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새(玉璽)의 유래:
개요 Abstract
동양 문화권에서는 옛적 부터 도장 (圖章)인(印)을 써 왔다. 특정 영역의 최고 집권자가 쓰던 도장을 국인 國印),국새 (國璽), 또는 옥새(玉璽) 라고 했다. 중원을 다루던 황제의 옥새를 전국 새 (璽), 그 전에는화씨벽 (和氏璧)이라고 했다. 옥새(玉璽) 의 발원지를 동양 고전에서 찾아 보았다.
필자는 여러 차례에 걸쳐 동양에서 아직도 쓰고 있는 [번체자(繁體字) 라고 부르는 상형 글자는 漢字가 아니라 韓字로 기록 함이 옳다]고 했다. 그 확실한 증거를 “삼한 (三韓)땅 청구(靑丘)의 새로운 고찰”에서 밝혔다. 옥새를 뜻한 둥근 옥 벽 (璧) 또한 황제가 청구 땅을 지나면서 자부선인으로 부터 황제 내문을 받았다는 고조선의 마지막 수도 금미달 지역 에서 나타났다.
옥새(玉璽) 란 글자는 후한말기 순열 (荀悅, 148년 ~ 209년)이 편술한 전한기 효무본기에 [사작 황제 옥새(詐作皇帝玉璽) 란 문구]가 실렸다. [1] 어느 누가 속임수로 황제 옥새를 만들었다. 그전에 옥새 가 있었다는뜻이다. 국가의 전권을 상징하는 옥새 (玉璽 Imperial seal)는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 관련 기록에 나타나야한다. 그에 앞서 사기에는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 하는 과정에 한왕이 나라 땅을 바친다는 증거로 옥새(韓王納地效璽)를 바쳤다. 시황본기에 옥새 (玉璽, 國璽)란 이름이 나타났다. 시황 말기에 옥새와 같이 칙명을 확인 하는 증거로 쓰이던 물에 빠졌던 둥근 옥 벽(沈璧 )을 찾았다. [2]
한무제 당시 살았던 사마천이 남긴 사기에는 한무제를 뜻한 효무본기에 벽문(璧門)이란 글자가 있다. 그러나 옥새를 사용 했다는 기록은 없다. [3] 이렇게 글자와 뜻을 이리저리 돌려 그 근원을 찾기가 쉽지 않다. 이를 간략히 설명한다.
글자 풀이
1 집권자의 도장(圖章) 인 (印)을 새(璽)라 했다:
강희자전에 새 자는 주문 사씨 절(璽Xi saai2 siɛ̌:籀文,斯氏切)이 라고 했다. 음과 뜻을 보면서주 초기 새장에 구금된 원주민의 지도자란 뜻으로 번후(樊侯)로 기록 된 태사주 (太史籀)가만든 글자다. 그를 중산보 (仲山甫)라 했다. 글자와 어음에 의문이 간다. 그가 집권자를 위해 만든 도장(圖章)에는 어떤 형태의 그림이 있었다. 원주민이었던 태사 주가 만든 옥새에는 예맥 족 (濊貊.斯;意在斯焉)과 관계가 있는 그림이었다고 본다. 설문에는 왕자인(王者印), 옥편에는 천자제후인 (天子諸侯印)라고 했다. 집군자의 도장(圖章) 음가를 새(璽, 壐; bird)라고 했다.
석명 석서계 (釋名釋書契)에 이르기를 “새(璽)는, 옮겨 다닌다. 받들다 라는 뜻으로, 윗 사람으로 부터 권위를 받은 징표다. 아무나 만들 수는 없다”고 했다. [4] 운회(韻會)에는 신임(信也)의 증표라 했다. 옥서를 보서(璽書爲寶書)로 바꾸어 전국새를 승천대보(承天大寶)라 했다. 서주 시절 태사주 (太史籀)가 만든 옥새(璽)에는 새(bird)를 그려 넣었다. 그를 진시황 때 부터 지존 (至尊)의 징표로 쓰였다.
동양 고전에 나타나는 풀을 석(釋)자는 원시 불교가 중원에 알려진 전국시대 이후에 사용 되기 시작 했다. 석명(釋名)이란 불가에서 붙인 이름이란 뜻이다.
2 도장(圖章 印稱璽)을 처음 사용한 시기와 장소:
강희자전 새 (璽) 자 설명에 비공지 (卑共之), 태사주, 서계 (書契)하는 글자 가 있다. 그 속에 시대와 장소가 숨어 있다. 글자 꼴을 보면 구슬 옥 변에 또는 흙 토 변에 너라는 글자를 새겼다.
새(璽)라고 읽는 글자는 옥을 든 너(爾)라는 뜻이고, 새(壐; 爾:土)자는 너의 영토란 뜻이 있다. 당시 귀중한 옥돌로 도장을 만들었다. 두루미 미(彌 자는 큰 활을 지닌 너”라는 뜻이다. 이를 단군왕검 백익 (彌:益也, 長也,久也. 弛弓也, 徧也, 終也)의 후손이 이어온 (즉 단군이란 직책) 끝이라 했다. 고조선의 마지막 단군과 관계가 있다. [5] 지금도 쓰고 있는 도장(圖章) 이란 이름은 고조선 영역을 다스리던 천자의 징표를 뜻한글자 옥새(玉璽)가 원조다.
새(璽)자를 흑토 변에 새(壐)라고도 사용 했듯이, 바람 막이 벽(壁) 자에 흙 토를 구슬옥으로 바꾸어 권력의 상징으로 도장 (圖章)을 만들었다. 바람벽 (壁)에 그려 놓았던 핵심 문양이 벽 (璧)과 새 (璽)의 기원이 되었다고 본다. 같은 뜻을 지닌 보물에 여러 형용사를 붙여 사서에 실렸다. [6] 사마천이 무제 본기에 옥당 벽문대조지속(玉堂、璧門、大鳥之屬)이란 문구가 있다. 벽에 만들어 놓은 문을 통해 큰 새가 들어 오도록 만든 문이란 뜻이다. 장수 안녕을 상징하는 신선도에 실린 문양이 옥새에 새겨 있었다.
마왕 퇴 노자 덕경(馬王堆 老子甲德經)에 수유공지벽(雖有共之璧)이란 글자가 있다. 독단과 태평 어람에나오는 고자존비공지 (古者尊𤰞共之)하는 문구와 같은 뜻이다. 옛적 사람들이 비공(𤰞共) 을 높히받들었다. 공지(共之)란 분수 연안에 공동채를 이루고 치수사업을 시작 했던 공공씨의 후손 이란 뜻이다. 문헌에 공공씨지자 구룡 (共工氏之子句龍)이란 문구가 있다. 그 주류가 고구려의 어원이다. 그 시절 그곳 에서옥새 (印稱璽) 가 처음으로 사용 되었다. 도장 인 (圖章 印)의 출원 지다. 그림을 그려 지도자가 인준 했다는증거로 사용했었다. 치수 사업을 하던 지역에 있던 열산 (烈山氏)을 개려산 (蓋厲山氏)이라 했다. [7] 순인금이 백익을 시켜 산림을 불태워 농지로 개발 했다는 곳이다. 이곳 려산 (驪山)에 살던 사람들 려융 (驪戎)이여러 부락을 이루고 살아 구려 (九黎)라 했다. 구려지군 (九黎之君) 치우가 황제와 마지막 전쟁을 탁록에서싸웠다.[8] 탁록 (涿鹿) 이란 글자는 “족쇄를 찬 돼지와 사슴”이란 뜻으로 호타하 연안 금미달 지역에 살던고구려와 부여족을 비하한 글자다. 그 곳에 황제의 조당을 세웠다.
간략 하면;옥새(璽)의 출원지는 고조선 영역, 산서성 분수 연안 공공(共工; commune)의 지역으로 고조선 발생지 “意在斯焉古朝鮮 立都阿斯達” 를 뜻한 곳이다. 이방인 서주 세력이 사 또는 시(斯)로 기록된 원주민을 노예(隸)로 사용하여 만든 글자 체를 예서(隸書)라 했다. 고조선 사람들이 구전해 오던 선조들의 예기(濊記; story telling)를 기록으로 남겼다.
춘추 시대 진(秦)나라의 재상 백리 해 (百里奚; 기원전726년-621년)가 있다. 북송 시인 황정견(黃庭堅, 1045년~1105년) 이 백리해의 무덤을 지나면서 (過百里奚大夫冢) 읊은 시문에 “大夫身霸秦。虞侯纳垂棘” 란 문구가 있다. 백리 해가 진나라 대부 였던 때에 수극지벽 (垂棘之璧) 을 얻었다. 필자가 발조선 시대(發朝鮮/春秋時代) 라고 이름 붙인 시절 이후, 진-한(秦 漢) 시대 부터 지존의 상징으로 쓰이었다. 고조선의 첫수도 부터 마지막 수도 까지의 역사가 수극지벽 (垂棘之璧) 즉 옥새(璽)에 남아 있다.
문헌에 실린 옥새
왕검조선 발생지에 들어와 중화문명의 기초를 닦은 주예(周禮) 에 옥으로 여섯 종류의 예물(六瑞)을 만들어 임명장으로 썼다. 벽(璧)은 규(圭) 보다 하층 남작(子男爵)위에 주어 졌다. 시경에 규벽기졸 (圭璧既卒)이란 문구가 있다. 주왕실의 혈통을 이어 받은 고위직에서 원주민 말단 지도자 까지 모두 복종 했다는 뜻이다.[9] 태평광기에는 습유록(拾遺錄)내용을 인용 하여 주 무왕이 높은 나무위에 지어 놓은 새집에서 빨간색 옥새(赤玉璽)를 얻었다 하고 이런 행운을 오행의 목덕(木德)이라고 풀이 했다. [10]
동주 전국시대 초기에 만들어진 주예(周禮)에 실린 내용을 보면, 임명장으로 쓰던 륙서(六瑞)를 륙기(六器) 또는 륙패(六幣)로 바꾸어 제물이란 명목으로 상납하는 “매관 매직”의 풍조가 나타났다.
한무제 사후에 편술된 염철론에는 옥 같은 귀중 품으로 만든 반지 귀거리 비녀가 보편화 되어 결혼 지참금(dowry,다와 이)의 징표로 사용되었다. [11]
동서고금을 통해 최고 귀중품을 소유하려고 치열한 경쟁이 있었다. 통치권 을 상징하는 귀중한 옥돌로 만든 국새(國璽)에는 무수한 사연이 있다.
말단 작위에 쓰였다는 벽 (周之璧翣)이 예기(禮記)에는 유우씨 (有虞氏) 하후 (夏后) 상 은 시대의 보물과같이 명당위 (明堂位)에 보관 되었다.
혼란기에 도참설이 흥행 했다. 참위서(讖緯書)로 취급 받는 춘추잠담파 (春秋潛潭巴)에 천자유 삼보(天子有三寶)란 문구가 있다. 천자란 칭호는 단군(壇君)신화에서 유래된 글자다. 북쪽 (홍산문화권)에서 분수 연안을 따라 내려온 역사적 사실을 [하늘에서 내려 왔다고 잘못 풀이한] 결과다.
고조선의 지도자는 보물 셋을 지니고 있었다는 뜻이다. 삼보(三寶)의 설명이 구구 하지만 유가에서는 제기벽 규 “祭器(簋,彜), 玉璽(璧), 珪”는 포함 되었다. 도가와 불가에서도 고조선의 지도자, 단군은 보물 셋을지니고 있었다는 뜻이다. 삼보란 글자를 차용해서 다양한 용도로 사용했다. [12]
4 삼보(三寶)의 하나인 화씨벽 (和氏璧)을 수극지벽 (垂棘之璧)이라 했다.
같은 물품을 이름을 바꾸었다. 하나는 사람이란 뜻의 씨 (氏)자가 있다. 성(姓) 은 모계, 씨(氏)는 부계를뜻한다. 수극(垂棘)이란 고조선 땅 산서성에 있던 진(晉 㬜)의 지역 이름이라고 한다.
화씨벽(和氏璧)의 기원: 화는 남자 였다. 원시 모계 사회가 사라진 이후 남자가 주도권을 잡고 있던 시대에화씨벽(和氏璧)이 나타났다. 일설에는 주 선왕의 아버지가 잡혀가고 북쪽에서 공공국의 지도자 화 (垂共工和)내려와 다스렸던 시절, 즉 고조선 변한(弁韓)의 화씨(卞和氏)가 사용 했다고 한다. [13]
제후국 진의 별명을 성(省)란 뜻에 간략 해서 “省作, 俗作, 隸作. 今變隸作” 이라 했다. 변할 변,또는 바를 변 이라고 읽는 변예(變隸) 란 글자는, 변한(弁韓)지역 사람들을 뜻했다. 공자(孔子,기원전 551년 ~ 기원전 479년) 의 제자 증자( 曾子 曾参) 가 안자(晏子 晏嬰, ? ~ 기원전 500년) 를 보내면거 나눈 대화에 화씨벽 정리지곤(和氏之璧, 井里之困)이란 문구가 있다. 화씨벽을 만든 자료의 원산지가우물 마을(井里) 이란 뜻이고, 시대는 공자의 연장자인 안자 앵 (晏嬰)이 살았던 시절이다. [14]
한비자 화씨편에 따르면 서주 시대에 화씨벽이 나타났다. 이를 Wiki에서 인용 했다. [15] 그가 인용한 화씨(和氏)는 한(韓)씨의 선조, 상서 우서(虞書)에 나오는 화(和), 즉 동이의 시조를 뜻했다. [16] 여씨춘추에옛 글자 화씨지벽 (龢氏之璧)을 뜻했다. 옛 글자 “보화 (寶龢)는 종 이름(鍾名)이고, 화환 (龢驩)은 신령(靈)한 능묘(陵墓: 臺tower, stage), 또는 전명(殿名) 이라” 했다.[17] 불가 에서는 보화(寶龢)를 보화( 寶華)로바꾸어 쓰고 있다. [18] 중원의 지도자들이 애용 하는 중화(中華)의 빛날 화 (華)자는 령수보화(靈壽寶華)의 략자다. [19]
순자에는 백리해(百里奚) 와 괵(虢)하는 글자가 없다. 정백 백리해 (郉伯 井伯 百里奚; 726年—前621年)를 간략히 정리(井里)라 했다. 그가 연 나라에 인접한 지역(虢,燕境)을 공격 했다. 좌전 (左傳) 양공29년에 옥새(璽)에 관련된 인명과 시대를 남겼다. 계무자(季武子;?—기원전 535년)가 사자로 보냈다는 공야(公冶)는 공자의 사위 공야장(公冶萇, 公冶長; 기원전 519-470년)이 분명 하다. 화씨벽의 출처는 단군왕검백익 이 우물을 만들어 마을이 생겼다는 곳이다. [20]
진(晉)나라 땅 수극(垂棘)의 뜻: 맹자에 수극(垂棘)이란 글자가 실렸다. 순자 에는 수극(垂棘)이란 글자가없다. 정론에 이르기를(語曰) 하는 글자를 우리나라에 전해오는 속담으로 인식하여 구덩이 감 감정지와 (坎井之蛙)를 정중지와 (井中之蛙)로 풀이 하여 [우물 안 개구리] 이라는 말이 생겼다. 그 곳을 우물 마을 이라하고 그 곳에서 나온 옥돌을 갈아 화씨벽 和氏璧 天子寶 이라는 천자의 보물을 만들었다. 같은 곳 (place)을맹자는 수극(垂棘, region) 이라 하여 화씨의 벽을 수극지벽 (垂棘之璧) 이라 한다. [21] 백익의 후손이 살던 마을을 뜻한 우물井, 마을里 수극垂棘, 하는 지역을 두 유학자가 다른 글자로 기록 했다. 고조선 마지막수도 금미달을 이렇게 혼미하게 기록 했다.
5 진시황이 고조선 지역에 전해오던 옥새 하나를 받았다.
사기 진시황 본기에 이일(異日) 한왕이 영토와 새(璽) 를 바쳤다가 후에 약속을 어기고 한 조 위 세 나라가합종 하여 진(秦) 나라에 반항했다. 하여 한왕을 잡아 처형하고 조나라 왕(趙王)이 사죄하여 인질을 돌려 보냈다. [22] 진시황(秦始皇帝:기원전 259년 – 기원전 210년)이 천하를 통일 하는 과정에 조공자 가(趙公子嘉)는 동쪽으로 도망가서 대왕(代王嘉)이 되었다. 진시황이 제위 26년에 한왕납지 교새 (韓王納地效璽)라는 문구가 있다. [23] 시황본기에 실린 옥새(玉璽) 란 글자의 뜻을 보면, 진시황제가 화씨지벽(和氏之璧)으로 만든 옥새를 대, 즉 중산국으로 알려진 금미달 영역을 빼앗었던 조(趙)나라로 부터 얻었다. 그후 제위 36년에 동쪽으로 순행하다 강에서 잃어 버렸던 벽 (渡江所沈璧) 을 얻었다. 이를 화씨벽(和氏璧)이라 한다. 옛적 고조선 영역 이였던 진 (晉)의 제후국이 셋으로 부서졌다. 그 전후 역사의 흐름을 보면, 호타하 연안을 세지도자가 다투었다는 뜻의 상형 글자 상(𠭨,籀文桑)자를 썼다. 당시 각 지도자가 옥새(玉璽)를 만들어 지니고 있었다고 본다. [24]
시황제가 지니고 있던 옥새(玉璽) 를 진나라 마지막 황제 자영(秦王子嬰) 으로 부터 한고조 유방이 물러 받아 한 전국새(傳國璽)란 명칭이 나타났다. [25] 전후한 전환기에 전국새(傳國璽)를 넘겨 주지 않으려는 황후가 있었다. [26]
손견이 먼저 후한의 수도 낙양(洛陽)에 진입하여 한나라 때 쓰던 전국새 (漢傳國璽)를 얻었다. 그에 색인된수명우천(受命于天) 이란 글자는 천부인 (天符印)을 뜻함이다. 선비족 우문씨가 하늘로 부터 글문(文)을 받았다는 뜻에 우문(宇文)을 성씨로 했다.
6 전국새(傳國璽)의 저주(詛呪)와 소유권 분쟁:
사마씨의 서진(西晉)이 동오를 흡수 했다. 서진이 도망 가던 시절에 부여의 후손 선비족 모용준(慕容儁)이, 348년에 모용황의 뒤를 이어 연왕(燕王)에 즉위 했다. 그 시절에 상산사 왕모 사당 앞에 있던 큰 나무 (常山寺王母祠 前大樹) 뿌리 밑에서 (得 璧七十珪七十三)벽 70개 규 74개를 얻었다. [27] 이 문구는 [성스러운 서낭당 뜰에 새워 놓은 장승(長承,totem pole) 밑에 귀중품] 을 숨겨 좋았었다는 뜻이다. 같은 내용이 진서와십육국 춘추에도 실렸다.
전국시대에 금미달이 함락되는 싯점에서 북쪽 고조선 땅이 동서로 분산 되어 대 혼란 일어나 남북조 시대로 이어진다. 사마천은 [서쪽은 흉노, 동쪽은 동호]라 했다. 진수는 흉노에게 살해당한 동호왕을 조선왕 부(朝鮮王否), 그의 아들을 준(其子準)이라 했다. [28] 위서에 따라 오환족을 동호의 일부로 선비족 서쪽 세력으로 기술 했다. 선비(鮮卑)란 조선의 평민 이란 뜻이다. 선비란 어음이 와전 되어 시배리아(Siberia)란이름이 나타났다. 고조선, 즉 동호의 후예들이 세운 여러 나라를 “五胡십육국” 이라고 한다. 이를 선비족 탁발씨 (拓跋氏) 가 통일하여 북위(北魏: 386 ~ 534)를 세웠다.
탁발씨(拓跋氏)의 탁(拓)자는 땅이란 뜻이고, 발(跋)자는 밝다는 뜻의 사음자로 북(北)쪽을 뜻한다. 탁발씨(拓跋氏) 가 나타난 곳이 옛적에 우리양곡 이라 부르던 아사달 지역이다. 북당 (北唐)의 북(北[běi]; 빛sun-ray)자는 (햇) 빛의 사음자다. 해(解)를 당숙우가 식읍으로 정해서 성씨로 했다. 비씨(費氏)는 “햇볓(sunray) 이라는 뜻의 해비씨(解枇氏)”와 같이 당숙우 (唐叔虞)의 후손이다. [29] 두자 성 해비씨가 해씨로바꾸었다. 고구려 성에 북씨 (北;髙麗姓) 즉 해씨가 있다고 했다. [30] 선비족 탁발씨(拓跋氏)는 후에 원(元) 씨로 바꾸었다. 아사달이 그들의 본향이라 한다. 고구려와 같은 언어를 썼다.[31] 선비족이402년에임분에서 분수 계곡을 따라 서남 쪽에서 화친 맹약을 하다 파혼 하여 전쟁이 나타났다. 이를 진서(晉書)에는섭시(柴)자 바람벽자 시벽지전 (柴壁之戰) 이라 하고, 십륙국 춘추에는 절대 권력자를 뜻한 둥군옥 벽자 시벽지전 ( 柴璧之戰)이라 한다. 형용사로 쓰인 섭시 (柴) 자는 예맥족의 본향 어조사 시(斯 豕 澌 廝) 의 다른사음자가 분명 하다.
7 금미달에서 얻은 고조선의 보물을 더 옛적으로 옮겨 설명 했다:
벽을 물에 빠뜨렸다는 뜻에 잠길 침 침벽(沈璧 沉璧)이란 글자는 요순시대 기록에도 나타난다. [32] 중국오호 십육국 시대 후조의 제3황제 석호(石季龍 石虎, 295년 ~ 349년) 이전에는, 진시황 3년에 기이한 자연현상이 여러 차례 나타났다. 시황제가 죽으면 나라가 분산 된다는 문구가 하늘에서 떠러진 운석에 나타났다. 진시황이28년에 강을 건너다 잃었다는 벽을 38년에 함양으로 돌아 가는 도중에 그 벽을 찾았다는 사람을만났다. [33]
요임금이 귀중한 벽옥을 물에 버렸다는 뜻의 요침벽어하(堯沉璧於河)란 문구와 순침벽우하(舜沈璧于河)란문구도 보인다. 목천자가 서왕모를 마나 하종벽(授河宗璧)을 받았다가 요사(妖邪)스런 물건이라 물에 던져버리고, 두번 큰절(再拜)을 하고 중벽지대(重璧之臺) 를 쌓았다. 죽서기년에는 북쪽에 살던 현토씨가 보옥을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34] 이렇게 글자를 바꾸어 시대와 장소를 확인하기 어렵게 기록 했다.
맺는 말:
허진 (許慎; 58년-148년)의 설문해자(說文解字)에는 삼수 일월성신 (三垂, 日月星也)이라 했다. 드리울 수(垂)자 풀이가 번잡하다. 반세기 후에 편술된 채옹(蔡邕:132년-192년)의 채중랑집 (蔡中郎集) 황금 도끼에새긴 명문에 고구려 왕자 백고 (高句驪嗣子 伯固) 이리모 ( 伊夷謨: 179년 ~ 197년)가 서쪽 선비족과 같이중원 세력에 반기를 든 사건을 삼수 소연 위 국우념 (三垂騷然為國憂念) 이라했다. [35] 상간하 (桑乾河) 유역 금미달 (今彌達) 지역에서 북쪽으로 밀려 갔던 “유목민 세지도자가 다시 결합하여 내려와 중원을 괴롭 혔다는 뜻이다. [36]
영가 (永嘉 307년~312년) 때 고구려가 선비족 은단씨 와 우문씨 (段氏, 宇文氏) 와 합심하여 전연(前燕)을 세운 모용황(慕容皝)의 아버지 모용외 (慕容廆, 269년 ~ 333년) 의 별명이 혁락괴(弈洛瑰)다. 관(冠)에 붙였던 구슬이 떠러졌다는 뜻이 숨어 있다. 창려 극성선비족(昌黎棘城鮮卑人)으로 사마중달을 도와 공손연을 토벌한 공으로 옛적에 전욱 고양씨 살던 극성(棘城)에서 나라를 새웠다. 창려현(昌黎縣)은 당산에서 산해관에 이르는 지역이였다. 옛적에 백랑수(白狼水) 라고부르던 대능하 일대의 홍산문화 (红山文化) 유적이 발굴된 곳을 전욱 고양씨가 살던 곳(顓頊高陽氏) 이라고 한다 . 동북쪽으로 옮겨 유성(柳城) 에 자리잡고 점차로 중원의 풍속을 모방했다 . 당시 최필이 고구려로 도망 했다. [37] 창려 노룡현 이라고 풀이 한다. 중산국 영역에 있던 지명을모두 동북쪽 만주 땅으로 밀어 버렸다.
금미달 지역을 사마천은 미지 수천리 (彌地數千里) 라 했다. 그로 부터 해하 수계에서 발해만 연안에이르는 지역에 조선(朝鮮)이 있었다.[38] 조선이 있던 지역에 창해군이 나타났다. 이를 후한서에 예군남여(濊君南閭)가 28만명을 이끌고 요동으로 갔다고 했다. 오늘의 천진 당산 일대에 백제 땅 맥국 (濊國) 이 있었다. 그 곳에 [신라 가야 왜 백제 등등] 여러 소읍 국가가 나타났다.
금미달에 전승해 오던 보물을 갖고 떠나 발해만에 나타났다. 부여에는 대대로 전해오던 옥벽 옥갑 규 등등귀한 보물이 있었다.[39] 공손연이 양평성에서 잡힌 때에 이러한 사실이 밝혀졌다. 사마천의 사기와 광개토대왕 비문에 나오는 양평으로 오늘의 천진 당상 일대다. 고허촌에 조선 유민이 6부락을 이루고 살았다는 곳에서 신라가 나타났다. 신라 남해차차웅 16년에 북명인(北溟人)이 밭을 갈다가 예왕인 (濊王印)을 얻었다. 고구려 3대 태무신왕(大武神王, 재위 : 18년~44년) 이 22년에 북명 사람 괴유 (北溟人 怪由)를 얻어 부여(扶餘)를 정벌 했다 . 그때에 부여에 전해오던 금새 (金璽) 정(鼎)등 여러 보물을 얻었다. [40] 북명(北溟) 은부여 영역의 같은 지역이다.
부여 건국 설화에 천제(天帝)의 아들 해모수 (解慕漱)가 나온다.
중국기록에는 부여와 고구려 설화에 동명이 나온다. 동명이 부여에서 떠나 도착한 곳이 부여다. 광개토대왕 비문에는 추모왕이 시조로 색인 되었다.
그 또한 부여를 떠나 졸본부여에 정착 했다.백제의 먼 시조 또한 동명이다.[41] 후손 비류가 미추홀에 정착해서 대륙에 백제를 세웠다. 삼국사기는 의문이 많은 흑치상치 열전에 보벽(寶璧)이란 사람이 실렸다. 그를 백제 서부인이라 했다. 옛 수도 미추홀 사람이라 본다. [42]
광개토대왕 비문에는 낭랑(樂浪)이란 글자가 없다. 낭랑(樂浪)은 말갈(多多, Tartar)어의 사음자라고 했다.[43] 광개토대왕 시절의 역사서 16국 춘추 (十六國春秋)에는 낭랑(樂浪)이란 글자가 발해만 연안을 기술한 내용에 많이 나타난다. 발해만 연안에 열고사국이 있었다. 하백 녀랑(河伯女郞)을 중원 사람들이 열고사 또는 낭랑(樂浪)이라 했다. 영창진(靈昌津)에 이르러물가에서 잃었다는 벽(璧)이 수극지벽 (垂棘之璧)이다. 중산국으로 알려진 미지(彌地)의 옛 수도를 영수 (靈壽, 古中山邑. 靈壽寶華)라 했다. 시경에는 계획을 영대(經始靈臺)에서 시작 했다. 호타하가 흐르는 강변을 영창진 (靈昌津)이라 했다. 그곳을 수극 (垂棘)이라 했다.
다음은 wikipedia 에 실린 전국새(傳國璽) Image 와 그 설명 이다. [44]
Following image is form the wikipedia; Heirloom Seal of the Realm.
They interpreted 國璽;受命於天 既壽永昌 “Having received the Mandate from Heaven, may (the emperor) lead a long and prosperous life.”
대한제국 고종황제의 옥새는 장수의 상징인 거북 모형으로 만들었다. [45]
“지난 3월 고종황제의 비밀 옥새가 사라진지 100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조선의 자주독립을 도와 달라며 이탈리아, 러시아 황제 등에 보낸 밀서에 사용된 어새다. 국립고궁박물관이한 재미교포에게서 구입해 현재 보관 중이다.
고종의 비밀도장이 왜 미국에서 발견됐는지는 아직까지 미스터리다. 게다가 이런 비밀 옥새가 하나 더 있다는 사실도 함께 확인했다. 고종은 왜 비밀도장을 만들었으며, 또 하나의 비밀 옥새는 어디에 있는지.” 출처 : 경남연합일보(http://www.gnynews.co.kr)
Revised July 14,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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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前漢紀 孝武皇帝紀三: 狩元年冬十月。行幸雍。祠五畤。獲白麟一角。有五號有奇木。 眾枝旁出。復合於上。然吾以為不至於此。詐作皇帝玉璽。將軍都官令丞相旁近郡太守相都尉印綬。.
[2]. 史記 秦始皇本紀:秦王初并天下,令丞相、御史曰:「異日韓王納地效璽,請為藩臣,已而倍約,與趙、魏合從畔秦,故興兵誅之,虜其王。始皇惡言死,群臣莫敢言死事。上病益甚,乃為璽書賜公子扶蘇曰. 在中車府令趙高行符璽事所,未授使者 使御府視璧,乃二十八年行渡江所沈璧也
[3]. 史記 孝武本紀: 其南有玉堂、璧門、大鳥之屬。乃立神明臺、井幹樓,度五十餘丈,輦道相屬焉。
[4]. 康熙字典 玉部·璽:《廣韻》斯氏切《韻會》想氏切,𠀤音徙。《說文》王者印也。本作壐。《玉篇》天子諸侯印也。《釋名》璽,徙也。封物使可轉徙,而不可發也。《韻會》信也。古者尊共之,秦漢以來唯至尊以爲稱。《左傳·襄二十九年》公在楚,季武子使公冶問,璽書追而與之. 初攺璽書爲寶書,再攺傳國寶爲承天大寶. 馬王堆 :老子甲德經:道者萬物之注也,善人之保也, 不善人之所葆也. 故立天子,置三卿,雖有共之璧以先四馬,不善坐而進此.
[5]. 康熙字典 彌:益也,長也,久也. 彌:〔古文〕𢑀《說文》弛弓也。《玉篇》徧也。 《周禮·春官·大祝》彌祀社稷禱。《類篇》終也。《詩·大雅》誕彌厥月。《傳》彌,終也。《廣韻》益也。《論語》仰之彌高,鑽之彌堅。又遠也。後秦將軍彌姐婆觸。《周禮·春官·小祝》彌災兵。《前漢·李廣傳》彌節白檀。
[6]. https://ctext.org/dictionary.pl?if=gb&char=%E4%B9%8B%E7%92%A7:垂棘之璧. 和氏之璧,夜光之璧. 不貴尺之璧. 所沉之璧. 禮記: 有虞氏之綏夏, 后氏之綢練, 殷之崇牙, 周之璧翣.
[7]. 蔡中郎集 獨斷: 稷神、蓋厲山氏之子柱也,柱能殖百穀,帝顓頊之世舉以為田正,天下賴其功.孟子 滕文公上: 舜使益掌火,益烈山澤而焚之,禽獸逃匿 潛夫論 五德志: 初,烈山氏之有天下也,其子曰柱,能植百穀,故立以為稷,自夏以上祀之.
[8]. https://www.ancienthistoryofkorea.com/ 고구려(高句麗)의 어원과 발생지.
[9]. 周禮 春官宗伯: 以玉作六瑞,以等邦國:王執ㅡ圭,公執桓圭,侯執信圭,伯執躬圭,
子執穀璧,男執蒲璧. 詩經 蕩之什 雲漢: 靡神不舉、靡愛斯牲。圭璧既卒、寧莫我聽.
[10]. 太平廣記 徵應一帝王休徵 周武王: 及武王伐紂。樵夫牧豎。探高鳥之巢。得赤玉璽。文曰。 木德將滅,水祚方盛。」文皆大篆。紀殷之世曆已盡。而姬之聖德方隆,是以三分天下,而二分歸周。乃元元之類,嗟殷亡之晚,恨周來之遲。出《拾遺錄》.
[11]. 鹽鐵論:大夫曰:「賢聖治家非一寶,富國非一道。昔管仲以權譎霸,而紀氏以強 本亡。 今山澤之財,均輸之藏,所以御輕重而役諸侯也。汝、漢之金,纖微之貢,所以誘外國而釣胡、羌之寶也。夫中國一端之縵,得匈奴累金之物,而損敵國之用。是以騾驢馲駝,銜尾入塞,驒騱騵馬,盡為我畜,鼲貂狐貉,采旃文罽,充於內府,而璧玉珊瑚琉璃,咸為國之寶。 是則外國之物內流,而利不外泄也。異物內流則國用饒,利不外泄則民用給矣. 鹽鐵論:「古者,男女之際尚矣,嫁娶之服,未之以記。及虞、夏之後,蓋表布內絲,骨笄象珥,封君夫人加錦尚褧而已。今富者皮衣朱貉,繁露環佩。中者長裾交褘,璧瑞簪珥。
[12]. https://ctext.org/dictionary.pl?if=gb&char=%E4%B9%8B%E7%92%A7:垂棘之璧. 和氏之璧,夜光之璧. 不貴尺之璧. 所沉之璧.禮記: 有虞氏之綏,夏后氏之綢練,殷之崇牙,周之璧翣.
[13]. 水經注: 東條山也 卞和得玉璞于是山,楚王不理,懷璧哭于其下,王後使玉人理之,所謂和氏之玉焉. 史記: 項王軍壁垓下,兵少食盡,漢軍及諸侯兵圍之數重。夜聞漢軍四面皆楚歌。
[14]. 晏子春秋曾子將行晏子送之而贈以善言: 和氏之璧,井里之困也,良工修之,則為存國之寶,
故君子慎所修. 墨子閒詁 備城門: 即以古文困為梱。《荀子·大略》篇云「和之璧,井里之厥也」。
[15]. 韓非子 和氏: 和氏璧 – 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 (wikipedia.org)
[16]. 尚書 虞書: 乃命羲和,欽若昊天,歷象日月星辰,敬授人時。分命羲仲,宅嵎夷,曰暘谷。
寅賓出日,平秩東作。日中,星鳥,以殷仲春。申命和叔,宅朔方,曰幽都
[17]. 康熙字典: 寶華:至寶之妙華也。法華經譬喻品曰:「寶華承足.《說文》調也。《廣韻》諧也, 合也。如樂之龢。《註》龢,古和字。又晉邑名。《晉語》范宣子與龢大夫爭田。又殿名。《張衡·東京賦》前殿靈臺,龢驩安福。《註》龢驩,殿名。又鍾名。寶龢,鍾也。《晉語》范宣子與龡大夫爭田。〕大夫改龢大:「淺不足與測深,愚不足與謀智,坎井之蛙,不可與語東海之樂。」.
[18].康熙字典·龠部:龢:《韻會》胡戈切。《說文》調也。《廣韻》諧也,合也。如樂之龢。《註》龢,古和字。又晉邑名。《晉語》范宣子與龢大夫爭田。又殿名。《張衡·東京賦》前殿靈臺,龢驩安福。《註》龢驩,殿名。《六一題跋古器銘》寶龢,鍾也。「淺不足與測深,愚不足與謀智,坎井之蛙,不可與語東海之樂。」. 荀子 大略:和之璧,井里之厥也,玉人琢之,為天子寶.孟子 萬章上: 晉人以垂棘之璧與屈產之乘,假道於虞以伐虢.
[19]. 藝文類聚 野: 都廣之野,后稷葬焉。爰有黍稷,百穀自生,鸞自歌,鳳自舞,靈壽寶華,草木所聚.
[20]. 康熙字典 二: 井:《釋名》井,淸也。《廣雅》深也。易有井卦。《世本》伯益作井。《汲冡周書》黃帝作井。《玉篇》穿地取水,伯益造之,因井爲市也。《師古曰》市,交易之處,井,共汲之所,因井成市,故名。《左傳》有井伯,卽郉伯。說文解字:《易》曰:「井,法也。」. 虛:大丘也。古者九夫為井,四井為邑,四邑為丘。丘謂之虛.
[21]. 荀子 正論: 語曰:「淺不足與測深,愚不足與謀智,坎井之蛙,不可與語東海之樂。」:和之璧, 井里之厥也,玉人琢之,為天子寶.孟子 萬章上: 晉人以垂棘之璧與屈產之乘,假道於虞以伐虢.
[22].史記 秦王初并天下,令丞相、御史曰:「異日韓王納地效璽, 請為藩臣,已而倍約,與趙、 魏合從畔秦,故興兵誅之,虜其王。寡人以為善,庶幾息兵革。趙王使其相李牧來約盟,故歸其質子
[23].史記 秦始皇本紀: 二十六年 初并天下,令丞相、御史曰:「異日韓王納地效璽,請為藩臣,
已而倍約,與趙、魏合從畔秦,故興兵誅之,虜其王。趙王使其相李牧來約盟,故歸其質子。已而倍盟,反我太原,故興兵誅之,得其王。趙公子嘉乃自立為代王,故舉兵擊滅之。
[24]. 呂氏春秋》伊尹生于空桑. 桑丘、庚桑。𠭨,籀文桑
[25].漢書 元后傳:漢高祖入咸陽至霸上,秦王子嬰降於軹道,奉上始皇璽。及高祖誅項籍,即天子位,
因御服其璽,世世傳受,號曰漢傳國璽。前漢紀 高祖皇帝紀二:沛公至霸上。秦王子嬰素車白馬。
繫頸以組。奉皇帝璽降于軹道旁。沛公執之以屬吏。於是秦遂亡矣。
[26].前漢紀 孝平皇帝紀:初高帝時得秦玉璽。因服命之。名傳國璽。莽令王舜從太后求之。太后怒罵舜。
汝不顧義。我漢家寡老婦。旦暮且死。用此璽俱葬。太后因號泣而言. 漢書 元后傳: 太后因涕泣而言,
舜亦悲不能自止,良久乃仰謂太后:「臣等已無可言者。莽必欲得傳國璽,太后寧能終不與邪!」太后聞舜語切,恐莽欲脅之,乃出漢傳國璽,投之地以授舜,曰:「我老已死,知而兄弟,今族滅也!」舜既得傳國璽,奏之,莽大說.
[27].十六國春秋 卷二十七前燕錄五: 慕容儁下. 儁常山寺王母祠前大樹自拔乃於根下得璧七十 珪七十三光色精奇有異常玉儁以為嶽神之命遣尚書郎叚勤用太牢祀之. 晉書: 根下得璧七十 珪七十三,光色精奇,有異常玉。儁以為嶽神之命,遣其尚書郎段勤以太宰祀之.
[28].三國志 魏書三十 韓傳:及秦并天下,使蒙恬築長城,到遼東。時朝鮮王否立,畏秦襲之,略服屬秦,不肯朝會。否死,其子準立。
[29].廣韻》自唐叔虞食邑于解,後因氏。又複姓。《姓苑》北魏有解枇氏,後攺爲解氏.
[30]. 廣韻 北:髙麗姓,北唐子眞治京氏,易丗本云晉有髙人隱於北唐因以爲氏. 『北』古『別』
[31].前漢紀 後魏始爲拓跋氏。北方謂土爲拓,謂后曰跋。孝文改爲元氏。 廣韻 拓:周書王秉王興並賜姓拓王氏又有拓跋氏 初黃帝子昌意少子受封北土黃帝以土德王北俗謂土爲拓謂后爲跋故以拓跋爲氏跋亦作拔
[32].十六國春秋 卷二十七前燕錄五: 慕容儁下. 儁常山寺王母祠前大樹自拔乃於根下得璧七
十珪七十三光色精奇有異常玉儁以為嶽神之命遣尚書郎叚勤用太牢祀之. 晉書 : 常山大樹自拔, 根下得璧七十、珪七十三,光色精奇,有異常玉。儁以為嶽神之命,遣其尚書郎段勤以太宰祀之.
[33].史記 秦始皇本紀: 三十六年,熒惑守心。有墜星下東郡,至地為石, 黔首或刻其石曰 「始皇帝死而地分」。秋,使者從關東夜過華陰平舒道,有人持璧遮使者曰:「為吾遺滈池君。」 因言曰:「今年祖龍死。」使者問其故,因忽不見,置其璧去。使者奉璧具以聞。始皇默然良久,曰:「山鬼固不過知一歲事也。」退言曰:「祖龍者,人之先也。」使御府視璧,乃二十八年行渡江所沈璧也。於是始皇卜之,卦得游徙吉。拜爵一級.
[34].穆天子傳:古文:吉日甲子,天子賓于西王毋。乃執白圭玄璧以見西王毋
天子授河宗璧。河宗伯夭受璧,西向沉璧于河,再拜稽首。五舍至于重璧之臺.
竹書紀年 帝舜有虞氏: 息慎氏來朝貢弓矢. 四十二年,玄都氏來朝,貢寶玉
[35]. 說文解字:示:天垂象,見吉凶,所以示人也。从𠄞。三垂,日月星也。 觀乎天文, 以察時變。示,神事也。 凡示之屬皆从示. 蔡中郎集 黃鉞銘: 孝桓之季年, 鮮卑入塞鈔, 盜 起匈奴左部,梁州叛羌逼迫兵誅, 淫衍東夷。 高句驪嗣子伯固,逆謀竝發,三垂騷然,為國憂念,四府表橋公。昔在涼州,柔遠能邇,不煩軍師,而車師克定. 《左傳》作提彌明.
[36]. 《呂氏春秋》伊尹生于空桑. 桑丘、庚桑。𠭨,籀文桑。
[37]. 三國史記 高句麗國本紀第五:崔毖聞之,使其兄子燾詣棘城僞賀。●臨之以兵, 燾懼首服,●●遣燾歸。謂毖曰:「降者,上策;走者,下策也。」引兵隨之。毖與數十騎,棄家來奔,其衆悉降於●。●以其子仁,鎭遼東官府,市里案堵如故。
[38]. 方言:則楚言哀曰唏,燕之外鄙,朝鮮洌水之間,少兒泣而不止曰咺。 . 蔡中郎集 黃鉞銘: 孝桓之季年,鮮卑入塞鈔,盜起匈奴左部,梁州叛羌逼迫兵誅,淫衍東夷。高句驪嗣子伯固,逆謀竝發,三垂騷然,為國憂念,四府表橋公。昔在涼州,柔遠能邇,不煩軍師,而車師克定.
[39]. 三國志 魏書三十 夫餘傳: 漢時,夫餘王葬用玉匣,常豫以付玄菟郡,王死則迎取以葬。公孫淵伏誅,玄菟庫猶有玉匣一具。今夫餘庫有玉璧、珪、瓚數代之物,傳世以為寶,耆老言先代之所賜也。魏畧曰:其國殷富,自先世以來,未甞破壞也。其印文言「濊王之印」,國有故城名濊城,蓋本濊貊之地,而夫餘王其中,自謂「亡人」,抑有似也。魏畧曰:舊志又言,昔北方有高離之國者,其王者侍婢有身,王欲殺之,婢云:「有氣如鷄子來下,我故有身。」後生子,王捐之於溷中,猪以喙噓之,徙至馬閑,馬以氣噓之,不死。王疑以為天子也,乃令其母收畜之,名曰東明,常令牧馬。東明善射,王恐奪其國也,欲殺之。東明走,南至施掩水,以弓擊水,魚鼈浮為橋,東明得渡,魚鼈乃解散,追兵不得渡。東明因都王夫餘之地。
[40]. 三國史記: 王出師,伐扶餘,次沸流水上,望見水涯,若有女人,●鼎游●。就見之,只有鼎。使之炊,不待火自熱,因得作食,飽一軍。忽有一壯夫曰:「是鼎吾家物也,我妹失之,王今得之,請負以從。」遂賜姓負鼎氏。抵利勿林理勿林宿,夜聞金聲。向明,使人尋之,得金璽兵物等,曰:「天賜也。」拜受之。上道有一人,身長九尺許,面白而目有光。拜王曰:「臣是北溟人怪由。竊聞大王北伐扶餘,臣請從行,取扶餘王頭。」王悅許之。又有人曰:「臣赤谷人麻盧,請以長矛為導。」王又許之
[41]. 三國史記: 渡浿、帶二水,至●鄒忽彌鄒忽以居之。『北史』及『隋書』皆云:「東明之後有仇台, 篤於仁信。初立國于帶方故地,漢遼東太守公孫度以女妻之,遂為東夷强國。」未知孰是。
[42]. 三國史記: 列傳第四 黑齒常之,百濟西部人. 左監門衛中郞將寶璧, 欲窮追邀功, 詔與常之共討,寶璧獨進,為虜所覆,擧軍沒。寶璧下吏誅,常之坐無功.
[43].說文解字:多語也。樂浪有𧧛邯縣。浿水。出樂浪鏤方,東入海。一曰出浿水縣. 出樂浪潘國,
,
[45]. http://www.gnynews.co.kr/2023-07-14 19:32
옥새(玉璽. Seal) 란 글자는 전한기 효무 본기에 퍼음 실렸다. 이치를 생각해 보면, 국가의 전권을 상징하는 옥새(玉璽 Seal)의 기원은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 관련 기록에 나타나야 한다. 어원부터 왜 새(鳥, bird) 자를 붙여나 의문이 간다.
사기에는 진시황(秦始皇帝:기원전 259년 – 기원전 210년)이 천하를 통일 하는 과정에 조공자 가(趙公子嘉)는 동쪽으로 도망가서 대왕이 되었다. 제위 26년 한왕이 나라를 상징하는 옥새 (韓王納地效璽) 를 바쳤다. [1] 시황분기에 옥새(玉璽) 란 글자의 뜻을 보면, 이는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 하고 자신이 진시황 (始皇帝)이란 칭호를 만들었던] 시대에 나타났다. 전국옥새 (傳國玉璽) 라고도 한다. [2] 그러나 글자와 뜻을 이리저리 돌려 그 근원을 찾기가 쉽지 않다. 이를 간략히 설명한다.
한국에서 “도장 새, 도장 사, 옥새 새(璽)라고 읽는 글자는 중국어로 풀 해(解)자와 음이 비슷한 시(xǐ, 斯 )로 읽는다. 강희 잔전에 그 글자 풀이가 모호하게 실려 있다. 천자의 새(璽)라 하고, 천자의 제후, 왕자의 인(印)이라 했다. 당나라 때에 보배 보(寶)자로 바꾸었다고 한다.
후한시대에 편찬된 잠부론에서 옥새를 화씨벽(和氏之璧)이라 했고, 기원을 호괘 (瑚簋之器 )에 두고 있다. 둥근 옥돌 이란 뜻에 옥새를 벽(璧)이라고도 했다. 이는 제기 괘, 홀 규(圭) 와 같이 권위의 상징 으로 쓰이었다. 서쪽에서 온 호 왕 (瑚)이 사용하던 제기 (祭器) 괘(簋) 의 어음과 뜻이 돌고 돌아 오늘날 쓰고 [흠이 없는 구슬이라는 뜻으로 완벽(完璧) 결점이 없이 완전함을 이르는 말. 빌려 온 것을 온전히 반환함] 이란 글자로 남아 있다. 꼬이고 꼬인 옥새의 실마리가 주 무왕이 목야전 (牧野之戰)을 기념한 이괘명문 (利簋銘文), 공자가 말한 호괘 (胡簋)에 있다. [3]
왜 이를 잠부론(潛夫論) 에서 화씨 벽(和氏之璧)이라 한다. [4] 화씨벽(和氏之璧)의 화할 화(和)자는 급총죽간에 실린 공화(共和) 에서 왔다. 서주가 쇄약해저서 왕실을 이르키기 힘들었다. 선왕어 공화 (宣王興於共和)라 했다. 분수 상유에 있던 공공국, 아니면 주민의 지도자 화(和)와 같이 서주를 제활 시켰다. [5] 옥에 새(鳥,玄鳥, 烏)자를 붙인 통치권을 상징하는 문양의 기원은 삼족오를 숭상하던 고조선, 즉 홍산문화와 관계가 있다.
전국시대의 시작으로 다루는 시기에 서주의 제후국이 었던 진(晉) 나라 셋으로 부서져서(三家分晉) 한 조 위 (韓、趙、魏) 세 나라가 옛 고조선 영역에 나타났다. 마지막 수도 금미달이 있덩 곳을 중산국 (中山國, 기원전 414년 ~ 기원전 296년)이라 한다. 오늘의 대현 (代縣) 일대에 있었다. 전국시대 말기에 조나라 태자가 그곳으로 도망을 가서 왕이 되었다가 진시황 군사에게 잡혔다. 변화, 공화 하는 글자는 금미달 지역을 뜻한 변한(卞 弁韓)과 관련 된다.
수경주에는 화씨벽(和氏之玉)의 화자는 변화(卞和)를 간략한 글자로 어원의 발생지를 동조산(東條山) 이라 했다. 생번(生變)이란 문구가 많이 있다. 순 임금이 죽었다는 명조(鳴條)일대란 곳으로 많은 전쟁이 있었던 곳이다. [6] 그곳에서 변화가 얻은 옥박 (卞和得玉璞)으로 만든 화씨벽 (和氏之璧) 을 수극지벽 (垂棘之璧) 이라고도 했다. [7]
강희자전에는 “咼與和同”이라 했다. 지금은 쓰이지 않는 (咼 歪)자와 같다. 즉 여자 무당을 우-왜(媧; 古之神聖女. 女媧伏羲之妹) 화(和)자로 기록했다고 한다. [8] 그들이 하(夏)나라 이전에 홍산문화권에서 권력의 징표로 써 오던 우-왜(媧)씨 벽 (咼氏之璧) 이 오늘의 옥새다.
기원전658年에 정백이 진 조와 수극(垂棘)에서 만나 합의 했다. [9] 드리울 수(垂共工)자는 북쪽에서 내려와 공공 共工국을 이루고 치수 사업을 했던 호(胡) 를 뜻했다. [10] 한비자에 전국시대 다른 나라를 침략 하려고 길을 빌려 달라는 대화에서 “수극지벽(垂棘之璧), 즉 옥새는 우리 조상의 보배다” 란 문구가 있다. [11] 십육국춘추( 十六國春秋)에도 수극이 많이 실렸다.
특히 선비족의 활동 무대였던 조록과 연록에 극성(棘城)이란 요새가 많이 실렸다. 창려 극성 선비인(昌黎棘城鮮卑人)이 사마중달을 도와 공손연을 토벌한 공으로 옛적에 전욱 고양씨가 살던 극성(棘城)에서 나라를 새웠다. 창려현(昌黎縣) 은 대현에서 산해관에 이르는 지역이였다. 옛적에 백랑수 (白狼水) 라고 부르던 대능하 일대의 홍산문화 (红山文化) 유적이 발굴된 곳을 전욱 고양씨가 살던 곳 (顓頊高陽氏) 이라고 한다. 후에는 동북쪽으로 옮겨 유성(柳城) 에 자리잡고 점차로 중원의 풍속을 모방했다.
극성이란 수극 (垂棘)의 략자로 한나라 때 북평군(北平郡)이 었던 고죽국, 즉 금미달 영역이 었다. 공화의 수극지벽 (垂棘之璧)이 화씨벽(和氏之璧) 이다. 금미달을 점령 했던 조나라에서 가져다 진나라에 바쳤다. 하늘로 부터 명을 받은 삼족오가 전해 주었다는 천지간의 유일한 통치자를 뜻에 원형에 가운대는 사각형을 만든 옥돌애 새(鳥, 烏,玄鳥)를 그려 넣었다.
극성이란 수극 (垂棘)의 략자로 한나라 때 북평군(北平郡)이 었던 고죽국, 즉 금미달 영역이 었다. 공화의 수극지벽 (垂棘之璧)이 화씨벽(和氏之璧) 이다. 금미달을 점령 했던 조나라에서 가져다 진나라에 바쳤다. 하늘로 부터 명을 받은 삼족오가 전해 주었다는 천지간의 유일한 통치자를 뜻에 원형에 가운대는 사각형을 만든 옥돌애 새(鳥, 烏,玄鳥)를 그려 넣었다.
금미달 사람들이 천부인(天符印)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들 발해만 연안 으로 내려와 창해군이 생겼던 곳에서 왕망(王莽:기원전 45년 ~ 기원후 23년) 시절인 기원후 19년에 신라 사람이 해변 밭에서 예왕인 (濊王印) 을 얻었다. 만주에 살던 사람들은 개천절을 성대히 치루었다. [12] 부여에서는 재천의식을 치루고 선조가 도망온 사람(亡人) 들이라 했다. 옥새의 새자는 새(鳥,玄鳥, 烏, bird)의 사음자다. 옥돌에 새를 그려 넣었다는 뜻으로 홍산 문화권에서 시작 되었다.
June 7th,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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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史記 秦始皇本紀: 二十六年 初并天下,令丞相、御史曰:「異日韓王納地效璽,請為藩臣,已而倍約,與趙、魏合從畔秦,故興兵誅之,虜其王。寡人以為善,庶幾息兵革。趙王使其相李牧來約盟,故歸其質子。已而倍盟,反我太原,故興兵誅之,得其王。趙公子嘉乃自立為代王,故舉兵擊滅之。
[2]. 여자 독립군 정정화의 낮은 목소리 녹두꽃 未完. 상하이 일기. 김자동 (지은이) 두꺼비 2012-12-05.대한민국 건국절 논쟁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3].利簋 – 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 (wikipedia.org). 春秋左傳: 仲尼曰,胡簋之事,則嘗學之矣,甲兵之事,未之聞也. 潛夫論 讚學: 是故「工欲善其事,必先利其器」;王欲宣其義,必先讀其智。《易》曰:「君子以多志前言往行以畜其德。」是以人之有學也,猶物之有治也。故夏后之璜,楚和之璧,雖有玉璞卞和之資,不琢不錯,不離礫石。夫瑚簋之器,朝祭之服,其始也,乃山野之木、蠶繭之絲耳. 潛夫論 論榮: 伯夷、叔齊,餓夫也,傅說胥靡,而井𦥑(𦥑:斂手)處虜也,然世猶以為君子者,以為志節美也。夫和氏之璧,出於璞石;隨氏之珠,產於蜃蛤。
[5].晉書: 蓋魏國之史書,大略與《春秋》皆多相應。其中經傳大異,則云夏年多殷;益乾啟位,啟殺之;太甲殺伊尹;文丁殺季歷;自周受命,至穆王百年,非穆王壽百歲也;幽王既亡,有共伯和者攝行天子事,非二相共和也。其《易經》二篇,與《周易》上下經同。《易繇陰陽卦》二篇,與《周易》略同,《繇辭》則異。在周之衰,難興王室. 是以宣王興於共和, 襄惠振於晉 ,鄭。豈若二漢階闥暫擾, 而四海已沸, 嬖臣朝入, 九服夕亂哉!
[6]. 水經注: 東條山也 卞和得玉璞于是山,楚王不理,懷璧哭于其下,王後使玉人理之,所謂和氏之玉焉. 史記: 項王軍壁垓下,兵少食盡,漢軍及諸侯兵圍之數重。夜聞漢軍四面皆楚歌
[7]. 水經注: 東條山也 卞和得玉璞于是山,楚王不理,懷璧哭于其下,王後使玉人理之,所謂和氏之玉焉. 史記: 項王軍壁垓下,兵少食盡,漢軍及諸侯兵圍之數重。夜聞漢軍四面皆楚歌
[8]. 水經注: 東條山也 卞和得玉璞于是山,楚王不理,懷璧哭于其下,王後使玉人理之,所謂和氏之玉焉. 史記: 項王軍壁垓下,兵少食盡,漢軍及諸侯兵圍之數重。夜聞漢軍四面皆楚歌
[9].春秋左傳 僖公:二年春,諸侯城楚丘而封衛焉,不書,所會後也。晉荀息請以屈產之乘,與垂棘之璧,假道於虞以伐虢,公曰,是吾寶也,對曰,若得道於虞. 鄭伯及晉趙同盟于垂棘.晉獻公欲伐虢,荀息曰:「君何不以屈產之乘、垂棘之璧而借道乎虞也?」公曰:「此晉國之寶也,如受吾幣而不借吾道,則如之何?」荀息曰:「此小國之所以事大國也。
[10]. 康熙字典 肉部: 胡:𠀤音瑚。《說文》牛頷垂也。《正字通》喉也。頷肉下垂者曰胡。《詩·豳風》狼跋其胡。《註》胡謂頸下垂肉也。《傳》胡,壽也。又《正字通》鋒之曲而旁出者曰胡。《史記·諡法》彌年壽考,保民耆艾,𠀤曰胡。又鳥名。《禮·表記詩云維鵜在梁註》鵜,鵜胡。《爾雅·釋丘》方丘,胡丘。《疏》丘形四方者名胡丘。禮器。與瑚同。《左傳·哀十一年》仲尼曰:胡簋之事,則嘗學之矣。《註》胡簋,禮器。夏曰胡。
[11]. 韓非子 十過: 奚謂顧小利?昔者晉獻公欲假道於虞以伐虢。荀息曰:「君其以垂棘之璧、與屈產之乘,賂虞公,求假道焉,必假我道。」君曰:「垂棘之璧,吾先君之寶也」荀息曰:「彼不假我道,必不敢受我幣。若受我幣而假我道,則是寶猶取之內府而藏之外府也,馬猶取之內廄而著之外廄也。君勿憂。」君曰:「諾。」乃使荀息以垂棘之璧、與屈產之乘,賂虞公而求假道焉。若假之道,則虢朝亡而虞夕從之矣。不可,願勿許。」
[12]. 三國史記 新羅本紀第一:北溟人耕田,得濊王印,獻之. 三國志 夫餘傳: 國之耆老自說古之亡人。作城柵皆員,有似牢獄。行道晝夜無老幼皆歌,通日聲不絕。有軍事亦祭天.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