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공대인(王公大人)에 숨은 뜻-2: 왕건의 고려(高麗)는 현토 땅에서:
왕공대인의 후손에서 여러 성씨가 나왔다고 논증 했다. 만주에 등장했던 는 논증을 보충 설명한다.
공손도를 사위로 맞아드렸다는 일차 사료가 삼국지 부여전에 나타난 처이종녀(妻以宗女)란 문구다. 이를 뒤바꾸어 공손도의 딸을 부여왕에게 출가 시켰다고들 풀이 한다.
공손연은 해모수(解慕漱)의 혈통이다.
동한의 왕부(王符:約85年~約163年)가 편술한 잠부론(潛夫論 志氏姓)에 성씨의 기원을 정리 했다[. 潛夫論 志氏姓:昔者聖王觀象於乾坤,考度於神明,探命曆之去就,省群后之德業,而賜姓命氏,因彰德功。傳稱氏之徹官百,王公之子第千世能聽其官者,而物賜之姓,是謂百姓。姓有徹品,於王謂之千品。昔堯賜契姓,姬;賜禹姓姒,氏曰有夏;伯夷為姜,氏曰有呂。下及三代,官有世功,則有官族,邑亦如之.所謂國也;王氏、侯氏、王孫、公孫,所謂爵也;司馬、司徒、中行、下軍,所謂官也;伯有、孟孫、子服、叔子,所謂字也]: 왕공의 자제들은 천세대가 지나도 (선조의) 덕업이나 관직을 알고 있서 성으로 삼았다. 왕에도 계층이 많았다. 그들이 살던 지역 이름의 익(號邑謚), 직업으로 하던 일(所謂事也), 호(所謂號也), 자(所謂字也), 살던 곳(所謂居也) 등 등에 따라 여러 성씨가 나타났다. 왕씨 공손씨(王氏、侯氏、王孫、公孫)는 받았던 작위(所謂爵也)에서 나왔다. 앞서 발해만 서남쪽 연안 무종사람 서요(徐樂,燕郡無終人)가 인용한 공손씨(公孫氏)란 왕공대인(王公大人)의 후손이란 뜻이다. 왕공대인의 후손은 북쪽 흉노땅으로 도망을 가기도 했다. 하여 사기 제후년표에는 잡혀온 흉노 추장에 “公孫賀,公孫敖,公孫戎奴”등 등 공손이란 이름이 실렸다. 사마천은 공손씨의 시조를 황제 헌원이라고 오제본기에 기록 했다. 삼국지 공손도 전에는 공손도를 출세 시킨 사람이 현토 태수를 공손역(玄菟太守公孫琙)이라고 했다. 앞서 “단군왕검의 혈통과 표기”에서 유웅씨란 융(Jung, 戎)자를 헌원(軒轅)이란 밝을 환(桓)자를 길게 발음한 사음자라고 밝혔다. 사마천은 우본기(禹本紀)에 있던 환웅천왕을 황제 헌원으로 둔갑 시켜 중국사람들의 시조라고 설명 했다.
여씨춘추(呂氏春秋 恃君覽 知分)에는 안자와 최저가 약속(晏子與崔杼盟)한 문구가 실렸다[. 呂氏春秋 恃君覽 知分:晏子與崔杼盟,其辭曰:「不與崔氏而與公孫氏者受其不祥」。晏子俛而飲血,仰而呼天曰:「不與公孫氏而與崔氏者受此不祥。」崔杼不說,直兵造胸,句兵鉤頸,謂晏子曰:「子變子言,則齊國吾與子共之;子不變子言,則今是已。」晏子曰:「崔子!子獨不為夫詩乎?《詩》曰:『莫莫葛藟,延于條枚,凱弟君子,求福不回。』嬰且可以回而求福乎?子惟之矣。」崔杼曰:「此賢者,不可殺也。」罷兵而去。晏子授綏而乘,其僕將馳,晏子無良其僕之手曰:「安之!毋失節。疾不必生,徐不必死。鹿生於山而命懸於廚。今嬰之命,有所懸矣。」晏子可謂知命矣。命也者,不知所以然而然者也,人事智巧以舉錯者不得與焉。故命也者,就之未得,去之未失。]:
부여최씨와 공손씨는 같은 혈통(不與崔氏而與公孫氏者受其不祥)이란 뜻이다. 이를 격으로 시비를 했다. 안자는 문왕의 덕을 읊었다는 시경 대아 한록(詩經大雅 旱麓)에 실린 문구를 인용하여 <부여 최씨가 아니라, 부여 공손씨(不與公孫氏而與崔氏者受此不祥)가 옳다고 피를 술마시듯 마시면서 하늘에 맹세했다. 개제(豈弟)란 문구는 시경 여러 곳에 나온다. 성공한 동생이란 뜻이다. 성공한 동생이 누구인가 궁금하다.
수기(受其)를 수차(受此)라 했다. 란 흔히 쓰는 표현이다. 이것을 뜻한 이 차(此)란 글자는 멀리 있는 사물을 표현 하는 형용사 피와 상반되는 뜻(此者,彼之對)이라 했다. 도덕경에 거피취차(去彼取此), 대학에는 차위지본(此謂知本)란 문구가 있다[. 此:說文》止也。从止从匕。匕,相比次也。《徐曰》匕,近也。近在此也。《爾雅·釋詁疏》此者,彼之對。《詩·周頌》在彼無惡,在此無斁。《老子·道德經》去彼取此。又《六書故》此猶兹也,斯也。《大學》此謂知本
道德經:不居其薄;處其實,不居其華. 故去彼取此. 是以聖人自知不自見;自愛不自貴。故去彼取此。]. 번역하면;차가 이르기를 알아야 함이 근본이다란 뜻이다. 육서고(六書故)에는 차위지본(此猶兹也,斯也)이라 했다. 결국 이차(此)자는 시경에 나오는 사간(斯干,何人斯)을 뜻한다. 부여 최씨가? 아니야 부여 공손씨가 햇님으로 부터 지도권을 일임 받은 사간(斯干)이라고 설전을 했다. 단군왕검 백익의 직계는 북쪽으로 도망 갔고 지손이 해지 연안에 남아 서주 창립에 공헌 했다 배신당한 부족을 사간(斯干)이 인도 했다. 최씨와 공손씨는 다같이 유목민 부여(不與,與,蜉蝣,浮游, 胡不與之國)의 혈통을 이어 받은 사람이다.
한 때 정권을 잡았던 공손무지(公孫無知, 기원전 729년 ~ 기원전 685년)가 춘추 시대 제나라 사람이다. 그를 여무지(呂無知)라 하고 성이 강(姜)씨라 한다. 여씨(呂氏) 또한 강씨(姜姓)와 같이 염제의 후손 백이(炎帝的後裔伯夷)로 알려진 백익의 후손이다[.江姓起源: 源于嬴姓, 《史记 秦本纪 第五》:伯翳 “佐舜调驯鸟兽,鸟兽多驯服,是为柏翳,舜赐姓嬴氏。”由于伯翳助舜帝治水有功,舜帝将其姚姓女儿赐伯益为妻,舜帝赐姓给他的女婿伯益姓为嬴,嬴姓开始。]. 그 한 지류가 영씨(嬴姓,伯翳)로 진시황의 선조다[. 呂伯夷:虞夏,呂姓始祖.呂尚:周朝,齊國始祖.伯夷,姜姓、呂氏,帝堯時輔佐政務,掌管禮儀;帝舜時代,擔任秩宗,典三禮;佐禹治水有功禹代行天子之政時,伯夷盡心輔弼,成為禹的心腹之臣;帝堯賜伯夷姓姜、氏呂,封為呂侯;
《潛夫論·志氏姓》:「昔堯賜契姓『姬』;賜禹姓『姒』,氏曰『有夏』;伯夷為『姜』,氏曰『有呂』。」]. 해 최 고 위(解,崔,高,魏 衛;Wei: Wi )씨는 모두 높이 떠 있는 밝은 햇님의 후손이란 뜻에서 나온 이름이다.
부여 공손씨(不與公孫氏)의 후손이 만주 땅에 올라와 우거왕의 경기지역에 자리잡아 현토 태수 공손역(玄菟太守公孫琙)이 나타났다. 그가 대륙백제의 시조가 된다. 하여 백제의 성씨를 부여(扶餘)라 한다. 고구려와 백제는 부여에서 나와 고(高)씨 해(解)씨를 성씨로 쓰고 고려에서는 왕씨(王氏)라 했다. 서긍은 왕씨의 혈통을 모르겠다고 발뺌 했다.
고려 왕씨(王氏)의 유례:
송(宋)나라 휘종(徽宗)이 1123년 고려(高麗)에 사신(國信使)를 보낼 때에 따라 왔던 정보원 서긍(徐兢;1091-1153)이 황실에 바친 비밀문서 고려도경(高麗圖經: 宣和奉使高麗圖經)에 실렸다. 책이름이 도경이니 고려의 지도가 마땅히 실렸었다. 그러나 지도는 전하지 않고 탈차도 여러 곳에 있다. 필자는 그에 실린 진여(餘辰)가 여진(女眞)의 어원이라고 논증 했다.
고려 왕씨(王氏)의 유례는 다음과 같이 기록에 남겼다.
王氏之先。蓋高麗大族也。當高氏政衰。國人以建賢。
遂共立爲君長。後唐長興三年。遂自稱權知國事。請命于明宗。乃拜建元菟州都督。
充大義軍使。封高麗王。晉開運二年。建卒。子武立。
이를 풀이 하면: 왕씨의 선조는 해(解,sun,蓋)고려의 큰 씨족이다. 고씨(高氏)의 정사가 쇠퇴하게 되어, 나라 사람들이 왕건을 어질게 여겨 드디어 군장(君長)으로 세웠다. 후당(後唐) 장흥(長興) 3년(932)에 마침내 스스로 권지국사(權知國事)라 칭하고 명종에게 봉작(封爵)하여 주기를 청하니, 곧 왕건에게 원토주도독(元菟州都督)을 제수(除授)하고 대의군사(大義軍使)에 충임(充任)하여 고려의 왕으로 봉하였다. 현도(玄菟)를 원토(元菟)로 바꾸었다. 왕건은 현토군이 있던 영주라고 하던 땅에서 나라를 세웠다는 증거가 뚜렸하다. 하여 건국 초기에는 이웃 사촌격인 글안과 서로 싸우고, 고구려의 후손이라 했다.
앞서 부여의 어원을 설명 했다. 시경에 시경 조풍 부유(詩經曹風 蜉蝣)에서 보는 바와 같이 옛 구주 땅 낙수-양산 일대가 부여족의 발생지다. 그로부터 동북 쪽으로 올라왔다가 한 부류는 내륙으로 도망을 가고 주류는 뱃길로 한해(翰海 瀚海)의 동서 연안에 정착 했다.
끝.
May 20, 2019.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