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인전(倭人傳)본론 설명-3:
왜 왕실의 역사-4: 요동만에서 일본 구주로:
하/해왜왕 (假倭王) 비미호가 어떻게 하여 요동만 일대에서 일본 구주로 옮겨 졌나를 살펴 보기로 한다.
진수는 첫번쩨 비미호(卑彌呼)에 관한 예기를 사절 (Section 4) 에서 모두 마치고, 다음절 (section 5)에는 다시 한해(瀚海) 탐험에 관해서 들은 예기를 실었다 :
그가 앞에서 하우씨의 후손이 유구열도에 나타난 사연을 오태백의 후손이라고 잘못 풀이 하였드시, 선진시대 문헌에 나오는 흑치(黑齒)라는 해을 숭상 하던 사람들(解, 奚)이 새운 사라를 이가 까만 사람(person with Black teeth)으로 인식 시켜 놓았다. 여기에 나타나는 왜(倭)자는 뜻글자(Semantic Character)다. 난쟁이 나라 주유국(侏儒國)에 사는 인종을 왜(倭)라고 불렀다. 그 사람들이 사는 유구열도를 왜지(倭地, Land of Dwarf)라고 했다. 이렇게 훈역한 글자와 옛적에 사마천이 한해(翰海)라고 하던 요동만 일대를 관장 하던 한인(汗, 韓)을 뜻하는 사음자(Phonetic Lean Character) 위이 (倭,high above, on top of) 를 뒤섞어 사용 했다. 다음사전(Daum Dictionary)에 그 글자(倭)는 다시 설명 하기를 라고 했다.
일본 열도가 알려지기전에 편찬된 설문해자(說文解字)에는 왜(倭)자를 순모(順皃)라 했지 왜소하다는 뜻이 없다 . 왜(倭; 亻,委)자는 책임을 맡(委)은 품위 있는 웃사람(人)이란 뜻글자로 쓰이였다.
왜인전 첫 일절(Section 1)에; 구주 서남부에 있는 고 했다. 바다 북쪽에 있는 여왕국은 대륙 백제의 분신을 뜻했다. 자그만 내륙해 유명해(有明海, Ariake Sea)가 천연적 경계선이고, 그 남쪽 나라들은 난쟁이 나라 여왕이 다스리는 영역이란 뜻이다.
북쪽은 반도백제에서 보냈던 대왜가 감찰(使大倭監之)하였다. 그곳에 특별히 한사람 대솔 감찰 (一大率檢察)을 두어 여러 나라들이 모두 두려워 했다. 그러한 기능을 한 사람(伊)이 상주(都)했던 곳(國)이 그 이름자 안에 있다. 반도백제 수도 한성 (漢城,平壤)에서 이도국(伊都國)에 지방장관 (Governor-General)으로 나와 있던 사람을 대솔 감찰이라고 했다.
수서에 나타나는 왜는 구주 남쪽 소인국(倭人,Dwarf)과 유구열도를 설명 했다:
백제와 신라에서 3,000리. 동서로 항해는 5월 남북 항해로는 3월을 택했다. 수나라가 중원을 통일 하고 603년(大業元年)에 복건성 해안에서 출발 하여 2-3일 안에 유구에 도착 하여 정벌 했다. 지도층은 한해를 따라 남만주에서온 사람들이라 장대 하지만 하는 기록이 있다 . 한반도에서 제주도(牟羅國)로 가는 최적기 또한 3월, 그곳에는 산다장록(山多麞鹿)이라, 노루와 사슴이 많다고 했다 .
이들을 종합하여 분석하면 왜인전에 실린 비미 (卑彌)란 이름은 구주에 있던 왜여왕국과는 무관한 이름이다. 후세 사관들이 남만주에 있던 나라 지도자를 사음한 왜(倭)란 글자에 비미 (卑彌)란 이름을 여자들이 많이 사는 왜소한 난쟁이 나라의 여왕에 접을 붇혀 이를 모두들 아직도 인정하고 있다. 사음자(PLCs)와 훈역한 글자를 구별하지 못하여 나타난 현상이다.
삼국지 왜인전에 나타나는 대방(帶方)을 후한서에는 낙랑군(樂浪郡)으로, 앞에서 필자가 중요하다고 했던 <구야 한국 북쪽 언덕에서 7,000리를 가면 1,000리나 되는 바닷길을 건너기 시작 한다 (韓國,七千餘里)는 문구에서 시도일해천여리
(始度一海千餘里)를 빼어버리고, 구야한국(狗邪韓國)은 글자를 바꾸어 구야한국 (拘耶韓國)이 한반도 끝에 있다고 풀이 했다. 군(郡)자는 대방군이라고 밝혔다. 그 결과 대동강 하구에서 부터 낙동강 하구에 이른 한반도 서남 해안을 통치 했던 대륙 백제를 남쪽 일부를 잘라 가야 연맹체가 경상남도에 있다는 설이 나타났다. 그후 모든 기록이 후한서의 내용에 따르고 있다. 야마대국에 살던 왜소한 사람들을 통치 하던 여왕(南至邪馬壹國,女王之所都)을 대왜왕 (大倭王居邪馬臺國)이라고 바꾸었다.
비류국(沸流國), 비류왕(沸流王), 전라 남도 흑산도 (黑山島)와 다물도(多勿島):
동서한(東西漢) 교체기 혼란 통에 온조왕의 형 비류(沸流)를 따라 발해만 서안 대방 땅 미추홀(彌雛忽)에 갔던 사람들은 옛 고향 땅 졸본부여로 되돌아 왔다. 이를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서는 . 발해만 서남 대방 땅을 되 찾겠다 는 옛 고구려의 어휘를 사음한 글자가 다물 (麗語謂復舊土為’多勿; duō wù/두어우/둬)이라는 한자다. 고구려 첫 도읍지가 옛적 부여의 경기(京畿)지역이란 뜻에서 졸본부여(卒本扶餘) 이라고 기록 했다. 주몽이 비류수 북쪽에 자리 잡었다 하여 비류수상(沸流水上)이라 했다 . 진수가 살아 있을 당시의 조선(今朝鮮)이라 한 곳이 바로 이곳이다. 고조선 찾기 마지막 장에서 다루겠다고 약속 했다.
졸본부여(卒本扶餘)에 살던 사람들이 옛 통상로를 따라 산해관을 지나 발해만 서남쪽 해안선을 따라 내려 갔고, 동쪽으로는 한반도 서해안을 따라 일본 구주에 이르는 한해(翰海) 항로에는 마땅히 쉬었다 가는 곳이 있었어야 한다. 북쪽으로 갔던 부족에 관해서는 중국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다. 진수는 그러한 가능성을 미묘하게 기록 했다. 필자가 새로운 시각에서 풀이한 구야한국 (狗邪韓國)이 대동강 하류에서 발굴된 낙랑 유적지다. 그 곳에서 쉬어 갔다. 마한 서쪽 바다에 있는 큰섬을 동호 사람들이 거주(州胡在馬韓)하던 곳이라고 기록 했다. 필자는 지난 가을에 “강화도 (江華島)의 어원: 한강(漢江)을 한강(韓江)으로, 빼앗긴 이름을 되 찾자.” 에서 이 섬이 강화도라고 풀이 했다. 긴 해상 항해를 하는 동안 이 두곳 밖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앞에서 거론한 바와 같이 “검을 흙, 흰 백, 누르황, 가물 현”자는 다 을 뜻하던 사음자라고 했다. 이들이 요동만을 나와 한해(翰海)를 따라 가던 먼 항로에 쉬던 곳이 한반도 서남 귀퉁이가 되는 전라남도 신안군 흑산면 (黑山面)에 속한 섬,
흑산도(黑山島)와 다물도(多勿島)다.필자는 앞에서, 비미호(卑彌呼)를 이라고 풀이 했다. 이와 같이 비류수상, 비류국(沸流國), 졸본부여, 다무도(多勿都)하는 이름은 모두 남만주에 있던 같은 지역을 뜻한다.
신라의 제8대 아달라 이사금(阿達羅泥師今, 재위: 154년~184년) 20년에, 왜여왕 비미호(倭女王卑彌乎)가 남만주 연안에 있던 신라에 사신을 보냈다 . 그녀가 백제 비류왕이 세운 대륙백제의 명맥을 이어 받은 지도자였다. 해성시(慰禮城,漢城) 일대에서 살았다. 삼국지에 따르면, 졸본부여 지역은 고구려에서도 오랫동안 하나의 자치 국가로 인정 했다 . 이렇게 있다. 중국 땅에도 있었다고 본다.
끝, 다음에 계속.
July 6, 2017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