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나라 장수 진개(秦开)란 풀이는 잘못:
공자님이 19세에 송나라의 견궁씨(幵官氏)를 부인으로 맞아 들였다[1]. 평평 할 견(幵)자는 <오랑캐 이름,산 이름>이란 뜻이 있고, 개(开, 開)자와 같은 뜻이다. 사위 공야장(公冶萇, 公冶長)은 오환족이였다. 춘추전국시대에는 하북평원 전역이 기마민족의 활동 무대 였다는 뜻이 공자가어에 숨어 있다.
땅을 빼았긴 사람들의 선조가 강족(羌,幵)이다. 춘추시대 초기에는 오환족이 살던 마을과 제 환공(齊 桓公,재위: 기원전 685년 ~ 기원전 643년)이 살던 사이에 제후국 연(燕)이 있었다[2]. 이 때는 이미 주왕실이 서쪽에서 원주민에게 쫒겨 제후국 연(燕)과 같이 함곡관을 나와 하남성에 정착 했다.
좌씨춘추의 원본이 되는 국어(國語)에는 연나라 역사란 뜻의 연어(燕語)는 물론 진어(晉語)란 글자가 없다. 연(燕)자는 하북성 남쪽에 멀리 떠러져 있었다. 제후국 연자는;<주어, 제어, 정어> 에만 나온다. 당시 제환공의 수도는 하남성 업(鄴) 즉 하북성 남쪽 한단(邯鄲)에 있었다. 그로 부터 자그만 연(燕) 나라 땅을 지나 산서성 태원시에서 하북성 석가장시 (石家庄市) 일대에 이르는 지역에 있었던 산융을 치러 올라 갔다. 그러니 작았던 연(燕)나라는 마땅히 하북성 서남쪽에 있었어야 한다. 이를 한서 지리지에 동군 22현(東郡, 縣二十二) 중에 있던 남연현(南燕縣)이 하남성 (河南省濮陽市) 에 있었다. 공자님이 잠깐 기거하였(仲尼燕居)다고 했다.
만리장성은 남만주에 이를 수가 없었다.
사기 은본기에 조을(祖乙)이 형으로 천도 했다(祖乙遷于邢)는 곳을 전국시대에 진(秦)이 빼았었다는 사실을 몽활열전을 편술 했다고 밝혔다[3]. 마을 이름 형(邢; 开:阝)자는 열을 개(开, 開)와 마을(邑, 陵阜)이란 상형자를 겹해서 만든 글자로, 새로 생긴 마을(frontier town)이란 뜻이다. 개(开)자는 상형자 방패간(干)자 두개를 겹친 글자(兩干)로 동호(東胡, 胡)로 알려진 강족(幵,羌名)을 뜻한다. 형(邢) 마을의 원주민은 북적 강족(羌) 이였다. 이지역이 오환족 (烏桓/丸)의 본향이다. 서북쪽에 있던 적인(狄人)이 형(邢; 开:阝)마을을 친입 하여 이를 도우려고 제환공이 기원전 661년에 올라 갔다는 기록이 춘추좌전 민공원년 (春秋左傳 閔公元年)에 있다[4]. 유목민 오환족이 하북평원 북쪽에 넓리 퍼저 살아 형(邢, 音耿) 이란 이름이 여러 곳에 나타났다.
세본과 옥편에는 백익작전(伯益作井)이라 했다. 춘추좌전에는 이를 은패 하여
우물을 판 사람을 형백(井伯,卽郉伯),즉 백익 이라고 했다[5]. 진(秦)이 빼았은 땅 (郉,Frontier town)은 백익(伯益)의 후손들이 살던 마을이란 뜻이 분명 하다. 중국 고전에는 단군왕검 (백익伯益)을 황제로 기록 했다. 공조 (孔晁)가 주를 달았다는 급총주서에는 단군조선의 후손이 중원을 석권 했다는 사실을 숨겨,황제(黃帝)가 우물을 팠다고 바꾸었다. 전국시대에는 단군조선의 후손들이 살던 마을을 진나라가 빼았아 자기 것 (秦開)으로 만들 었다. 사기 태사공자서, 논형 서해 (論衡 書解), 염철론(鹽鐵論) 등에는 그 뜻을 밝혀 “진개제업秦開帝業”이라고 했다[6]. 진나라가 개척(秦開) 했다는 사마천의 문구를 어느누가 연나라 장수 진개 (燕有賢將)라고 바꾸었다.
진시황 시절 말기의 혼란기에 중원의 북쪽 지역에 살던 많은 사람들이 남만주로 올라 왔다. 이러한 경향에 동조하여 진수는 한 발짝 더 나가 < 사마천이 동서로 천리의 땅이라한 문구를, 발해만 서쪽 해안을 따라 2,000리(取地二千餘里)라 하여 진나라 장성이 요양에 이르 렀다. 그 당시 조선에는 비가 왕(朝鮮王否立)이 었느데, 지시황이 공격해 올까 우려은 했지만 조공은 바치지 않았다>고 했다[7].
맥전과 한전에는 모두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고 진승이 나을 이르키니 연 제 조 (燕、齊、趙民) 사람들이 점차로 만주로 올라와 조선과 연이 패수를 겨경계로 했다.
그 통에 (장성 남쪽에 내려 갔던) 위만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왕이 되었다[8].
삼국사기 신라 본기와 삼국유사에 나오는 여러 글자와 이름들이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근거 했다. 앞서 이서국, 회소곡(會蘇曲) 신라의 감와 악기를 설명 했다. 고조선 사람들을 비하 했던 돼지란 글자가 있는 탁수(涿水) 탁록(涿鹿之野) 지역에 살던 사람들이 신라의 초기 국가를 이루었다고 했다[9].
만리장성의 끝은 오늘의 산해관이 였다. 산해관을 가로지르는 대석하(大石河)가 패수 (浿水), 패수가 바다로 드러가는 일대에서 연태자 단(燕太子 旦)이 죽었다. 이를 모두 요하 동쪽으로 바꾸어 연수(衍水)를 요양(遼陽)을 지나는 패수(沛水)에 접 붙여(graft) 태자하(太子河)라고 한다.
끝.
October 23, 2018
[1].幵:《說文》曰:平也,兩干對舉又羌名今作开同. 又曰「孔子年十九,而娶於宋之幵官氏」
[2]. 春秋公羊傳: 城楚丘。孰城之?城衛也。曷為不言城衛?滅也。孰滅之?蓋狄滅之。曷為不言狄滅之?為桓公諱也
[3]. 《史記·殷本紀》祖乙遷于郉。《註》郉,音耿。今河東皮氏有耿鄕。《括地志》絳州龍門縣東南十二里耿城,
故耿國也。本作郉。經史通作邢
[4].春秋左傳 閔公元年:狄人伐邢,管敬仲言於齊侯曰,戎狄豺狼,不可厭也,諸夏親暱,請救邢以從簡書,齊人救邢。
[5].康熙字典: 井: 穴地出水曰井。《世本》伯益作井。《汲冡周書》黃帝作井。《孟子》方里而井,井九百畝。
又市井.《玉篇》穿地取水,伯益造之,因井爲市也。《師古曰》市,交易之處,故名. 《左傳》有井伯,卽郉伯。
[6]. 史記 太史公自序: 為秦開地益眾,北靡匈奴,據河為塞,因山為固,建榆中。作蒙恬列傳第二十八
論衡 書解: 管仲相桓公,致於九合:商鞅相孝公,為秦開帝業,然而二子之書,篇章數十. 鹽鐵論 非鞅: 崇利而簡義,高力而尚功,非不廣壤進地也,然猶人之病水,益水而疾深,知其為秦開帝業,不知其為秦致亡道也
[7].三國志 韓傳:魏略曰:使禮西說燕,燕止之,不攻。後子孫稍驕虐,燕乃遣將秦開攻其西方,取地二千餘里,至滿潘汗為界,朝鮮遂弱.及秦并天下,使蒙恬築長城,到遼東。時朝鮮王否立,畏秦襲之,略服屬秦,不肯朝會。否死,其子準立。二十餘年而陳、項起,天下亂,燕、齊、趙民愁苦,稍稍亡往準,準乃置之於西方。及漢以盧綰為燕王,朝鮮與燕界於浿水
[8].三國志 魏書三十 濊傳:陳勝等起,天下叛秦,燕、齊、趙民避地朝鮮數萬口。燕人衞滿,魋結夷服,復來王之。
[9]. 三國遺事: 辰韓耆老自言。秦之亡人來適韓國.辰韓本燕人避之者。故取涿水之名。稱所居之邑里。雲沙涿。漸涿等
공자님이 19세에 송나라의 견궁씨(幵官氏)를 부인으로 맞아 들였다[1]. 평평 할 견(幵)자는 <오랑캐 이름,산 이름>이란 뜻이 있고, 개(开, 開)자와 같은 뜻이다. 사위 공야장(公冶萇, 公冶長)은 오환족이였다. 춘추전국시대에는 하북평원 전역이 기마민족의 활동 무대 였다는 뜻이 공자가어에 숨어 있다.
땅을 빼았긴 사람들의 선조가 강족(羌,幵)이다. 춘추시대 초기에는 오환족이 살던 마을과 제 환공(齊 桓公,재위: 기원전 685년 ~ 기원전 643년)이 살던 사이에 제후국 연(燕)이 있었다[2]. 이 때는 이미 주왕실이 서쪽에서 원주민에게 쫒겨 제후국 연(燕)과 같이 함곡관을 나와 하남성에 정착 했다.
좌씨춘추의 원본이 되는 국어(國語)에는 연나라 역사란 뜻의 연어(燕語)는 물론 진어(晉語)란 글자가 없다. 연(燕)자는 하북성 남쪽에 멀리 떠러져 있었다. 제후국 연자는;<주어, 제어, 정어> 에만 나온다. 당시 제환공의 수도는 하남성 업(鄴) 즉 하북성 남쪽 한단(邯鄲)에 있었다. 그로 부터 자그만 연(燕) 나라 땅을 지나 산서성 태원시에서 하북성 석가장시 (石家庄市) 일대에 이르는 지역에 있었던 산융을 치러 올라 갔다. 그러니 작았던 연(燕)나라는 마땅히 하북성 서남쪽에 있었어야 한다. 이를 한서 지리지에 동군 22현(東郡, 縣二十二) 중에 있던 남연현(南燕縣)이 하남성 (河南省濮陽市) 에 있었다. 공자님이 잠깐 기거하였(仲尼燕居)다고 했다.
만리장성은 남만주에 이를 수가 없었다.
사기 은본기에 조을(祖乙)이 형으로 천도 했다(祖乙遷于邢)는 곳을 전국시대에 진(秦)이 빼았었다는 사실을 몽활열전을 편술 했다고 밝혔다[3]. 마을 이름 형(邢; 开:阝)자는 열을 개(开, 開)와 마을(邑, 陵阜)이란 상형자를 겹해서 만든 글자로, 새로 생긴 마을(frontier town)이란 뜻이다. 개(开)자는 상형자 방패간(干)자 두개를 겹친 글자(兩干)로 동호(東胡, 胡)로 알려진 강족(幵,羌名)을 뜻한다. 형(邢) 마을의 원주민은 북적 강족(羌) 이였다. 이지역이 오환족 (烏桓/丸)의 본향이다. 서북쪽에 있던 적인(狄人)이 형(邢; 开:阝)마을을 친입 하여 이를 도우려고 제환공이 기원전 661년에 올라 갔다는 기록이 춘추좌전 민공원년 (春秋左傳 閔公元年)에 있다[4]. 유목민 오환족이 하북평원 북쪽에 넓리 퍼저 살아 형(邢, 音耿) 이란 이름이 여러 곳에 나타났다.
세본과 옥편에는 백익작전(伯益作井)이라 했다. 춘추좌전에는 이를 은패 하여
우물을 판 사람을 형백(井伯,卽郉伯),즉 백익 이라고 했다[5]. 진(秦)이 빼았은 땅 (郉,Frontier town)은 백익(伯益)의 후손들이 살던 마을이란 뜻이 분명 하다. 중국 고전에는 단군왕검 (백익伯益)을 황제로 기록 했다. 공조 (孔晁)가 주를 달았다는 급총주서에는 단군조선의 후손이 중원을 석권 했다는 사실을 숨겨,황제(黃帝)가 우물을 팠다고 바꾸었다. 전국시대에는 단군조선의 후손들이 살던 마을을 진나라가 빼았아 자기 것 (秦開)으로 만들 었다. 사기 태사공자서, 논형 서해 (論衡 書解), 염철론(鹽鐵論) 등에는 그 뜻을 밝혀 “진개제업秦開帝業”이라고 했다[6]. 진나라가 개척(秦開) 했다는 사마천의 문구를 어느누가 연나라 장수 진개 (燕有賢將)라고 바꾸었다.
진시황 시절 말기의 혼란기에 중원의 북쪽 지역에 살던 많은 사람들이 남만주로 올라 왔다. 이러한 경향에 동조하여 진수는 한 발짝 더 나가 < 사마천이 동서로 천리의 땅이라한 문구를, 발해만 서쪽 해안을 따라 2,000리(取地二千餘里)라 하여 진나라 장성이 요양에 이르 렀다. 그 당시 조선에는 비가 왕(朝鮮王否立)이 었느데, 지시황이 공격해 올까 우려은 했지만 조공은 바치지 않았다>고 했다[7].
맥전과 한전에는 모두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고 진승이 나을 이르키니 연 제 조 (燕、齊、趙民) 사람들이 점차로 만주로 올라와 조선과 연이 패수를 겨경계로 했다.
그 통에 (장성 남쪽에 내려 갔던) 위만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왕이 되었다[8].
삼국사기 신라 본기와 삼국유사에 나오는 여러 글자와 이름들이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근거 했다. 앞서 이서국, 회소곡(會蘇曲) 신라의 감와 악기를 설명 했다. 고조선 사람들을 비하 했던 돼지란 글자가 있는 탁수(涿水) 탁록(涿鹿之野) 지역에 살던 사람들이 신라의 초기 국가를 이루었다고 했다[9].
만리장성의 끝은 오늘의 산해관이 였다. 산해관을 가로지르는 대석하(大石河)가 패수 (浿水), 패수가 바다로 드러가는 일대에서 연태자 단(燕太子 旦)이 죽었다. 이를 모두 요하 동쪽으로 바꾸어 연수(衍水)를 요양(遼陽)을 지나는 패수(沛水)에 접 붙여(graft) 태자하(太子河)라고 한다.
끝.
October 23, 2018
[1].幵:《說文》曰:平也,兩干對舉又羌名今作开同. 又曰「孔子年十九,而娶於宋之幵官氏」
[2]. 春秋公羊傳: 城楚丘。孰城之?城衛也。曷為不言城衛?滅也。孰滅之?蓋狄滅之。曷為不言狄滅之?為桓公諱也
[3]. 《史記·殷本紀》祖乙遷于郉。《註》郉,音耿。今河東皮氏有耿鄕。《括地志》絳州龍門縣東南十二里耿城,
故耿國也。本作郉。經史通作邢
[4].春秋左傳 閔公元年:狄人伐邢,管敬仲言於齊侯曰,戎狄豺狼,不可厭也,諸夏親暱,請救邢以從簡書,齊人救邢。
[5].康熙字典: 井: 穴地出水曰井。《世本》伯益作井。《汲冡周書》黃帝作井。《孟子》方里而井,井九百畝。
又市井.《玉篇》穿地取水,伯益造之,因井爲市也。《師古曰》市,交易之處,故名. 《左傳》有井伯,卽郉伯。
[6]. 史記 太史公自序: 為秦開地益眾,北靡匈奴,據河為塞,因山為固,建榆中。作蒙恬列傳第二十八
論衡 書解: 管仲相桓公,致於九合:商鞅相孝公,為秦開帝業,然而二子之書,篇章數十. 鹽鐵論 非鞅: 崇利而簡義,高力而尚功,非不廣壤進地也,然猶人之病水,益水而疾深,知其為秦開帝業,不知其為秦致亡道也
[7].三國志 韓傳:魏略曰:使禮西說燕,燕止之,不攻。後子孫稍驕虐,燕乃遣將秦開攻其西方,取地二千餘里,至滿潘汗為界,朝鮮遂弱.及秦并天下,使蒙恬築長城,到遼東。時朝鮮王否立,畏秦襲之,略服屬秦,不肯朝會。否死,其子準立。二十餘年而陳、項起,天下亂,燕、齊、趙民愁苦,稍稍亡往準,準乃置之於西方。及漢以盧綰為燕王,朝鮮與燕界於浿水
[8].三國志 魏書三十 濊傳:陳勝等起,天下叛秦,燕、齊、趙民避地朝鮮數萬口。燕人衞滿,魋結夷服,復來王之。
[9]. 三國遺事: 辰韓耆老自言。秦之亡人來適韓國.辰韓本燕人避之者。故取涿水之名。稱所居之邑里。雲沙涿。漸涿等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