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서 우공편에 삼위(三危)란 글자:
위서에 이르기(魏書云)를 옛날에 환인(桓因)의 서자(庶子) 환웅(桓雄)이 항상 천하에 뜻을 두고 인간 세상을 몹시 바랐다. 아버지는 아들의 뜻을 알고 삼위 태백(三危太伯)을 내려다 보고 가이 홍익인간(弘益人間)이라 했다[.三國遺事:魏書云。乃往二千載有壇君王儉。立都阿斯達經云無葉山。亦云白嶽。在白州地。或云在開城東。今白岳宮是開國號朝鮮。與高同時。古記云。昔有桓因謂帝釋也庶子桓雄。數意天下。貪求人世。父知子意。下視三危太伯可以弘益人間。乃授天符印三箇。遣往理之。雄率徒三千。降於太伯山頂即太伯今妙香山.].
단군신화에 나오는 위(危)자는 사음자다. 설문해자에는 태위야(殆:危也)라 했다. 시경위풍에 나오는 올라가기 어려운 성벽“乘彼垝垣” 을 뜻한 글자라 했다[.詩經 國風 衛風 氓:氓之蚩蚩、抱布貿絲。匪來貿絲、來即我謀。送子涉淇、至于頓丘。
匪我愆期、子無良媒。將子無怒、秋以為期 乘彼垝垣、以望復關。不見復關、泣涕漣漣. ]. 이를 설명한 문구가 왕험성(王險城)이다. 험(險)자는 모든 사람들(僉)이 뽑은 지도자 검(儉)이 사는 곳을 뜻한 글자다. 중국 고전을 살펴 보면 위(危)자와 험(險)자는 단군왕검 백익을 뜻한 글자로 쓰이기도 했다[.危:〔古文〕說文》在高而懼也。从厃,人在厓上,自卪止之也。《徐曰》孝經,高而不危,《玉篇》不安貌。《廣韻》疾也。隤也,不正也。又《禮·儒行》有比黨而危之者。《註》危,欲毁害之也。又屋棟上也。《禮·喪大記》升自東榮,中屋履危。《疏》踐履屋棟高危處。又《韻會》宿名。三星。《左傳·襄二十八年註》書·禹貢》三危旣宅。《韻會》三峗,山名。通作危。史記 律書: 危,垝也. 說文解字:垝:毀垣也.
險:益州,益,阨也,所在之地險阨也.於《易》為坎。坎,險也. 僉:皆也.《虞書》曰:「僉曰伯夷。」].
상서에는 삼위기택(書·禹貢:三危旣宅)이란 문구가 나온다. 치수 사업을 성공시킨 지역에 나타난 글자다. 융우와 같이 치수사업을 했던 사람들의 기록이다. 우의 동반자가 백익이다. 사죄이천하함복(四罪而天下咸服)이란 문구는 백익 동조자들을 처형 했다는 뜻이다[.尚書 虞書 舜典:流共工于幽洲,放驩兜于崇山,竄三苗于三危,殛鯀于羽山,四罪而天下咸服. ]. 산해경 서산경(山海經 西山經)과 여씨춘추에는 높은 곤륜산 계곡에 있는 우물(崑崙之井)에서 나오는 물을 삼위의 이슬(三危之露)이라 했다. 곤륜산 저강계곡에서 나오는 물을 요수라 (沮江之丘,名曰搖水)한다. 탕왕이이수(伊水) 즉 낙수(洛邑, 洛水) 북쪽(伊水之上)에 살던 사람을 얻어 그를 윤이(湯得伊尹)라 했다[.呂氏春秋 孝行覽 本味:察其所以然,曰:「其母居伊水之上,孕,夢有神告之曰.故命之曰伊尹. 湯得伊尹.
水之美者:三危之露;崑崙之井;沮江之丘,名曰搖水;曰山之水;高泉之山,其上有涌泉焉,冀州之原.
舜染於許由、伯陽,禹染於皋陶、伯益,湯染於伊尹. ].
수경주에는 우가 치수사업을 할때 만들었던 산해경 내용을 인용하여 위수가 흐르는 지역에 이른다[. 水經注:禹著《山經》,淇出沮洳。淇澳衛詩,列目又遠,當非改降,革為今號.《山海經》曰:羭次之山,漆水出焉,北流注于渭。蓋自北而南矣。《尚書·禹貢》,太史公《禹本紀》云:導謂水東北至涇,又東過漆、沮,入于河。孔安國曰:漆、沮,一水名矣,亦曰洛水也。周太王去邠,度漆踰梁山,止歧下。故《詩》云:民之初生,自土沮、漆。]. 옻 칠, 삼갈 철, 일곱 칠(漆)이라고 읽는 글자와、막을 저, 적실 저, 강이름 저, 작은내 전 (沮) 이라고 읽는 여울이 흐르던 지역이 호경이 있던 위수 유역이라 문왕지습에 나오는 여울“民之初生、自土沮漆”을 인용 했다.
그 곳에 살던 사람들이 우거왕의 경기지역에 정착 하여 살면서 쌓은 성이 옥저성(沃沮城)이다. 삼국지와 후한서의 내용을 종합해 보면 한무제가 우거왕의 수도를 정벌하고 옥조성을 현토군(沃沮城沃沮地為玄菟郡)으로 했다[.三國志 東夷傳:其後高句麗背叛,又遣偏師致討,窮追極遠,踰烏丸、骨都,過沃沮,踐肅慎之庭,東臨大海。三國志 魏書三十 東沃沮傳:其言語與句麗大同,時時小異。漢初,燕亡人衞滿王朝鮮,時沃沮皆屬焉。漢武帝元封二年,伐朝鮮,殺滿孫右渠,分其地為四郡,以沃沮城為玄菟郡。後為夷貊所侵,徙郡句麗西北,今所謂玄菟故府是也。沃沮還屬樂浪。後漢書 東夷列傳:武帝滅朝鮮,以沃沮地為玄菟郡。後為夷貊所侵.].
골도(骨gú都)는 옛구(舊)자의 다른 사음자라고 논증 했다. 옛구(舊)자를 중국에서는 치요(jiù)라고 읽는다. 오환의 옛 서울이 옥저성(沃沮城)이였고 그곳에 살던 사람들이 한국어를 사용 했다는 뜻이 숨어 있다. 옥저성이 있던 곳에 살던 사람들이 요하를 건너 요동반도에 살아 동옥저전에 실었다. 한무제군사는 요하를 건너지 못했다. 옥조성(沃沮城)은 의무려산 일대에 있었다.
앞서 올린“동명(東明)이 백익(伯益)의 후손이다”란 표제에서 밝혔습니다. 또한 환국(桓國)이 아니라 환인(桓因)이 옳은 글자라고 밝혔습니다.
백익(伯益)을 짐우(益 作朕虞) 대비(大費)라는 등등 여러 글자(伯翳、柏益,伯夷)로 혼잡하게 남겨 풀이 하기어렵게 만들었다. 동이 수령 백충장군 백익(伯益,柏翳,大費)을 뜻한 글자 “頹墤,隤凱”가 위(危)란 글자와 관계가 있다[.《康熙字典·阜部·十二》隤:《唐韻》杜回切《集韻》《韻會》《正韻》徒回切,說文》下隊也。《玉篇》壞隊下也。《司馬相如·上林賦》隤牆塡前漢·食貨志》因隤其土,以附苗根。《註》隤謂下之也。又《蘇武傳》士衆滅兮名已隤。又《揚雄·河東賦》發祥隤祉。《註》隤,降也。又《詩·周南》我馬虺隤。亦作穨。《爾雅·釋詁》虺穨,病也。又《前漢·景十三王傳》日崔隤。《註》崔隤猶言蹉.《左傳·隱十一年》王與鄭人隤。《註》在修武縣北。《後漢·郡國志》河內郡修武有隤城。又《左傳·成十六年》公出于壞隤。《註》魯邑。又《韻會小補》湯過切,音惰。通作穨。《周禮·冬官考工記·梓人》則必穨爾如委矣。《釋文》穨,如字,李讀湯過反。《玉篇》或作頹墤。《篇海》本作].
].
이미 기, 녹미 희, 쌀 희(旣)자를 간략하여 현존하는 상서에는 “三危既宅”자로 바꾸었다. 획수도 다르고 파자해 보면 뜻이 완전히 다르다. 희(旣)자는 비수(皀)를 지니고 있는 서쪽에서 횃불(torch.白:〔古文〕)을 들고 온 유목민(없을 무旡)이란 뜻이 있다. 한민족의 선조가 우랄 알타이산 남쪽에 있는 칸 탱그리(Khan Tengri Mountain) 일대에서 왔다는 증거다.
오늘도 쓰이는 위태(危殆) 위험(危險)하는 낱말은 단군조선 발생지에 뿌리를 두고 있다. 단군왕검을 살해한 측 입장에서 표현한 문구다.
끝
June 18, 2019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