 解批, 巂,𦋅,𡸔,𣫴)라고 부르는 여러 성씨가 산서성 해지 연안에서 나왔다. [2] 북해지우(北海之隅)라 한 곳은 산서성 해지(解池) 북쪽 연안이란 뜻이다. 풀 해자 (解:曉也)를 한낮에 밝은 물체”라고 했다. 집운에서는 “하동지음; 東海之邑”이라, 즉 하동 해지 (解/海池)옆에 있는 마을 이라고 했다. 천시애 (天𣫴)가 살던 지역에 있던 호수라 하여 염지 (鹽池) 라는 보통 명사를 쓰지 않고 고유명사로 시애지(xié chi, 解池,해지) 라고 기록 했다. 글자 “𣫴, xié/시애/쉐”와 같은 발음의 글자가 해지 연안에 살았던 휴자(攜, xié 子)다. 그에게 순임금이 양위를 하고 돌아 오지 않았다. 장자 “왕의 직위를 이양 했다는 양왕편, 여씨춘주, 고사전”등 많은 고전에 실려 있다. [3]
천시애(天𣫴)를 천독(天毒)이라고 바꾼 시기는 제터 단자 단군 (壇君)을 박달나무 단(檀 善木)자를 선목이라 했다. 상서 미자편에 <하늘 나라(天毒) 에서 재앙을 내렸다(降災), 즉 천벌을 받았다는 문구를 하늘이 독한 마음을 품고 재앙을 내려>라고 풀이 한다.[4] 단군왕검 백익을 천시애(天攜, xié 子) 로 이를 집권자는 천자(天子), 제사장은 “天君, 禮君” 이라고 했다. 해지연안에 살던 사람들이 만주로 옮겨 왔다. 그들은 전과 같이 하늘에 제사를 드렸다. 그들의 제천 의식이 삼국지 동이전에 여러 모로 실렸다. 한전에는 천시애 (天𣫴)를 “천신께 天神 제사를 드리는 사람을 천군 天君” 이라고 실렸다.[5]
어렴풋할 외, 가까이할 외( 偎;亻,畏wēi)자는 사랑이란 뜻이 있는 나라이름 (偎:愛也,亦國名)이다. 물가에 사는 잠길 외, 더러워질 외, 빠질 외, 흐릴 위(渨 ) 와 같은 글자로 예맥( 渨. 《博雅》穢也)이라고 했다. 외인 (偎人) 이란 글자는 한예왈 외왜(汙穢曰渨涹), 모예위건(冒禮為諐) 하는 문구도 있다. [6] 위약에, 외자는 몽비의 자세(偎以蒙鄙之姿)라 했다. 시경에는 몽고(蒙古) 란 이름에 쓰는 어두울 몽 (蒙)자가 많이 실렸다.
강희자전에는 열자 황제편(列子·黃帝篇)을 인용 하여 외(偎)자를 선성 (僊聖, 仙聖) 의 신하로 지역은 발해만 서안 고사산(列姑射山)국과 관련 시겨 설명 했다. [7] 장자 내장편에는고사산(姑射山)이 있던 곳의 시대와 장소를 밝혔다. 요 임금이 해지연안을 뜻한 해내(海內, 河東)를 다스릴 때에 산서성 분수연안 (汾水之陽)을 신인이 살던 곳(神人居)이라고 했다. [8]
둥근 알과 같은 상형이 붙은 “靑: 龶,下:円.丹與円同”청자라고 읽는 글자는 옛적 구주의 제일 북쪽 청양 씨가 자리 잡았다는 청주(靑州,靑陽氏) 를 뜻해 다. [9] 청구가 삼한 땅이라는 어음의 원조는 “붉을 단, 둥글원자”를 붙인 글자가 원조다. 서쪽에서온 까마귀 알, 오환(烏桓, 烏丸)족이 청구에서 살았다. 그들이 북쪽에 살던 곳을 오골성 (烏骨城), 그 일대를 지나는 여울 을 오천(烏川) 이라 했다.
한글 위키에서 “푸를(靑)를 설명한 내용은 해지 연안에 살았던 휴자(攜, xié 子),즉 “𣫴, xié/시애/쉐”로 읽던 글자다. 그 후손이 분수 계곡을 따라 올라가서 살던 지역에 마지막 수도 금미달이 있었다. 그 지역 청구(靑丘) 에서 황제가 자부선인(紫府仙人)으로 부터 삼황내문 (三皇內文) 을 받았다.
청구(靑丘)란 글자는, 삼국사기에 “靑丘之表,靑丘道行軍” 실렸다. 고구려 멸망이후 안승을 책봉 하며 내린 문구에“우풍진 어청구 威風振於青丘, 즉 우퐁은 청구에 떨쳤다”. 옛적 고구려 땅을 청구라 했다. 두 글자 사용의 한계가 모호하다. 답이 삼국 유사에 있다. 모두 청구 소문(青丘沙門) 또는 청구불(青丘佛)과 같이 청구란 어음의 기원을 불교와 관련 되었다. 홍산문화권에서 내려오는 통로에 불교가 전래 되어 “붉을 단자를 붙인 청구”를 불교국을 뜻한 달월자를 붙인 청구(青丘) 로 바꾸었다.
청진“青 真”두 글자는 불교 전래와 관계가 있다고 본다.
현제 중국과 일본에서는 “青”으로, 한국에서는 “靑”자로 기록 한다. 북쪽 사람들이 내려가 세운 월남 역사서 (大越史記全書)에는삼국사기에서와 같이 “靑 青”두 글자로 기록 했다.
2 붉을 단 변 청 “靑”자가 달월 변 청 “青” 자로 바뀐 사연:
청나라 초기에 만든 강희자전은 모든 글자의 설명을 일획 상형자 여섯 “一丨丶丿乙亅”으로, 청자는 청부(青部) 에서 설명 했다. 시서경등 많은 고전에 는 “海岱惟靑州”와 같이 “靑” 로 기록 했었다. 고전에 상형자는 각자 제나름 대로 형태가 변해 갔다. 참 진 (真:同眞。俗字) 자가 그 한 본보기다. 삼국사기에는 이 두 글자(真 眞)를 혼용했다. 일연 스님은 모두 “青”와 진(真)자로 적었다. 이 두 글자는 금미달 지역에 전래된 불교와 관계가 있다고 본다.
고전백과 “https://ctext.org/zh사전” 이라 판단되는 자서(字書)편에 글자 설명이 실려있다. 중국 한나라의 사유(史游)가 편찬한 급취편 (急就篇)에서 참 진(真 眞)자와 푸를청 (靑 青)자의 편형을 찾아 볼수 있다. 진(真; 眞의 俗字)자와 달월 변의 청 (青)자는 실리지 않았다. 또한 불교국이 되었던 원나라 때에 주백기 (周伯琦; 1298-1369) 가 편술한 육서정와(六書正譌) 에는 달월 변의 청 (青)자는 있고, 붉을 단 변 청 “靑”자와 참 진 “眞” 두 글자가 없다. 원나라떄 편찬된 원사 (宋史) 또한 참진(真), 여진 (女真) 으로 기록 했다. 일홱부수 한일형을 곧게 그은 두 상형글자 “靑 真”가 처음에 북쪽 사람들이 만들어 쓰던 글자다. 이는 태어 났다(靑,生也)는 뜻이 있다.
현제 사용 되는 한자(漢字)에는 뜻과 음이 같으나 글자 꼴이 다른 글자가 많이 있다. 산서성을 조선과 같은 뜻 글자 진 (晉)이라 했다. 그 곳에 사람들을 노예로 썼다. 제후국 진의 별명을 성(省)란 뜻에 간략 해서 “省作井 俗作, 隸作. 今變隸作” 이라 했다. 한국에서 한자사전의 대명사로 부르는 옥편(玉篇) 에는 “𡴑” 자가 푸를 청자로 씌었다고 한다. 옥편은 옛적 부터 전해 오던 이상한 글자 기자 (奇字)에 능통한 고야왕 (顧野王; 519-581)이 만들었다. 북쪽 사람들이 “옥돌에 새겨 놓았던 글자들을 모아 정리한 자전”이란 뜻이다. 하여 해편 (解 亥 海篇, 篇海) 이라고도 한다. 고야왕 때 만들어진 옥편(玉篇) 이 한해 남방 통로를 따라 남방불교와 함께 한반도에 이르러 이조시대 까지 전해 오고 있다. [10]
동한 시대에 만든 자서(字書) 에는 천독(天毒)이라 부르던 독자 밑의 무/모(毋, 母)자를 달월자 비슷한 글자“青:龶:月” 로 바꾼 글자 뿐이다.
허신의 설문해자(說文解字)에는 “靑 𡴑 𡴏 𡴐 𡗡 寈”자가 없다. 이상한 글자, 기자 (奇字)는 옥편에 실렸었다. 북쪽에서 쓰던 글자라 본다.
북쪽사람들이 만들어 쓰던 글자 꼴을 남쪽 사람들이 바꾸었다. 푸를청 (靑 青)이라고 읽는 두 다른 형태의 글자는 8획 이다. 청나라 때 훈고학자 단옥재 (段玉裁; 1735-1815)는 설문해자주 에서 이 두 글자는 “靑 青 𡴑 𡴏 𡴐 𡗡 寈”와 같이도 씌였다고 한다. 상형글자의 기본이 되는 획수가 다르다. [11]
대당서역기에는 “靑 眞”자가 보이지 않는다. 모두“青 真”로 기록 했다. 송고승전(高僧傳) 또한 “靑 眞”자가 실리지 않는다. 송나라 사람 서긍이 남긴 고려도경 또한 모두 “青”와 진(真)자로 적었다. [12]
강희자전에 실린 단청(丹靑)이란 글자는 도교와 불가에서 성스러운 건물을 호화롭게 분장한 기록에 나타난다. 단청(丹靑)이란 글자의 다른 표현이 청홍(靑紅)색 이다. 청실 홍실이란 가사가 있다.
같은 문화권에서도 한일 중국이 다른 글자를 쓰고 있다. 단청(丹靑)은 한국, 달월변의 단청(丹青)은 중국에서 쓰는 글자다.
3 사기에 실린 동호(東胡)의 유래: 청나라 때 편술된 묵자 한고에 죽일 도 자 도하(屠何)를 동호의 선조(東胡之先) 라 했다. [13] 모둔 선우의 급습에 피살 당한 동호왕을 朝鮮 왕 부/비(朝鮮王否)라 했다. 그 곳에 노관의 아들을 봉했다. [14] 옛왕공 대인의 수도에 사는 자비롭고 인자한 사람은 이방인 (慈仁他) 이다. 그를 가까이 있던 곽씨와 초씨(郭焦)가 점령 했(破滅胡)다. [15]
서주 성왕이 상나라 잔여 세력을 소탕하고 실시한 사상 가장 성대 했던 후에 왕들의 모임 설명(王會解)에 가 지역에서 참가한 사절단을 방위에 따라 기록 했다. 분수 연안에 있었던 첫 공공국 중심으로 그 일대에서 갖고온 선물과 지역(나라)이름이 실렸다. 고리(高夷)옆에 공공(邛邛) 라 그 일대를 고죽거허(孤竹距虛), 그 옆에 우령지(不令支) 부도하(不屠何), 동호(東胡)라했다. [16] 청구(青丘)에서는 구미호(狐九尾)를 선물 했다.
옛적에 서쪽 월지국(胡)에서 이방인 고조선 사람들 늙은 이(彌年壽考 曰胡)을 뜻한 상형자다. [17] 하여 이를 다음 사전에는 “오랑캐 호, 목 호, 되 호, 오랑캐 이름 호, 수염 호”라 했다. 도하(屠何)와 호(胡) 동호(東胡)는 단군왕검 피살 이후 하동 해지 연안 명조(鳴條)에서 지도를 들고 북쪽 흉노땅에 가서 선우가 되었다는 고조선 사람들 (彌達)의 후예다. [18]
4 청구青丘의 현 위치: 앞서 고 죽(孤竹)을 설명한 바와 같이 푸른 구릉이란 뜻의 청구(靑丘) 또한 오랫동안 여러지역을 지칭 했다.
일주서 왕회해에는 청구에서는 “북쪽에서 해유관을 바친 발인과 가까이 청구에서 구미호(青丘 狐九尾), 즉 꼬리가 아홉인 여우를” 바쳐다고 했다. 그 일대에 동북방에 사는 “고리 공공 고죽 부령지 高夷, 邛邛, 孤竹, 不令支” 등등 여러 부족 이름이 실렸다. 또한
단군왕검을 살해 하고 그 후손이 다스렸다는 전설적 하(夏)나라의 (북쪽을 통치 했다는 뜻이 있는)제저(帝杼)가 한원에 살다 노구(老丘)로 옮기고, 해지 연안과 삼수를 정벌하고 청구에서 구미호 (狐九尾)를 얻었다. 상후 명이 황하 북쪽(商侯冥死于河)에서 죽었다. 태평어람에는 치수 사업을 하던 우의 여자들(禹妃)을 설명 했다. 그가 북쪽 부쌍(婚於臺桑)이라는 곳에서 결혼식을 할때 꼬리가 아롭인(白狐九尾)흰여우가 나타났다. [19] 이는 모두 글자 그대로 풀이 하여 받아 드릴수는 없다. 있었던 사실을 상직적으로 비유해서 기록 했다. 상후(商侯)는 고유 명사가 아니라 상나라의 지도자를 뜻했다. 청구(靑丘)란 이름은 황하 문명 발생지에서 멀리 떠러진 잘 아려 지지 않았던 (SMa-Out) 동북쪽 영역을 뜻했다. 같은 지역을 불교 전래 이후에 “청구(靑丘)글자를 달월변 청 (青丘) 자로 바꾸어 그에 따라 북쪽에 있던 이름자 “狐九尾, 黑齒, 儋耳”가 중국 동해연안을 따라 내려가, 동남아 지역에 나타났다.
丹靑2
또한 당시 여러 곳에 실렸다.
북쪽 지역을 사기 오제본기에는 청양강거강수(青陽降居江水)라, 즉 청양이 내려와서 강수연안에 살았다. [20] 이곳에서 처음으로 치수 사업을 하느라고 첫 공동체 공공국(共工, 邛邛, 邛邛, 共工國)가 나타났다. 강수 연안이 고조선의 발생지다. 이들을 북적(北狄) 白狄 赤狄 蓋狄)적이라 부르던 백의민족 시원지다. 이 지역을 여주, 발조선, 통치자를 북주후 모라 했다. 청구란 이름은 홍산 문화권 사람들이 내려오던 분수 계곡 북부지역을 뜻했다.
하는지 증한 근거를 찾기 昔黃帝東到青丘,過風山,見紫府先生
중국문헌을 종합래 보면,황제가 청구에 이르러 자부선인으로 부터 도교 경전의 핵심이 되는 삼황 내문(三皇内文)을 받았다는 곳은 수경주, 역수 연안, 당시 연나라 수도(燕都)가 있던 청구(青丘)다. 자부선인은 산신의 되었다는 단군이다. 불교에서는 미륵(彌勒), 또는 안문관 을 지키던 안왕(雁王) 이라 했다. 고조선의 지도자가 처음으로 상형글자를 만들었다. 여러 단군의 가름침을 종리한 경전이 도덕경이다.
끝
[1].字書 急就篇: 朋黨謀敗相引牽。欺誣詰狀還反真. 字書 說文解字:假:非眞也。从人叚聲。一曰至也。《虞書》曰:「假于上下。」. 眞:僊人變形而登天也。
[2].解::曉也,又解廌仁獸似牛一角亦姓自唐叔虞食邑於解今解縣也,晉有解狐解楊出鴈門又虜複姓魏書有解批氏
[3].莊子讓王:舜以天下讓其友石戶之農,石戶之農曰:「捲捲乎后之為人,葆力之士也。」以舜之德為未至也,於是夫負妻戴,攜子以入於海,終身不反也。
[4]. 尚書 微子:父師若曰:「王子!天毒降災荒殷邦,方興沈酗于酒,乃罔畏畏,咈其耇長舊有位人
[5]. 三國志 韓傳: 信鬼神,國邑各立一人主祭天神,名之天君。又諸國各有別邑。名之為蘇塗。
立大木,縣鈴鼓,事鬼神。諸亡逃至其中,皆不還之,好作賊。其立蘇塗之義,有似浮屠.
[6].書叙指南: 汙穢曰渨涹劉向九歎又曰冒禮為諐. 《魏略》曰: 偎以蒙鄙之姿,得睹希世之寶.
[7].偎:《列子·黃帝篇》不偎不愛,僊聖爲之臣。《字林》偎,仿佛見,不寡也。列子 黃帝:列姑射山在海河洲中,山上有神人焉,吸風飲露,不食五穀;心如淵泉,形如處女,不偎不愛,仙聖為之臣;不畏不怒,愿愨為之使;不施不惠. 虞書》曰:「假于上下。」. 眞:僊人變形而登天也。
[8].莊子: 藐姑射之山, 有神人居焉 堯治天下之民, 平海內之政, 往見四子藐姑射之山, 汾水之陽」
[9]. 廣韻·下平聲·靑·靑》靑:東方色也,亦州名九州之一禹貢曰海岱惟靑州又男靑女靑皆木名出羅浮山記亦姓出何氏姓苑又漢複姓三氏風俗通云漢有靑烏子善數術又有靑牛氏靑陽氏
[10]. Lee Mosol :· Lee Mosol: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 Second Edition.2020 by Xlibris. P 212: The Jade dictionary in Korea. 康熙字典 一部 六: 𠀡:《玉篇》古文天字。註詳大部一畫。𠀢:《海篇》音資。定也.一部 -五: 丟:《篇海》丁羞切。《揚子·方言》一去不還也。俗作丟,非.
[11]. 康熙字典一部:·寈:《集韻》靑古作寈。註詳部首。亦作𡗡𡴏𡴐,玉篇作𡴑。說文解字注寈: 注解:東方色也。考工記曰:東方謂之靑。木生火,從生丹。丹,赤石也。赤,南方之色也。倉經切。十一部。丹靑之信言必然。俗言信若丹靑,謂其相生之理有必然也。援此以說從生丹之意。凡靑之屬皆從靑。□,古文靑。注□、□、寈、□、□,亦古文靑。
[12]. 高麗圖經:·寈契丹復謹修貢且乞降尊號頒正朔又求封冊真宗皇帝初欲俯從議者難之遂寢止從班詔而已天聖中使人屢與女真偕來貢方物天子加恩報禮優異後詢卒子隆立優柔不斷. 東方之旗青色
[13]. 墨子閒詁 非攻中: 不著何亦北胡國,周書王會篇云「不屠何青熊」,孔晁注云「不屠何,亦東北夷也」《管子·小匡》篇「敗胡貊,破屠何」,尹注云「屠何,東胡之先也」
[14]. 史記 匈奴列傳: 東胡初輕冒頓,不為備。及冒頓以兵至,擊,大破滅東胡王,而虜其民人及畜產. 以匈奴東胡王降,故燕王盧綰子侯. 三國志 韓傳:及秦并天下,使蒙恬築長城,到遼東。時朝鮮王否立,畏秦襲之,略服屬秦,不肯朝會。否死,其子準立
[15]. 字書 急就篇: 公孫都。慈仁他。郭破胡. 焦滅胡
[16]. 逸周書: 解隃冠,發人。麃麃者,若鹿,青丘狐九尾。黑齒白鹿白馬. 北方臺正東,高夷嗛羊,嗛羊者。獨鹿邛邛,邛邛善走者也。孤竹距虛。不令支玄模。不屠何青熊。東胡黃羆。山戎戎菽. 諡法解:彌年壽考曰胡. 保民耆艾,𠀤曰胡. 字書 急就篇: 公孫都。慈仁他。郭破胡. 焦滅胡
[17]. 廣韻·下平聲·靑·靑》靑:東方色也,亦州名九州之一禹貢曰海岱惟靑州又男靑女靑皆木名出羅浮山記亦姓出何氏姓苑又漢複姓三氏風俗通云漢有靑烏子善數術又有靑牛氏靑陽氏
[18]. 焦氏易林 大畜之: 大畜:朝鮮之地,箕伯所保。宜人宜家,業處子孫,求事大喜. 焦氏易林 明夷之: 升:鳴條之郊/鳴條之圖,北奔犬胡。左衽為長,國號匈奴。王君旄頭,立尊單于.
[19]. 竹書紀年 帝杼: 帝即位,居原. 五年,自原遷于老丘. 八年,征于東海及三壽,得一狐九尾. 商侯冥死于河.. 太平御覽 禹妃:考工記曰:《帝王世紀》曰:禹始納涂山氏女,曰女媧,合婚於臺桑,有白狐九尾之瑞,到至是為攸女.
[20]. 史記 五帝本紀:黃帝居于軒轅之丘, 而娶于西陵之女, 是為嫘祖為黃帝正妃生二子:其一曰玄囂, 是為青陽,青陽降居江水。史記 本紀 周本紀: 武王營之,成王使召公卜居,居九鼎焉,而周復都豐、鎬。 史記 秦始皇本紀:於是始皇以為咸陽人多,先王之宮廷小,吾聞周文王都豐,武王都鎬,豐鎬之閒,帝王之都也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