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만주에 나타난 조선(朝鮮)의 위치-2:
유목민의 지도자 “毋丘儉”을 어떻게 읽나:
관구검이라고 읽는 사람은 북쪽 유목민이였다.
유목민을 “소가 우는 소리, 馬/牟;móu mù mào”라고 기록 하여 毛詩는 유목민이 부르던 노래가 근본을 이룬다고 “古朝鮮 찾기”에서 밝혔다. 의문이 많은 글자 “毋”는 유목민을 뜻한 또 다른 사음자다[1]. 공자는 하북 평원에 살았다. 시경과 공자가 남긴 문구에는 유목민이 쓰던 사음자가 남아 있다고 추리 된다.
논어 학이편(論語 學而)에는 “毋, 無”자가 여러 곳에 많이 나온다. 학이편에 나오는“無友不如己者”란 문구를 논어 자하편에는「毋友不如己者」라고 글자를 바꾸어 기록 했다[2]. 논어주소에서도「無友不如已者」라 했다. 종전의 풀이에 따르면, 이 문구의 풀이가 자가 당착으로 앞뒤가 틀리다.
삼국시대의 서간(徐幹, 171년 ~ 218년)이 편술한 중론(中論 貴驗)에는, 필자가 해지연안의 지도자를 처단하던 사실을 읊은 시문이라고 풀이 한 “시경 소아 벌목” 을 인용하여[3], 무(毋)자는 군자 비 (君子不,beam of light)란 뜻으로 풀이 했다[4]. 빛을 숭상하던 부족의 지도자란 뜻이다. 무구검(毋丘儉)이란 문구는 빛을 숭상 하던 유목민이 살던 지역(毋丘)의 왕(儉)이란 뜻이다.
여러 고전에에는 “毋, 無,木, 莫” 글자를 때로는 자도자란 뜻이 있는“勿[5]”자와도 혼용 하여 고전 풀이에 혼란을 가저 왔다. 문제는 “毋”자를 잘못 풀이 해서다.
어용학자 반고(班固: 32년-92년)가 시경에 있다고 한 “毋封靡於爾邦” 문구를 현 시경에는 “無封靡于爾邦”라 했다. 백호통론에서도 “毋封靡於爾邦”라고 했다. 반고 또한 유목민의 최고 지도자를 천자(天子土地)라고 했다[6].
반고와 같은 시대의 어용학자 허진의 설문해자 서문을 깊히 살펴 보면, <중국의 많은 고전에는 古朝鮮 사람들이 쓰던 언어와 풍속이 있다>는 뜻이 숨어 있다:
전국시대 일곱 나라가 법령, 의관제도, 문자와 어음등 모든 것이 달라 이사가 창힐편(倉頡篇)을 만들고, 조고가 원력편 (爰歷篇), 태사령 호무경(胡毋敬)이 박학편 (博學篇)을 만들었다. 그 내용의 출처는 모두 대전자 혹은 산서성에서 (古朝鮮 사람들이 서주의 官奴가 되어) 개조 (或頗省改)한 소전자 였다[7].
강희자전 해(解)자 풀이에, 북위에는해비씨(解枇氏)”와 비씨(費氏)가 있었다:
姓苑》北魏有解枇氏,後攺爲解氏. 햇볓 (sunray)이라는 뜻이 해비씨(解枇氏)다. 고구려 성에 북씨 (北bèi/빼이;又髙麗姓)씨가 있었다[8]. 즉 해(解)씨가 있었다는 뜻이다. 고구려 부여 백제에는 해(解)씨가 있었다.
삼국지 종회전(鍾會傳)에 <왕필(王弼, 226년- 249년)의 역주에는 여기저기에
고려언어(注易,往往有高麗言)가 있다>고 했다.
진수는 삼국지 동이전에 졸본부여에 있던 옛 도읍지를 “古都, 別都, 骨都”라고 기록 했다[9]. 뼈골 (骨)자는 옛 고(古,舊)와 같은 뜻으로 씌였다. 모두 다 같은 <구닥 다리 하는 구(gǔ)란 어음(voice) 을 사음한 글자>인 듯 하다. 왕충의 논형(論衡 吉驗)에는 동명(東明)에게 명하여 당도에 가서 부여의 왕이 되라 (命當都王夫餘)고 했다[6]. 서쪽에서 온 유목민을 다스리던 정신적 지도자 (壇君, 禮君)가 부여 일대에 살았었다는 표현을 오환고도(烏丸古都)라 했다. 한무제가 우거왕의 수도를 점령하고 대 학살을 했다는 근거가 글자 골도(骨都)에 있다. 조선 사람들은 사방으로 흐터졌다. 한서에 호는 북쪽(居北方 胡之域也) 으로, 낭랑 바닷속에는 왜가 있다(樂浪海中有倭人)는 문구다 .
이로서 골동품 (骨董品)이란 낱말의 어원이 밝혀 졌다.고조선의 유물이란 뜻에서 나온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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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毋wú móu :《唐韻》武扶切.𠀤音無。古人云:毋,猶今人言莫也。又《儀禮·士相見禮》毋上于面,毋下于帶。
《鄭註》古文毋爲無。廣韻》毋丘或爲毋氏。 《何氏姓苑》云有毋終氏,《穀梁傳》作寧毋。毋音無。
[2].論語 子罕:子絕四:毋意,毋必,毋固,毋我。子曰:「主忠信,毋友不如己者,過則勿憚改。」
子曰:「君子不重則不威,學則不固。主忠信,無友不如己者,過則勿憚改。」
主忠信,論語 雍也: 子曰:「雍也可使南面。」孔子說:「仲弓可以當君主。」
原思為之宰,與之粟九百,辭。子曰:「毋!以與爾鄰里鄉黨乎!」
[3]. 毛詩正義 《伐木》,燕朋友故舊也.故《伐木》傳亦云:「丁丁,伐木聲。」而文王之詩,上有《鹿鳴》燕群臣,
下有《伐木》燕朋友,故舊廁於其間,與之為類,因以為文王燕兄弟之詩
[4]. 中論 貴驗:《詩》曰:「伐木丁丁,鳥鳴嚶嚶。出自幽谷,遷于喬木。」言朋友之義務,在切直以升於善道者也。
故君子不友不如己者,非羞彼而大我也,不如己者須己而植者也
[5].勿:州里所建旗。象其柄,有三游。雜帛,幅半異。所以趣民,故遽,稱勿勿。凡勿之屬皆从勿.音物。《集韻》或作𣃦。通作物。《周禮·春官·司常》九旗雜帛爲物。又《玉篇》非也。《廣韻》無也。《增韻》毋也。《韻會》莫也。《通志》勿,州里之旗也。而爲勿不之勿,借同音,不借義。《論語》非禮勿視。《朱註》勿者,禁止之辭及考《說文》乃知怱遽者稱爲勿勿。《東觀餘論》今俗勿中加點作匆,爲怱遽字,彌失眞矣。
昜:開也。从日、一、勿。一曰飛揚。一曰長也。一曰彊者眾皃
[6].白虎通德論 誅伐: 王者受命而起,諸侯有臣弒君而立,當誅君身死,子不得繼者,以其逆,無所天也。《詩》云:
「毋封靡於爾邦,惟王其崇之。」此言追誅大罪也。或盜天子土地,自立為諸侯,絕之而已.詩經 清廟之什 烈文: 無封靡于爾邦、維王其崇之.
[7].說文解字 卷一 序: 其後諸侯力政,不統於王。惡禮樂之害己,而皆去其典籍。分為七國,田疇異畝,車涂異軌, 律令異法,衣冠異制,言語異聲,文字異形。秦始皇帝初兼天下,丞相李斯乃奏同之,罷其不與秦文合者。斯作《倉頡篇》。中車府令趙高作《爰歷篇》。大史令胡毋敬作《博學篇》。皆取《史籀》大篆,或頗省改,所謂小篆也,
[8].北:髙麗姓又漢複姓七氏左傳衞大夫北宫貞子莊子有北門成漢有北唐子眞治京氏易丗本云晉有髙人隱於北唐因以爲氏晏子云齊有北郭先生名騷古有北人無擇清身絜己疾丗之濁自投淸冷之淵姓苑有北郷北野氏。博墨切. 無擇가고죽국(孤竹國, 墨胎.
[9].三國志 東夷傳: 其後高句麗背叛,又遣偏師致討,窮追極遠,踰烏丸、骨都,過沃沮,踐肅慎之庭,東臨大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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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nuary 14, 2019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