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육국춘추 (十六國春秋)-3:
부여의 선조는 햇님의 후손:
십육국춘추 (十六國春秋)에서 다룬 시기가 삼국사기에는 고구려 미천왕(美川王, 재위 : 300년 ~ 331년)에서 부터 광개토대왕((廣開土王, 재위: 391년? ~ 412년) 집권 시대 까지다. 서진의 왕실과 인척 관계를 맺고 있던 대륙 백제를 사가들은 아직 모용씨라는 동부선비의 한 부족으로 인식한다. 부여의 어원을 다룰 때에 를 지적 했다.
모용 씨는 부여의 한 부족이 였다. 그들이 먼저 고조선의 옛 땅을 찾으려고 고구려 서쪽에서 싸웠다 . 고구려는 대륙 백제의 명맥을 이어가던 모용외(慕容廆)에게 293년에 처음으로 친입을 당하고 3년후 295년에는 서천왕의 묘를 수탈 당하는 수모를 당했다 .
모용외(慕容廆)는 별명이 혁락괴(弈洛瑰)다. 관(冠)에 붙였던 구슬이 떠러졌다는 뜻이 숨어 있다. 창려 극성선비족(昌黎棘城鮮卑人)으로 사마중달을 도와 공손연을 토벌한 공으로 옛적에 전욱 고양씨 살던 극성(棘城)에서 나라를 새웠다. 창려현(昌黎縣)은 당산에서 산해관에 이르는 지역이였다. 옛적에 백랑수(白狼水) 라고 부르던 대능하 일대의 홍산문화 (红山文化) 유적이 발굴된 곳을 전욱 고양씨가 살던 곳(顓頊高陽氏) 이라고 한다 . 후에는 동북쪽으로 옮겨 유성(柳城) 에 자리잡고 점차로 중원의 풍속을 모방했다 .
진수는 오환과 선비는 고조선 사람, 동호(東胡)의 후예라 하고, 동이의 조상을 상서에 나오는 숙신씨(肅慎)라고 했다 . 죽서기년에는 숙신씨(肅慎) 보다 앞서 순임금 때에 숙신씨(息慎氏)와 현토씨(玄都氏)가 우왕, 즉 치수사업을 한 하후씨 (禹,夏后)와 같이 나타 난다 . 부여전에 는 시기는 진수(陳壽 233-297) 가 삼국지를 집필할 당시다. 그 시기에는 부터 다루 었다 . 공손씨가 남만주에 들어온 시절에는 많은 토착민이 그 지역을 떠나 한해 연안에 정착 했다. 이를 통전에는 백가제해 인호 백제(百家濟海 因號百濟)라, 즉 수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 바다를 건너 새로운 땅에 자리를 잡고 살아 백제(百濟)라는 나라 이름이 나타났다고 했다 . 한서 천문지 (漢書 天文志)에 는 문구와 같은 뜻이다 .
미천왕은 공손연에게 사기 당했던 옛 땅을 되찾으려고 서쪽 세력 모용씨세력을 공략 했다. 집권 다음 해인 302년에는 현도군을 공격하여 8천여 명을 사로잡아다 평양성 중측에 이용했다. 이어 314년 까지 이름 뿐이던 낙랑군(樂浪郡)과 대방군 (帶方郡)을 공격하여 중원 세력은 장성 남쪽으로 쫓았다. 결국 서진(西晉, 265년 ~ 317년)세력이 붕괴 되자 동부 선비족 세력(段氏, 宇文氏, 慕容氏)과 고구려의 세력권 틈에서 이리저리 잔 제주를 부리던 진의 평주자사(平州刺史) 최비(崔毖)가 319년에 고구려로 도망 왔다 .
고국원왕(故國原王)이 전사한 평양성(平壤城)은 양평성(襄平城):
삼국사기 고국원왕(故國原王, 재위: 331년 ~ 371년)편에 당시 모용황과 백제에 수모를 당하고 백제와 싸움에서 수도 평양성(平壤城)을 사수하다 전사 했다 . 여기 실린 백제는 남만주에서 발해만 서남쪽 천진 일대에 동부선비 부족과 같이 있었다. 고국원왕(故國原王;재위: 331년 ~ 371년)이 전사한 평양성는 공손연이 숨었던 양평성(襄平城), 즉 오늘의 심양 남쪽에 있는 요양시였다.
하북 평원을 40년간 지배 했던 전진(前秦, 351년~394년)의 3대 황제 부견(苻堅; 337년 ~ 385년.재위 : 357년 ~ 385년)의 집권 시절인 380년(建元十六年)에 선비 오환 고구려 백제 신라 휴인(鮮卑烏桓高句麗百濟 新羅休忍) 등 여러 나라가 모두다 따르지 않았다 . 같은 내용이 진서 부견전에도 실렸다 . 이들이 모두 동양의 지중해라고 볼수 있는, 발해-요동만 해안 일대에 살던 시절이다. 여기에 실린 설라(薛羅)를 중국 사람들이 신라(新羅)로 풀이 하여 그대로 받아 드리고 있다. 현제 한국식 발음으로 휴인(休忍; xiūrěn /쇼랜) 이란 국명은 옛적에는 “쇼랜 비슷한 발음”으로 부른듯 하다. 휴(休; xiū/쇼)자는 서(西; xī/sai1/sei)와 같은 사음자고, 인(忍; rěn /랜)자는 내(耐, nài/나이)와 같은 소리를 사름한 글자다. 신라를 서라벌, 박혁거세를 거서간(居西干) 이라 했다. 글자를 살펴보고, 시대와 지역을 고려해 보면, 휴인(休忍)이 앞에서 다룬 이서국(伊西國)이 아닌가 한다 .
이서국(伊西國)은 신라에서 멀지 않은 발해만 서쪽 해안에 있었다. 광개토왕 비문을 보면, 염전이 많았던 천진 일대에 백제, 임나가라(任那加羅)연맹 왜가 있었다 . 삼국사기에는 화려 부내(華麗,不耐)두 현이 있었고, 한서지리지에는 한나라 낙랑군에 조선 패수 함자 대방 화려 부내 잠대(朝鮮,浿水,含資, 帶方 不而, 蠶台, 華麗)현이 있었다 .
이서국(伊西國)이란 뜻은 란 뜻이다. 단군조선의 통치권을 이어 받은 백익(伯益)의 후손이 살던 곳이다. 발해만 서쪽 해안을 따라 남만주로 이어지는 통로에 나타났던 나라들 이름에는 모두 다 해 (sun, sun-ray)라는 뜻이 들어 있었다 . 광개토대왕 시절에는 그 일대에 가야연맹의 하나인 임나가라(任那加羅)가 있었다 .
어라하(於羅瑕)는 임금의 뜻을 훈역한 글자:
흔히들 남백제 왕실의 성씨는 부여씨라고 한다. 결국 부여(夫餘)란 이름에는 왕이란 뜻이 있다는 사실을 북주(北周) 또는 후주 (後周)라고도 하는 북조의 마지막인 나라의 역사서 주서 백제편(周書 百濟)에서 찾았다. 부르기를 어라하 (於羅瑕; wū[luóxiá /위우러시아) 라고 부르는 칭호는 그곳에 살던 사람들은 건길지 (鞬吉支; jiān jí zhī/찌앤지쮜) 라고 부른다. 이는 하나라 사람들의 말(夏言)로 왕이란 뜻이다 . 다움사전(Daum Dictionary)에는이라고 했다. 같은 내용이 북사, 통전, 태평어람 에도 실렸다 .
주서 (周書) 를 편찬한 당나라 영호덕분(唐, 令狐德棻;583년-666년)과 같은 용서지역 태생인 통전(通典)의 저자 두우(杜佑, 735년 ~ 812년)는라고 했다 .
단군조선의 발생지인 하 왕조가 나타났던 산서성 해지 연안에서 동쪽으로 옮겨온 사람들이 백제의 지도층이 였다. 그들이 임금을 어떻게 불렀는가 하는 기록이다.
음운학, 언어학, 또는 발성학을 전문으로 하는 분들의 의견을 듣고 싶다.
필자는 <어라하(於羅瑕)라고 고유명사로 부르는 문구는 신라가 무슨 뜻인가를 밝혔던 라자(羅者)와 같은 뜻으로 본다. 중국사람들은 우리 선조들이 부르던 왕이란 말을 훈역하여 어라하(於羅瑕)라고 남겼다 . 그 사람들은 했다.
끝, 다음에 계속.
October 28, 2017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