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수도 이전:
신라 동천은 고대 동북아시아에 중요한 사건이라 확실히 밝혀저야 한다. 삼국유사에 “上古 中古 下古”하는 문구가 신라 22대 지증마립간 조에 있습니다. 이에 근거했던 실수를 교정 합니다 . 그 시절에 고구려는 문자명왕(文咨明王, ? ~ 519년, 재위 : 491년 ~ 519년)이고, 백제는 무령왕(武寧王, 462년~523년) 시절에 벌써 수도를 한반도로 옮겼다 .
신라의 수도 이전은 이 시정에 몇년을 두고 이루어 졌다:
사료를 종합해 보면, 신라의 제19대 눌지 마립간(訥祗 麻立干, ? ~ 458년, 재위 417년 ~ 458년) 때에 한반도 동남쪽으로 옮겼다 . 눌지 마립간 전후의 동북아시아 역사를 종합해 보면 신라의 수도 이전이 나타난다.
신라의 제8대 아달라 이사금(阿達羅泥師今,재위: 154년~184년)은,
아달라 이사금(阿達羅尼師今)후기 부터 원수 구(仇)자가 많이 나온다. 외부의 친입이 많았다는 뜻이다. 비류백제의 미추홀에서 올라온 사람을 미추왕 (味鄒王: 재위 262∼284)이라고 했다. 성은 김씨(金氏)라고 했다.
신라의 국호는 여럿 있었다. 내해 이사금(奈解 泥師今,재위: 196년~230년) 때에 발해만 서남쪽에서 이주민이 많이 올라왔다. 왜왕을 염전의 노예로 쓰겠다는 일화를 남긴 석우로(昔于老, ? ~ 249년)가 나타났다. 이주민의 영향으로 후한에서 사용하던 부계 혈통의 왕위 계승제를 따르기로 하고 첫 해에 신라란 이름을 쓰기로 했다. 이때부터 김씨 왕조의 기반을 닦았다 . 기림이사금 (基臨尼師今:재위; 298년~310년) 제위 10년인 308년에 신라란 국호를 다시 찾아 썼다 . 공손연 (公孫淵, ? ~ 238년)세력에서 벗어난 강대국 백제와 고구려의 영토 분쟁에 시달린 사람들이 한해를 따라 내려와 신라와 구주에 있던 반도 백제 (倭)가 번성하게 되었다 . 남사(南史)에는 남만주를 떠나 한반도 동남쪽에 세로 수도를 정한 신라 (新羅)는 문자가 없어 나무 쪽에 금을 그어 의사소통 (刻木為信)을 했다. 인사법은 고구려와 비슷하고, 신라왕 성이 모 (王姓募名泰, 法興王)라는 사람이521년 (梁普通二年) 에 백제 사신을 따라 와서 그의 통역으로 조공을 시작 했다 . 통전에 따르면, 신라는 521년에 처음으로 백제 사신편에 사신을 남조에 보냈다. 글자가 없고 그당시 영역과 몇마디 언어가 실려 있다. 성을 건모라 (城曰健牟羅)라 하고 52개의 마을이 있다고 했다 .
신라(新羅)는 광개토대왕 (廣開土大王. r. 391–413) 이후에 한반도로 수도를 옮겼다. 자비마랍간(慈悲 麻立干,재위; 458- 479) 17년에 백제 개로왕이 아들 문주를 보내 구원병을 청했다. 신라 구원병이 도착하기 전에 개로왕은 전사 했다. 그 다음해인 18년(475년)에 명활성에 가서 거처 했다(王移居明活城)는 기록이 있다. 명활성은 한반도 남단 오늘의 경주 분지에 있었다.
고구려에 불모로 갔다 돌아온 실성 이사금(實聖 泥師今, ? ~ 417년, 재위 402년 ~ 417년)이 광개토대왕 시절에 왕이 되어 큰 물을 건너 졸본주 평양으로 가는 부교를 놓았다. 뒤를 이은 신라의 제19대 눌지 마립간(訥祗 麻立干, ? ~ 458년, 재위 417년 ~ 458년)왕 때에 수도를 경주로 옮겼다.
백제 계로왕 (蓋鹵王: r. 455–475) 은469년 부터 개로왕은 고구려에 빼았겼던 남만주 땅을 되찾으려고 한반도 대동강(漢江) 하류에 있던 온조 (반도) 백제의 수도 한성(漢城), 즉 북한산성 (北漢山城, 北岸狗邪韓國) 진을 치고 469년 부터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공격 했다. 장수왕은 아버지 광개토대왕의 적의 심장부를 노리는 전법을 그대로 인용 했다. 진두지휘하여 계로왕 (蓋鹵王)의 심장부를 공격 했다.
대동강 하구에 있던 옛 수도 (漢城, 北岸狗邪韓國 )을 친입한 고구려 장수왕과 싸우다 475년에 죽었다 . 뜻밖의 공격을 받은 계로왕은 급히 구원병을 찾았다. 그가 죽기전에 북위 (北魏: 386-534)에 보낸 편지내용에 한해의 북로를 고구려에 빼았겼다는 증거가 보인다. 아들이 남조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려다 같은 이유로 실패 했다.한편 남쪽으로는 구주에 있는 동생과 신라에 구원병을 청했다. 신라에 갔던 아들 문주왕(文周, 汶洲王,475–477)이 도착 했을 때는 벌써 개로왕은 싸운터에서 죽었다. 글자를 보면 문주왕은 강화도에 머물렀다. 그의 짧은 재위기간 중신이 정권을 잡았다. 원수 구자 해구(解仇)에게 살해 당하고 연신(燕信)은 부하들을 이끌고 고구려로 도망 갔다 . 대륙에 있던 비류백제와의 고류는 차단 되고, 겨우 제주도와 열도백제 구주로 가는 해상로가 반도 백제의 관활이었다 . 대두산성을 수리하고 옛 수도 한북민호(移漢北民戶)를 옮겼다는 곳은 강화도가 된다. 수도를 웅진으로 옮겼다는 기록은 문주왕 이후에 이루어 졌다고 본다.
끝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