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사치 (廉斯鑡) 사건과 오림이낭랑(吳林以樂浪):
진수가 혼미하게 남긴 남맘주 해안에서 발생한 두 사건이다.
염사치 (廉斯鑡) 사건에 관해서는 논란이 계속 되고 있다. 그 핵심적 문제가 염사치의 고향이다. 이를 중국 기록에는 시대와 장소가 다르게 기록 했다. 사건의 발생지역이 “韓, 辰韓, 辰國, 弁韓, 馬韓”으로 나타난다. 일차 사료가 되는 삼국지에는 한전 (韓傳)에 통전에는 변진던에 올렸다. 염사치의 고향을 위만에게 쫒겨난 준이 한의 땅에 가서 왕이 되었던 곳이라 하고, 발생시대는 왕망지황(王莽地皇:기원전 45년 ~ 기원후 23년) 전후한 혼란기, 그가 가서 살고 싶다는 곳을 한낭랑(漢樂浪)이라 했다 . 통전에는 오림이낭랑 사건을 삼국지 변진전 (弁辰傳) 지역으로 풀이 했다 . 왕망이 대동강 연안에 한 나라의 통치영역 낭랑군을 설치 했다는 잘못된 학설의 뿌리가 염사치 사건과 직결 된다. 이 사건과 오림이 사건의 발생 시대와 장소가 통전에서 밝혀 젔다. 쫒겨 바다로 들어 가서 처음 처음 정작 했던 곳이 요동 반도 서남 해안이고, 마지막에 한의 왕이 되었다는 곳이 대동강 하구 였다. 같은 경로를 온조왕이 지나 갔다. 이렇게 요동만을 돌아 한반도와 발해만 서남쪽 천진항에 이르는 해상로를 부여의 후손, 백제가 관장 했었다.
마한왕 (馬韓王)이 275-280년 사이(晉武帝咸寧中)에 조위 황실을 찾았다. 오림이 사건은 후한 말기(景初中:237-239에 발생 했었다 . 그에게 오림이 사건을 문의 했더니 모르는 일이라 했다. 마한(馬韓, 牟韓)은 이름을 여러 글자로 기록 했다. 마한이라고 부르던 지역이 한해(翰海)의 세 해안 (海沿岸)에 분포되여 마한왕 (馬韓王)이 어느 지역에서 왔는 가를 알수 없었다. 염사치 (廉斯鑡)가 살던 곳에서는 사신을 낙랑군에 보내 철 마다 조알(朝謁)했다. 이는 그 지역의 최고 통치자, 마한왕 (馬韓王)을 찾아가서 예를 배풀었다는 뜻이다. 이 곳에 미추홀 (彌鄒忽)이 있었다. 예군남여 (濊君南閭)가 280만명을 대리고 왔다는 창해군 지역이다. 수서에는 백제의 맥국 (貊國), 양사도는 숙신(肅愼)씨의 향이라 했다. 서진 초대 황제 사마염 (晉 世祖 武帝 司馬炎, 236년 ~ 290년) 집권기에 급총국간이 발굴 되었고, 그를 방문 했던 숙신(肅慎)씨를 마한왕이라 했다 . 진수가 한창 일하던 46세 였다. 이러한 사실을 혼미하게 기술 했다.
평양 일대의 낙랑 유적지는 온조왕이 현 대동강인 한강 서북쪽에 성을 쌓고 (築城漢江西北)요동반도에 새웠던 첫 수도의 주민을 옮겼던 반도(半島) 백제의 두번쩨 수도 한성(漢城)이다. 이 곳이 우거왕이 도망 와서 자리잡은 곳이고 또한 염사치 사건(廉斯鑡)의 고향이다. 한반도에 있던 온조백제의 수도 한성(漢城)과 비류가 대방고지 (천진일대)에 새운 대륙백제의 수도 두 곳에 활발한 교류가 있었다. 그 유물들이 대동강 연안에서 발굴된 소위 낙랑 유적이다.
끝 March 26th. 2020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