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공대인(王公大人)에 숨은 뜻-1, 보충 수정본:
왕공(王公)이란 글자는 경전문헌(經典文獻)에서 부터 각종 문헌 여러 곳에 많이 나오지만 시대와 장소를 밝히기 어렵다. 선진 문헌에 대인(大人) 이란 명사는 를 훈역한 글자다. 논어(論語 季氏)에 <군자는 세가지를 두려워 한다. 천명(天命)을 두려워하고,대인(大人)즉 지도자를 두려워하고,성인의 말씀(聖人之言)을 두려뤄 한다. 옛적에 지도자를 “아버이, 아바이”라 하던 명사의 뜻 글자다. 여러 곳에 실려 어느시대 어떤 사람을 뜻했는지를 확인 할수 없다[. 論語 季氏:孔子曰:「君子有三畏:畏天命,畏大人,畏聖人之言。小人不知天命而不畏也,狎大人,侮聖人之言。」
荀子 成相:堯不德,舜不辭,妻以二女任以事。大人哉舜,南面而立萬物備。舜授禹,以天下,尚得推賢不失序。外不避仇,內不阿親,賢者予。新書匈奴:夫胡大人難親也,若上於胡嬰兒及貴人子好可愛者,上必召幸大數十人,為此繡衣好閑,且出則從,居則更侍。揚子法言 學行卷第一:曰:「大人之學也為道,小人之學也為利。子為道乎?為利乎?」或曰:「耕不獲,獵不饗,耕獵乎?」曰:「耕道而得道,獵德而得德,是獲、饗已.]. 군서치요에는 연나라사람 서요(徐樂,燕郡無終人)가 황제에게 올린 글을 인용하여 자신은 왕공대인명족의 후손(王公大人名族之後)도 아니요, 공자 증자 묵자 같은 현인이나, 기돈과 같은 부잣집 (猗頓之富)의 혈통을 지닌 사람도 아니라고 했다. 발해만 서남쪽 해하여 수계에서는 왕공대인이란 문구는 귀족의 대명사로 쓰이였다[. 群書治要 漢書六 傳:徐樂,燕人也。上書曰:臣聞天下之患,在於土崩,不在瓦解,古今一也。 何謂土崩,秦之末世是也。陳涉無千乘之尊,身非王公大人名族之後,非有孔,曾,墨子之賢,陶朱,猗頓之富. 燕郡無終人. ].
다행이도 글쓴 사람이 살았던 시대란 뜻이 분명한 금왕공대인(今王公大人) 란 문구는 서요가 현인이라고 평한 묵자(墨子;기원전 470?~391?)가 편술한 묵자 여러편(墨子 尚賢, 非攻, 天志,非樂)에 많이 실렸다[.墨子 尚賢中:子墨子言曰:「今王公大人之君人民,主社稷,治國家,欲脩保而勿失,故不察尚賢為政之本也.子墨子言曰:「今1者王公大人為政於國家者,皆欲國家之富,人民之眾,刑政之治,然而不得富而得貧,不得眾而得寡,不得治而得亂,則是本失其所欲,得其所惡,是其故何也?」今王公大人欲王天下,正諸侯,夫無德義將何以哉?其說將必挾震威彊。今王公大人將焉取挾震威彊哉. ]. 고죽군의 후손으로 묵씨(墨)고, 이름은 북적 이란 뜻이 있는 작(翟)이라 한다[.Wiki: 墨家創始人為墨翟,或稱墨子。《元和姓纂》中認為墨子的祖籍是孤竹國. 最傳統的說法是,墨子,墨氏,名翟,《呂氏春秋》、《淮南子》、《史記·孟子荀卿列傳》內都如是稱. ]. 앞서 익모초는 북적(北狄)이 기르던 풀을 뜻했다고 논증 했다. 북적(北狄)을 백적(白狄),백작(白翟), 붉을 적자 적적(赤狄)이라고도 또는 개적(蓋狄) 이라고도 했다
그 곳이 왕공대인이 통치하던 고조선 땅이였다. 태행(太行山) 연산산맥(燕山山脈) 일대다. 그 곳에 있던 고조선을 관자에는 발조선(發朝鮮) 양자 방언(揚子方言)에는 조선(朝鮮)이라 부르던 북쪽 지역이다. 중원의 세력 밖이라 여주(餘州, Extra State)라 했다. 지도자를 북주후 (北州侯), 선우(鮮虞) 라고 했다. 앞서 이라고 논증 했다. 왕공대인(王公大人)은 천자(天子), 천왕(天王), 모둔선우(冒頓單于) 라는 명칭과 같이 고조선의 지도자를 뜻했다[. 揚子方言:燕代朝鮮洌水之間曰盱,或謂之揚.燕之北鄙朝鮮洌水之間謂之策.燕之東北朝鮮洌水之間謂之.]. 북주후의 통치 이념이 겸애사상, 즉 홍익인간이였다. 고조선의 지도자를 묵자 이전에는 대인(王公大人)이라 했다. 왕공대인이 다스리던 지역은 전국시대 초기에야 중원 세력이 친입 했다는 증거다.
묵가(墨家)는 제자백가 중에 뒤 늦게 나타난 학파로 묵자를 비조라 한다. 홍익인간 사상이 들어 있는 겸애(兼愛)가 묵가의 핵심 사상이다. 사마천이 태사공 자서에서 밝혔다[.史記 太史公自序:易大傳:「天下一致而百慮,同歸而殊涂。」.然其序君臣父子之禮,列夫婦長幼之別,不可易也。墨者儉而難遵,是以其事不可遍循;然其彊本節用,不可廢也. 墨者亦尚堯舜道,言其德行曰:「堂高三尺,土階三等,茅茨不翦,采椽不刮。食土簋,啜土刑,糲粱之食,藜霍之羹。夏日葛衣,冬日鹿裘。」其送死,桐棺三寸,舉音不盡其哀。教喪禮,必以此為萬民之率。使天下法若此,則尊卑無別也。夫世異時移,事業不必同,故曰「儉而難遵」。要曰彊本節用,則人給家足之道也。此墨子之所長,雖百長弗能廢也。《史記·太史公自序》墨者尚堯舜,道其德行.]: 묵가 사상은 요순임금의 도를 숭상 (尚堯舜道)하여 너무 겸손을 내 세워 따르기가 어렵다. 그러나 버려서는 안된다(不可廢也). 겸손한 생활을 하무로서 고란을 격어 나갈수 있다(儉而難遵)고 했다.
경전문헌(經典文獻)은 옛적 구주 땅에서 발생한 사건을 기록 했다. 역경에 왕공(王公)이란 문구가 여럿 나온다. 그 하나가 왕공이 나라를 지키려고 요새를 쌓았다(王公設險以守其國)는 문구가 돼지의 함정(彖傳)이란 뜻이 있는 편에 실렸다[.周易 易經 ䷜坎: 彖傳:習坎,重險也。水流而不盈,行險而不失其信。維心亨,乃以剛中也。行有尚,往有功也。天險不可升也,地險山川丘陵也,王公設險以守其國,坎之時用大矣哉. ]. 삼국지 종회전(三國志 鍾會傳)에는고 했다[. 三國志 魏書二十八 鍾會傳:弼注老子,為之指略,致有理統。著道畧論,注易,往往有高麗言。太原王濟好談,病老、莊,常云:「見弼易注,所悟者多。」].
시경(詩經 大雅 文王有聲)에 왕공이탁(王公伊濯)이란 문구가 있다[. 詩經 大雅 文王之什 文王有聲:文王受命、有此武功。既伐于崇、作邑于豐。文王烝哉. 築城伊淢、作豐伊匹。匪棘其欲、遹追來孝。王后烝哉。王公伊濯、為豐之垣。四方攸同、王后維翰。王后烝哉.豐水東注、維禹之績。四方攸同、皇王維辟。皇王烝哉。]. 시설(詩說)에는 주 무왕이 수도를 옮기고 후손들에게 “鎬以訓嗣王”라 했다[. 詩說大雅:《文王有聲》:周公述文、武遷都豐、鎬以訓嗣王,前七章皆賦也,末章興也. ]. 천도와 관련된 역사적 교훈을 후손들에게 남긴 문서다. 사마천은 이 시문구를 고 풀이 했다[. 史記 司馬相如列傳:太史公曰:春秋推見至隱,易本隱之以顯,大雅言王公大人而德逮黎庶,小雅譏小己之得失,其流及上.楊雄以為靡麗之賦,勸百風一,猶馳騁鄭衛之聲,曲終而奏雅,不已虧乎?余采其語可論者著于篇。]. 검을 려자 려민(黎民)은 구리(九黎)라고 하여 탁록전에 나타난다. 춘추시대 이전 부터 산서성에 살던 고구려와 부여의 선조다.
왕공이탁(伊濯)은 <대우와 백익이 치수 사업을 하던 옛 12주 땅에 있던 낙수(洛水)로 이어지는 이수(伊水)가에 살던 탁(濯)이란 뜻을 간략한 문구다. 이수가 까이에 조선(朝鮮)을 뜻했다는 선수(鮮水)가 흘렀다. 그 연안에 있던 양산이 한혁에 나온다[. 奕奕梁山、維禹甸之、有倬其道.韓侯受命. 王親命之 纘戎祖考. ]. 한후의 혈통은 시문에 나타난 문구 “纘戎祖考,以佐戎辟”에서와 같이 융족이 분명하다. 그러나 유가에서는 한후가 주왕실의 혈통을 이어 받았다 하고 시문 첫 구절 풀이가 혼미 하다. 특히 양산과 우왕 예기가 시문에 실렸나를 흡족하게 설명을 못했다.
한혁은 옛부터 많이 다루어온 시문이다. 역사의 흐름을 고려해 보면 이다. 유탁기도(有倬其道)의 유탁(有倬)이 이수(伊水)가에 살던 융(戎)족의 지도자란 뜻의 이탁(伊濯)이다. 그가 대우(禹)와 같이 치수사업을 했던 백익(伯益,伯翳)이다. 그를 저 늙은이라고 비하 하여 이기(伊耆)라 했다. 이기란 옛적에 왕의 호다(伊耆,古王者號). 그의 덕을 기려 후에는 이기란 관직이름을 만들었다. 그가 낙수(洛水)의 지류에 살아 그 여울을 이수(伊水)라고 했다[. 山海經:曰鮮山,多金玉,無草木。鮮水出焉,而北流注于伊水.曰北鮮之山,是多馬。鮮水出焉,而西北流注于涂吾之水.水經注 伊水: 陽水出陽山陽溪,世人謂之太陽谷,水亦取名焉。東流入伊水,伊水又東北,鮮水入焉,水出鮮山,北流注于伊。伊水又與蠻水合,水出盧氏縣之蠻谷,東流入于伊. 山海經》熊耳之山,伊水出焉,南入于洛。與洢同。又《周禮·秋官》伊耆氏。《註》伊耆,古王者號。後王識伊耆氏之舊德,而以名官。今姓有伊耆氏]. 뒤에는 낙수를 함곡관 동쪽에 새로 나타난 수도 낙양(雒陽)을 지나는 강이라고 뒤바꾸어 설명한다. 순임금이 죽었다는 명조(鳴條)에 살던 부족이 백익이 초안을 잡은 지도를 갖고 북쪽에서 개를 대리고 사는 융족의 땅에 가서 선우가 되었다는 사람들의 후손이 한혁의 한후다[. 詩說大雅:《文王有聲》:周公述文、武遷都豐、鎬以訓嗣王,前七章皆賦也,末章興也. ]. 초씨역림에 실린 문장이 한글 어순이다. 명조(鳴條)에 살던 사람들이 한글 어순의 언어를 썼다는 증거다[. 尚書 商書 湯誓:伊尹相湯伐桀,升自陑,遂與桀戰于鳴條之野,作《湯誓》 焦氏易林:鳴條之圖,北奔犬胡。左衽為長,國號匈奴。主君旄頭,立尊單于.升:鳴條之郊,北奔犬胡。左衽為長,國號匈奴。王君旄頭,立尊單于.]. 한후는 단군왕검 백익의 후손이다.
모시정의에는 “王后維翰”의 날개 한(翰)자를 “音寒.幹,乾”라 했다. 정현(鄭玄)의 모전(毛傳)에는 “幹也”라고 했다[. 詩經: 윤영춘 역해. 서울 신한출판사. 1976년 ].
다음 사전에 는 뜻이 있다. 글자를 풀어보면 이괘명문에 각인된 “상나라 왕초;珷征商隹”를 어근(語根)으로 한 글자다. 물가에 살던 북적(翟,狄,濊)의 지도자, 즉 서주의 노예(奴隸, 官奴)가 된 예맥(濊貊, 其追其貊)족의 지도자다.
공자가어에 자공이 질문 했던 (子貢問於孔子曰) 진문공이 천자를 부러오라 했다고 하셨는데 그게 진실 입니까(晉文公實召天子)라는 사실을 춘추삼전에서는 모두 천자를 천왕(天王狩于河陽)으로 바꾸었다. 이른 사마천은 주본기에 잘못된 문구라고 연막극을 첬다.
왕공대인(王公大人)이란 글자는 유목민(奴)들이 지도자를 햇님(sun,)의 후손이라한던 뜻을 훈역하여 하늘나라 제왕 천제(天帝)의 후예라 천자(天子)또는 천손(天孫)이라 부르던 명칭이다. 관자는 이를 다시 비하 하여 자부패구(柴夫吠狗)라 했고 뒤에는 자부선인(紫府仙人)으로 둔갑 시켰다. 현토군에 있던 서개마(蓋馬: 蓋; gài gě hé音合; hé gě.蓋牟) 란 이름은;부여와 고구려 시조에 나오는 해모수의 해모(解慕)와 같은 뜻이다[. 三國遺事: 北扶餘古記云。前漢書宣帝神爵三年壬戌四月八日。天帝降於訖升骨城在大遼醫州界.
自言天帝子解慕漱.我是天帝子河伯孫.因以高為氏本姓解也。今自言是天帝子。]. 수(漱)자는 도망을 간 지도자 (澣)란 뜻으로, 현토군에 있던 서개마현의 지도자로 도망갔던 사람이 해모수(解慕漱)다. 그 가까이에 있던 의무려산(醫巫閭山), 즉 선비산(鮮卑山)에 숨어 살아난 고조선의 후예를 선비족이라 했다. 부여왕 해모수(解慕漱)를 현토태수 공손역(玄菟太守公孫琙)으로 바꾸어 기록 했다. 공손역의 역(琙)자는 염사치(廉斯鑡)의 염사나 치(鑡)자와 같이 진수가 만든 글자로 삼국지에만 실렸다. 햇님의 후손(公孫)이 왕으로 다스리던 지역(琙)이란 뜻이다. 해모수(解慕漱)의 혈통이 대륙백제의 왕실이었다.
그들이 주물에 세겨 놓은 글 꼴이 예서체(隸書體)의 전신이다. 글자 풀이와 각종 고전, 그리고 모시정의에 실린 내용을 종합해 보면 시경의 왕공이탁(王公伊濯)이 묵자에 나오는 왕공대인(今王公大人)의 선조다.
결론: 왕공이탁(王公伊濯)이 한후의 선조다. 그 혈통이 묵자에 나오는 왕공대인(今王公大人)이다. 춘추시대에 발조선(發朝鮮) 전국시대에는 양자방언에 조선(朝鮮) 이라고 기록된 지역의 지도자 였다. 고조선의 지도자를 시경(詩經)에 왕공이탁(王公伊濯)이라 했고, 그의 행적을 유탁기도(有倬其道)라 했다. 그사람들이 만들어 쓰던 상형문자가 전자(篆書,篆字)로 오늘에 한자(漢字)라고 하는 글자의 원조다. 산서성에 살던 고조선 사람들이 서주의 노예(奴隸, 官奴)가 된 예맥(濊貊)족이다. 하북평원에 살던 사람들이 남만주를 거처 한해를 따라 한반도와 일본 열도에 흐터져 나갔다.
민족의 혼을 되 찾으려면, 옛적 이름을 살려야 한다. 단군을 제터 단자 단군(壇君)이 옳다고 밝혔다. 한반도 중앙에 흐르는 제일 큰 강을 아리수라 했다. 상형자로 쓰려면 마땅히 한강(漢江)이 아니라 한강(韓江)으로 바꾸어야 한다. 마한 땅에 가서 왕이 되였다는 한강(韓江)을 대동강(大同江)이라고 바꾸었다. 한반도에 있는 서한의 뜻이 담긴 한(漢)를 형용사로 쓰던 이름은 모두 클 한(Hahn,韓)자로 바꾸어 써야 한다. 한자(漢字)란 이름은 버리고 단군왕검의 후손들이 쓰던 글자란 뜻이 있는 온 세상에 알려야 한다.
끝
May 19, 2019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