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미호 (卑彌呼)가 살던 남만주 땅이 일본 구주로 뒤바꼈다.
왜 그렇게 되였나 하는 연유를 찾아 본다.
왜와 조위는238년(景初二年) 6월에 처음으로 사신이 왕래 했다. 조위는 그해 12 월(其年十二月)에 친위왜왕비미호(親魏倭王卑彌呼)에게 극진한 답례를 했다 .
2년후 (正始元年, 240년)에는 태수궁전 (太守弓遵)이 건중교위 제준(梯儁)을 통해서 귀한 상품과 위상을 높혀 왜는 (자세한 내용 없이 조위에)보답 했다 . 그로 부터4년 후가 되는243년(正始四年)에는 왜왕이 다시 조위에 사신을 보냈다 . 뒤에 같은 내용을 인용한 사서에는 진수가 남긴 사신들의 이름(伊聲耆、掖邪狗)이 보이지 않는다. 진수만이사용 했던 이름이다. 특히 제준(梯儁)이란 이름자는 권력 직계 후손이란 뜻인 듯하다. 그후 “正始四年. 六年, 其八年”계속 사신왕래가 있었다. 그와 관련된 사건을 기록한 문장 내용이 또한 은미 하여 후세 사가들의 풀이가 다양 하다. 풀이가 묘하고 은미한 문장이 많아 풀이에 이견이 분분하겠지만, 먼 싯점에서 시대와 장소를 밝혀, 삼국사기에 실린 내용과 비교 검토하여 본다.
245년(正始 六年)에는 칙소를 띄워 대부였던 난승미를 왜난승미 (詔賜倭難升米黃幢)라 하고 그에게 군(郡)의 총 책임을 맏겼다(付郡假授).
247년(正始其八年)에는 (현토군)태수왕기(王頎)가 왜왕이 사는 곳에 도착 하니 (到官) 왜 여왕 비미호와 구로국(狗奴國) 남자왕 비미궁호(卑彌弓呼)가 서로 영토문제 (素)로 화목하지 못해서 왜(두나라)는 제시/사(倭載斯)와 오월등(烏越等) 을 군에 보내 (詣郡)어 서로 공격한다(相攻擊)는 상황 증명서(狀)를 내여 보이며 설명 했다 . 구로국(狗奴國)은 한전에 나오는 구로국(狗盧國)을 다른 사음자로 적었다. 한전에 나오는 여러나라들이 왜(倭)라고 기록 되였다고 본다. 조위에서는그들의 영역 밖 한지(塞曹)에서 기록을 맡아 보던 장정 (張政)등으로 하여금 자조서와 황당(齎詔書、黃幢)를 같고 가서 대방태수 하난승미(假難升米) 에게 자초지종을 아뢰었다. 조서 <앞에 형용사로 탄식한다는 뜻 글자를 넣었다. 비미호가 죽으니 백여보가 넘는 무덤을 만들어 노비 백여인을 순장 했다. 다시 남자가 왕이 되니 국인이 불복하고 난리가 나서 수천명이 죽었다 . 처음에 왜에서 보냈던 대부난승미 (大夫難升米)가 후에는 군(郡)의 최고 통치자가 되면서 앞에 형용사 왜(倭)가 붙었다가 다시 하(假)로 바뀌었다. 그는 조위황실과는 아무런 혈연관계가 없다. 그는 요하 동쪽에 있던 비미호(卑彌呼)가 통치하던 지역 사람으로 같은 혈통이라 하(假)라는 명사 형용어를 붙였다. 그가 관장 하던 영역(郡)에서 특사로 보냈던 사람이 구주 동남쪽 이도국(伊都國)에 가서 대왜감(大倭監)이 되여 여러 국가들이 두려워 했다.
대왜국(大倭國, 大和國)의 전신이였던 부족 국가 영주의 혈통은 발해만 서안에서 대동강 하류에 있던 백제수도 한성을 거처, 낙동강 하류에 자리 잡았던 부족의 한 지류 였다.
중국기록에 따르면 사절단으로 갔던 태수왕기(王頎)는 240년-249년 기간에 현토군 태수로 있었다 . 흔히들 소(素))자를 등 여러가지 뜻으로 풀이 한다. 진수는 소(素; white (silk); plain; vegetarian; formerly; normally)자를 의 산서성에서 쓰던 말로 기록 했다. 제왕기4년(齊王紀:四年 十二月) 겨울에 비미호가 사신을 보냈다 .
이 시대에 한전에 나오는 낙랑이 옛적부터 한국이었는데, 진한 8국을 나누어 한낙랑과 같이 하려다 폭동이나서 대방태수궁전이 죽었다는 기록과 일치 한다 .
이렇게 진수는 사서를 묘한 글자를 써가며 은미하게 작성 했다.
조위의 특사로 갔던 왕기(王頎)는 제왕기7년(齊王紀:七年春二月)봄 2월에 출병하여 여름 6월에 고구려 군사와 싸웠다고 했다 . 삼국사기에는 <그해 (245년) 가을에 관구검(毌丘儉;? -255년)이 친입하여沸流水上)과 양맥지곡(梁貊之谷)
고구려 군사를 격파했다 . 백제 본기에는 고이왕(古爾王; 재위: 234년 ~ 286년) 13년(246년)에 낙랑태수 유무(劉茂)와 대방(삭방)태수 궁준 (朔方帶方大守太守王遵弓遵)을 인솔하여 고구려를 친입해서 낙랑군의 수비가 허술한 틈을 타서 낙랑 남쪽에 친입하여 주민을 납치해왔다가 돌려 보냈다 . 신라본기에는 조이분이사금(助賁尼師今) 16년(245년)에 고구려가 신라 북쪽을 친입해서, 우로(于老)가 인솔하여 싸웠지만 막을수가 없어서 마두책(馬頭柵)을 지켰다. 우로(于老)가 열전에도 나타나는 석우로(昔于者昔于老)다. 농담으로 언젠가는 너의 왜왕(倭王)을 잡아 염전에서 일하는 종(鹽奴)으로 부려 먹겠다고한 사람이다 . 삼한의 후예들이 남만주 해안 일대에서 공손연으로 부터 풀려나서는 저희들 나름 대로 옛 땅을 되 찾겠다고 일어스던 때였다. 관구검(毌丘儉)의 수하 장수로 246년에 출정했던 대방태수 궁준(太守弓遵, 王遵) 지방민의 폭동 (攻帶方郡崎離營)에서 피살 당했다. 그 자리에 난승미가 대방군 태수로 임명장을 받았다 .
삼국사기에는 왜에 관한 내용이 둘로 나뉘여 있다. 신라와 고구려편에 나오는 왜(倭) 자는 남만주 지역이고, 백제편에 나오는 왜(倭)는 한반도 동남쪽 오늘의 일본 지역을 뜻했다. 광개토대왕 비문에 실린 왜(倭)는 대륙백제를 뜻했고, 온조왕의 동백제(東百濟, 半島百濟)를 백잔(百殘) 또는 잔(殘)이라 했다.
왜인전에 나오는 “難升米与副使都市牛利奉女王”가 공손연 일당을 포로로 잡아 조위에 바치고 그들로 부터 대륙백제의 한해 해상로에 관한 설명을 조위 조정에 들려 주었다 . 이들이 한반도 서남 해안을 돌아 대마도를 거처 일본렬도 서남부 일대를 설명 했다. 관구검의 수하 장수들은 246년 경(동천왕 20년)에 동옥저의 노인들로 부터 제주도에 관한 예기를 들었다 . 이 전쟁 통에 낙랑의 수비가 약하리라 생각하여 백제는 8대 고이왕 (古爾王,재위: 234년 ~ 286년) 13년인 246년에 낙랑 남쪽을 친입했다가, 두려워 인질을 되돌려 보냈다 . 지도를 펴 놓고 보면, 좌장군 진평(左將眞忠)이 출병한 백제 땅은 한반도가 될수 없다. 고이왕이 대륙백제 땅에서 공손도 일당이 잡고 있었던 주도권과 영토를 되찾으려는 운동을 적극적으로 시도 했었다. 당시에는 아직 가야와 일본이 고이왕이 통치 하던 대륙 백제에 속해 있었다. 하여 고이왕 (古爾王)은 일본사서와 백제 본기에 같이 나오지만, 그의 혈통에 관하여 많은 의문점이 있다. 그의 성이 부여(扶餘)라 하여 동남부 일본 열도에 있던 국가를 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가야에 관해서는 를 찾아야 한다.
끝, 다음에 계속 함
July 1, 2017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