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로자등묘(阿鲁柴登墓)
아루 차이덴의 무덤-1
아로자등묘(阿鲁魯柴登墓)이란 서쪽에서 온 융족 (羌:西戎) 부풍 (扶風)출신, 세 지도자의 한 사람 (參也魯) 이 었던 루/로(鲁魯)의 무덤에 향불을 피워 제사를 지내던 언덕]이란 뜻이 있다. [1] 부풍에서 동남 쪽으로 나와 공자와 맹자의 고향인 노(魯)나라가 생겼다. [2] 공자의 사위 공야장 (公冶萇)이 현명하여 새들의 이야기를 이해 했다고 한다. 중앙 아시아에서 온 삼족오를 숭상하던 오손(烏孫)족이란 뜻이다. 그 옆에는 강태공을 시조로 하는 제 나라가 있다.
금관이 발굴된 곳은 금미달 영역으로 판정된 지역 서부가 된다. 고전에 실린 부풍 (扶風)이란 [단군조선 지역에 들어와 자리잡았던 서주의 영역에 살던 부여씨의 풍속을 지니고 살던 부족이란 뜻이다. 그 곳을 상나라가 통치 못하여 서주의 시조 주공 계력 (季歷) 을 서쪽 위험한 지역 연경지융 (周公季歷 伐燕京 之戎 )이라한 곳에 보냈다. [3] 그 곳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계력을 죽여 그 후손 창이 서쪽의 지도자 (西伯自)가 되어 원주민을 학살 하고 세력이 날로 성하게 되었다. 서백 감려 (西伯戡黎)란 글자로 기록된 두번쩨 원주민 학살이사건이 나타났다.
이들이 산서성 원주민 예맥족을 잡아다 그 지역에 전해 오던 전설을 글자로 남겼다. 노예(隸)가 글자를 만들어 이를 예서(隸書)라 한다. 현제 사용하는 번체자(繁體字)의 기원이다. 그들이 만든 글자로 동북 아시아 문명의 기틀이 되는 각종 경전을 만들었다.
원주민을 관노로 삼아 그들이 쓰던 글자 원주민을 써서 서주의 문화가 싹트던 성강지치(成康之治) 시대의 마지막 강왕의 부인이 애첩을 시기하여 서주가 쇠약해 졌다. 이러한 내용을 양자법언에는 원주민 해(解, 奚, 亥)를 음이 같은 시(習)로 바꾸어 시치 (習治) 또는 시란 (習亂)이라고 했다 . 하여 관저숙녀(關雎淑女)가 악녀로 변신하고 관저지도(關雎之道)가 관저자란(關雎之亂)으로 둔갑 했다.
원주민 학살을 중원 세력은 유신( 維新)이라 한다. 상나라 마지막 재왕 제신(帝辛,?~기원전 1100년 경)이 서백 창을 구금 했다. 창의 아들이 상나라에 반기를 들어 목야전에서 승리 했다. 서주를 건국한 무왕이 집권 12-3 년 경에 상나라를 정벌 했다. 무왕 16년에 기산지 양이라 부르던 산서성 단군 조선 땅 태원에 도망 갔던 기자가 돌아와 조공을 바쳤다. 기자조선이란 중원 세력이 만든 이름이다.
단군조선의 마지막 수도가 있던 궁홀산(弓忽山) 금미달 에서 지도권을 놓고 남쪽으로 내려 갔다. 이를 아사달에 돌아가 산신이 되었다고 기록 했다. 중원 세력은 그 마지막 단군의 실체를 존재 철저히 은패 했다. 영토 분쟁과는 관계가 없는 불가 기록에 마지막 단군의 실체를 미륵(彌勒), 안문왕(鴈王) 아왕 이라고 옳바로 기록 했다.
원시 불교의 탄생과 전래에 동북아 역사가 있다. 전국시대에 금미달(今彌達)에서 유래된 미륵(彌勒)이란 글자다. 미륵(彌勒)이 다루던 영역을 미지(彌地)라 했다. 안문관을 지키던 왕이란 뜻에 두루미(彌)를 기러기(鴈 雁)로 바꾸어 궁홀산 (弓忽山)에 안문관(雁門關)을 지었다. 오늘의 산서성 (山西省) 대현 (代縣) 안문산雁門山) 중 요새에 살던 지도자를 중원 사라들은 고죽군 (孤竹君)이라 했고, 불가에서는 [안왕(雁王) 또는 아왕 (鵝王) 즉; 내가 삼족오 (三足烏)를 숭상 하는 지역 사람들의 왕]이라 했다. 동관 한기에 [대군 고유에서 까마귀가 다리가 셋인 새끼를 낳았다, 그 삼족오가 산동성 패국에 정착했다]는 기록이 있다. [4]
고유 북쪽에 안문 산(鴈門山, 在高柳北)이 있다. 고유란 지명은 이 중산국을 점령하고 대군 (代郡)수도에 붙인 이름이다. 령구(靈丘) 도인(道人) 당성(當城) 마성(馬城) 쌍간(桑乾) 삼합 (參合)하는 이름이 있다. 떠나 간 단군을 대(代)신 하여 세 지도자가 나타난 곳이다. 상간(桑乾) 이란 “유목민 지도자 (木)를 돕는 세 보좌관”이란 뜻이다. [5] 금미달이 함락 당한 시기에 “흉노, 북부여, 고구려” 로 분산 되었다. 약삭 빠른 흉노지도가 삼족오가 달린 금관을 들고 도망 갔다고 본다.
산서성 대현 일대에 석정곡전에 왕실 전용 우물 금곡(石井俗傳御井琴谷) 이 있었다. 통지 (通志)에는 변한을 산정한(山井韓)이라 하고 석정 어정 (御井)이란 단군왕검 백익이 우물을 만들어 마을 (井 淸也. 伯益作井)이 생겼다는 뜻에 단군의 후손이 사용 하던 우물을 뜻했다. 그곳에 살던 유울국 가실왕 (柳郁國嘉悉王)이 해안으로 내려와 신라 가까이 산동성에 정착 하여 가야국 가실왕(加耶國嘉悉王)이라 했다. 동관 한기에 실린 삼족오 사연과 일치 한다. 이러한 기록이 동국여지승람에 실렸다.[6]
금미달을 떠난 사람들이 발해만으로 나와 동남아 해안을 따라 수천리에 흐터져 신미제국(新彌諸國) 20여국이 나타났다. 가야국 가실왕(加耶國嘉悉王)의 후손이 해운업을 하는 큰상인 (大商主僧伽)으로 인도 동남 해안에 있는 섬나라 승가라국(僧伽羅國), 즉 세일론에 이르러 원시 불교와 대조 되는 미륵신앙 (彌勒信仰)의 기틀이 나타났다. [7]미륵 (彌勒)의 출생지를 남 천축국(Ceylon: 彌勒為名。 生於南天竺婆羅門家。紹釋迦如來之佛位. 南天竺際大海)이라 했다. 당나라 불교 스님들이 만든 법원주림 (法苑珠林) 에는 문수보살 (文殊菩薩) 양거 (儴佉; 晉陽을 떠난 사람)가, 범서(梵書) 다음 창힐 (倉頡) 이전에, 글자를 만들었다는 문구가 있다.[8]
신라 자장법사(慈藏法師)가 중국 산서성 오대산에 가서 문주스님으로 부터 불법을 배울 때(文殊授法)신라 골품제의 유래를 동이족 공공(東夷共工)의 후세와는 다르다고 했다. 동이(東夷)가 문자를 만들고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여 좋은 철기를 만들어 중원을 석권한 발조선 시대가 있었다. 이 시기를 중원 사람들은 춘추 전국시대라 한다.
조선의 분류: 시대와 영역
옥새와 왕관
이 렇게 단군조선의 시말을 찾고 동북아 상고사를 살펴 보면 조선(朝鮮)이란 명사 앞에 붙어 혼란을 이루었던 글자의 뜻이 분명 하다. 서주 무왕이 기원전 1048년에 계획하여 기원전 1046년에는 무예의 전투에서 대승하여 상나라의 주왕(紂王, 제신)은 궁을 불태우고 분사하였다. 무왕은 상나라 정벌 3년 후 기원전 1043년에 사망하였다. 희발이 풀어 주었던 기자가 성주 대회에 나타났다. 성주 대회에는 상나라 북쪽에 있던 단군조선 후손 제후들(彌宗旁之為諸侯)이 참석 했다. 기자 조선이란 이름은 존재 할수 없다.
관자에 발조선 (發朝鮮 )이란 문구와 여주(餘州, extra state)라고 했던 곳은“소가 우는 소리, 馬/牟;móu mù mào”라고 기록 되여 오던 기마유목민족의 지도자를 북주후모(北州侯莫)라고 했다. 또한 금국미란 (今國彌亂) 미란(彌亂) 이란 문구가 있다. 중원에서 춘추 시대라고 부르는 시기는 단군조선 (朝鮮 )을 이루 었던 여러 부족이 중원을 석권 하던 시대가 분명 하다. 이를 발조선 시대(發朝鮮 時代)라 함이 마땅 하다.
제왕의 상징은 옥새와 왕관이다. 금미달 지역에서 옥새(玉璽)의 원조가 되는 화씨벽(和氏之璧) 이 나타 났다. 맹자가 성지 화자 () 라고 불렀던 고유에서 내려온 해(柳下惠)가 지니고 있던 옥새란 뜻이다. 옥새란 [옥돌에 새겨 놓은 새bird란 뜻]의 한국어다. 지도자란 뜻의 감(監)자에 물수 또는 풀초 변등을 더해 여러 글자를 만들어 청출어람 (靑出於藍) 이란 사자성어가 나타났다. 진수가 금미달 (今彌達) 지역 호타하 연안에 살던 세 지도자 삼감 (三監)이란 뜻을 삼한(三韓) 이란 명칭을 만들고 높은 지도자(큰 가한 Kahan )란 뜻을 비하 음차 하여 적을 소자 왜(倭; wēi wō wǒ; 魏, 微: 汗[hán])로 기록 했다. 글자를 바꾸었다는 근거가 삼국지 왜인전과 단석괴전에 있다. 발해만 서쪽 한국(汗國)을 공격하고 한인(汗人) 수천명을 잡아갔다. 동이전에는 원시 불교가 중앙 아시아를 돌아온 전래 경로에 왜(倭)자가 신라의 옛이름 시라(斯羅)와 같이 실렸다. [30] 같은 내용을 태평어람에는 왜(倭)인전에 실었다. 삼국지 위서에 실린 선비(鮮卑)와 여러 미(彌)자가 금미달 지역을 떠난 사람들이 세운 도읍을 뜻했다.
이러한 글자들이 신라 백제 임나 가라와 같이 광개토 대왕 비문에 실렸고, 중원의 동쪽 해안을 따라 흐처져 나가 왜(倭)왕이 다스렸다는 기록이 여러 남조 역사서에 실렸다. 이들이 모두 수나라가 중원을 통일 하던 시절에 한해(瀚海)를 건너 동쪽으로 와 수나라에 듣기 불쾌한 문구를 보냈다. 당나라에서는 632년에 사신으로 고인표 (高表仁)를 왜에 보냈다. 사신이 부여씨의 왕자와 서로 우위 다툼을 했다. 그는 신라 남아 (附新羅奉表,以通起居) 사정을 알렸다. 이사건으로 무수원제(無綏遠才)란 사자성어가 나타났다.
高表仁:貞觀五年(632年)奉命持節出使日本,十月四日隨遣唐使船隊經朝鮮半島到達日本難波津(今大阪)。當時日人率船三十二艘,懸彩旗,奏鼓樂,在江口歡迎。高表仁要求「天皇下御座,面北接受唐使國書」,與日本王子爭禮,不肯宣朝命。次年正月日本朝廷派遣吉士雄麻呂、黑麻呂陪送至對馬島。表仁回國後被罰沒兩年俸祿。史稱其「無綏遠才」 . 2/26/2024 이 모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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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우 박사로 부터 받은 금관 사진: https://www.facebook.com/photo/?fbid=1748801348941276&set=a.120162338471860&__cft__[0]=AZVMQnW5HtdmNu4CPkSpYGECo2yER4aPWmWPBxRN-ndm0Y6n9NhkkM-BDm-3UGVTW5cePFqMhVWHFglv6rIVwVKQmFM7HAG0zN3UP-El5EerFg8vfQXOQyoBafe2SdNQy-uBkRgqZxcOAbVRXl3bZXKIhPYr8wFhpHMn1dLq-87YtQ&__tn__=EH-R
[1].廣韻: 魯:鈍也,又國名伯禽之後以國爲姓出扶風又羌複姓有魯步氏。 논어 (論語) – 제5편 공야장(公冶長): 수재류설지중 비기죄야 #1 (tistory.com)
[2]. 史記 魯周公世家: 周公旦者,周武王弟也。自文王在時,旦為子孝,篤仁,異於群子。及武王即位,旦常輔翼武王,用事居多。武王九年,東伐至盟津,周公輔行。十一年,伐紂,至牧野,周公佐武王,作牧誓。史記 管蔡世家: 管叔鮮, 蔡叔度者, 周文王子而武王弟也。 武王同母 兄弟十人。母曰太姒,文王正妃也。其長子曰伯邑考,次曰武王發,次曰管叔鮮,次曰周公旦,次曰蔡叔度,次曰曹叔振鐸,次曰成叔武,次曰霍叔處,次曰康叔封,次曰冉季載。冉季載最少。同母昆弟十人,唯發、旦賢,左右輔文王,故文王舍伯邑考而以發為太子。及文王崩而發立,是為武王。伯邑考既已前卒矣.
[3]. 竹書紀年 文丁: 二年,周公季歷伐燕京之戎,敗績. 四年,周公季歷伐余無之戎,克之,命為牧師. 十一年,周公季歷伐翳徒之戎,獲其三大夫,來獻捷。王殺季歷. 周武王: 十六年,箕子來朝。複姓有魯步氏。강상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4].東觀漢記:章帝元和二年,三足烏集沛國。三年,代郡高柳烏子生三足。
[5]. 康熙字典 叒:榑桑,叒木。《說文》日初出東方暘谷,所登榑桑叒木也。東方自然之神木。 又《精薀》叒,順也,道相似也。古人發明取友之義,从三又會意,同心同德,而後可相與輔翼也。桑字从此,象衆手之形,非取其義。《正譌》二又爲友,三又爲叒,所助者多,故爲順也。會意.
[6]. 東國輿地勝覽 :園幽御井黯一里有父伽郁國宮闢其旁有石井俗傳御井琴谷柳郁國嘉悉王樂師 于勒家中國秦事而製琴音伽郁琴縣址三里有地名琴谷世傅勒率工人肄琴之地或云烘琴出於金海之柳僻國但金海柳槨世代無稱嘉悉王者恐出打跳舄是錦林王陵縣西二里許朴古藏俗稱錦林王陵束京堤在縣東十謀攻大聊雕雜傳新羅兵萊知有備而邊夜築鞅堤以示其眾新復縣金富軾云本加尸穹縣為高靈郡領縣景德主改名今未詳口接縣西十里地名有加西谷者凝尸音轉為西.
[7]. 가야국 가실왕(加耶國嘉悉王)이 마지막 단군이다. « Lee Mosol’s Book Collection (ancienthistoryofkorea.com)
[8]. 康熙字典: 佉:《法苑珠林》造書凡三人,長曰梵,其書右行。次書佉盧,其書左行。少者倉頡, 其書下行。見《唐書·異域志》又神名。《釋書》佛說彌勒成佛經,其先轉輪聖王,名儴佉。有四種兵,不以威武,治四天下。又《陀羅尼經》佉佉。《註》文殊眷屬。《又》佉呬佉呬。《註》普賢眷屬。◎按佉,梵音去佐切,見就形門。今不从,只以音和門,丘伽切,釋之爲是。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