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인전(倭人傳)의 새로운 고찰-3:
본론 설명-1:
이절 (Sectin 2) 부터는 풍속을 설명 했다: 후한서 동이전을 포함하여 삼국시대 이후에 편찬된 왜인전이 모두 진수의 왜인전을 인용하고 추가 했다.
이들을 참조 종합하여 왜인전 본론을 설명한다.
첫쩨: 왜인의 풍속을 “黥面文身또는斷髮文身”이라 했다. 이는 앞에서 에 기원을 둔다고 설명 했다. 진수는 사기 오세가에 실린 오태백의 형상을 잘못 인용하여 했다 . 한반도 서남해안을 따라 대마도를 거처 일본열도 구주 연안에 이르는 해상 통로를 자세히 설명해 놓고 나서는 엉뚱한 풀이를 더했다. 강남 해안 지대에 하후씨의 후손이 자리잡게된 이유는 그들의 후손이 오월이 되였다. 이러한 사실을 동중서의 신흥유교사상에서 따라 만들어 놓은 억설이다.
사마천은; 황하문명 초기에 발생 했던 사건들을 한무제 통치 전역으로 분산 시키느라 중국의 영토가 사면이 바다로 싸였다는 사해(四海)란 글자를 쓰고, 황하 동쪽(河東) 산서성 해지(解池) 연안에서 나타났던 일화는 모두 중국 동쪽 해안으로 기술 했다. 백이숙제의 수양산을 발해만 연안에, 우왕이 죽었다는 회계산(會稽山) 을 절강성 (浙江省)해안으로 옮겨 놓았다. 해지(解池) 동북쪽 조용하고 살기 좋은 곳이라 유주(幽州)라 하고 그 곳에 소공의 연(燕)이 있었다. 안읍(安邑)이 있었다고 했다. 그러드니 이들을 하북성 동북으로 후에는 다시 남만주 서남 지역이라고 바꾸어 버리고, 같은 착상에서 해지연안에 있던 의무려 (醫巫閭山)마저 조양일대의 진산(鎭山)으로 둔갑 시켰다 .
왜인의 선조가 하후 소강의 후손으로 회계(夏后少康之子封於會稽)에 봉해 졌던 부족이라 하고, 지리적으로 왜는 마땅히 회계동쪽에 있었다(當在會稽) 동야지동 (東冶之東)이라, 즉 왜에 이른다고 설명 했다. 사기에 나타난 <우왕이 묻혔다는 회계(會稽)에 관한 원문을 잘 살려보면 우왕이 는 내용을 사마천은 회계라고 했다. 도산(塗山)은 분수 하류 침수가 자주 발생하던 곳에 있던 토산이 었다 . 시경소아에 도(塗)자가 나온다.
이는 일전에 올린; 여러번 설명 했다.
그러한 의식을 거행하고 위험한 뱃길을 떠났다. 그 풍속이 점차로 변하여 사회적 유형이 (後稍以為飾) 되였다. 그렇게 문신을 한 이유가 바다 깊히 들어가 물속에서 일하는 동안에 큰 물고기의 피해를 막기위한 수단이였다고 그럴사한 풀이 했다. 눈늘 뜨고 바닷물 속에 들어갔던 분은 누구나 잘 알고 있다. 물안경(水鏡) 없이는 불가능 하다. 작은 배로 한해를 이용하는 동안 실종자가 많아, 여자 숫자가 남자보다 월등히 많았다. 더 멀리 떠러진 외딴섬 제주도와의 해상로는 희생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던 모양이다. 하여 그 섬을 여인국이라 했다. 문신의 유래에서 보듯이 그들의 풍속에서도 나타났다 :지도자(大人)는 모두 4-5명, 천한(下戶) 사람이라도 2-3명의 부인을 두었다. 부인네들은 음란하지 않고 시기도 하지 않는다. 도둑(盜竊)이 없고 송사는 아주 희박하다. 경범자는 그 처자를, 중범자는 그 문호를 몰수 당한다. 여자를 가옥보더 싼 값으로 다루었다.
이를 또한 먼 해상 교류의 위험을 그린 글로 남겼다 :
바다를 건너 중국(대방군이라 하던 백제의 수도 한성 (漢城) 즉 대동강 연안)으로 떠날 때는 언제나 책임 연락관(恒使一人)이 따른다. 머리는 가다듬지 않고(不梳頭), 기슬에 가지 않고(不去蟣蝨), 남루한 옷에 육식과 부부관계도 피기를 마치 상을 당한 사람같이 한다. 이를 지쇠(持衰)라 한다. 공동으로 제물로 바칠 산사람을 구한다. 만일 병이 있는 자를 구했다면 불길한 증조라고 죽여 버린다. 신께 위험을 보살펴 달라고 기도 하면서 생사람을 제물(生口財物)로 바친다 .
두쩨: 또하나는 는 문구다. 진수가 왜인전을 편찬하기전, 아주 옛적부터 발해만 연안에서 남만주에 이르는 통상로에 살던 상나라에서 피란온 사람들을 왜(倭, 汗, 韓)인이라고 했다는 증거다. 그들도 오태백의 후손 같은 경면문신을 했다.
세쩨: 같은 삼한의 후예들은 기자유풍이란 말을 했지만, 왜인전에는 기자 대신 그와 혈통이 같은 소강(少康)을 인용하고, 그들의 풍속은 음탕치 않다(其風俗不淫) 남자는 모두 (덥고 습한 지방이라 모자 없이)맨머리라 마치 머리위에 솜 (木緜招頭,목화송이, cotton plant)를 펼처 놓은듯 하다.
병장기 중에 활을 설명 했다. 남만주에서 왜여왕이 보냈던 특사는 단목과 단궁시 (丹木、、短弓矢)를 갖고 갔다. 왜인의 활은 나무로 만들어 위는 길고 밑이 짧다(木弓。木弓短下長上)고 했다. 같은 왜인이라 했지만, 대한해협(玄海灘)을 건너 구주(九州) 일대에서 사용하던 활은 남만주지역의 특산물로 들고 갔던 단궁시 (短弓矢, 檀弓)즉 숙신씨의 대명사로 알려진 활 (肅慎氏之矢)과는 완전히 다르다 .
끝, 다음에 계속.
June 24, 2017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