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4:부여의 종말 (終末):
산서성 해지연안에 나탄났던 단군조선의 후예가 역사의 흐름에 따라 만주 땅으로 옮겨 와서 새로 정착하고 사는 사람들을 부여전에는 쫓겨온 사람들(亡人) 이라 했고, 고구려 사람들은 잃어버린 땅을 되찾겠다(亡人)는 의지에서 개천절을 (東盟)이라 했다 . 시경 한혁에 “그추그맥(其追其貊)을 모시정의에서는 한후의 선조들이 점차로 밀려 갔다”고 풀이 했다 . 중원 세력 북쪽에서 항거하며 밀려온 부족이다. 다른 한 줄기는 중원으로 내려가서 상나라에 깊히 관여했던 부족이 만주로 올라와 부여전에는 상나라를 뜻하는 은(殷正月祭,其國殷富)자가 나타 났다.
나라의 이름, 영역, 도착한 경로, 발생 시대, 부족이름 등등이 모두 여러가지로 기록되여 종말에 관한 기록도 다양하다. 앞서 영역을 설명 했다. 서쪽에 있던 선비, 아니면 동남쪽에 있던 고구려와 왜란 글자, 즉 한 예와 접했다 . 그 어느 세력에 흡수 되였다고 본다.
선비전에 따르면;
진수는 고 했다. 이는 사기 조선열전에 군영 4게를 설치 했다는 기록을 근거로 한사군을 설치 했다는 영역이 대흥안령 동쪽이였다는 주장을 강조 하려는 계획이였다. 한서와 후한서 지리를 보면 낙랑과 현토군이 더해 졌다. 새로 만든 두군의 서쪽 영역은 대흥안령 너머까지 포함 되여 있었다. 서쪽 지역에는 사기에 실린 오환과 부여 (烏桓, 夫餘)족이 있었어야 한다. 삼국지에 실린 오환 선비 가비능전 (軻比能傳) 그리고 선비전에 나타난 단석괴(檀石槐;136년-181년)의 활동 영역을 보면 부여의 서쪽은 산해경에 실린 부여(夫餘)를 부여 또는 간략히 여(不與, 與)로 적어 부여(扶餘)의 존제성을 인식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조위 말기에 공손연을 정벌한 사마씨가 양위 받아 나타난 진(晉)조의 기록에는 286년(太康六年)에 부여(夫餘)를 정벌하니 왕은 자살을 하고 아들과 동생이 옥저 (沃沮)로 도망 갔다. 그후 60년 후에 전연(前燕)을 세운 모용씨가 346년 부여를 공격하고, 부여의 왕(王)과 백성 5만 명을 포로로 잡아 전연(前燕)으로 끌고 갔다. 전연은 부여 주민들을 회유하기 위하여 왕을 사위로 삼고, 진동장군(鎭東將軍)의 작위(爵位)를 주었다 . 이 작위를 대륙백제왕, 또는 왜왕에게 주었다. 부여(扶餘)가 요하 서쪽에 있었다는 증거다. 이 사건을 부여의 종말이라고 하나, 북부여에서 도망온 주몽이 고구려의 시조가 되였고, 동부여를 흡수했다는 기록이 광개토대왕 비문에 있다 . 문자명왕(文咨明王, 재위: 491년 ~ 519년) 3년에 부여왕(扶餘王)이 처자를 대리고 돌아와 나라를 고구려에 바쳤다. 503년에는 고구려가 부여를 물길 땅으로 쫓아 버려서 금이 없다 하라고 했다 .
부여는 요하 서쪽 현토군 일대에서 사는 동안 서남쪽세력에 못이겨 일부는 전연에 흡수되고 주류는 요하를 건너 고구려에 흡수되여 살았다. 그 일부는 다시 고구려를 떠나 동북 쪽 연해주 쪽으로 멀리 사라졌다. 부여의 종말은이 걸렸다.
진서(晉書)에는 남만주에 있던 비리국(裨/卑離國)이 숙신 서북쪽에 있다. 말을 타고 200일을 가야 한다는 등등 과장된 기록이 많이 있다 . 공손연을 토벌하니 비미호가 사신을 보냈던 왜인과는 사돈관계를 맺고 문제가 왜인을 제상으로 만들었다(其後貢聘不絕。及文帝作相)고 했다 . 대륙백제가 성장하던 과정을 이렇게 묘사 했다. 부여의 종말을 모용황 (慕容皝)이 두 아들 (皝使恪與俊)을 출정 시켜 부여는 그들에게 망하고 잔여 세력이 60일을 가야 하는 먼 지역으로 도망을 갔고, 숙신 읍루가 예적 부여의 동부를 차지 했다.
삼국지 선비전을 보면, 단석괴(檀石槐:136년-181년) 시절이 그들의 전성기 였다. 그때 선비족의 동쪽에 있던 부여를 물리처(東却夫餘) 우부평 이동이 요동에서 부여와 접했다. 예맥 20여읍이 (선비족 단석괴가 다스리던 3부의 하나인) 동부 (從右北平以東至遼東接夫餘)가 되였다 . 전국시대 말기에는 북경 북쪽에 있던 부여(夫餘)가 기원저 208년 흉노의 친입과, 그후 한무제의 침략으로 요하를 경계로 후한시대에는 대흥안령 일대에서 동쪽으로 밀려 요동땅에 이르렀다.
진서에 나온 부여의 종말을 보면, 서남쪽 경계는 선비족 분파인 모용씨와 접해 있었다. 그 혈통이 앞에서 다룬 “胡不與之國, 夫餘, 浮游”이었다.이렇게 부여(夫餘) 와 직접 관계가 있는 부족의 영역은 방대 했다. 이에 따라 멸망에 관한 기록 또한 여러 엇갈린 시대로 기록되여 있다.
부여전 (夫餘傳)은 그들이 살던 중심부 경기지역 위주로 작성 했다.
끝, 다음에 계속.
July 21, 2017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