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미호(卑彌呼)와 비미국(卑彌國)은 남만주에 있었다.
왜인전 사절 (Sectin 4 부터 8) 까지는 왜왕실의 역사를 자세하게 설명 했다.
이편에서는 금년 초(January 23, 2017)에 운만 띄워 올린 “왜여왕 히미/매꼬(卑彌呼) 는 백제왕이 였다”는 폭탄선언을 했다. 그 배경을 좀더 설명 한다.
신라 본기에는 제8대 아달라 이사금(阿達羅泥師今, 154년~184년) 20년 (173년)에 왜여왕 비미호(卑彌乎)가 사신을 통해 예물을 가지고 았다는 기록이 있다 . 삼국지에는 발음이 같은 비미호(卑彌呼)가 왜여왕이다. 가까이에는 남자왕 비미궁호소(卑彌弓呼素)가 다스리던 구노국(狗奴國)이 있었다 . 한전에는 비미국 (卑彌國) 백제(伯濟國) 비리국(卑離國)등 비미(卑彌)와 발음이 같거나 비슷한 여러 국가 이름이 실렸다. 이러한 이름자들은 그지방에 살던 사람들이 부르던 이름을 한자로 기록 했거나 (PLCs) 또는 소리와 음을 이리저리 뒤 바꾸어 적은(PSMCs) 글자다. 하여 이러한 이름은 지역적으로 모두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고 본다.
왜여왕 비미호(卑彌呼)가 어느시대 어느곳에 살던 사람인가를 찾아본다. 그녀는 라고 했다. 이를 왜인전 첫구절에 고 했다 . 시대적으로는 그 나라 발생시기부터 진수 (陳壽 233-297) 삼국지를 편찬하던 시기 까지라고 볼수 있다.
왜인이 고조선 땅에서 도망가서 바다에 살았면서 한나라에 조견하는 자가 있다는 문구는 그들이 살던 곳은 중원에 가까운 한해(翰海)연안에서 살았다. 그 지역에서 국가들이 발생할수 밖에 없었다. 중원 세력과 교류가 있었다는 증거가 부여와 고구려의 역사 기록에 였보인다.
비미호(卑彌呼)란 이름은 중원 세력이 고조선 영역을 점령한 이후 바다(翰海)로 퍼저 나갔던 고조선의 후예들이 작은 부락을 이루고 살다 점차적으로 결합하여 자그만 국가를 설치하던 시대에 처음으로 나타났다. 서한에서 동한으로 너머가는 기원전 1세기에서 기원후 첫 2-300년에 해당 한다. 비미호(卑彌呼)란 이름이 238년에서 248년(正始八年)대에 다시 두번 나온다. 그 때는 진수 (陳壽; 233년-297년)가 아직 어린 나이로 촉한에 있었다. 왜인전에 관한 상세한 내용은 조위의 수도 낙양을 찾았던 비미호(卑彌呼)의 사신이 전해 주었던 예기를 근거로 왜인전에 기록 했다. 진수는 같은 나이였던 장화(張華)의 추천을 받아 사마염(司馬炎;236년-290년, 제위 265년-297년)이 조위(曹魏, 220년-265년) 원황제(元皇帝; 260년-265년)로 부터 황제직을 이양 받고난 이후에 서진의 관리가 되었다. 사마염과 그의 측근이였던 장화(張華)에게서 들은 예기일 가능성이 많다.
비미호(卑彌呼)와 관련되는 년대기에는경초(景初)와 정시(正始)가 있다.
경초(景初; 237년-239년)란 연호는 조위 2대황제조예(魏明帝曹叡)의 세번쩨 연호다. 景初3年1月에 명제(明帝)가 죽고 혈통이 분명치 않은 제왕 조방 (齊王曹芳)이 즉위 했다. 그가 조위(魏)의 3대 황제로 사용하던 연호가 둘이다. 처음에 정시 (正始:240년-249년 4월), 정시 10년 4월에 가평(嘉平元年)으로 바꾸었다.
238년(景初二年 ) 유월에 두번쩨로 비미호(卑彌呼)란 여자가 나온다 :
그가 왜여왕으로 대부 난승미(大夫難升米)가 인솔하는 사절단을 (대방)군에 보내 조위의 수도에 가서 천자를 만나게 해달라고 요구 했다. 대방태수 유하가 안내하여 낙양에 갔다. 이 사건이 조위 2대황제가 죽기 일년 전이다. 그의 말년에는 국정이 문란해저 사마염의 영향이 깊히 관여한 때다. 왜와 중원 수도와의 첫 교류 였다.
그해 12월에 조위왕실에서 왜여왕에게 칙소를 내렸다. 그 내용이 다음과 같다:
이에 따른 여러 하사품의 종류와 목록에 관하여 설명이 구구하지만, 욧점은 는 점이다.
애석하다는 표현은 왜왕이 잡혀온 포로들에서 시달림을 많이 받았었다는 뜻이 있다고 본다. 시대와 장소 역사적 사건등을 고여 하면, 왜에서 조위에 보낸 포로는 양평성(襄平城)에서 주살 당한 공손연(公孫淵; ?198-238)의 잔여 친족이라 본다.
특히 섭원(涉遠)이란 표현은 이란 뜻이지 바다(翰海)를 건너(渡海) 왔다는 뜻이 아니다. 비미호(卑彌呼)는 대륙에 살았다.
240년(正始元年)에 태수궁준(弓遵)이 건중교위(建中校尉)를 사신으로 왜국에 보내 왜왕에게 조위 황실의 칙소와 함께 많은 선물을 전했다. 이에 답례로 왜왕이 사신을 보내 사례 했다 . 이에 앞서 고구려는 237년에 조위에서 경초(景初)로 연호를 고친 것을 하례하고, 238년에는 조위의 태부 사마선왕(司馬宣王)이 공손연 (公孫淵)을 토벌하는 작전에 출병하여 조위를 도와 승리 했다 . 공손연 일당의 억압에서 풀려난 삼한의 후예들이자립하기 시작 하게 되였다. 고구려는242년에, 태조대왕(太祖大王, 재위 53년 ~ 146년) 때 빼았었다 잃어 버린 요동만 서북쪽에 있는, 서안평 (西安平)을 습격 했다. 조위는 고구려의 발목을 잡아야 했다. 고구려의 수도 남쪽 해성시 일대에 있던 왜에 다시 사신을 보내 협조를 다짐 했다. 하여243년(正始其四年)에 왜에서는 답례 했다 .
고구려에서 옛 땅을 되찾으려는 움직임이 강해지면서 당시 중원 세력이 였던 조위와 부닥치게 되였다. 고토 회복 투쟁이 시작 한지 6년 후인 245년에는 대방태수 궁준 (帶方太守弓遵)이 낙랑 태수와 같이 관구검의 수하 장수로 고구려를 친입하여 국내성이 함락되고 동천왕은 남옥저로 피신하여 살아 났다 .
백제 본기에는제8대 고이왕(古爾王: 재위: 234년 ~ 286년) 13년에 관구검이 고구려를 습격하는 틈을 타서 진충을 보내 낙랑 남쪽을 습격하여 낙랑인을 탈취해 왔다 두려워서 되돌려 주었다고 했다 .
왜국에서는247년(正始其八年)에 불화가 생겨 비미호가 죽고 남자가 왕이 되니, 난리가 나서 사람이 많이 죽었다. 비미호의 종녀일여(宗女壹與)가 13살에 여왕이 되여 국가가 안정 되였다. 일여가 왜대부솔선 중랑장 (倭大夫率善中郎將)을 시켜 남녀 포로 30명을 조위에 보냈다 . 양평일대에서 공손연의 잔여 세력 또는 옛 적에 우호관계에 있던 사람들이 봉기하다 잡혔다고 본다.
왜인전에 나오는 대방과 낙랑은 발해만 서쪽에 있었어야 이치에 맞는다.
왜인전에는 가왜왕(假倭王) 즉 여왕비미호(女王卑彌呼) 이외에 구로국(狗奴國) 남자왕 비미궁호소(卑彌弓呼素)란 지도자가 있었다 . 이 구로국(狗奴國)은 한전에 나오는 구로국(狗盧國)이라 본다. 이 밖에도 삼국지 한전(韓傳)에는 왜인전(倭人傳)에 나오는 나라 이름과 비슷한 이름이 많이 나타나 있다. 광개토왕비문, 삼국사기 실린 삼한의 초기의 기록에도 비슷한 이름이 적혀있다.
비미호(卑彌呼)가 남만주에 살었다고 추리 할수 있다는 증거다.
사기를 비롯한 진수이전 시대의 문헌에는 열전 첫 머리에 혈통과 본향를 알렸다. 진수 또한 그렇게 열전을 적었지만, 왜인전에는 이름도 성씨도 알려 지지 않은 어떤 남자가 왕이였다고 했지만 년대를 정확히 남기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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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수가 삼국지에 남긴 귀도(鬼道)란 글자는 으로 산동성을 포함한 한해(翰海) 연안에서 흥행 했다 .
중국문헌을 깊히 살펴보면, 비미호(卑彌呼)란 이름은 진수가 삼국지 왜인전에서
처음으로 만들어 사용 했다. 한전, 왜인전에 나오고, 후한서, 통전, 태평어람등 여러 사서에도 나타난다. 진수는 선비전에서 단석괴(檀石槐)를 설명하면서 한(汗人, 韓人) 이라고 한 부족 이름을 스스로 왜(倭)로 바꾸어 적었다. 그 확실한 증거가 후한서 동이전에 있다. 왜인들이 살던 곳이 옛 적에 창해군(滄海郡)이 있었던 발해만 서남쪽에서 황하 하류에 이르는 늪지대 였다 . 이곳이 “백제, 가야 연맹, 왜라 부르던 사람들” 의 옛 고향 이다. 그 뿐아니라 한인(汗人, 韓人)을 삼한으로, 삼한의 글자 마저 이리저리 휘돌려 시대와 장소를 판가름 할수 없도록 어지럽게 만들어 놓았다.
첫번쩨 비미호(卑彌呼)는 시대를 거론치 않았다. 이를 좀더 살펴 보면, 처음에 나오는 비미호(卑彌呼)는 왜국의 초기 역사를 론하는 과정에 나타났다. 삼국의 발생 초기가 된다. 두번쩨는238년 12월(景初二年 十二月), 세번쩨는 240년 (正始元年)이다. 이를 후한서에서는 모호하게 환영지간(桓靈之閒)에 왜국에서 또 다시 큰 난리가 나서 비미호(卑彌呼)가 왕이 되었다고 했다 . 진수가 거론한 두번쩨와 세번쩨 나오는 비미호(卑彌呼)의 시대는 동한(東漢; 25년-220년) 이후 삼국 시대가 된다. 후한서에서 인용한 비미호(卑彌呼)는 삼국지에 나오는 첫번쩨 비미호(卑彌呼)가 돼야 하지만 내용은 위진시대를 기술 했다. 그러나 동한의 시조 광무제기(光武帝紀)에는 왜노국이 사신을 보내 봉헌 했다는 기록이 있다. 통전에는 공자께서 그 곳이 가서 살고 싶다고 했던 발해만 연안에 왜인이 있다고 했다 . 이를 종합해 보면, 광무제기에 나오는 왜노국왕(倭奴國王)은 삼국지에 첫번쩨로 나오는 왜여왕 비미호(卑彌呼)와 같은 시대의 사건이라고 본다.
동한 세조 광무황제 유수(漢 世祖 光武皇帝 劉秀, 25-57년)는 삼한의 후예들의 봉기에 직면 했던 사람이다.
왜여왕 비미호(卑彌呼)는 일본 열도 구주(Kyushu Island, 九州)가 아니라 발해만 연안에 살았었다. 대륙백제의 시조 비류왕(沸流王) 계통의 지도다 였다.
끝, 다음에 를 계속 함
June 28, 2017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