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에 나타난 염사치 사건:
이 사건은 남만주에 있던 삼한 땅에서 나타났다[.한(汗·干·翰·韓·馯·邯) 강희자전:瀚:《廣韻》《集韻》《韻會》《正韻》𠀤侯旰切,音翰。北海名。《史記》作翰海。
《霍驃騎傳》登臨翰海。《集韻》亦作澣. “如淳曰:「翰海, 北海名也.” Sea of the Han.
三國志 倭人傳:倭人在帶方東南大海之中,依山島為國邑。舊百餘國,漢時有朝見者,今使譯所通三十國。從郡至倭,
循海岸水行,歷韓國,乍南乍東,到其北岸狗邪韓國,七千餘里,始度一海,千餘里至對海國。其大官曰卑狗,副曰卑奴母離。所居絕島,方可四百餘里,土地山險,多深林,道路如禽鹿徑。有千餘戶,無良田,食海物自活,乖船南北巿糴。又南渡一海千餘里,名曰瀚海,至一大國,官亦曰卑狗,副曰卑奴母離。 ]. 시대적으로 전후한 전환기 지황시(王莽地皇時: 20-23년)에서, 건무20년(建武二十年:서기 44년)사이다. 한무제 친입이후 고조선 사람들이 흐터졌다가 다시 작은 군소국가를 형성하였다. 이들이 좀더 큰 부족국가로 성장해가는 삼국의 탄생 초기다. 삼한의 후예들이 연합하여 중원 세력에 반기를 들고 일어나 싸우던 시대다. 삼국사기에서 찾아 보았다.
고구려: 고구려 대무신왕 (大武神王, 18년-44년)과 민중왕 (閔中王;44년-48년)집권 시대다. 그 때에 중원에서는 왕망(王莽)이 신(新, 8년~23년)나라의 황제가 되였다 가 전한의 후손인 광무황제 유수(東漢 世祖 光武皇帝 劉秀, 25년 -57년)에게 쫓겨 났다. 지황 시절에 발생했던 사건을 광무제때에 조작 했다는 근거가 삼국사기 고구려 편에 보인다.
대무신왕 집권5년(서기 22년)에는 갈사부여를 통합하여 국토를 확장 해 나갔다. 제위 9년에는 개마국(蓋馬國)을 정벌 했다. 개마(蓋馬)는 사음자로 개모(蓋牟) 라고도 기록 했다. 천제(天帝)의 아들 북부여의 시조인 해모수(解慕漱)의 해모와 같은 소가 우는 소리, 馬/牟;móu mù mào”라고 기록 되여 오던 기마유목민족이다. 소우는 소리를 사음한 여러 글자 로 기록 하던 부족의 지도자를 모한(馬/牟/慕韓)이라고 했다. 요사에 따르면 고구려 개모성 (蓋牟城)이 요양 남쪽에 있었다. 발해(渤海)시대에는 그곳을 해/개주(蓋州)라 했고 거란은 진주(辰州)라 불렀다. 그 곳이 진한(辰韓)이란 이름을 얻었다고 했다[.遼史 地理志二 東京道: 辰州,奉國軍,節度。本高麗蓋牟城。唐太宗會李世勑攻破蓋牟城,即此。渤海改為蓋州,
又改辰州,以辰韓得名。井邑駢列,最為沖會。遼徙其民於祖州。初曰長平軍。戶二千
]. 이름을 보면, 옛 우거왕의 수도에 차려 놓았던 현토군 서개마(西蓋馬)에 살던 사람들과 같은 부족이 요하 동쪽에 새운 나라란 뜻이다. 왕자 호동이 옥저땅에 사냥을 나갔다가 최리왕을 만났다. 최리(崔理)의 낙랑국은 고구려와 부여 (扶餘), 동옥저, 개마국, 갈사부여와 같이 고구려의 수도에서 멀지 않은 요동 반도에 있었다는 증거다.
집정 초기가 되는 서기 20-25년간에는 첫 도음지 가까이에 있던 부여와 비류수 일대에서 고된 전쟁을 했다. 부여를 흡수한 서기25년에 후한 광무제가 등극했다. 영토확장에서 후한의 광무제와 부디첬다. 한나라는 28년에 천진-당산일대를 관장 하던 요동 태수를 시켜 고구려를 침략(漢遼東太守將兵來伐)했다. 위내암성 (尉那巖城)에서 몇달 동안 항전하다 서로 타협하여 한나라 군사는 되돌아 갔다. 그 곳이 고구려에서 서쪽 세력을 막기위하여 분수령을 너머 압록강 수계에 준비했던 수비 목적의 산성이다. 통화군 국내성 일대다.
호동왕자가 32년 봄에 남쪽 옥저땅에 사냥을 갔다 낙랑국최리왕을 만나 낙랑공주를 소개 받았다. 그해 12월에 한무제에게 조공을 바치고 왕호를 쓰도록 허락을 받았다. 그해가 후한 건무 8년(是立武八年也)이다. 낙랑공주의 도움으로 37년에는 고구려 남쪽 요동반도에 있던 최리의 낙랑국을 정벌했다. 낙랑국을 흡수 한지7년 후에는 출처를 찾아 볼수 없는 사건을 기록 했다:
살수(薩水)란 이름은 수서에 처음 나온다. 수양제가 보냈던 수나라 군사가 때죽엄을 당한 곳으로 비류수 (沸流水)와 동서 요하의 두 물줄기가 심양 일대에서 만나 서남으로 흘러 발해만에 이르는 늡지대다.
현행 삼국사기의 원문을 Google에서 찾아 보면 중국에서 올린 내용에는 삭제 또는 묵칠을 한 글자 가 많이 보인다. 한국에서 올린 원문에 없는 북(北)자가 중국에서 올린 삼국사기 원문에는;“살수 남북이 한에 속했다 薩水已南北屬漢”고 했다. 살수(薩水)가 요양 동남 쪽에 있던 늪지대라고 풀이 했다. 뚜렸한 6근거가 고구려 대 태조대왕 (太祖大王, 재위 53년 ~ 146년)이 56년 가을에 동옥저(東沃沮)를 처서 그 땅을 빼았아 남쪽으로 살수(南至薩水)에 이르는 성을 쌓았다[.三國史記 -> 高句麗本紀第三: 大祖大王 四年,秋士七月,伐東沃沮,取其土地為城邑,拓境東至滄海,南至薩水]. 동옥저는 요동 반도에 있었다. 후한 광무제 낙랑 살수 운운 하는 지역은 요동반도에 있던 낙랑국 영역이 뚜렸하다. 중국문헌에 살수란 이름이 나탄 시대가 뚜렸하다. 삼국사기에 사용된 시대와 장소가 합당치 않다. 한반도 평양이 될수 없다.
뒤를 이은 민중왕(閔中王, : 44년-48년) 4년에 사냥을 났다가 요양 동쪽에 있는 본계수동(本溪水洞: 石窟 )을 찾았다. 그해 10월에는 잠지락부(蠶友落) 지도자 대승(戴升)이 10,000여 집안 (家)식구를 대리고 한 낙랑에 투항 했다. 후한서에도 실렸다[.三國史記 高句麗本紀第二: 閔中王四年,夏四月,王田於閔中原。秋七月,又田,見石窟,顧謂左右曰:「吾死,
必葬於此,不須更作陵墓。」九月,東海人高朱利獻鯨魚目,夜有光。冬十月,蠶友落部蠶支落部大家戴升等萬餘家,
詣樂浪投漢。『後漢書』云:「大加戴升等萬餘口。」
]. 후한서에는 건무 23년에 고구려 대가 대승이 만여인을 대리고 낙랑에 내속 했다. 건무 25년에는 고구려가 “우부평, 어양, 상곡, 태원 일대를 약탈 하니 요동 태수 재침(祭肜)이…”하는 기록이 있다[.後漢書 東夷列傳:建武八年,高句驪遣使朝貢,光武復其王號。二十三年冬,句驪蠶支落大加戴升等萬餘口詣樂浪內屬。二十五年春,句驪寇右北平、漁陽、上谷、太原,而遼東太守祭肜以恩信招之,皆復款塞]. 삼국사기에는 그 당시 고구려군이 북경 일대를 점령하니 요동태수 채융(蔡●)이 은혜와 신의로 고구려 장수를 대하여 화친을 했다[.三國史記 高句麗本紀第二: 二年,春,遣將襲漢北平、漁陽、上谷、太原。而遼東太守蔡●祭●,以恩信待之,
乃復和親。三月,暴風拔樹。夏四月,殞霜雨雹。秋八月,發使賑恤國內饑民 ].
이러한 당시 고구려와 중원의 세력 판도를 고려 하면, 광무제가 낙랑을 점령하고 군현을 유지 했다는 기록은 사료의 가치가 없다. 삼국사기의 기록과 후한서에; 고 하는 기록이 이다[.後漢書 光武帝紀下: 東夷韓國人率眾詣樂浪內附.高句麗率種人詣樂浪內屬.]. 진한이 모한(牟/慕韓)이고 생산품이 모한포(牟韓布)였다.
백제측 기록:
이 시대가 백제 건국 초기다. 온조왕 말기에서 제2대 다루왕(多婁王: 28년~77년) 집권 시기에 해당 한다. 온조왕 14년(기원전 5년)에 요동 반도에 있던 수도를 (마한 땅에 있던) 큰강 서북쪽(築城漢江西北)에 성을 쌍고 옛 적에 남만주에 한성(漢城)에 살던 주민을 나누어 한반도로 옮겼다[.三國史記 溫祚王: 十四年, (+來)遷(+漢山)都。二月,王巡撫部落,務勸農事。秋七月,築城漢江西北,分漢城民. 二十四年,王作熊川柵。馬韓王遣使責讓曰:「王初渡河,無所容足,吾割東北一百里之地,安之.].
세로 수도를 한반도에 옮기고 정착 하기에는 18년의 투쟁이 있었다. 온조왕26년 (기원후 8년) 10월에 사냥을 한다고 나가 마한(馬韓)을 공격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다음해 (온조왕27년, 서기 9년)에 마한(馬韓)의 두 성이 항복 하여, 큰강 서북(築城漢江西北)에 있던 마한(馬韓)을 멸망 시키고 성을 쌓았다. 대동강(大同江) 하류 일대를 마한(馬韓)땅이라 했다. 이곳이 백제가 수도로 정한 한성 (漢城)이다[.三國史記 溫祚王: 二十六年,王曰:「馬韓漸弱,上下離心,其勢不能又久。●為他所幷,則脣亡齒寒,悔不可及。
不如先人而取之,以免後艱。」冬十月,王出師,陽言田獵,潛襲馬韓. 遂幷其國邑. 二十七年,二城降,
移其民於漢山之北,馬韓遂滅。 秋七月,築大豆山城. 二十八年,立元子多婁為太子,委以內外兵事. 三十一年,分國內民戶,為南北部。三十三年,秋八月,加置東西二部
]. 그러니 그 곳에 설치한 성은 마땅히 한성 (韓城) 큰 강은 한강(韓江)이라고 적어야 옳다. 언제 누가 어떤 사연으로 대동강(大同江)이란 이름을 지었는가 궁금하다. 오늘의 서울 중심부를 지나는 한강 (漢江)을 한강 (韓江)이 옳은 한자 표기 해야 옳다고 밝혔다. 대동강(大同江)이란 이름은 한강 (韓江)과 같이 큰 강이란 뜻에서 붙인 이름이라고 본다. 한강과 한성은 요하 동쪽 남만주와 한반도 서해 연안 두곳에 있었다. 기원후 25년(온조왕 43년) 10월에는 남옥저(삼국지의 東沃沮) 사람 구파해 (南沃沮仇頗解)등 20여세대가 귀순해 와서 이들을 한산 서쪽에 살게 했다.
온조왕은 옛적에 준이 도망와서 마한왕이 되 다스리던 대동강 일대 땅을 흡수하여 수도를 정한지 20년 후가 되는 서기 28년에 사망 했다.
다루왕은 온조왕 28년이 되는 서기 10년에 태자로 책봉되여 18년동안 내외병사 업무를 주관(委以內外兵事) 했다. 수도를 대동강 서북 한성에 옮긴 후, 서기33년에는 백제 남쪽 지역에서 벼농사를 시작 했다[.三國史記 溫祚王:二十四年,王作熊川柵。馬韓王遣使責讓曰:「王初渡河,無所容足,吾割東北一百里之地,安之.
二十六年,王曰:「馬韓漸弱,上下離心,其勢不能又久。●為他所幷,則脣亡齒寒,悔不可及。不如先人而取之,以免後艱。」冬十月,王出師,陽言田獵,潛襲馬韓. 二十七年,二城降,移其民於漢山之北,馬韓遂滅。秋七月,築大豆山城
二十八年,立元子多婁為太子,委以內外兵事.三十一年,分國內民戶,為南北部。三十三年,秋八月,加置東西二部溫祚王: 三十七年,夏四月,旱,至六月乃雨。漢水東北部落饑荒,亡入高句麗者一千餘戶,浿、帶之間,空無居人
三十八年,王巡撫,東至走壤,北至浿河,五旬而返。四十一年,右輔乙音卒,拜北部解婁為右輔。解婁,本扶餘人也
二月,發漢水東北諸部落人年十五歲以上,修營慰禮城。四十三年,王田牙山之原五日。九月,鴻●百餘集王宮。冬十月,南沃沮仇頗解等二十餘家,至斧壤納款。王納之,安置漢山之西。三年,冬十月,東部屹于,與靺鞨戰於馬首山西,克之,殺獲甚衆.七年,春二月,右輔解婁卒,年九十歲。以東部屹于為右輔。夏四月,東方有赤氣。秋九月,靺鞨攻陷馬首城,放火.十年,冬十月,右輔屹于為左輔,北部眞會為右輔.十一年,秋,穀不成,禁百姓私釀酒。冬十月,王巡撫東西兩部,貧不能自存者,給穀人二石.二十八年,春夏旱。慮囚,赦死罪。秋八月,靺鞨侵北鄙.북쪽 마을 북비(北鄙)
二十九年,春二月,王命東部,築牛谷城,以備靺鞨].
신라측 기록: 이 시대에 북교 전래-도솔가(兜率歌) 출현:
신라 2대 차차웅(南解次次雄, 재위 4년 ~ 24년) 말기부터, 제3대 유리 이사금(儒理 尼師今,재위: 24년~57년) 시절이다.
남해 차차웅 즉위 원년에는 낙랑 군사가 친입했고, 즉위 11년에는 왜(倭)가 민가를 노략질 했다. 하여 6부의 병사들을 내보내 격퇴하는 사이 낙랑(樂浪) 이 다시 쳐들어 왔다. 유리이사금 시대에도 나라는 여전히 외환 내우로 시달림을 받았다. 신라는 남북 양쪽으로 부토 계속 시달림을 겪어야 했다. 재위 5년 (28년)에 도솔가(兜率歌)를 지어 향가, 즉 국풍(國風)의 시초가 되였고 한다.
도솔(兜率)이란 글자는 한나라 이전 문헌에서는 찾아 볼수 없다. 석가보살이 도솔천궁(兜率天宮)에 있다는 문구가 있다[.釋迦菩薩在兜率天宮. 菩薩最後身之住處也。釋迦如來為菩薩時最後之住處. 西遊記:一會把路差了,不是齊天府,卻是兜率天宮]. 삼국유사에도 도설 (兜率)이란 문구를 그러한 뜻으로 썼다[.三國遺事: “兜率: 真身受供 月明師兜率歌. 即得天眼見兜率天眾來儀之相. 。汝捨此身受大國王身。
後生於兜率。如是語已。兩聖即隱. 王曰。既卜緣僧。雖用鄉歌可也。明乃作兜率歌賦之。].이 시절에 불교가 신라에 전교 되였다는 증거다.
32년에는 회소곡(會蘇曲)이 나타 났다. 필자는May 19, 2017 에 실은 “고조선의 가무(歌舞)-1: 회소곡(會蘇曲)”이회(會;huì kuài guì)자 는 를 뜻하던 그 당시 쓰던 말(言語)의 사음자다 . 되살아날 소(蘇)자는 부활을 뜻한다. 회소곡이란 “유능한 지도자가 다시 나타나 기를 기원 하는 뜻이 담긴 하는 가무곡” 이었다[. 三國史記 儒理尼師今 五年,冬十一月,王巡行國內,見一老●飢凍將死曰.是年,民俗歡康,始製兜率歌。
此,歌樂之始也. 九年春.於是歌舞百戱皆作,謂之嘉俳。是時,負家一女子,起舞嘆曰:
「會蘇,會蘇!」其音哀雅,後人因其聲而作歌,名會蘇曲。
]. 회소곡은 일제 강점기에 흔히 인용하던 “임이여 어서 속히 돌아오서소” 하는 뜻이다. 도솔가(兜率歌)와 같이 당시 신라의 고난을 배경으로 나타난 음율이다.
재위 17년에는 한서 지리지에 나타난 한 낙랑군 현 “화려부내(華麗,不耐/不而) 지역 사람들이 공모하여 처들어 왔다. 맥국 지도자가 이들을 막아 주어 맥국과 절친하게 되였다[. 儒理尼師今 十七年,華麗、不耐二縣人連謀,率騎兵犯北境。貊國渠帥,以兵要曲河西敗之。王喜,與貊國結好.
十三年,秋八月,樂浪犯北邊,攻陷朶山城. 十四年,高句麗王無恤,襲樂浪滅之。其國人五千來投,分居六部]. 북쪽에 있던 낙랑이 또 처들어 왔다. 고구려 대무신왕 (大武神王: 18년-44년)이 32년에 최리왕의 낙랑국을 정벌하니 낙랑의 유민 5000명이 신라로 투항 했다[. 三國史記 儒理尼師今: 十三年樂浪犯北邊,攻陷朶山城.十四年,高句麗王無恤,襲樂浪滅之。其國人五千來投,分居六部]. 신라는 한낙랑(漢樂浪)과 오림이가 낙랑 땅은 옛부터 가한들이 다스리던 나라다 한(吳林以樂浪本統韓國) 요동만 북쪽에 있었다.
염사치 사건 결론:
진수가 위약의 내용을 인용 했다는 염사치에 관한 예기는 후한서, 통전 등여러 곳에도 나타나 있고, 사건 발생 시대, 진한을 마한으로 하는 등 다르게 기록 되여 혼란을 초래하고 있다. 삼국지 한전에는 마한(馬韓)이란 이름이 한반도를 뜻한 문구가 있다[.三國志 魏書三十 韓傳:其男子時時有文身。又有州胡在馬韓之西海中大島上,其人差短小,言語不與韓同,
皆髠頭如鮮卑,但衣韋,好養牛及豬。其衣有上無下,略如裸勢。乘船往來,巿買韓中 ]. 그러나 이 사건은 진한 땅에서 나타났다고 밝혔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편에 실었다. 염사치 또는 소마시라 한 사람이 대승(戴升)이고, 그의 직책 우거수(右渠帥)를 대가 (大加)라고 했다. 나무짜르러 왔다가 잡혔다는 호래는 대륙백제의 수도에서 온 사람들이였다.한서지리지 낙랑군 (樂浪郡)에 있던 여러 현 이름 “浿水, 含資,黏蟬, 帶方,海冥,列口,不而,蠶台,華麗, 夫租”이 염사치의 고향과 그가 도착 했다는 함자현 (含資縣)일대에 있었다. 그 바로 옆에 점선(黏蟬)현이 있다. 수서(隋書)에는 수양제 가 고구려를 친입하려고 출병한 통로 이름에 <좌 12군 출발로를 밝힌 다음, 오른 쪽 제일군은 점선도, 제 2군은 함자도 (右第一軍可黏蟬道,第二軍可含資道)하는 문구가 있다. 삼국사기 영양왕 23년 조에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三國史記 高句麗本紀第八: 左十二軍,出鏤方、長岑、溟海、蓋馬、建安、南蘇、遼東、玄●、扶餘、朝鮮、沃沮、
樂浪等道;右十二軍,出●蟬、含資、渾彌、臨屯、候城、提奚、踏頓、肅愼、碣石、東●、●方帶方.
隋書 卷四帝紀第四 煬帝下:第十一軍可沃沮道,第十二軍可樂浪道,右第一軍可黏蟬道,第二軍可含資道,
第三軍可渾彌道,第四軍可臨屯道,第五軍可候城道,第六軍可提奚道,第七軍可踏頓道,第八軍可肅慎道,第九軍可碣石道,第十軍可東暆道,第十一軍可帶方道,第十二軍可襄平道. ].
삼한(三韓)의 이름자는 왕망세력을 물리치고 후한을 새운 광무제 때에 바꾸었다는 증거가 강희자전에 있다[.“考證:〔又三韓,國名,辰韓,示韓,馬韓也。見《後漢•光武紀》。〕謹按示韓當作弁韓,見後漢書東夷傳,光武紀本文無之。謹將示改爲弁。光武紀改東夷傳.” 韓:《集韻》亦作榦幹《唐韻》《集韻》胡安切.《正韻》河干切,𠀤音寒
]. 어용학자 가규(賈逵, 30년-101년)가 반고와 함께 궁중 도서의 교정과 후한의 역사 정리를 맡았다고 한다. 후한서 가규열전을 보면 그는 옛 경전에 실린 백여 만자 (百餘萬言)를 바꾸어 어마어마한 범죄 행위를 저질렀다[. 後漢書. 賈逵傳:逵數為帝言古文尚書與經傳爾雅詁訓相應. 逵所著經傳義詁及論難百餘萬言,學者宗之, 後世稱為通儒.
論曰:鄭、賈之學,行乎數百年中,遂為諸儒宗,亦徒有以焉爾。賈逵能附會文致,最差貴顯。世主以此論學,悲矣哉]. 하여 논왈 “그 후부터 귀현 세주가 모두 이를 의론하며 공부 하고 있다. 아! 슬프다”하는 문구가 있다.
대동강 유역 낙랑유적지에서 발굴된 낙랑유적에는 고 윤내현 씨는 밝혔다[. 한국古代史 新論. 1986년, 서울 일지사윤내현 저. P 29. 337.]. 흔히 말하는 점제현 신사비란 이름과 비슷하다. 비문 전체를 판독 할수는 없으나, 역사적 사료와 비문의 성격을 고려 하면, 비각이 출토된 대동강 연안의 수장, 또는그의 선조가 발해만 서쪽 대방일대에 있었던 대육백제 서울에서 왔다는 뜻이라고 본다.
치(鑡)자는 한반도 북쪽에서 옛적에 쓰던 로 진수가 만든 글자다[.康熙字典 金部 十五:鑡:《集韻》測角切,音娕。人名。王莽時有廉斯鑡。又《玉篇》鉼鑡也 ]. 염사치 사건은 신나라를 세웠던 왕망 시절(王莽時;新, 8년 ~ 23년)에 나타났다.삼한의 초기에 발해만 서남쪽에서 남만주 해안과 요동 반도를 지나 대동강 하구에 이르는 해상 교류 현상이 나타났다.
끝, 다음에 계속.
June 16, 2017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