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인전(倭人傳)본론 설명-4:
한해(翰海)의 동서쪽-2: 한해의 서쪽 해안:
한해의 서쪽 통로인 중국 동해안에 관해서는 자세한 설명이 없이 <동오(東吳)수장 손권이 호위 (胡衛)를 특사로 조위를 치려는 계획을 상의 하려는 목적으로 236년 봄에 만주에 있던 고구려 동천왕(東川王 十年, 재위: 227년– 248년) 에게 보냈다[1]. 이 사건을 진수는 위약에서 인용 했다고 밝히 면서 고구려가 아니라 238년에 공손연 (公孫淵) 에게 <장미(張彌)와 허안(許晏)등을> 보냈다[2]. 그 내용을 종합해 보면 <공손연이 점유하고 있던 곳에 비미호(卑彌呼) 가 있었고, 그 곳이 비류수 연안으로 고구려에 속했던 땅>이라 한중 사서에 엇갈린 표현이 실렸다.
강남에 있던 손권이 생각 하기에는 조위편이 뱃기로 만리나 되는 고구려와 내통 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으리라고 믿으니 적의 헛점을 찌르자는 계획이 였다. 이 시절에<삼한의 후예들이 산동반도에서 남만주로 건너가는 뱃길은 개척 했다> 는 뜻이 숨어 있다. 황해 서안의 해상로를 개척한 사람들이 삼한의 후예란 근거가 특사들의 성씨 (胡, 許, 張)에 나타났다. 신당서(新唐書)에 백제는 <북쪽은 고구려, 동쪽은 신라에 접하고, 서쪽 경계가 상해시 서남쪽 월주(越州)다. 동서 거리가 6,000리 바다 양쪽에 있어 왕은 동서 두 곳에 거주한다>고 했다[3]. 당나라가 번성하기 전 650년대 까지는 백제가 황해 남쪽을 북쪽은 고구려가 통치 했다.
언제부터 왜인국(倭人國, 倭國)이 일본(日本)으로 이름을 바꾸었나?
삼국사기에는 문무왕(文武王,재위: 661년– 681년 ) 10년(679년)에 왜를 일본으로 고첬다는 기록이 있다. 중국 문헌에는 구당서(舊唐書)와 통전(通典)에 처음으로 일본(日本)이 왜국(倭國)의 별종으로 취급하여 두 나라로 나타난다[4].
오호 십육국 시대(五胡十六國時代: 304년 ~ 439년)가 끝나는 싯점에도 남제서와 송서에도 일본(日本)이란 이름이 없다. 송서는 동진의 뒤를 이은 남조 유송 (劉宋, 420년–479년) 의 역사다. 남조 양나라(梁, 502년 ~ 557년) 시대의 기록인 양서(梁書)에도 일본이란 이름이 없다. 문자 그대로 풀이하면 혼란기를 거쳐 중국을 통일한 수(隋, 581년- 619년)나라 역사 수서 (隋書)에도 일본(日本)이란 글자가 없고, 왜국(倭國)에 관해 앞뒤가 틀인 설명을 했다[5]. 그 내용에 일본이란 뜻을 비춘 문구가 보인다.
수나라 첫 황제 20 년인 (開皇二十年) 서기 600년에 왜왕 성은 아매(阿每)
이름이 다리사북고 (多利思北孤), 호는 아배계미(阿輩雞彌)라는 자가 사신을 보내 그들의 풍속을 설명 했다. 사신이 이르기를 왜왕이천위형 (倭王以天為兄) 이요 이일위제 (以日為弟)라 했다. 하늘이 형이요 해(日)가 동생이다. 해가 뜨기 전에 나와서 정사를 듣고 가부좌(跏趺坐)하고 편안히 업무를 집행한다[6]. > 아배계미란 뜻은 < 옛적에 그지역에서 부르던, 글안 태조를 만주에서는 아보기 (阿保機)로 불렀던, 발음이 약간 다르지만 같은 뜻으로 아버지의 옛적 말>이다.
Abegaemi (아배계미;阿輩雞彌) is the same as Abogi (아보기;阿保機) referring father by ancient Tungus people.
<왜왕이 이르기를 하늘이 형이요 해가 동생이다>는 문구는 천손의 후예라고 믿는 우왕의 후손인 부여(扶餘 天孫)가 형이요 일본이 동생이라고 일왕이 인식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오호십육국 말기에 수문제가 통일하는 싯점에 왜인국(倭人國) 으로 알려 졌던 대륙 백제에서 떠러져 나가 일본이란 이름을 쓰면서 옛 대륙백제가 다스리던 한반도 남쪽 해안 국가 (열도부여)를 형이라고 모셨다. 이 시절에 수나라 전함이 제주도에 표류 하여 백제가 배를 수나라에 돌려 보냈다.
구당서(舊唐書)에서도 <일본은 왜국의 별종이다. 그 나라는 해뜨는 쪽 변두리에 있다하여 일본이라 했다. 일설에는 왜국이란 이름이 나빠서 일본으로 바꾸었다. 일본은 옛적에 작은 나라여서 왜국 땅에 속했(日本舊小國,並倭國之地)었다[7].>
구당서(舊唐書)는 당나라(唐)의 정사(正史)로 940년에 편찬을 시작해 945년에 완성되었다. 그보다 앞서 두우 (杜佑, 735년 ~ 812년)가 유질(劉秩)의 정전(政典) 보완하여, 766년부터 시작 하여 끝냈다는 통전(通典)에 왜를 자세히 실렸다[8];
첫 두절 (first 2 section)은 삼국지 왜인전을 요약 했고, 3절부터 끝까지는 열도 백제에서 분리된 일본을 통전 편찬 시기까지의 새로운 사실로 실었다.
첫쩨: 해상통로는 대한 해협을 건너 한반도 서해안을 따라 중원에 가는 길을 사용하다 고구려의 간섭을 받아 어럽다는 예기가 479년 남조송순제 (順帝昇明二年) 에게 바치는 상소문(上表曰)에 있다. 그 동안 그의 선조가 동쪽에 사는 아이누 55국(東征毛人五十五國), 서북쪽에 있던 66국 (西服眾夷六十六國), 바다 건너 북쪽 95국(渡平海北九十五國)을 정벌 하여 큰 나라가 되였다. 대륙백제와는 먼거리라 배에 짐을 싣고 왕래를 하는데, 고구려가 방해를 놓으니 무장을 해서 고구려를 눌러야 겠다고 호소 했지만, 남송에서는 왜가 요구하던 안동대장군 왜왕 (詔除武使持節、安東大將軍、倭王)이란 칭호를 거절(除)했다.
<왜왕의 성이 아매 나라 이른은 아배계미(阿輩雞彌) 라고 부른다. 중국말로 천아(天兒), 즉 천손(天孫)의 후예란 뜻이다. 수문제가 특사를 보냈다. 왜국은 바다를 건너 백제 동쪽에 이르면 한 분국(一支國)이 나온다. 또 동쪽으로 가면 진왕국(秦王國)에 이른다. 외모가 중국인(同於華夏)과 같다. 이주(夷洲)라고 한다. 의사소통이 뚜렸치 않아 의심스럽다. 또 역대사(歷代史)에는 왜국을 일본이라고도 한다. 중국 바로 동쪽에 있다. 의복이 파동신라(頗同新羅)라, 신라를 닮았다. >
삼국사기에는 신라와 고구려 초기에 왜(倭)자가 나온다. 발해만 연안에 있던 대륙백제 가야 연맹을 포함한 초기여러 부족 국가를 뜻하던 사음자다. 이 글자가 광개토대왕 비문에 찍힌 왜(倭)자다. 백제는 백잔으로 새겨 졌다. 백제 본기에는 제 15대 아사왕 (阿莘王; 재위 392년 –405년) 6년에 처음으로 왜(倭)와 우호관계를 맺고 , 11년 12년 계속하여 왕래가 있었다가 결국 백제 종말에 지원군을 보냈다[9].
수서와 구당서 중간 시대에 편찬 된 통전(通典)에 대륙백제의 상황이 실렸다[10]; <왜를 일본이라고도 부른다. 자기들 나라가 해뜨는 변두리에 있다고 한다; 倭一名日本,自云國在日邊. 만주에 있던 고조선인(朝鮮人)의 후예다. 공손연이 멸망 하고 대방군에 속했었다>. 열도부여의 동쪽, 오늘의 일본 본토에 자리 잡고 자란 부족 국가를 일본(日本)이라 했다는 뜻이다.
삼국사기에는 문무왕 10년(671년)에 일본이 국명을 바꾸었다는 통지를 받았고, 중국사서에 일본(日本)이란 이름이 처름으로 실린 구당서에는 바꾸었다는 년도를 밝히지 않았다. 삼국유사에는 진흥왕 37년(576)에 수나라(隋, 581년-619년) 에서 돌아온 스님의 일대기인 해동안홍기(海東安弘記)에; “구한(九韓)은 1 일본(日本), 2 중화(中華), 3 오월(吳越), 4 탁라(乇羅), 5 응유(鷹遊), 6 말갈(靺鞨), 7 단국(丹國), 8 여진(女眞), 9 예맥(穢貊)이다.”라고 하였다. 수서(隋書)에는 일본(日本)이란 이름이 없다. 현제 널리 인용되는 삼국유사는 1902년(明治三十五)에 일본에서 편찬 되었다. 일본 (日本) 이란 이름을 구한의 첫쩨로 올렸다.[11]
현제 널리 인용되는 삼국유사는 1902년(明治三十五)에 일본에서 편찬 되었다. 일본 (日本) 이란 이름을 구한의 첫쩨로 올렸다. 명치유신 이후 일본 사람들이 일본 이란 이름을 삼국유사에 올렸다고 본다 .
[1].東川王十年,春二月,吳王孫權,遣使者胡衛通和。王留其使,至秋七月,斬之,傳首於魏..十一年,遣使如魏,賀改年號。是景初元年也. 十二年,魏大傅太尉司馬宣王率衆,討公孫淵。王遣主簿大加,將兵千人助之.十六年,王遣將,
襲破遼東西安平. 二十年,秋八月,魏遣幽州刺史毋丘儉,將萬人,出玄●來侵。王將步騎二萬人,逆戰於沸流水上,敗之.
[2].江南海北有萬里之限,遼東君臣無怵惕之患,利則利所不利,貴則義所不貴,此為厭安樂之居,求危亡之禍,賤忠貞之節,重背叛之名。權遣使張彌、許晏等,齎金玉珍寶,立淵為燕王。淵亦恐權遠不可恃,且貪貨物,誘致其使,悉斬送彌、晏等首,魏略載淵表曰:「臣前遣校尉宿舒、郎中令孫綜,甘言厚禮,以誘吳賊。幸賴天道福助大魏,使此賊虜暗然迷惑,違戾羣下,不從衆諫,承信臣言,遠遣船使,多將士卒,來致封拜
[3].新唐書: 百濟,扶餘別種也。直京師東六千里而贏,濱海之陽,西界越州,南倭,北高麗,皆逾海乃至,其東,
新羅也。王居東、西二城
[4].文武王 十年 倭國更號日本,自言近日所出以為名. 舊唐書: 高麗百濟新羅倭國日本. 日本國者,倭國之別種也。
以其國在日邊,故以日本為名。或曰:倭國自惡其名不雅,改為日本。或云:日本舊小國,並倭國之地。其人入朝者,多自矜大,不以實對,故中國疑焉。通典:倭國一名日本,在中國直東;扶桑國復在倭國之東,約去中國三萬里,蓋近於日出處
[5].舊唐書 : 高麗百濟新羅倭國日本.日本國者,倭國之別種也。以其國在日邊,故以日本為名。 或曰:倭國自惡其名不雅,改為日本。或云:日本舊小國,並倭國之地.
[6].隋書: 魏明帝景初二年,司馬宣王之平公孫氏也,倭女王始遣大夫詣京都貢獻。魏以為親魏倭王,假金印紫綬。倭國,
在百濟、新羅東南,水陸三千里,於大海之中依山島而居。魏時譯通中國。三十餘國,皆自稱王.漢光武時,
遣使入朝,自稱大夫。安帝時,又遣使朝貢,謂之倭奴國。桓、靈之間,其國大亂,遞相攻伐,歷年無主。有女子名卑彌呼,能以鬼道惑眾,於是. 開皇二十年,倭王姓阿每,字多利思北孤,號阿輩雞彌,遣使詣闕。上令所司訪其風俗。
使者言倭王以天為兄,以日為弟,天未明時出聽政,跏趺坐,日出便停理務,雲委我弟。
[7].舊唐書 : 高麗百濟新羅倭國日本.日本國者,倭國之別種也。以其國在日邊,故以日本為名。 或曰:倭國自惡其名不雅,改為日本。或云:日本舊小國,並倭國之地.
[8].通典 邊防一 倭: 隋文帝開皇二十年,倭王姓阿每,名多利思比孤,其國號「阿輩雞彌」,華言天兒也,遣使詣闕。
其書曰,「日出處天子致書日沒處天子,無恙」云云。帝覽之不悅,謂鴻臚卿曰:「蠻夷書有無禮者,勿復以聞。」明年,帝遣文林郎裴清使於倭國。渡百濟,東至一支國,又至竹斯國。又東至秦王國,其人同於華夏,以為夷洲,疑不能明也。又經十餘國達於海岸。自竹斯以東,皆附庸於倭。清將至,王遣小德阿輩臺,從數百人,設儀仗,鳴鼓角來迎。又遣大禮歌多毗從二百餘騎郊勞。既至彼都,其王與清相見,設宴享以遣。復令使者隨清來貢方物。其國跣足,以幅布蔽其前後,椎髻無冠帶。隋煬帝時始賜衣冠,令以綵錦為冠飾,裳皆施耻,音饌。綴以金玉。衣服之制頗同新羅。
[9]. 三國史記 百濟本紀第三: 六年,夏五月,王與倭國結好,以太子●支為質。秋七月,大閱於漢水之南。
十一年,夏,大旱,禾苗焦枯,王親祭橫岳,乃雨。五月,遣使倭國求大珠..十二年,春二月,倭國使者至,王迎勞之,特厚。秋七月,遣兵侵新羅邊境. ○●支王或士云直支。,『梁書』名映暎/●,阿莘之元子。阿莘在位第三年,立為太子,六年出質於倭國
十四年,王薨,王仲弟訓解攝政,以待太子還國,季弟●禮殺訓解,自立為王。●支在倭聞訃,哭泣請歸,倭王以兵士百人衛送。旣至國界,漢城人解忠來告曰:「大王棄世,王弟●禮殺兄自(+立)王,願太子無輕入。」●支留倭人自衛,依海島以待之,國人殺●禮,迎●支卽位。妃八須夫人,生子久●辛.
[10].通典: 倭一名日本,自云國在日邊,故以為稱. 古青州: 安東大都護府,春秋及戰國並屬燕。秦、二漢曰遼東郡,
東通樂浪。漢元封三年,朝鮮人斬其王而降,以其地為樂浪、玄菟等郡,後又置帶方郡,並在遼水之東。自後漢末公孫度自號平州牧,及其子康,康子文懿,並擅據遼東,東夷九種皆服事之。魏置東夷校尉,居襄平,而分遼東、昌黎、玄菟、帶方、樂浪五郡為平州,後還合幽州。及文懿滅後,有護東校尉居襄平。晉咸寧二年,分昌黎、遼東、玄菟、帶方、樂浪等郡國五置平州.
[11].眞興王 三十七年. 」唐令狐澄『新羅國記』曰:「擇貴人子弟之美者,傅粉粧飾之,名曰花郞,國人皆尊事之也。」
安弘法師入隋求法,與胡僧毗摩羅等二僧廻,上『稜伽勝●經』及佛舍利。秋八月,王薨。諡曰眞興,葬于哀公寺北峯.
三國遺事: 古貊國。又或云。今朔州是貊國。或平壤城為貊國.海東安弘記云九韓者一日本二中華三吳越四[尤-尢+乇]
羅五鷹遊六靺鞨七丹國八女真九穢貊二府前漢書。昭帝始元五年己亥。置二外府。謂朝鮮舊地平那及玄菟郡等為平州都督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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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인전(倭人傳)의 새로운 고찰-3:
왜인전(倭人傳)본론 설명-4: 한해(翰海)의 동서쪽-1:
한해의 통치권을 가졌던 삼한의 후예들은 마땅히 한해의 동서쪽 해안에도 정착 했었다. 일본열도 서남 해안을 지나 유구열도까지 비교적 상세하게 설명 하였지만, 한해의 동쪽 해안은 설명이 미약 하고, 서쪽 해안에 관해서는 설명이 없다.
대륙백제의 후계자 여자무당 비미호 (卑彌呼)가 조위와 밀접한 관계를 맺을 당시에는 서진의 초대 황제(西晉世祖 武皇帝; 제위265년-290년)가 된 사마염 (司馬炎, 236년- 290년)이 실권을 장악 했던 시기다. 대륙백제의 번성은 없고 쇠망 과정이 진서(晉書)에 나타난다. 발해만 서남쪽 해안 일대에서 나타났던 에 있어야 한다. 삼국지와 백제가 멸망하기 이전, 당나라 방헌령(臨淄人 房玄齡; 579년-648년)이 주관하여 편찬된 진서(晉書)가 를 찾아 볼수 있는 좋은 사료다. 삼국지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여 왜인(倭人)과 비리(裨離, 卑離)를 설명 했다. 그러나 그 내용을 살펴보면 이들 은 일본 열도가 아니라 사음자 는 남만주에 있었다. 한전에 여러 형태의 비리국 (卑離)을 글자를 바꾸어 비리(裨離) 라고 했다. 동북아시아 멀리 떠나 갔던 부족의 이름이다 .
대륙백제가 크게 번성한던 시대는 공손도 부터 공손연이 주살된 238년 이후 고조선의 후예들이 중원 세력에 반항하여 독자적으로 나라를 세우던 위진-오호 십육국 시대 (五胡十六國時代: 304년 ~ 439년)다. 이를 중국사서에서는 말을 바꾸어 부여가 공손도와 혼인관계를 맺어 동이의 강국이 되였다고 했다.
대륙백제란 이름은 빼어 놓고 이 천연 방어선인 회수(淮水) 이북부에16개의 나라를 세우고 서로 대립하던 시대>라고 말한다. 후한 초에 중국에 들어온 불교는 토속신앙의 유사점을 받아드려 급히 전역에 퍼젔다. 인접해 있던 고구려, 신라, 백제, 왜, 가야 연맹체에 전교 되였다. 삼국사기 신라에는 도솔가 (兜率歌), 고구려와 백제의 불교 전래가,가야(伽耶, 阿羅)란 이름자가 또한 이를
증명 한다 . 삼국사기에는 신라본기와 열전에도 아라(阿羅)란 이름이 나온다 .
백제는 침류왕(枕流王, 재위 384년 -385년) 때에동진(東晋)에서 호승(胡僧)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들어왔고, 고구려는 소수림왕(小獸林王, ? ~ 384년, 재위 : 371년~384년) 때에 전진(前秦)으로부터 불교가 전래 되였다. 5개의 비한족이란 고조선(東胡)의 후예를 뜻하여 간략하게 오랑캐 호(胡)자로 기록 했다. 그중에는 한해로 퍼저 나갔던 삼한의 후예들도 참여 했다는 뜻이 분명 하다.
고인돌과 비파형 동검(琵琶形銅劍)이 발굴된 지역을 고조선의 영역이라고 한다.
일본 구주와, 중국 산동성 절강성 해안 일대에서도 발굴 되였다. 이는 일본구주 (九州, Kyushu) 에서 유구에 까지 진출 하였던 삼한의 후예들이 중국 동쪽 해안 땅에도 진출 했었다는 고고학적 증거다. 그 사료를 중국문헌에서 찾아 본다.
삼국지에는 나타나지 않았던 백제(百濟)란 이름이 진서(晉書)에 크게 다루어졌다 . 특히 동진 간문제(東晉 簡文帝, 재위: 371년 ~ 372년) 시대에 활발 했다. 그후 서북 쪽에서는 선비족 탁발규(拓跋珪)가 북위의 첫 황제 도무제(北魏 道武帝, 재위: 386년- 409년)가 등장하고 동쪽에서는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이 나타나 양쪽에서 공격을 받아 짧은 시일 안에 무너저서 한반도와 일본 구주로 옮겨 갔다. 그러한 싯점에 대륙백제의 한 지류인 열도부여가 점차로 동쪽으로 진출 하면서 세력을 키워 그들에게도 밀리게 되였다.
진서(晉書)에는 이 실렸다.
중국 오호 십육국 시대 전진(前秦)의 3대 황제인 부견(苻堅, 337년- 385년, 재위 :
357년 ~ 385년)이379년(太元四年)에 치루었던 전쟁에서 선비,오환,고구려, 백제,설라(薛羅;xuē xiē/ luó luō luo) 휴인(休忍; [xiūrěn] 슈우랜) 등 여러 나라가 모두 따르지 않았다 . 그후 부견(符堅)이 383년 비수(淝水)에서 동진(東晉)의
사현(謝玄)에게 크게 패배 했다. 비수대전(淝水大戰)이후 두세력은 몰락하게 되였고 중원에는 더큰 난리가 나타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해안을 따라 진출 했던 한인 (汗/韓人)이 대륙백제를 형성 했다가 중원에서 영역을 잃고, 만주에서는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등장 하여 백잔, 가야, 왜(倭)로 비문에 기록된 연맹체들은 4-500년 대에는 대륙 해안에서 떠나게 되였다.
설라(薛羅)는 신라(新羅)가 분명하나 휴인 (休忍; [xiūrěn] 슈우랜)은 알수가 없다. 설라(薛羅)와 휴인(休忍)이란 이름이 중국문헌 다른 곳에는 없다. 신라의 작은 성(新羅堡)은 발해만 서쪽에 있었다. 신라(新羅)란 이름이 두번 실렸다 . 문맥을 보아도, 휴인이 살던 곳은 대륙의 동북지역이였다. 휴인은 가야연맹의 다른 이름이 아닌가 한다. 통전에는 고 했다 . 삼국사기에는 고구려와 백제가 종주권을 놓고 치열한 전쟁을 하는 통에 두 나라 사람들이 신라로 피란을 가서 신라가 갑짜기 큰 나라가 되였다고 했다. 태평어람과 남사 (太平御覽. 南史) 에도 신라가 이러한 혼란기에 크게 성장 했다는 기록이 있다 . 이와 같은 흐름에 따라 신라의 제22대 지증왕(智證王, 재위: 500년-514년) 4년에 확고하게 국호를 신라로 했다 .
한해의 해안선을 장악하고 있던 대륙 백제는 비유왕(毗有王, 재위 : 427년- 455년)과 개로왕(蓋鹵王, 재위: 455년-475년)으로 끝났다. 특히 이 당시의 백제본기에는 의문점이 많이 있다.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으로 위례성이 함락되고 개로왕도 피살 되었다. 삼국사기에는 그가 구원군을 청한 최후의 편지가 실려 있다.
백제가 대륙에서 기마민족과 활발하게 투쟁 했던 증거가 사건 이후 남제서에 나타났다: 고구려와 백제의 안력에 신라와 왜가 급성장한 면모가 남제서 동남이편에 실렸다. 고구려는 장수왕이 송말(宋末)에는 뱃길로 바다를 건너 사신을 보내 고려왕낙랑공 고련(高麗王樂浪公高璉)도독영평2주제군사거기대장군
(都督營平二州諸軍事、車騎大將軍)의 칭호를 받았다 . 479년 남제태조원년 (太祖建元元年)에도 사신을 보냈다. 그후로 계속 뱃길로 통상을 했다. 고구려 서쪽에 있던 위(魏虜) 조정에서는 제(南齊)를 첫 쩨, 고구려를 두번쩨로 취급했다.
** Please read over the note that Michael Ryoo wrote on July 6, 2017 about: 대륙백제 by citing 송사, 남제서, 자치통감, so on.
고구려는 오경(五經)을 읽을 줄 알고의 의복은 바지와 관모가 특이 했다. 모자를 건(巾) 책(幘)이라 한다. 고구려 사신이 쓰고 온 건(巾) 책(幘)이 그들의 특색 (Trade Mar)이였다. 이를 삼국지 한전에서 인용한 “其俗好衣幘, 皆假衣幘” 모자로 옛적 해관에서 유래한 편두 (辰韓人皆褊頭)라고 기록 했다. 이를 놓고 중서랑 왕융이 농담(中書郎王融戲)하기를 라고 했다 . 고구려 사신이 답하기를 라 했다. 그러한 모자가 공손도전(公孫度傳)에도 나타난다 . 일주서에 나오는 해유관 (解隃冠, 北唐以閭,閭似隃冠)이 변한 모자다.
이 고변(古弁)을 쓴 지도자가 변한(弁韓)이고, 그들의 영역을 변진전에 실었다.
백제의 쇠퇴해 갔던 과정이24대 동성왕 모대(東城王牟大, 재위: 479년~501년) 가 하소연한 내용에 나타났다 . 그는 북경 천진 일대를 뜻하는 광양태수(廣陽太守), 요양-해성시 일대를 뜻하는 조선태수(朝鮮太守)등 여러 중책을 지냈고 태시중 (泰始中;265년-274년)에서 부터 남제의 전신이 되는 유송 (劉宋;420년-479년)시대 까지 중원에서 활동 했다는 문구가 있다. 북경 일대에 있던 위로(魏虜)가 100,000 명
의 병력을 동원하여 백제를 공격하였지만, 모대가 이를 처부었다고 했다. 진수가 처음으로 멀 하 나타난다. 모대 동성왕 (東城王牟大)의 선조가 조선태수(朝鮮太守)를 맡았었다는 지역은 진수사 예전(濊傳)에서 금조선 (今朝鮮)이라한 지역으로 비미호가 살던 요양-해성시 일대 지역이 아니면 발해만 일대를 뜻한다. 오직 남제서 (南齊書)에만 조선태수(朝鮮太守)란 글자가 보인다. 그 당시 대륙백제와 고구려의 강역이 삼국사기에는 최치원 열전에;
“高麗百濟全盛之時 强兵百萬南侵吳越 北撓幽燕齊魯爲中國巨蠡”란 문구가 있다. 고구려와 백제가 강성 했을 때는 백만 군사를 두어 중국대륙 남쪽으로는 오나라와 월 나라의 땅을 친입하고 북쪽으로는 산동성에서 발해만 연안을 따라 북경 일대에 깊숙히 이르렀다는 공문서를 남겼다.
대륙 백제가 붕괴 되자 열도 백제가 힘을 얻게 되여, 479년(建元元年)에는 백제와 고구려을 제외한 6국을 맏아보는 큰 벼슬 “倭王武號為鎮東大將軍”을 받았다. 이 칭호는 백제 왕에게 주었던 무호(武號)다. 같은 행사에 가라국왕 하지가 참석하여 보국장군 가라국왕의 칭호를 받았다 . 신라는 한반도로 수도를 옮기기전이다.
끝, 다음에 계속.
왜인전(倭人傳)의 새로운 고찰-3:
왜인전(倭人傳)본론 설명-4:
한해(翰海)의 동서쪽-2: 한해의 서쪽 해안:
한해의 서쪽 통로인 중국 동해안에 관해서는 자세한 설명이 없이 <동오(東吳)수장 손권이 호위 (胡衛)를 특사로 조위를 치려는 계획을 상의 하려는 목적으로 236년 봄에 만주에 있던 고구려 동천왕(東川王 十年, 재위: 227년- 248년) 에게 보냈다 . 이 사건을 진수는 위약에서 인용 했다고 밝히 면서 고구려가 아니라 238년에 공손연 (公孫淵) 에게 보냈다 . 그 내용을 종합해 보면 이라 한중 사서에 엇갈린 표현이 실렸다.
강남에 있던 손권이 생각 하기에는 조위편이 뱃기로 만리나 되는 고구려와 내통 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으리라고 믿으니 적의 헛점을 찌르자는 계획이 였다. 이 시절에 는 뜻이 숨어 있다. 황해 서안의 해상로를 개척한 사람들이 삼한의 후예란 근거가 특사들의 성씨 (胡, 許, 張)에 나타났다. 신당서(新唐書)에 백제는 고 했다 . 당나라가 번성하기 전 650년대 까지는 백제가 황해 남쪽을 북쪽은 고구려가 통치 했다.
언제부터 왜인국(倭人國, 倭國)이 일본(日本)으로 이름을 바꾸었나?
삼국사기에는 문무왕(文武王,재위: 661년- 681년 ) 10년(679년)에 왜를 일본으로 고첬다는 기록이 있다. 중국 문헌에는 구당서(舊唐書)와 통전(通典)에 처음으로 일본(日本)이 왜국(倭國)의 별종으로 취급하여 두 나라로 나타난다 .
오호 십육국 시대(五胡十六國時代: 304년 ~ 439년)가 끝나는 싯점에도 남제서와 송서에도 일본(日本)이란 이름이 없다. 송서는 동진의 뒤를 이은 남조 유송 (劉宋, 420년-479년) 의 역사다. 남조 양나라(梁, 502년 ~ 557년) 시대의 기록인 양서(梁書)에도 일본이란 이름이 없다. 문자 그대로 풀이하면 혼란기를 거쳐 중국을 통일한 수(隋, 581년- 619년)나라 역사 수서 (隋書)에도 일본(日本)이란 글자가 없고, 왜국(倭國)에 관해 앞뒤가 틀인 설명을 했다 . 그 내용에 일본이란 뜻을 비춘 문구가 보인다.
수나라 첫 황제 20 년인 (開皇二十年) 서기 600년에 왜왕 성은 아매(阿每)
이름이 다리사북고 (多利思北孤), 호는 아배계미(阿輩雞彌)라는 자가 사신을 보내 그들의 풍속을 설명 했다. 사신이 이르기를 왜왕이천위형 (倭王以天為兄) 이요 이일위제 (以日為弟)라 했다. 하늘이 형이요 해(日)가 동생이다. 해가 뜨기 전에 나와서 정사를 듣고 가부좌(跏趺坐)하고 편안히 업무를 집행한다 . > 아배계미란 뜻은 이다.
Abegaemi (아배계미;阿輩雞彌) is the same as Abogi (아보기;阿保機) referring father by ancient Tungus people.
는 문구는 천손의 후예라고 믿는 우왕의 후손인 부여(扶餘 天孫)가 형이요 일본이 동생이라고 일왕이 인식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오호십육국 말기에 수문제가 통일하는 싯점에 왜인국(倭人國) 으로 알려 졌던 대륙 백제에서 떠러져 나가 일본이란 이름을 쓰면서 옛 대륙백제가 다스리던 한반도 남쪽 해안 국가 (열도부여)를 형이라고 모셨다. 이 시절에 수나라 전함이 제주도에 표류 하여 백제가 배를 수나라에 돌려 보냈다.
구당서(舊唐書)에서도
구당서(舊唐書)는 당나라(唐)의 정사(正史)로 940년에 편찬을 시작해 945년에 완성되었다. 그보다 앞서 두우 (杜佑, 735년 ~ 812년)가 유질(劉秩)의 정전(政典) 보완하여, 766년부터 시작 하여 끝냈다는 통전(通典)에 왜를 자세히 실렸다 ;
첫 두절 (first 2 section)은 삼국지 왜인전을 요약 했고, 3절부터 끝까지는 열도 백제에서 분리된 일본을 통전 편찬 시기까지의 새로운 사실로 실었다.
첫쩨: 해상통로는 대한 해협을 건너 한반도 서해안을 따라 중원에 가는 길을 사용하다 고구려의 간섭을 받아 어럽다는 예기가 479년 남조송순제 (順帝昇明二年) 에게 바치는 상소문(上表曰)에 있다. 그 동안 그의 선조가 동쪽에 사는 아이누 55국(東征毛人五十五國), 서북쪽에 있던 66국 (西服眾夷六十六國), 바다 건너 북쪽 95국(渡平海北九十五國)을 정벌 하여 큰 나라가 되였다. 대륙백제와는 먼거리라 배에 짐을 싣고 왕래를 하는데, 고구려가 방해를 놓으니 무장을 해서 고구려를 눌러야 겠다고 호소 했지만, 남송에서는 왜가 요구하던 안동대장군 왜왕 (詔除武使持節、安東大將軍、倭王)이란 칭호를 거절(除)했다.
삼국사기에는 신라와 고구려 초기에 왜(倭)자가 나온다. 발해만 연안에 있던 대륙백제 가야 연맹을 포함한 초기여러 부족 국가를 뜻하던 사음자다. 이 글자가 광개토대왕 비문에 찍힌 왜(倭)자다. 백제는 백잔으로 새겨 졌다. 백제 본기에는 제 15대 아사왕 (阿莘王; 재위 392년 -405년) 6년에 처음으로 왜(倭)와 우호관계를 맺고 , 11년 12년 계속하여 왕래가 있었다가 결국 백제 종말에 지원군을 보냈다 .
수서와 구당서 중간 시대에 편찬 된 통전(通典)에 대륙백제의 상황이 실렸다 ; . 열도부여의 동쪽, 오늘의 일본 본토에 자리 잡고 자란 부족 국가를 일본(日本)이라 했다는 뜻이다.
삼국사기에는 문무왕 10년(671년)에 일본이 국명을 바꾸었다는 통지를 받았고, 중국사서에 일본(日本)이란 이름이 처름으로 실린 구당서에는 바꾸었다는 년도를 밝히지 않았다. 삼국유사에는 진흥왕 37년(576)에 수나라(隋, 581년-619년) 에서 돌아온 스님의 일대기인 해동안홍기(海東安弘記)에; “구한(九韓)은 1 일본(日本), 2 중화(中華), 3 오월(吳越), 4 탁라(乇羅), 5 응유(鷹遊), 6 말갈(靺鞨), 7 단국(丹國), 8 여진(女眞), 9 예맥(穢貊)이다.”라고 실렸다. 그 시절이 되는 진평왕(眞平王, 재위 579년-632년) 때 일본 (日本) 이란 이름이 나타나지 않았다.
명치유신 이후 일본사람들이 일본 이란 이름을 삼국유사에 올렸다고 본다 . 현제 널리 인용되는 삼국유사는 1902년(明治三十五)에 일본에서 편찬 되었다. 일본 (日本) 이란 이름을 구한의 첫쩨로 올렸다.[1]
[1].眞興王 三十七年. 」唐令狐澄『新羅國記』曰:「擇貴人子弟之美者,傅粉粧飾之,名曰花郞,國人皆尊事之也。」
安弘法師入隋求法,與胡僧毗摩羅等二僧廻,上『稜伽勝●經』及佛舍利。秋八月,王薨。諡曰眞興,葬于哀公寺北峯.
三國遺事: 古貊國。又或云。今朔州是貊國。或平壤城為貊國.海東安弘記云九韓者一日本二中華三吳越四[尤-尢+乇]
羅五鷹遊六靺鞨七丹國八女真九穢貊二府前漢書。昭帝始元五年己亥。置二外府。謂朝鮮舊地平那及玄菟郡等為平州都督府
July 7, 2017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