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수(遼水) 요동(遼東) 양평(襄平) 고죽현(孤竹縣)
앞으로 “한나라의 군현(漢之郡縣)하에 있던 지역”을 설명하기에 앞서 지난
November 20, 2016. 에 올렸던 글을 보충하여 다시 올립니다.
사기에 나타난 요동 (遼東)과 양평(襄平)이 원조다.
사마천이 사관으로서 의 임기 :
한서에 따르면, 사마천은 한무제 첫해(建元)부터 원봉(元封)간에 태사공으로 근무 했다고 한다. 원봉(元封,기원전 110-105년) 끝 까지라 하더라도 조선을 멸망한후 3년안에 퇴임 되였다. 어느 누가 조선 열전에 손을 대지 않았다면, 이는 그가 보고 느낀 초후의 전쟁목격담이다.
기원전 664년에 제 환공이 이끄는 중원세력이 처음으로 고조선 땅으로 친입해 왔다 . 이를 중국에서는 제 환공의 고죽국 (孤竹國)정벌이라 한다. 중요한 지형지물의 이름이 많이 나온다. 같은 지역에 두나라가 있슬수는 없다. 필자는 고죽국 (孤竹國)이 아니라 고조선 고죽현 (孤竹縣)이라 함이 옳다고 본다. 또한 앞서 영문본 “Ancient History of Manchuria” 에서는 고죽국 (孤竹國)이 요서(遼西)에 있었다고, 이를 뒤이어 출판된 “Ancient History of Korea” 에서도 요수(遼水)를 오늘의 난하 (Luán-hé灤河)라고 풀이 했다. 이는 필자의 학문적 미숙에서 온 잘못이라 이자리를 빌려 요동 요수 요하 요동 하는 문제를 수정하여 밝킨다.
양평(襄平): 양평(襄平)이란 이름은 사마천이 처음 사용 했다. 연의 장성이 요동 양평에서 끝났다. 북쪽으로 군을 인솔하려니 양평후 통의 허락이 있어야 한다는 기록이 있고, 한서에도 요동군 18현 중에 양평현(襄平縣)이 있다 . 요동의 옳바른 위치는 당산 천진 일대다. 양평(襄平)은 갈석산 이남에 있어야 한다.
요수(遼水)와 요동: 요수(遼水)는 가장 멀리 있는 큰 강이란 뜻이다. 천진을 지나는 해하(海河)의 옛 이름이였다. 그 뜻을 인용하여 중국이 영토를 늘리면서 점차로 동쪽으로 옮겨 왔다. 유향 (劉向, 기원전77- 기원전6년)은한 무제(漢武帝156–87 BC)이후 사람이다. 그가 편찬한 설원에는 제 환공이 고생 했던 강이 요수(遼水)라 했다 . 이 때는 한무제가 우거왕을 정벌 하여 얻은 땅에 있는 큰 강을 “제일 먼 강”이라고 했다. 그러나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 하기 전에 여불귀가 편찬한 “완전 무결한 책이라 오자 하나에 천냥을 주겠다고 방을 붙였다” 는 백과사전 여씨 춘추와, 한무제가 기원전 109년 조선을 친입하기 전에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 기원전 179년 -기원전 122년)이 편찬한 회남자에는 다 같이 “중국에서 제일 큰 강이름 여섯”에 요수 (遼水)가 들어 있다 . 요수 (遼水)는 마땅히 갈석산 남쪽에 있던 큰 강으로, 그 강 동쪽이 요동이 된다. 한무제 이후에 편찬된 염철론에도 연나라 진개가 “도요동이공조선 (度遼東而攻朝鮮) 즉, 요동을 지나 조선을 공약했다” 는 기록이 있고, 진시황이 북쪽 새력을 내 몰았지만 진말 한초 혼란기에는 북쪽 세력이 다시 내려 왔다 . 진시황 이전에 편찬된 여씨춘추에 (당시 중국에서 제일 멀리 있는 강) 요수(遼水)라 한 강은 오늘의 북경과 천진을 지나는 해하(海河)가 제일 멀리 있던 강이다 . 요동은 그 동쪽이라야 한다. 오늘의 천진 당산이 모두 요동에 있던 땅이다. 제 환공은 산융정벌을 하려고 중원에서 연을 지나 북쪽으로 올라 갔다. 그를 보필했던 관자는 강 이름을 몰라 적지 않았다. 이를 한무제 후에 나타난 유향이 더 북쪽에 있던 강물을 요수(遼水)라고 이름을 더 북쪽에 있는 강으로 옮겨 붙였다.
동쪽(遼東): 전한 초기에 각 고을 마다 한고조 사당을 새웠다. 그 당시에 그들이 부르던 요수 (遼水) 동쪽(遼東), 즉 천진 당산 일대에 세웠던 고조묘 (高祖廟)가 불에 타버렸다 . 이를 동중서가 음양설로 잘못 풀이하여 한무제 조정에서 사형을 받았지만 간신히 풀려나 관계에서 물러 났다. 후한 말기에 편찬된 전한기에도 동중서 사건이 시려려 있고, 한무제 또한 진시황과 같이 동북쪽 국경을 순회 하며 갈석은 지나 요서 의 북쪽 변경을 시찰했다. 그 당시 방어선을 “고 요수위새 (故遼水為塞)즉 옛 요수에 새를 두었다”고 해다 . 이 요수는 한무제 조선정벌이후 유향이 예기 했던 요수를 뜻함이 분명하다. 오늘의 난하를 요수라 했다. 고조선의 우거왕을 정벌하니 새로 빼았은 땅이 모두 요동이 되였다. 그 곳에 있는 “의무려산 (醫巫閭山,醫無閭山) 즉 흑산 (黑山)이 있는 현도군 일대를 모두 요동이라 했다 . 그러나 단군조선이 산서성 해지 연안에 있었슬 때는 분수 연안에 북당(北唐)이 의무려(醫無閭, 醫巫閭)을 새웠었다. 그 곳에 살던 하우씨의 후손들이 만주로 옮겨와 수도를 정한 곳에 같은 목적으로 의무려 (醫巫閭)를 새워 놓았던 산을 의무려산이라 했다. 해를 숭상하던 사람들이 산다 하여 “흐어산 (黑山)이라 했다. 같은 맥락에서 한반도 압록강 연안에 해산(海山) 이란 이름”이 붙었다.
위진시대에 공손도(公孫度, ? ~ 204년)가 옛 요동 땅이 였던 현도군에서 성장하여 남만주에서 백제 (百濟)의 힘을 업고 웅거하면서 오늘의 요하 동쪽일부를 포함한 남만주 해안에 영향력을 미처 요동 땅이 너무 넓어 졌다. 옛적 요동 땅을 요서 (遼西)요중(遼中)으로 나누고, 낭랑땅 “둔유현이남황지(屯有縣以南荒地) 남쪽을 대방군(帶方郡)이라 하고, 자신은 요동후(遼東侯)라 했다 . 그들이 만든 대방군 (帶方郡)은 “옛 요동군 북쪽 끝을 낭랑군에 부속 시켰던 열구(列口)를 중심으로한 나하 하류 지역을 뜻했다.
중국사서에는 공손도(公孫度) 공손강(公孫度)의 내력이 은미하게 기술 되여 정확한 혈통을 판단할수 없게 되였다. 필자는 한무제 당시 제상이 였던 공손홍이 천진 당산 일대에 평진후로 봉직을 받아 그 후손이 경미한 죄를 범했지만 두려워 당시 제일 북쪽 오지였던 현토로 도망을가 그 곳에서 세력을 이르킨 집안이라고 풀이 했다 . 이름자에 혼동이 있지만 그 집안의 마지막 집권자가 잡힌 곳이 오늘의 요양이다. 그 자신이 요동후(遼東侯)라한 요동은 요하 동쪽을 뜻했다고 풀이 할수도 있다.
공손도가 남만주 해안 일대를 다스리던 시대를 서술한 진수(陳壽 233-297)는, 그 당시 중원에서 가장 멀리 있는 큰 강을 요수(遼水)라 했다 . 그러나 삼국지에 요동(遼東)이란 표현은 옛적 요동을 사용하여 현토군이 요동에 있다고 했다. 제일 먼 강이 오늘의 요하 (遼河)다. 이를 삼국사기 (三國史記)에서는 비류수 또는 개사수 (蓋, gài gě hé/흐어/해 斯水)라 했다 . 공손도 일당은 후에 옛 백제의 전신이 되는 부여의 수도였던 양평(襄平), 즉 오늘의 요양(遼陽) 에서 잡혀 주살 당했다. 이 처형장을 수경주에서는 요수(遼水)라 하고 한 옛적 양수(梁水) 일명, 사수(斯水)라 부른다고 했다. 이 설명은 삼국사기와 일치 한다 . 공손도(公孫度,?204년) 집권 말기부터 고구려의 비류수 (沸流水)즉 요하(遼河)의 동쪽을 요동(遼東) 이라고 불렀다. 하여 먼 훗날 편찬 된 후한서에는 옛적 진한시대 이름를 그대로 적용하여 “요동돼지 우화(遼東豕)를 비롯한 요동(遼東)이란 지명은 천진 당산 일대”를 뜻한다 . 산서성 해지 연안에 살던 사람들이 발해만 연안으로 이사 오면서 그들의 가축을 갗고 왔다는 증거다 .
고죽국(孤竹國): 같은 맹락에서 해지연안에서 발해만 연안으로 옮겨온 사람들이 “서주 무왕의 배신으로 애절한 전설을 남긴 백이숙제 사당” 동쪽에 새워 그곳에 고죽국이 있었다고 알려저 온다. 그 곳에서 온사람들이 옛적 이름으로 쓰던 조선이 발해만 서안 갈석산 가까이에 있었다. 여기서 상나라 유민을 받아 드렸다는 추리가 되나, 조선의 수도 평양이나 왕검성이란 이름은 나타나지 않아 많은 사학가들은, 삼국유사와 중국여러 문헌에 나오는 “기자가 조선에 갔다”는 기록을 시대와 장소에 부합된 합당한 설명을 못하고 있다. 하여 아직도 많은 한국 실증 사학자들은 “단군조선은 발해만 연안에 존제 하지 않았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러나 자새히 살펴 보면 그 “지역에 조선현”이란 이름을 비롯한 여러가지 증거가 지명 글자 속에 숨어 있다. 또한 평양 (平壤)이 이 일대에 있었다는 사료가 고구려 전성기인 북위 문성황제 (北魏文成帝拓跋濬; 在位452-465년)기록에 보인다 . 단군조선의 수도 를 지키는 왕검성이 있었어야 한다. 필자는 양평(襄平)이 발해만 연안에 있던 기원전 1043년 경의 단군조선 수도였다고 추리 했다.
그 후에 중죽 사료에서는 요동(遼東)이라는 이름이 편리한 쪽으로 인용 되였다. 이러한 중국사료를 인용한 삼국사기에 나오는 요동(遼東)은, 시대를 정확히 파악 하더라도 위치를 밝히기가 어렵게 되였다.
끝
January 9, 2017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