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시 (神市) 환국 (桓國)시대 1.
신시 시대의 역사는 지금까지 알려진 사료를 근거로 추적해 올라가는 수 밖에 없다. 단군왕검이 치수사업에 성공하여 만장일치로 왕중왕이 되여 그를 대우라 하고 예맥족 출신이라 하여 대우모(大禹謨)라 했다. 참(僉, ; 咸也,皆也)자에는 “모두 다”란 뜻이 있으나 더 뚜렸하게 사람 인(人)변을 붙여 “모두의 왕”이란 뜻에서 왕검 (王儉)이라는 새 칭호가 붙었다고 본다. 그는 다른 사악 (四岳)의 지도자 (稷、契,暨,皋陶) 와 같은 제사장(壇君)이였다. 모두가 추천하고 절대 다수가 인정하자 그는 다른 제사장들에게 다시한번 사양했스나 순 (舜)임금의 결정에 따라 최초로 제사장으로서 집정권을 허락 받은 “제정일치의 지도자”가 되였다. 얼마 후에는 요임금이 다스리던 12주를 물려 받아 통치하던 순임금 마저 그에게 선양하고 은퇴 했다. 장자에 실린 휴자(攜子)를 “아들의 손을 잡고”라 풀이 한다. 잘못이다. 순 임금은 자신이 능력 부족이라 생각하고 해지(解池, Xiechi) 연안에 자리잡고 있던 단군왕검(중국 발음으로 시애[xié, 解,해,sun]을 찾아가 선양하고 돌아오지 않았다는 뜻이다 . 휴자(攜子)를 산해경에는 천독(天毒)으로 적었다. 글자가 비슷하다는 이유로 “ xié”자를 바꾸어 넣은 글자가 천독이다 .
구주(九州, 九疇,九丘,九土)가 얼마나 큰가?
숫자로 계산 하면 해지(解池) 크기의 4배 정도 였다. 이는 지리지형을 놓고 보면 서안 분지에서 동쪽으로 황하를 건너 동북으로 분수를 따라 올라가 임분시일대에 이르는 반달 모양의 구능 (丘陵) 예기했다.
우왕이 중점적으로 옛적부터 수해가 많안던 분수를 다루었기에 기록에 남아 있다. 그러나 역수의 침해는 서쪽으로 위수를 따라서도 올라 갔었다고 본다.
구주 밖에는 팔인 (八殥) 팔횡(八紘)이 있었다. 그 지역이 요임금 부터 우왕 때 까지 많이 나타나는 지명과 관계가 있다고 본다 . 이는 주로 동북으로 분수 계곡을 따라 올라 가는 지역이 였다. 산해경에서는 곤륜 계곡이 제왕의 남쪽 수도라 했다 .
북쪽을 바라보면 해빛씨들 회귀 이윤이 그곳에 산다. 매집(falcon nest)이 있고, 동쪽을 바라보면 항산이 있다. 천신이 살았다.우왕이 치수한 곳에 곤륜이 있었다 .
여씨춘추에는 황제가 음률을 만들도록 명했다는영윤이란자는 곤륜도인 (昆侖道入)을 뜻한다. 그가 곤륜산 북쪽 해곡(嶰谷, 谿谷)에서 대나무로 퉁소를 만들었다. 당대에 구양순(歐陽詢)이 편찬한 예문유취(藝文類聚)에 같은 내용이 실렸지만 글자를 바꾸어 다른 뜻으로 풀이 할수있은 근거를 남겨 놓았다 . 이에 관한 여러 사료를 종합해 보면 곤륜산 북쪽 (崑崙之北, 崑崙北, 崑崙之丘, 崑崙之陰)을 다시 원유지음 (阮隃之陰)이라 부꾸었다. 이는 웃사람(지도자)이 살던 마을이란 뜻이 있는(阮)글자와 넘을 유(隃)자로 바꾸었다 .
완유 (阮隃)가 곤륜이다 “ 阮隃rŭan yú:昆仑别名”했지만, 글자 풀이와 시경등 다른 사료를 참작해 보면 완유 (阮隃)는 해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그곳에 살던 사람이 곤윤 도인 (昆侖道入) 즉 단군이였다. 伶lonely, solitary; actor. 倫normal human relationships. 시경 대아에는 원국 (阮國)을 침범하고 하내공성 ( 河內共城)으로 향했다는 시귀가 있다 . 곤륜 (昆侖)은 분수 분지에 있었다. 그 곳 가까이에 서왕모도 있었고 그 곳에 우왕의 아버지 곤이 귀양 살이를 했다는 숭산 (崇山, 恒山, 常山)이 있다 . 상구 (商丘)는 이곳을 뜻하고 우공(禹貢) 밖이다 . 상서에는 곤윤인 (昆侖入)이 살던 살던 구릉을 곤강 (崑岡)이라 했다 .
Over the Nine Provinces:
구주 (九州,九疇,九丘) 밖에는 팔인(八殥) 밖에 팔횡(八紘)이다.
다시 그 밖에는 팔극(八極)이 있다고 했다. 회남자 지형훈은 대우가 치수사업을 하고 설치한 시대의 구주(九州)부터 시작 하여 팔횡 까지는 옛 전설을 적었고, 다음 한나라 영토의 의 끝을 팔극 (八極)이라 이름 하여 한무제가 영토를 확장 시킨 다음의 변두리를 기록 했다. 위만 조선을 정벌하고 난 뒤라 동북방 끝(極)에는 창문이라고 부르는 방토지산이 있고, 그 지역의 특산물은 의무려산에서 나는 옥돌이다 .
무슨 뜻을 또 이렇게 혼잡스럽게 만들었나? 팔은 숫자로 본다. 그 여덟이라는 형용사 다음 따라 붙은 두 글자는 명사가 분명 하다. 글자를 풀어(解字) 본다 .
멀다는 뜻의 인(殥)자는 “左:歹,右:寅。猶遠也” 멀리 떠러저 있는 융의 지도자란 뜻이 있다. 매어 달린 줄이란 뜻의 횡(紘)자는“左:糹,右:厷. 冠卷也” 머리에 쓰는 관에 매어달린 장식품을 뜻했다. 흔히 말하는 면류관(冕旒冠) 또는 금관총에서 나온 신라 금관에 달은 장식품을 뜻했다.
구주 밖에는 천손의 후예란 자부심을 갖고 화려하게 장식한 관을 쓴 사람이 통치 하는 여러 부족이 살았다. 그들은 해지연안에서 분수를 따라 동북지역 방토지산 까지 흐터저있었다. 후에 한무제가 영토를 확장하고나서는 의무려산이 있는 지역에까지 흐터저 살았다는 뜻이다. 해지 북동 지역 여러 곳에 흐터저서 살았던 부족의 지도자를 곤륜(昆侖) 즉 곤오씨(昆吾氏)라 했다. 곤륜 방향은 밝고 그윽한 곳. 추측 컨데,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의 생각이 모두 건실하다는 뜻이다 . 선조가 서쪽에서 왔다 하여 서쪽 제일 높은 산을 곤륜 (崑崙)이라 했다고 한다 .
우본기 (禹本紀)
산해경(山海經)의 저자는 한사람이 아니라 여러시대를 거처 후한 시대에 완성된 중국 선진(先秦) 시대에 저술되었다고 한다. 지리서라 지만 신화와 괴물이 많이 등장하는 믿기어려운 사료라고 하지만, 그 첫 시작은 우(禹)와 같은 예맥족의 단군이였던 백익(伯益)의 저서라는 설이 있다. 맥족이 믿고 있던 전설이 책 내용의 근간이라고 본다. 그들은 천신을 믿었다. 신선전 또는 잡가로 풀이되는 고전에 비슷한 내용이 실려 있다.
사마천은 귀책열전과 대완 열전에서 곤륜산관한 예기를 남겼다 . 귀책열전은 (근본 유교사상에 어긋나 그런가) 일자열전과 같이 후세 사람 저소손(褚先生)이 수정/보충한 내용이 나타 나므로 사마천의 의견이 그대로 반영 되였다고 볼수 없고 풀이하기도 어렵다 . 대완 열전에는 곤륜(崑崙)과 우본기 (禹本紀)라는 한국 사학계에서는 아직 깊이 거론되지 않은 편명이다 . 신시 (神市) 환국 (桓國)시대와 직결되는 중요한 내용이라고 본다.
사마천은 우본기에 나오는 지명은 믿을 수가 없고 상서의 기록이더 타당 하다고 보았다. 그 시대에는 우본기(禹本紀)란 편명 또는 책이 있었지만 그에 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다. 우본기(禹本紀)란 편명은 웃사람 즉 지도자의 혈통을 기록한 가첩이란 뜻으로 그 조상이 멀리 서쪽에서 왔다 하여 곤륜이란 말을 썼다고 본다.
September 4, 2016
신시 (神市)시대의 수도 아사달
단군왕검이 해지 연안에 도읍을 정하여 평양이라 하고 조선을 선포하기 전에도 예맥족을 이끌던 지도자는 있었고, 수도를 그들의 말로 불렀다고 본다. 그 수도 “서울”이라는 말이 “한자로 사음한 글자가 아사달”이라 본다.
삼국유사에 “후에 돌아와 아사달에 가서 산신이 되였다”는 아사달은 요녕성 서남쪽 북진시 가까이에 있는 의무려산 (醫巫閭山)일대라고 필자는 여러번 밝혔다 . 이곳에 흑산 (黑山)이란 지명이 있다. 이는 사음자로 해족(解, 奚族)과 깊은 관계가 있다. 이곳이 옛적 현토군이였고 그 곳에 상나라유민의 집촌 상은대, 고구려현, 서개마현(西蓋馬縣)이 있었다. 개마는 사음자다. 그 곳이 고구려와 부여의 신흥 발생지였다. 뒤에 글안은 그들의 선조가 살던 곳이라 하여 그들의 성역이 되였다 . 삼국유사의 무엽산(無葉山)을 글안국지 (契丹國志)에서는 동음이자로 목엽산 (木葉山)이라 했다. 해모수가 내려와 북부여의 도읍으로 삼았다는 흘승골성(訖升骨城)이 북쪽에 있는 부신(Fuxin 阜新市) 유역이라 본다.
아사달이란 이름이 이렇게 오랫동안 씌여온 연유를 참작하면, 신시 (神市)시대 에도 수도를 아사달이라고 불었다고 본다.
사마천은 “우를 왕중왕으로 선출한 예맥족이 믿고 있던 전설”을 장건(張騫)의 서역 탐험기를 근거로 자신은 믿을수가 없다고 했다. 후세에는 그의 풀이를 받아 드려 “허망된 소리”라 했다.
그러나 장전의 경로와 그가 서역사람들을 만나 예기한 내용을 보면, 그는 천산 남로를 따라 아프가니스탄 쪽으로 다녀 왔다. 예맥족이 믿고 있던 전설의 발원지는 씰크로드의 다른 한 통로였던 천산 북로 에 있었다. 돈황(敦煌) 이 남북로의 시발점으로 예맥족의 전설은 돈황에서도 넗리 알려져왔다. 사기이전에 편수 되였다고 보는 몬천자전(穆天子傳)을 보면, 신비의 서왕모(西王母)는 무(毋)자의 오기로 하백 (河伯) 즉 하종씨(河宗氏) 같은 ‘소우는 소리로 표현된 부족을 뜻하는 글자 (貃,牟, 毋)를 이리저리 바꾸어 적었다. 서쪽에 있던 맥족의 지도자라는 뜻이다 . 월씨가 살다 흉노에게 빼았겼다는 돈황은 감숙성 서북부에 있던 교통의 중심지다. 그 이름에는 천신께 예물을 바치는 곳이란 뜻이 있다. 감숙성에서 소안에 이르는 지역을 신주, 진단, 또는 옹주라 했다. 이들 이름 또한 천신을 모시던 사람들이 살던 곳이란 뜻이 있다 . 그러한 예의식을 맡아본 사람을 여러가지로 뜻과 음을 뒤섞어 기록 했다. 그 또하나의 이름이 웃사람의 자질을 묘사한 곤륜(昆侖)인이다. 이를 영리하고 옳은 사람을 판단을 하는 사람이라 하여 영륜(伶倫)이라 했다. 돈황이 아사달이였으나 중국기록이라 그 말의 뜻을 이리저리 바꾸어 돈황이라 했다.
우본기 (禹本紀)는 곤륜인 (崑崙, 伶倫) 즉 지도자 위치에 있던 웃사람 의 행적을 기록한 내용이라 본다.
여씨춘추와 같이 잡가로 알려진 회남자 지형훈(淮南子 墬形訓) 내용에 “단지가 곤륜산 계곡湍池在昆侖에 있다” 했고 그 곳에 서왕모가 살았다 .
담이 (耽耳)는 노자 (elders, 즉 壇君)의 또다른 표현이다. 단지 (湍池)는 제사장이 관여하던 호수란 뜻이다. 단지(湍池)를 현존하는 중국 기록에는, 옥같이 아름다운 호수라 요지 (瑶池, 瑶:玉之美者)또는 빛이 나는 호수 (華池)가 있다 한다. 모두 뜻과 음을 이리저리 뒤바꾸어 제일 서쪽 높은 산골을 뜻한다고 적었다.
사기 하본기에 나오는 우왕의 혈통에서 그의 아버지 곤(鯀)과 조부가 되는 전욱(顓頊)은 신시 (神市) 환국 (桓國)시대에 실존 했던 단군으로 받아 드리고 싶다.
곤(鯀)이 성(城)을 쌓고 살았다는 곳이 왕옥산 (王屋山)이다. 하동 동쪽에 단을 쌓아놓은 산에서 연수(沇水) 시작하여 동쪽으로 흘러 해지(海,解)에 이른다. 이곳을 흐르는 여울 이름이 시경에 많이 나온다. 해지 동북쪽 어느 높은 곳에 왕옥산이 있었다. 이곳이 단군조선의 첫 수도 평양에 가까이 있던 산성이라 평양성(平壤城) 이라 했고, 필요에 따라 또는 전시에는 이곳으로 피란을 했다고 본다. 하여 백악산 아사달로 수도를 옮겼다(移都於白岳山阿斯達) 했다. 이곳이 숙신씨가 살던 가까운 곳에 있는 불함산(不咸山)이고, 그곳에 환운천왕을 기리는 장승을 새워 두었다. 그 곳이 노역장에서 일하던 현인을 찾았다는 부암 (傅巖)이라 한 산이라 본다 . 이 곳을 주역에서는 해인의 지도자 왕공 (王公)이 쌓았다 하여, 해 (習xí, 奚, 携, ) 인의 함정(坎), 즉 난공불락의 요새라 했다 .
우왕의 가까운 선조라는 전욱은 해지 동북쪽에서 많이 나타난다. 그가 만든 전욱역 (顓頊歷)에 따라 “새해의 첫(상)달 초사흘(시월 3일)을 개천절”로 정했다.
이러한 것들을 종합해 추리해 보면 앞에서 지적했던 동북방 지역에 있었다는 방토지산(方土之山)은 “산위에 네모지게 흙을 쌓은 흔적이 있는 산”이란 뜻으로 풀이 된다. 이곳에서 천신께 제사를 올린듯 하다. 이 곳이 신시시대에 제일 동쪽에 있던 수도 아사달이였다고 본다 .
September 6, 2016
끝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