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대장군 왜국왕(安東大將軍 倭國王)이 편지를 작성한 장소:
앞서 한해(翰海)를 언제 어느 누가 처음으로 건넜나를 살펴 보았다. 중국 기록에 신라임나 가라(新羅 任那 加羅)를 다스렸다는 안동대장군 왜국왕(安東大將軍 倭國王)이 편지를 작성한 장소를 찾아 보기로 한다.
진서(晉書)에는 공손연이 숨었다 잡혔던 옛 졸본주 양평성 일대를 동왜(東倭)라고 했다(*[.晉書 帝紀第一:魏正始元年春正月,東倭重譯納貢,焉耆、危須諸國,弱水以南,鮮卑名王,皆遣使來獻。天子歸美宰輔,又增帝封邑。初,魏明帝好脩宮室,制度靡麗,百姓苦之。帝自遼東還,役者猶萬餘人,雕玩之物動以千計。至是皆奏罷之,節用務農,天下欣賴焉.]).
남제의 심약(沈約:441~513年)이 편술한 유송(劉宋:420년 ~ 479년) 역사서(宋書 夷蠻)에는 당시 유송의 해안선에 있던 여러 부족과 국가를 설명 했다(*[. 宋書 卷九十七列傳第五十七 夷蠻:居大海中洲上,相去或三五千里,遠者二三萬里,乘舶舉帆,道里不可詳知。外國諸夷雖言里數,非定實也.]):
“왜는 바닷속 섬에 산다. 외국 여러 족속은 이수를 몰라 믿기가 어럽다. 흔히 3-천리 먼곳은 2-3만리를 배를 타고(乘舶舉帆)가는 길이라 거리(里數)를 자세히 알수는 없다”
당시에 바람과 조류를 타고 먼 바다를 다녔다는 뜻이 있다다. 먼거리를 오랫동안 바다에서 생존할수 있는 장비가 구비 되였었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후한시대에 씰크로드를 통해 중국에 들어온 불교는 위진시대의 전란 통에 더더욱 번창하여 유송시절에는 중국 동남 해안을 따라 동남아와의 교류가 왕성 했다. 때때로 해안에 들려 필수품을 공급 받았다고 본다. 송서에 나타난 왜(倭)와의 교류 내용이 실렸다.
연초 2년(高祖永初二年)인 421년에 왜찬(倭贊萬里修貢,遠誠宜甄,可賜除授)이 만리길을 어렵게 와서 공물을 바치니, 멀리서온 성의를 밝혀 세로운 작위를 줌이 마땅하다>는 뜻의 소(詔曰)를 내렸다. 그후 425년(高祖永初二年)에 왜찬(倭贊)이 또다시 방물을 보냈다.찬이 죽고 동생 진이 뒤를 이어(贊死,弟珍立) 사신을 통해 공헌했다. 그가 스스로 6국을 다스리는 안동대장군 왜국왕“自稱使持節、都督倭百濟新羅任那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國王”이라 했다. 송나라 조정에서는 안동장군 왜국왕(詔除安東將軍、倭國王)이란 문구를 제거 했다. 그 후 작위를 놓고 주거니 받거니 흥정 하다 462년(世祖大明六年)에 발표한 소에 왜왕 세자 흥(倭王世子興)의 공로를 인정하여 안동장군 왜국왕(可安東將軍、倭國王)이라 했다. 흥이 죽고 동생 무가 집권하고 스스로 (나라 하나를 더하여) 6국에서 이라 했다(*[. 宋書 卷九十七列傳第五十七 夷蠻: 世祖大明六年,詔曰:「倭王世子興,奕世載忠,作籓外海,稟化寧境,恭修貢職。新嗣邊業,宜授爵號,可安東將軍、倭國王。」興死,弟武立,自稱使持節、都督倭百濟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七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國王。]).
송서에는 백제왕 비가 죽고(毗死) 아들 경(子慶代立.餘慶, 扶餘慶.개로왕)이 즉위하여 457년 (宋世祖大明元年)에 송나라에 사신을 보냈다. 그에 따르면, 478년(宋順帝升明二年)에 왜국왕 무(武)는 중국에 표를 보내 “사지절·도독 왜 백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칠국제군사·안동대장군·왜국왕(使持節·都督倭 百濟 新羅 任那 加羅 秦韓 慕韓七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國王)”이라는 작위를 요청하였다. 송나라 조정에서는 백제 이름은 제거 하고 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육국제국사 안동대장군 왜왕“詔除武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王”이란 작위를 주었다(*[.宋書:毗死,子慶代立。世祖大明元年,遣使求除授,詔許。二年,慶遣使上表曰:「臣國累葉,偏受殊恩,文武良輔,世蒙朝爵。行冠軍將軍右賢王餘紀等十一人,忠勤宜在顯進,伏願垂愍,並聽賜除。」仍以行冠軍將軍右賢王餘紀為冠軍將軍。以行征虜將軍左賢王餘昆、行征虜將軍餘暈並為征虜將軍。倭國,在高驪東南大海中,世修貢職。高祖永初二年,詔曰.二十年,倭國王濟遣使奉獻,復以為安東將軍、倭國王。二十八年,加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將軍如故.]).
그후 유송 최후가 되는 479년(順帝升明二年)에 왜에서 보낸 편지에는 는 내용이 있다(*[.宋書:順帝升明二年,遣使上表曰:「封國偏遠,作籓於外,自昔祖禰,躬擐甲胄,跋涉山川,不遑寧處。東征毛人五十五國,西服眾夷六十六國,渡平海北九十五國,王道融泰,廓土遐畿,累葉朝宗,不愆于歲。臣雖下愚,忝胤先緒,驅率所統,歸崇天極,道遙百濟,裝治船舫,而句驪無道,圖欲見吞,掠抄邊隸,虔劉不已,每致稽滯,以失良風。雖曰進路,或通或不。臣亡考濟實忿寇仇,壅塞天路,控弦百萬,義聲感激,方欲大舉,奄喪父兄,使垂成之功,不獲一簣。居在諒暗,不動兵甲,是以偃息未捷。至今欲練甲治兵,申父兄之志,義士虎賁,文武效功,白刃交前,亦所不顧。若以帝德覆載,摧此彊敵,克靖方難,無替前功。竊自假開府儀同三司,其餘咸各假授,以勸忠節。」詔除武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王.]).
남만주 연안에서 고구려와 백제가 싸우는 통에 많은 사람들이 신라로 가서 신라가 큰 나라가 되었다는 시절이다. 필자는 이 시기에 신라가 수도를 경주로 옮겼다고 추리 했다.
유송의 뒤를 소도성(齊 太祖 高皇帝 蕭道成, 427년 ~ 482년)에게 양위하여 남제(南齊;479년 ~ 502년)가 나타났다. 남제서에는 송서에 실린 왜에 관한 기록을 인용하고 더 높은 작위를 주어 안동대장군왜왕 진동대장군“安東大將軍、倭王武號為鎮東大將軍”이라고 했다.
남제서(南齊書)에는 진동대장군 백제왕 모대(鎮東大將軍百濟王牟大)가 올린 표(表曰)가 실렸다(*[.南齊書:詔可,並賜軍號,除太守。為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鎮東大將軍。使兼竭者僕射孫副策命大襲亡祖父牟都為百濟王。曰:「於戲!惟爾世襲忠勤,誠著遐表,滄路肅澄,要貢無替。式循彞典,用纂顯命。往欽哉!其敬膺休業,可不慎歟!制詔行都督百濟諸軍事、鎮東大將軍百濟王牟大今以大襲祖父牟都為百濟王,即位章綬等玉銅虎竹符四.]). 진동대장군(鎮東大將軍)이란 같은 칭호를 왜왕과 백제왕이 같이 받을수는 없다. 백제왕을 왜왕이라 했다.
당나라 때 편찬된 통전(通典新羅)에는 신라가 남만주에서 한반도 동남 연안으로 옮겨온 이후 처음으로 중원에 사신을 보냈다. 그 기록에 아래와 같은 문장이 있다(*[. 通典邊防一 新羅:至隋文帝時,遣使來貢。其王姓金名真平,隋東蕃風俗記云:「金姓相承三十餘葉。」文帝拜為樂浪郡公、新羅王。其王至今亦姓金。按梁史云姓慕,未詳中間易姓之由。其先附屬於百濟,後因百濟征高麗,人不堪戎役,相率歸之,遂致強盛,因襲加羅、任那諸國,滅之。並三韓之地。其西北界犬牙出高麗、百濟之間.]):
통전의 기록을 보면, 논란이 되는 가라와 임나(加羅、任那)가 한반도 남쪽에 있었다. 그 시기는 광개토대왕이 발해 요동만 일대를 석권하던 백제 세력을 물리친 이후 경주에 수도를 정한 신라가 가야를 흡수한 사실을 기록 했다.
북송의 사마광(司馬光:1019年 — 1086年)이 편술한 자치통감(資治通鑑)에도 수양제 때인 608년에 왜왕 다리사비고(倭王多利思比孤)가 사신을 보네 현 일본 열도와의 교류가 시작되었다(*[.資治通鑑 ●卷第一百八十一:煬皇帝上之下大業四年戊辰,公元六零八年.倭王多利思比孤遣使入貢,遺帝書曰:「日出處天子致書日沒處天子無恙。」帝覽之,不悅,謂鴻臚卿曰:「蠻夷書無禮者,勿復以聞。」]). 왜왕이 보낸 편지에 “日出處天子致書日沒處天子無恙>”란 문구는가 있다. 화친결혼을 했던 흉노가 한고조 부인에게 보넸던 편지와 같이 였다. 왜왕의 이름자는 현지음의 사음자라 글자가 다양 하다(*[.通典 倭:隋文帝開皇二十年,倭王姓阿每,名多利思比孤,其國號「阿輩雞彌」,華言天兒也,遣使詣闕.太平御覽 倭:《北史》曰:隋開皇二十年,倭王姓何每,字多利思比孤,號河輩雞彌,遣使詣闕.]).
최치원이 남긴 글에도 “高麗高句麗、百濟,全盛之時,强兵百萬,南侵吳、越,北撓幽、燕、齊、魯,為中國巨●고구려와 백제의 전성기에는강한 병사가 100만이 되었다.남쪽으로는 오나라 월나라, 북쪽으로는 유,연,제,노나라 땅에 이르러 중국의 큰 옴벌래”라고 했다.
이러한 상황을 종합해 보면, 는 수서(隋書)의 기록이 합당하다(*[.隋書:新羅、百濟皆以倭為大國,多珍物,並敬仰之,恆通使往來。大業三年,其王多利思北孤遣使朝貢。使者曰:「聞海西菩薩天子重興佛法,故遣朝拜,兼沙門數十人來學佛法。」其國書曰「日出處天子至書日沒處天子無恙」. ]).
북제(北齊,高齊:550-577년)와 같은 시절에 남쪽 내륙에 있었던 양나라(梁:502-557년)의 역사서(梁書)는 당나라 때에 요사(姚思廉:557年 — 637年)이 편찬 했다. 삼국지 왜인전을 서두로 하고 그 후에 나타난 사실을 기록 했다. 당시에 하북 평원은 선비족이 석권하여 오호 십육국 시대라 한다. 중원의 동해안은 고조선 후예들인 한예가 관장 했던 사실을 은미하게 기록 했다. 그 내용에 왜오왕(倭五王)의 이름이 강남으로 도망 갔던 동진안제(晉安帝; 382年-419年)시절로 부터 찬(讚), 진(珍), 제(濟), 흥(興), 무(武) 라고 했다. 그들에게 진동대장군 또는 정동장군(鎮東大將軍。高祖卽位,進武號征東將軍.鎮東大將軍百濟王牟大. 安東大將軍、倭王武號為鎮東大將軍)이라 했다. 동성왕(東城王, 재위 : 479년~501년)가 왜오왕(倭五王)의 마지막에 나타난 무(武)다. 그가 탐라국(三國史記:王以耽羅不修貢賦,親征.耽羅自武德以來,臣屬百濟)을 친히 정벌하고 남제에 사신(牟大又表曰)을 보냈다. 왜오왕이 활동하던 시절에 한해남로를 개발 했다.
왜의 남쪽에는 키가 3-4척(人長三四尺)이 되는 작은 사람들이 사는 (侏儒國、裸國、黑齒國)이 있다고 했다(*[. 梁書:晉安帝時有倭王賛 賛死立弟彌 彌死立子濟 濟死立子興 興死立弟武 齊建元中除武持節督倭新羅任那伽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鎮東大將軍 高祖即位進武號征東大將軍.其南有侏儒国 人長三四尺 又南黒齒國裸國 去倭四千餘里船行可一年至 又西南萬里有海人 身黒眼白裸而醜其肉羙行者或射而食之]). 진수가 남만주 현지인의 예기를 듣고 편술한 삼국지 왜인전에 실린 섬나라 이름을 실렀다(*[.三國志 倭人傳:女王國東渡海千餘里,復有國,皆倭種。又有侏儒國在其南,人長三四尺,去女王四千餘里。又有裸國、黑齒國復在其東南,船行一年可至。參問倭地,絕在海中洲島之上,或絕或連,周旋可五千餘里。]). 한해의 동남쪽 섬나라와 직접 교류가 있었다는 뜻이 아니라 모대(牟大)가 보냈던 사신으로 부터 들은 정보를 기록 했다고 본다.
흑치(黑齒)란 글자는 사음자로 햇님을 숭상하는 사람들이란 뜻이다. 진한시대 이전 부터 사용하던 사음자다. 통전(通典 倭)에 (*[.通典邊防一倭: 隋文帝開皇二十年,倭王姓阿每,名多利思比孤,其國號「阿輩雞彌」,華言天兒也,遣使詣闕.又千餘里至侏儒國,人長三四尺。自侏儒東南行船行一年至裸國、黑齒國,使驛所傳,極於此矣.倭一名日本,自云國在日邊,故以為稱。武太后長安二年,遣其大臣朝臣真人貢方物.]). 삼국지 왜인전에 실린 이름이다.
양서는 송서의 내용을 인용 하고 같은 내용이 통전에도 실렸다. 왜오왕(倭五王)의 이름은 남조의 동쪽 해안을 통치 했던 백제 동성왕(東城王)과 같은 부여씨(扶餘氏)의 이름자다.
중국 북송 초기의 학자 이방(李昉) 등이 태평흥국 2년 ~ 8년(977년 ~ 983년) 사이에 편찬한 태평어람(太平御覽 倭)에는 왜에 관한 자세한 설명이 있다. 오호 십육국 시대 동진의 제10대 안제(晉 安帝; 396년 ~ 418년) 때에 왜왕 찬이 사신을 보네(倭王贊遣使) 조공물 바쳤다(*[. 太平御覽 四夷部三·東夷三倭:《南史》曰:倭國風俗不淫,男女皆露髻。富貴者以錦繡雜采為帽,似中國胡公頭。晉安帝時,有倭王贊遣使朝貢。宋武帝永初二年,詔曰:「倭王贊遠誠宜甄,可賜除授。」文帝元嘉二年,贊又遣使奉表獻方物。贊死,弟珍立,遣使貢獻,自稱使持節都督倭、百濟、新羅、任那、秦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國王,詔除安東將軍、倭國王。珍又求除正倭洧等十三人平西征虜冠軍號,詔并聽之。自此朝貢不絕。至順帝升明二年,倭王武遣使上表言:「自昔祖禰躬擐甲胄,跋涉山川,不遑寧處,東征毛人五十五國,西服眾夷六十六國,陵平海北九十五國,王道融泰,廓士遐畿,累葉朝宗,不愆于歲。道過百濟,裝飾船舫,而句麗無道,圖欲見吞。臣亡考濟,方欲大舉,奄喪父兄,使垂成之功,不獲一簣。今欲練兵,申父兄之志,竊自假開府儀三司,其餘咸各假授,以勸忠節。」詔除武使持節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國王。至齊建元中,及梁武帝時,并來朝貢.]). 426년(南宋文帝元嘉二年)에 찬이 죽고 동생 진(珍)이 왕이 되었다 (贊死,弟珍立.自稱使持節都督倭、百濟、新羅、任那、秦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國王,詔除安東將軍、倭國王)양서에 실린 왜오왕의 이름과 같다. 남조 역사서에 실린 내용이다.
삼국사기 백제 본기에는 중국사료와 일본 사관들이 인정하는 왜오왕(倭五王)의 이름자 “讚, 珍, 濟, 興, 武”는 확인하기 어렵다. 송서 왜인전에 나오는 니/미 (自昔祖禰nǐ mí xiǎn)자와 양서에 나오는 (賛死立弟彌 彌死立子濟)는 미자,삼국지 왜인전에 나오는 친위왜왕 비미호(親魏倭王卑彌呼)의 미자 등, 동북아 상고사 여러 곳에 나오는 와 같은 뜻을 지닌 글자다. 백제는 비하 하여 너(you)라 불러 구이신왕(久爾辛王;재위 420∼427)이라 했다.
시대적으로는 남만주에서 공손연 세력이 사라진 이후 고구려와 영토분쟁을 하다가 광개토대왕에게 요동 반도 끝의 요세마저 빼았기고 쫒겨 나던 시절이다. 뒤를 이은 장수왕 (413년 ~ 491년)이 동진(東晉)에 사신을 보네 안제(晉安帝:382年-419年)로 부터 고구려왕 낙안 즉 낭랑군공(樂安郡樂浪郡公)이란 칭호를 받았다(*[.三國史記 高句麗本紀第六: 長壽王,諱巨連一作璉。開土王之元子也。開土王十八年,立為太子.元年,遣長史高翼,入晉奉表,獻●白馬。安帝封王高句麗王樂安郡樂浪郡}}}公. 十二年,新羅遣使修聘.十五年,移都平壤. ]). 제임 12년에는 신라가 사신을 보네(新羅遣使修聘) 그들의 노고를 위로하고 했다. 옛적에 요동만 서쪽에 있던 신라 땅을 흡수 했다. 장수왕은 계속 백제를 추격하여 반도백제의 수도 한성(漢城.其北岸狗邪韓國. 대동강 하류 낭랑유적)을 전령 했다. 계속 남쪽으로 진출하여 충주에 고구려비를 세웠다. 그 전투에서 백제 개로왕 (蓋鹵王;재위: 455년~475년)부여경(王扶餘慶)이 피살당하고 백제는 한반도 서남쪽으로 수도를 옮겼다. 대동강 하류 한성에 있던 부여경은 대륙에 있던 북위(北魏, 386년~534년)와 동남쪽에 있던 신라에 구원을 청했지만 구원병이 오기전에 전쟁이 끝났다. 북위에 올린 편지에 사신으로 대방태수 장무(張茂等)등이 “投舫波阻,搜徑玄津,託命自然之運,遣進萬一之誠”란 문구가 있다. 천운에 생명을 맞기고 대동강 하구에서 뱃길로 산동반도 아니면 천진항에 이르렀다는 뜻이다. 고구려가 한해북로를 장악 했다. 그러한 사실을 사랑격로(豺狼隔路)라고 기록했다(*[. 三國史記: 四十一年,冬十月,百濟王率帥兵三萬,來攻平壤城。王出師拒之,為流矢所中。是月二十三日,薨。葬于故國之原。百濟蓋鹵王表魏曰:「梟斬釗首。」過辭也。蓋鹵王或云近蓋婁。諱慶司,毗有王之長子.十八年,遣使朝魏。上表曰:「臣立國東極,豺狼隔路,雖世承靈化,莫由奉藩。瞻望雲闕,馳情罔極,凉風微應。伏惟皇帝陛下,●協和天休,不勝係仰之情。謹遣私署冠軍將軍駙馬都尉弗斯侯長史餘禮,龍●將軍帶方太守司馬張茂等,投舫波阻,搜徑玄津,託命自然之運,遣進萬一之誠。冀神祗祇垂感,皇靈洪覆,克達天庭,宣暢臣志,雖旦聞夕沒,永無餘恨。」]).
결론: 사료를 종합해 보면 후한말기 위진 시대는 고조선후예들을 이용하여 중원을 통일하느라고 정략 결혼을한 후유증으로 나타난 서진 팔왕의난(八王-亂)이 계속된 현상이다. 왜왕 비미호 (倭國女王俾彌呼)가 살았던 동왜(東倭)가 남만주 지역이 였다는 확실한 증거가 뚜렸하게(明文化)적혀 있다(*[.晉書 列傳: 東夷,夫餘國、馬韓、辰韓、肅慎氏、倭人、裨離等十國:漢末,倭人亂,攻伐不定,乃立女子為王,
名曰卑彌呼 宣帝之平公孫氏也,其女王遣使至帶方朝見,其後貢聘不絕。及文帝作相,又數至。泰始初,遣使重譯入貢
]):
“宣帝之平公孫氏也,其女王遣使至帶方朝見,其後貢聘不絕. 及文帝作相,又數至.”
공빙(貢聘)이란 어휘에는 사마씨와 동왜간에 혼사가 있었다는 뜻이다. 이로 인하여졸본부여 지역 또는 대방 사람들(汗人, 倭人)이 서진의 조정에서 높은 직을 맡아 보았다. 진수는 이 사실을 부여전(夫餘傳)에; 위거가 대사가 되여 조위 경도에 매년 사신을 보넸다 (歲歲遣使詣京都貢獻)고 기록 했다.
대륙생활에 익숙했던 조선호(朝鮮胡,故句驪胡)가 해양으로 진출했던 한예세력(朝鮮在海中)을 물리첬다. 중원을 잃은 한예(韓濊) 세력은 해양으로 진출 했지만, 중원에 가까운 한반도 서남쪽 해안에 수도를 두고 중원을 되찾으려는 꿈을 쉽게 버리지 못했다.
신라임나 가라(新羅 任那 加羅)등 6국을 통치하고 중원에 사신을 보네 안동장군 왜왕(安東將軍,安東大將軍 倭國王)의 칭호를 받은 시기는 광개토대왕 이후다. 위치는 고구려 장수왕이 백제수도 한성을 점령하여 한(汗人.汗國)을 왜(倭國)라 했던 백제가 남쪽으로 옮겨 갔던 곳으로 한해 동남 쪽에서 한해 북로를 통해 중원과 교류 하던 곳이다. 고구려가 막았다는 문구는 비유왕(毗有王. 百濟王餘毗, 재위 : 427년 ~ 455년)의 아들,개로왕(蓋鹵王餘慶, ? ~ 475년 9월)이 북위(北魏; 386~534)에 구원을 청했던 내용과 같다. 안동대장군 왜국왕(安東大將軍 倭國王)이 편지를 작성한 위치는 한반도 서남 해안에 있던 반도 백제의 수도에 피신하여서 였다. 부여에 있던 왕흥사(王興寺)에는 위덕왕 부여창(威德王 扶餘昌, 재위: 554년~598년)이 잃어버린 아들을 위하여 남긴 남긴 금석문이 있다.
해상권을 자랑했던 현상이 장보고와 왜구로 나타났고,중원을 되찾으려는 꿈이 임진왜란으로 나타났다. 풍신수길이 조선에 전한 정명가도(征明假道)란 문구가 있다. 그가 명나라를 정벌하고 햇님으로 부터 인수 받은 가왜왕도(假倭王道)를 실시 하겠다는 의지를 전했다.
끝June 13, 2019
앞서 한해(翰海)를 언제 어느 누가 처음으로 건넜나를 살펴 보았다. 중국 기록에 신라임나 가라(新羅 任那 加羅)를 다스렸다는 안동대장군 왜국왕(安東大將軍 倭國王)이 편지를 작성한 장소를 찾아 보기로 한다.
진서(晉書)에는 공손연이 숨었다 잡혔던 옛 졸본주 양평성 일대를 동왜(東倭)라고 했다(*[.晉書 帝紀第一:魏正始元年春正月,東倭重譯納貢,焉耆、危須諸國,弱水以南,鮮卑名王,皆遣使來獻。天子歸美宰輔,又增帝封邑。初,魏明帝好脩宮室,制度靡麗,百姓苦之。帝自遼東還,役者猶萬餘人,雕玩之物動以千計。至是皆奏罷之,節用務農,天下欣賴焉.]).
남제의 심약(沈約:441~513年)이 편술한 유송(劉宋:420년 ~ 479년) 역사서(宋書 夷蠻)에는 당시 유송의 해안선에 있던 여러 부족과 국가를 설명 했다(*[. 宋書 卷九十七列傳第五十七 夷蠻:居大海中洲上,相去或三五千里,遠者二三萬里,乘舶舉帆,道里不可詳知。外國諸夷雖言里數,非定實也.]):
“왜는 바닷속 섬에 산다. 외국 여러 족속은 이수를 몰라 믿기가 어럽다. 흔히 3-천리 먼곳은 2-3만리를 배를 타고(乘舶舉帆)가는 길이라 거리(里數)를 자세히 알수는 없다”
당시에 바람과 조류를 타고 먼 바다를 다녔다는 뜻이 있다다. 먼거리를 오랫동안 바다에서 생존할수 있는 장비가 구비 되였었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후한시대에 씰크로드를 통해 중국에 들어온 불교는 위진시대의 전란 통에 더더욱 번창하여 유송시절에는 중국 동남 해안을 따라 동남아와의 교류가 왕성 했다. 때때로 해안에 들려 필수품을 공급 받았다고 본다. 송서에 나타난 왜(倭)와의 교류 내용이 실렸다.
연초 2년(高祖永初二年)인 421년에 왜찬(倭贊萬里修貢,遠誠宜甄,可賜除授)이 만리길을 어렵게 와서 공물을 바치니, 멀리서온 성의를 밝혀 세로운 작위를 줌이 마땅하다>는 뜻의 소(詔曰)를 내렸다. 그후 425년(高祖永初二年)에 왜찬(倭贊)이 또다시 방물을 보냈다.찬이 죽고 동생 진이 뒤를 이어(贊死,弟珍立) 사신을 통해 공헌했다. 그가 스스로 6국을 다스리는 안동대장군 왜국왕“自稱使持節、都督倭百濟新羅任那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國王”이라 했다. 송나라 조정에서는 안동장군 왜국왕(詔除安東將軍、倭國王)이란 문구를 제거 했다. 그 후 작위를 놓고 주거니 받거니 흥정 하다 462년(世祖大明六年)에 발표한 소에 왜왕 세자 흥(倭王世子興)의 공로를 인정하여 안동장군 왜국왕(可安東將軍、倭國王)이라 했다. 흥이 죽고 동생 무가 집권하고 스스로 (나라 하나를 더하여) 6국에서 이라 했다(*[. 宋書 卷九十七列傳第五十七 夷蠻: 世祖大明六年,詔曰:「倭王世子興,奕世載忠,作籓外海,稟化寧境,恭修貢職。新嗣邊業,宜授爵號,可安東將軍、倭國王。」興死,弟武立,自稱使持節、都督倭百濟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七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國王。]).
송서에는 백제왕 비가 죽고(毗死) 아들 경(子慶代立.餘慶, 扶餘慶.개로왕)이 즉위하여 457년 (宋世祖大明元年)에 송나라에 사신을 보냈다. 그에 따르면, 478년(宋順帝升明二年)에 왜국왕 무(武)는 중국에 표를 보내 “사지절·도독 왜 백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칠국제군사·안동대장군·왜국왕(使持節·都督倭 百濟 新羅 任那 加羅 秦韓 慕韓七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國王)”이라는 작위를 요청하였다. 송나라 조정에서는 백제 이름은 제거 하고 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육국제국사 안동대장군 왜왕“詔除武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王”이란 작위를 주었다(*[.宋書:毗死,子慶代立。世祖大明元年,遣使求除授,詔許。二年,慶遣使上表曰:「臣國累葉,偏受殊恩,文武良輔,世蒙朝爵。行冠軍將軍右賢王餘紀等十一人,忠勤宜在顯進,伏願垂愍,並聽賜除。」仍以行冠軍將軍右賢王餘紀為冠軍將軍。以行征虜將軍左賢王餘昆、行征虜將軍餘暈並為征虜將軍。倭國,在高驪東南大海中,世修貢職。高祖永初二年,詔曰.二十年,倭國王濟遣使奉獻,復以為安東將軍、倭國王。二十八年,加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將軍如故.]).
그후 유송 최후가 되는 479년(順帝升明二年)에 왜에서 보낸 편지에는 는 내용이 있다(*[.宋書:順帝升明二年,遣使上表曰:「封國偏遠,作籓於外,自昔祖禰,躬擐甲胄,跋涉山川,不遑寧處。東征毛人五十五國,西服眾夷六十六國,渡平海北九十五國,王道融泰,廓土遐畿,累葉朝宗,不愆于歲。臣雖下愚,忝胤先緒,驅率所統,歸崇天極,道遙百濟,裝治船舫,而句驪無道,圖欲見吞,掠抄邊隸,虔劉不已,每致稽滯,以失良風。雖曰進路,或通或不。臣亡考濟實忿寇仇,壅塞天路,控弦百萬,義聲感激,方欲大舉,奄喪父兄,使垂成之功,不獲一簣。居在諒暗,不動兵甲,是以偃息未捷。至今欲練甲治兵,申父兄之志,義士虎賁,文武效功,白刃交前,亦所不顧。若以帝德覆載,摧此彊敵,克靖方難,無替前功。竊自假開府儀同三司,其餘咸各假授,以勸忠節。」詔除武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王.]).
남만주 연안에서 고구려와 백제가 싸우는 통에 많은 사람들이 신라로 가서 신라가 큰 나라가 되었다는 시절이다. 필자는 이 시기에 신라가 수도를 경주로 옮겼다고 추리 했다.
유송의 뒤를 소도성(齊 太祖 高皇帝 蕭道成, 427년 ~ 482년)에게 양위하여 남제(南齊;479년 ~ 502년)가 나타났다. 남제서에는 송서에 실린 왜에 관한 기록을 인용하고 더 높은 작위를 주어 안동대장군왜왕 진동대장군“安東大將軍、倭王武號為鎮東大將軍”이라고 했다.
남제서(南齊書)에는 진동대장군 백제왕 모대(鎮東大將軍百濟王牟大)가 올린 표(表曰)가 실렸다(*[.南齊書:詔可,並賜軍號,除太守。為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鎮東大將軍。使兼竭者僕射孫副策命大襲亡祖父牟都為百濟王。曰:「於戲!惟爾世襲忠勤,誠著遐表,滄路肅澄,要貢無替。式循彞典,用纂顯命。往欽哉!其敬膺休業,可不慎歟!制詔行都督百濟諸軍事、鎮東大將軍百濟王牟大今以大襲祖父牟都為百濟王,即位章綬等玉銅虎竹符四.]). 진돈재장군(鎮東大將軍)이란 같은 칭호를 왜왕과 백제왕이 같이 받을수는 없다. 백제왕을 왜왕이라 했다.
당나라 때 편찬된 통전(通典新羅)에는 신라가 남만주에서 한반도 동남 연안으로 옮겨온 이후 처음으로 중원에 사신을 보냈다. 그 기록에 아래와 같은 문장이 있다(*[. 通典邊防一 新羅:至隋文帝時,遣使來貢。其王姓金名真平,隋東蕃風俗記云:「金姓相承三十餘葉。」文帝拜為樂浪郡公、新羅王。其王至今亦姓金。按梁史云姓慕,未詳中間易姓之由。其先附屬於百濟,後因百濟征高麗,人不堪戎役,相率歸之,遂致強盛,因襲加羅、任那諸國,滅之。並三韓之地。其西北界犬牙出高麗、百濟之間.]):
통전의 기록을 보면, 논란이 되는 가라와 임나(加羅、任那)가 한반도 남쪽에 있었다. 그 시기는 광개토대왕이 발해 요동만 일대를 석권하던 백제 세력을 물리친 이후 경주에 수도를 정한 신라가 가야를 흡수한 사실을 기록 했다.
북송의 사마광(司馬光:1019年 — 1086年)이 편술한 자치통감(資治通鑑)에도 수양제 때인 608년에 왜왕 다리사비고(倭王多利思比孤)가 사신을 보네 현 일본 열도와의 교류가 시작되었다(*[.資治通鑑 ●卷第一百八十一:煬皇帝上之下大業四年戊辰,公元六零八年.倭王多利思比孤遣使入貢,遺帝書曰:「日出處天子致書日沒處天子無恙。」帝覽之,不悅,謂鴻臚卿曰:「蠻夷書無禮者,勿復以聞。」]). 왜왕이 보낸 편지에 “日出處天子致書日沒處天子無恙>”란 문구는가 있다. 화친결혼을 했던 흉노가 한고조 부인에게 보넸던 편지와 같이 였다. 왜왕의 이름자는 현지음의 사음자라 글자가 다양 하다(*[.通典 倭:隋文帝開皇二十年,倭王姓阿每,名多利思比孤,其國號「阿輩雞彌」,華言天兒也,遣使詣闕.太平御覽 倭:《北史》曰:隋開皇二十年,倭王姓何每,字多利思比孤,號河輩雞彌,遣使詣闕.]).
최치원이 남긴 글에도 “高麗高句麗、百濟,全盛之時,强兵百萬,南侵吳、越,北撓幽、燕、齊、魯,為中國巨●고구려와 백제의 전성기에는강한 병사가 100만이 되었다.남쪽으로는 오나라 월나라, 북쪽으로는 유,연,제,노나라 땅에 이르러 중국의 큰 옴벌래”라고 했다.
이러한 상황을 종합해 보면, 는 수서(隋書)의 기록이 합당하다(*[.隋書:新羅、百濟皆以倭為大國,多珍物,並敬仰之,恆通使往來。大業三年,其王多利思北孤遣使朝貢。使者曰:「聞海西菩薩天子重興佛法,故遣朝拜,兼沙門數十人來學佛法。」其國書曰「日出處天子至書日沒處天子無恙」. ]).
북제(北齊,高齊:550-577년)와 같은 시절에 남쪽 내륙에 있었던 양나라(梁:502-557년)의 역사서(梁書)는 당나라 때에 요사(姚思廉:557年 — 637年)이 편찬 했다. 삼국지 왜인전을 서두로 하고 그 후에 나타난 사실을 기록 했다. 당시에 하북 평원은 선비족이 석권하여 오호 십육국 시대라 한다. 중원의 동해안은 고조선 후예들인 한예가 관장 했던 사실을 은미하게 기록 했다. 그 내용에 왜오왕(倭五王)의 이름이 강남으로 도망 갔던 동진안제(晉安帝; 382年-419年)시절로 부터 찬(讚), 진(珍), 제(濟), 흥(興), 무(武) 라고 했다. 그들에게 진동대장군 또는 정동장군(鎮東大將軍。高祖卽位,進武號征東將軍)이라 했다. 뒤를 이어 왜의 남쪽에는 키가 3-4척(人長三四尺)이 되는 작은 사람들이 사는 (侏儒國、裸國、黑齒國)이 있다고 했다(*[. 梁書:晉安帝時有倭王賛 賛死立弟彌 彌死立子濟 濟死立子興 興死立弟武 齊建元中除武持節督倭新羅任那伽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鎮東大將軍 高祖即位進武號征東大將軍.其南有侏儒国 人長三四尺 又南黒齒國裸國 去倭四千餘里船行可一年至 又西南萬里有海人 身黒眼白裸而醜其肉羙行者或射而食之]). 한해의 동남쪽 섬나라와 직접 교류가 있었다는 뜻이 아니다. 진수가 남만주 현지인의 예기를 듣고 편술한 삼국지 왜인전에 실린 섬나라 이름을 실렀다(*[.三國志 倭人傳:女王國東渡海千餘里,復有國,皆倭種。又有侏儒國在其南,人長三四尺,去女王四千餘里。又有裸國、黑齒國復在其東南,船行一年可至。參問倭地,絕在海中洲島之上,或絕或連,周旋可五千餘里。]).
흑치(黑齒)란 글자는 사음자로 햇님을 숭상하는 사람들이란 뜻이다. 진한시대 이전 부터 사용하던 사음자다. 통전(通典 倭)에 (*[.通典邊防一倭: 隋文帝開皇二十年,倭王姓阿每,名多利思比孤,其國號「阿輩雞彌」,華言天兒也,遣使詣闕.又千餘里至侏儒國,人長三四尺。自侏儒東南行船行一年至裸國、黑齒國,使驛所傳,極於此矣.倭一名日本,自云國在日邊,故以為稱。武太后長安二年,遣其大臣朝臣真人貢方物.]). 삼국지 왜인전에 실린 이름이다.
양서는 송서의 내용을 인용 하고 같은 내용이 통전에도 실렸다. 진동 정동 하는 어휘는 유송이나 양(梁)나라의 수도를 영점으로 한 시각에서 표현 했다. 당시에는 한해 남로는 개발 되지 않아 왜오왕(倭五王)의 이름은 남조의 동쪽 해안을 통치 했던 대륙백제 지도자 부여씨(扶餘氏)의 이름자다.
중국 북송 초기의 학자 이방(李昉) 등이 태평흥국 2년 ~ 8년(977년 ~ 983년) 사이에 편찬한 태평어람(太平御覽 倭)에는 왜에 관한 자세한 설명이 있다. 오호 십육국 시대 동진의 제10대 안제(晉 安帝; 396년 ~ 418년) 때에 왜왕 찬이 사신을 보네(倭王贊遣使) 조공물 바쳤다(*[. 太平御覽 四夷部三·東夷三倭:《南史》曰:倭國風俗不淫,男女皆露髻。富貴者以錦繡雜采為帽,似中國胡公頭。晉安帝時,有倭王贊遣使朝貢。宋武帝永初二年,詔曰:「倭王贊遠誠宜甄,可賜除授。」文帝元嘉二年,贊又遣使奉表獻方物。贊死,弟珍立,遣使貢獻,自稱使持節都督倭、百濟、新羅、任那、秦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國王,詔除安東將軍、倭國王。珍又求除正倭洧等十三人平西征虜冠軍號,詔并聽之。自此朝貢不絕。至順帝升明二年,倭王武遣使上表言:「自昔祖禰躬擐甲胄,跋涉山川,不遑寧處,東征毛人五十五國,西服眾夷六十六國,陵平海北九十五國,王道融泰,廓士遐畿,累葉朝宗,不愆于歲。道過百濟,裝飾船舫,而句麗無道,圖欲見吞。臣亡考濟,方欲大舉,奄喪父兄,使垂成之功,不獲一簣。今欲練兵,申父兄之志,竊自假開府儀三司,其餘咸各假授,以勸忠節。」詔除武使持節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國王。至齊建元中,及梁武帝時,并來朝貢.]). 426년(南宋文帝元嘉二年)에 찬이 죽고 동생 진(珍)이 왕이 되었다 (贊死,弟珍立.自稱使持節都督倭、百濟、新羅、任那、秦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國王,詔除安東將軍、倭國王.)양서에 실린 왜오왕의 이름이다. 오호 십욱국 시대 남조 역사서에 실린 내용이다.
삼국사기 백제 본기에는 중국사료와 일본 사관들이 인정하는 왜오왕(倭五王)의 이름자 “讚, 珍, 濟, 興, 武”는 확인이 안된다. 송서 왜인전에 나오는 니/미 (自昔祖禰nǐ mí xiǎn)자와 양서에 나오는 (賛死立弟彌 彌死立子濟)는 미자,삼국지 왜인전에 나오는 친위왜왕 비미호(親魏倭王卑彌呼)의 미자 등, 동북아 상고사 여러 곳에 나오는 와 같은 뜻을 지닌 글자다. 백제는 비하 하여 너(you)라 불러 구이신왕(久爾辛王;재위 420∼427)이라 했다.
시대적으로는 남만주에서 공손연 세력이 사라진 이후 고구려와 영토분쟁을 하다가 광개토대왕에게 요동 반도 끝의 요세마저 빼았기고 쫒겨 나던 시절이다. 뒤를 이은 장수왕 (413년 ~ 491년)이 치임한 해에 동진(東晉)에 사신을 보네 안제(晉安帝:382年-419年)로 부터 고구려왕 낙안 즉 낭랑군공(樂安郡樂浪郡公)이란 칭호를 받았다(*[.三國史記 高句麗本紀第六: 長壽王,諱巨連一作璉。開土王之元子也。開土王十八年,立為太子.元年,遣長史高翼,入晉奉表,獻●白馬。安帝封王高句麗王樂安郡樂浪郡}}}公. 十二年,新羅遣使修聘.十五年,移都平壤. ]). 제임 12년에는 신라가 사신을 보네(新羅遣使修聘) 그들의 노고를 위로하고 했다. 옛적에 요동만 서쪽에 있던 신라 땅을 흡수 했다. 장수왕은 계속 백제를 추격하여 반도백제의 수도 한성(漢城.其北岸狗邪韓國. 대동강 하류 낭랑유적)을 전령 했다. 계속 남쪽으로 진출하여 충주에 고구려비를 세웠다. 그 전투에서 백제 개로왕 (蓋鹵王;재위: 455년~475년)부여경(王扶餘慶)이 피살당하고 백제는 한반도 서남쪽으로 수도를 옮겼다. 대동강 하류 한성에 있던 부여경은 대륙에 있던 북위(北魏, 386년~534년)와 동남쪽에 있던 신라에 구원을 청했지만 구원병이 오기전에 전쟁이 끝났다. 북위에 올린 편지에 사신으로 대방태수 장무(張茂等)등이 “投舫波阻,搜徑玄津,託命自然之運,遣進萬一之誠”란 문구가 있다. 천운에 생명을 맞기고 대동강 하구에서 뱃길로 산동반도 아니면 천진항에 이르렀다는 뜻이다. 고구려가 한해북로를 장악 했다는 기록을 사랑격로(豺狼隔路)라 했다(*[. 三國史記: 四十一年,冬十月,百濟王率帥兵三萬,來攻平壤城。王出師拒之,為流矢所中。是月二十三日,薨。葬于故國之原。百濟蓋鹵王表魏曰:「梟斬釗首。」過辭也。蓋鹵王或云近蓋婁。諱慶司,毗有王之長子.十八年,遣使朝魏。上表曰:「臣立國東極,豺狼隔路,雖世承靈化,莫由奉藩。瞻望雲闕,馳情罔極,凉風微應。伏惟皇帝陛下,●協和天休,不勝係仰之情。謹遣私署冠軍將軍駙馬都尉弗斯侯長史餘禮,龍●將軍帶方太守司馬張茂等,投舫波阻,搜徑玄津,託命自然之運,遣進萬一之誠。冀神祗祇垂感,皇靈洪覆,克達天庭,宣暢臣志,雖旦聞夕沒,永無餘恨。」]).
결론: 사료를 종합해 보면 후한말기 위진 시대는 고조선후예들을 이용하여 중원을 통일하느라고 정략 결혼을한 후유증으로 나타난 서진 팔왕의난(八王-亂)이 계속된 현상이다. 왜왕 비미호 (倭國女王俾彌呼)가 살았던 동왜(東倭)가 남만주 지역이 였다는 확실한 증거가 뚜렸하게(明文化)적혀 있다(*[.晉書 列傳: 東夷,夫餘國、馬韓、辰韓、肅慎氏、倭人、裨離等十國:漢末,倭人亂,攻伐不定,乃立女子為王,
名曰卑彌呼 宣帝之平公孫氏也,其女王遣使至帶方朝見,其後貢聘不絕。及文帝作相,又數至。泰始初,遣使重譯入貢
]):
“宣帝之平公孫氏也,其女王遣使至帶方朝見,其後貢聘不絕. 及文帝作相,又數至.”
공빙(貢聘)이란 어휘에는 사마씨와 동왜간에 혼사가 있었다는 뜻이다. 이로 인하여졸본부여 지역 또는 대방 사람들(汗人, 倭人)이 서진의 조정에서 높은 직을 맡아 보았다. 진수는 이 사실을 부여전(夫餘傳)에; 위거가 대사가 되여 조위 경도에 매년 사신을 보넸다 (歲歲遣使詣京都貢獻)고 기록 했다.
대륙생활에 익숙했던 조선호(朝鮮胡,故句驪胡)가 해양으로 진출했던 한예세력(朝鮮在海中)을 물리첬다. 중원을 잃은 한예(韓濊) 세력은 해양으로 진출 했지만, 중원에 가까운 한반도 서남쪽 해안에 수도를 두고 중원을 되찾으려는 꿈을 쉽게 버리지 못했다.
신라임나 가라(新羅 任那 加羅)등 6국을 통치하고 중원에 사신을 보네 안동장군 왜왕(安東將軍,安東大將軍 倭國王)의 칭호를 받은 시기는 광개토대왕 이후다. 위치는 고구려 장수왕이 백제수도 한성을 점령하여 한(汗人.汗國)을 왜(倭國)라 했던 백제가 남쪽으로 옮겨 갔던 곳으로 한해 동남 쪽에서 한해 북로를 통해 중원과 교류 하던 곳이다. 고구려가 막았다는 문구는 비유왕(毗有王. 百濟王餘毗, 재위 : 427년 ~ 455년)의 아들,개로왕(蓋鹵王餘慶, ? ~ 475년 9월)이 북위(北魏; 386~534)에 구원을 청했던 내용과 같다. 안동대장군 왜국왕(安東大將軍 倭國王)이 편지를 작성한 위치는 한반도 서남 해안에 있던 반도 백제의 수도에 피신하여서 였다. 부여에 있던 왕흥사(王興寺)에는 위덕왕 부여창(威德王 扶餘昌, 재위: 554년~598년)이 잃어버린 아들을 위하여 남긴 남긴 금석문이 있다.
해상권을 자랑했던 현상이 장보고와 왜구로 나타났고,중원을 되찾으려는 꿈이 임진왜란으로 나타났다. 풍신수길이 조선에 전한 정명가도(征明假道), 즉 명나라를 정벌하고 햇님으로 부터 인수 받은 가왜왕도(假倭王道)를 실시 하겠다는 뜻이다.
끝
June 12, 2019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