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육국춘추 (十六國春秋)-2:
수수께끼가 풀린다.
북위 말엽 산동성 임치(山東省淄博市臨淄) 태생의 최홍(崔鴻)이 쓴 십육국춘추 (十六國春秋)에 실린 백제는 그 영역이 중원이였다는 사실을 그렸다 . 이 시절에 고구려가 서쪽에 있던, 연(燕)나라 위(魏)나라와 자주 전쟁을 했던 사실이 삼국사기 고구려 편에 실려 있다 . 십육국춘추 (十六國春秋)에 나타나는 신라와 백제는 마땅히 남만주 땅이여야 한다. 이러한 시각에서 는 결론이 나온다.
앞에서 본바와 같이 서진이 망할 징조는 건국 시초에 나타났다. 사마염이 원주민이 였던 고조선의 유민을 농락 하여 불만을 샀다. 발해연안에 살던 동부 선비파와 한해를 관장 하던 대륙 백제는 서진 초기부터 사마씨와 가까이 서진으로 부터 제상의 지위를 받았다 . 그들을 믿고 서쪽에서 기마민족의 특성이 지니고 살아 있던 오환(烏桓)과 서쪽으로 퍼저 나갔던 선비족의 세력을 맊으려고 서진 초기 부터 사마씨의 자손들을 서쪽에 봉했다 . 그 결과 팔왕의 난 (八王-亂; 291년- 306년) 이 나타나 결국 383년에 비수전(淝水之戰;383년)에서 패망하고 강남으로 도망 갔다.
사마씨와 가까이 서진으로 부터 제상의 작위를 받았던 선우족의 동부파와 부여의 정통성을 이어온 대륙 백제가 중원의 옥새를 번갈아 가면서 옛 서진의 영역을 통치
했다. 북제서(北齊書)에는 중원 옥새를 지니고 있었던 대륙백제 집안(齊氏, 高氏) 의 혈통을 잘라 버렸다.
대륙백제 혈통을 알아 보다:
동이의 여러 부족을 삼한(三韓)이라 하드시, 오호 십육국 시대(五胡十六國時代: 304년 ~ 439년)의5와 16이라는 숫자를 이용한 근거가 뚜렷하지 않다. 삼한(三韓)의 원조가 되는 부여(夫餘,扶餘)를 뚜렷하게 설명 못하였드시,바로 서쪽에 있던 부족을 선비(鮮卑)와 오환(烏桓, 烏丸)이라고 했지만 그들의 관계를 단석괴(檀石槐;137년-181년)와 가비능(軻比能, ? ~ 235년)은 선비족의 왕으로 오환족의 본향인 오환산을 점유 했었다. 선비(鮮卑)란 이름은 중원 사람들이 이다. 중원 옥새 (玉璽, 神璽)의 소유권 이전을 다루는 사서에는 동부선우에 속했던 모용씨 우문씨 단/하씨 (慕容,宇文, 段部) 와의 전쟁이 실렸다.
북제의 위수(北齊, 魏收)가 편술한 위서(魏書)에는 북위(北魏: 386 ~ 534) 시절에 요나라(大遼, 916년-1125년)를 세운 글안(契丹, Khitan)이라고 부르던 부족이 고구려 옆에 있었다. 당시에 조선후 (朝鮮侯)란 칭호도 사용 했다 .
글안국지(契丹國志)에는 국호의 뜻이 일익강성(日益強盛)이라고 했다 . 하늘 나라를 뜻하는 하씨 (叚氏) 하국(叚國)이 325년에 모용외(廆與叚氏方睦)와 같이 모종의 계획을 했다. 옛적에 영지국(令支國)이 있었다는 어양 (漁陽) 동쪽에서 요수에 이르는 지역을 아침 해가 솟아 오르는 땅(日益強盛其地)이라고 표현 했다 . 전연(前燕, 337年 – 370年) 이 이다. 이 지역에 나타났던 하씨 (叚氏) 하국 (叚國) 하는 이름의 하(叚)자를 모양이 비슷한 층계 단(段) 바꾸어 단요(段遼) 또는 동부선비 단부(東部鮮卑段部)하는 이름이 나왔다. 글자 속임수는 성공 했다. 한국 다움사전(Daum Dictionary) 에서는 두 글자 모두이 있다고 풀이 한다. 그러나 <글자 발생의 배경이 다르다. 단(段)자는 에 속하고, “빌 가, 성 하, 빌릴 가, 성씨 하, 층계 단”의 뜻으로 풀이하는 글자(叚)는 또우 변(又)으로 분류>되였다. 하(叚)자에는 하늘 같이 높다(우又, 위)는 뜻이 숨어 있다. 또한 하(叚)자는 해(解; jiě jiè xiè/ gaai2 gaai3 haai6/ gɛ̌i)자와 비슷하게; 북경어로는 “國語發音;jiǎ jià xiá ” 남쪽 사람들은 가 “粵語發音; gaa2” 라고 읽는다. 설문 해자에는 이 글자(叚)를 가(借)라 하고, 조자법 육서의 한 방법을 가차(假借)라 했다. 필자는 조자법을 설명 하면서 정현의 풀이에 착안 하여 고 풀이 했다 . 강희 자전에서는 어떠한 형상을 모아 하“叚”자가 만들어 졌나는 설명이 없다. 이 <텅텅 비었다(empty,false, 假)는 하늘 나라를 뜻하는 글자(叚)에 여러 가지 변을 붙여 사용한 글자가 발해만 지역 역사에 많이 나타난다. 이러한 여러 글자가 옛적에는 같은 뜻으로 사용 되였다. 강희자전, 설문해자주(說文解字注)에도 그렇게 기록 했다 . 옛적에 국왕이 죽었다는 뜻으로 승하 (升遐,昇遐)란 글자를 썼다. 연경(燕京, 北京)을 통해서 한국에 들어온 천주교에서는 똑 같은 뜻을 승천(昇天)이라 한다. 멀리(辶) 하늘 나라(叚)로 올라 갔다 (升)는 표현이다. 삼국지 동이전에 그러한 글자가 많이 (假埋, 皆假衣幘, 假倭王, 假難升米, 帶方太守假) 나타 났다. 해를 숭상하는 사람/오랑캐들(遐夷)을 정복하지 못했다는 뜻에서 공손연 세력을 제거하기 전에는 남만주에 살던 사람들을 미빈하이 (未賔遐夷)라고 했다. 십육국춘추 (十六國春秋)에도 발해만 연안을 기술한 내용에 이러한 글자가 많이 나타난다.
고구려가 이 광개토대왕 비문 첫 구절이다.
惟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 出自北夫餘天帝之子母河伯女郎剖卵降出生.
발해만 연안 남만주 일대에서 나타난 삼한의 후예들이 세운 나라의 지도자는 모두 하늘 나라의 뜻을 이어 받았다고 한다.
햇님으로 부터 신권을 이어 받은 사람이란 뜻이 우문씨(宇文氏):
선비족 우문씨(宇文氏)는 북주(北周, 557년-581년)를 건국 했었다. 주서(周書)에 따르면, 우문씨(宇文氏)의 우자는 높다는 뜻이고, 문자는 옥새(玉璽)에 새겨진 글자를 뜻 하여 이란 뜻이 있다고 한다 . 팔왕의 난이 발생 하던 시절의 역사가 진서 모용황전 (晉書 慕容皝)에 실렸다. 사마의 (司馬懿, 179년 ~ 251년 ) 말년에 발해만 연안에 있던 <고구려 백제 동부 선비 위문부와 단부(宇文、段部之人) 여러 부족의 군사력 이 모두 커지고 이리저리 옮겨 다녀(兵勢所徙) 중국과 같지 않아 옳바른 판단을 모색하여 모두 되돌아가고 싶은 생각 뿐이였다. 서쪽에 사는 토착민의 반발이 심하여 그의 형제들로 하여금 서쪽을 지키도록 했다 . 천진-당산 발해만 연안에 살던 대륙 백제가 군사력이 강했지만 서진왕조에 반기를 들지 않았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은미하게 기록 했다.
“句麗,百濟及宇文、段部之人,皆兵勢所徙,非如中國慕義而至,咸有思歸之心 今戶垂十萬,狹湊都城,恐方將為國家深害,宜分其兄弟宗屬,徙于西境諸城,撫之以恩,檢之以法,使不得散在居人,知國之虛實。”
이문구는 고 풀이한 후속 편이다. 그 내용이 이 들어 있다. 공손연 이후에는 서진과 계속 친밀한 관계가 유지 되였다. 진문제 (晉文帝)는 왜인에 승상의 작위를 주어 몇 대 계속(文帝作相,又數至) 되였다 . 진수는 삼국지 동이전에 에 사용 했다. 이 글자를 하늘 나라를 뜻한 글자로 풀이 함이 옳다고 논증 했다.
같은 내용이 십육국춘추 전연의 역사 편(十六國春秋 前燕錄三)에도 실렸다 .
옛 대방 땅(帶方故地)에 수도를 잡았던 비류의 후손이 세운 대륙백제에 관한 기록은 이렇게 은미하게 기록되여 찾기가 어렵다. 삼국지 백제 본기애는 이 곳에 첫 도읍을 정했던 비류(沸流)와 발음이 같은 사람이 백제 왕으로 시대가 모두 다르게 3번 나온다. 중국사서에는 북제의 시조를 고환(高歡, 字賀六渾: hè liù hún)이라고 하고 그의 6대조 은(六世祖隱)이 선조가 현토태수(玄菟太守)군에서 왔다 . 앞서 주서(周書)에 실린 “齊氏擅東夏”라고한 “동하(東夏)가 대륙백제”라고 논증 했다.
삼한의 후예로 중원의 옥새를 소유했던 백제의 선조를 부여의 후손이라 할뿐, 더 이상 밝히지 않았다. 삼국지 부여전에서도 부여의 선조를 밝히지 않았다.
중원의 옥새를 소유했던 대륙백제의 선조를 은패하려는 음모가 있었다고 본다.
끝 다음에 계속.
October 28, 2017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