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의 세로운 고찰-2:
의문의 안동대장군 왜국왕(安東大將軍 倭國王)이란 문구:
동북아시아 상고사에는 왜왕(倭王,倭國王)이란 글자가 여러 시대와 장소에 나타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왜(倭國,倭人)자가 많이 나온다. 백제 본기에는 진사왕(辰斯王, 재위: 385년~392년) 때에 왜와 활발한 교류가 있었다. 고구려 백제 신라 왜 가야제국이 모두 한해 서북쪽에서 나타난던 시절이다. 일본 구주후쿠오카 시(福岡市) 해안에서는 왜왕인(委奴國王)이 발견 되었다. 일본에서 국보로 다루는 옥새의 글자를 중국에서는 왜소 왜(倭)자로 바꾸어 “漢倭奴國王印”라 한다. 또 다른 왜왕이 다스리던 땅이 한해 동남쪽 연안(倭地溫暖,冬夏食生菜,皆徒跣) 오늘의 구주 남쪽과 유구 열도에도 있었다. 이지역 사람들이 키가 삼사척 이라 작다(人長三四尺)하여 왜(倭)자를 형용사로 썼다. 이렇게 왜(倭)자는 높다 위대하다는 동북아시아 고대어(tungusic language)의 음을 사음한 글자다. 같은 글자를 훈역하여 왜소한 사람이란 뜻으로 쓰기도 했다.
중국 기록에 신라 임나 가라(新羅 任那 加羅)를 다스렸다는 안동대장군 왜국왕(安東大將軍 倭國王)이란 곳을 찾으려면 언제 어느 누가 한해(翰海)를 처음으로 건넜나를 찾아야 한다.
남제의 심약(沈約:441~513年)이 편술한 유송(劉宋:420년 ~ 479년) 역사서(宋書 夷蠻)에는 당시 유송의 해안선에 있던 여러 부족과 국가를 설명 했다(*[. 宋書 卷九十七列傳第五十七 夷蠻:居大海中洲上,相去或三五千里,遠者二三萬里,乘舶舉帆,道里不可詳知。外國諸夷雖言里數,非定實也.]):
“바닷속 섬에 산다. 외국 여러 족속은 이수를 몰라 믿기가 어럽다. 흔히 3-천리 먼곳은 2-3만리를 배를 타고 돗을 올려(乘舶舉帆)가는 길이라 거리(里數)를 자세히 알수는 없다”
당시에 바람과 조류를 타고 먼 바다를 다녔다. 먼거리를 오랫동안 뱃속에서 생존할수 있는 장비가 구비 되였었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유송시절에는 중국 동남 해안을 따라 교류가 왕성 했다. 때때로 해안 에 들려 필수품을 공급 받았다고 본다. 송서에 나타난 왜와의 교류 내용이 실렸다. 초 2년(高祖永初二年)인 421년에 왜찬(倭贊萬里修貢,遠誠宜甄,可賜除授)이 만리길을 어렵게 와서 공물을 바치니, 멀리서온 성의를 밝혀 세로운 작위를 줌이 마땅하다>는 뜻의 소(詔曰)를 내렸다. 그후
425년(太祖元嘉二年)에 왜찬(倭贊)이 방물을 보냈다.찬이 죽고 동생 진이 뒤를 이어(贊死,弟珍立) 사신을 통해 공헌했다. 그가 스스로 6국을 다스리는 안동대장군 왜국왕“自稱使持節、都督倭百濟新羅任那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國王”이라 했다. 송나라 조정에서는 이를 안동장군 왜국왕(詔除安東將軍、倭國王)이란 문구를 제거 했다(*[. 宋書 卷九十七列傳第五十七 夷蠻: 高祖永初二年,詔曰:「倭贊萬里修貢,遠誠宜甄,可賜除授。」太祖元嘉二年,贊又遣司馬曹達奉表獻方物。贊死,弟珍立,遣使貢獻。自稱使持節、都督倭百濟新羅任那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國王。表求除正,詔除安東將軍、倭國王.]). 그 후 작위를 놓고 주거니 받거니 흥정 하다 462년(世祖大明六年)에 발표한 소에 왜왕 세자 흥(倭王世子興)의 공로를 인정하여 안동장군 왜국왕(可安東將軍、倭國王)이라 했다. 흥이 죽고 동생 무가 집권하고 스스로 (나라 하나를 더하여) 이라 했다(*[. 宋書 卷九十七列傳第五十七 夷蠻: 世祖大明六年,詔曰:「倭王世子興,奕世載忠,作籓外海,稟化寧境,恭修貢職。新嗣邊業,宜授爵號,可安東將軍、倭國王。」興死,弟武立,自稱使持節、都督倭百濟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七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國王。]).
백제왕 비유왕(毗有王,?~455,재위 기간 427~455) 비가 죽고(毗死) 아들 경(子慶代立.餘慶, 扶餘慶.개로왕蓋鹵王, 재위: 455년~475년)이 즉위하여 457년 (宋世祖大明元年)에 송나라에 사신을 보냈다(*[. 宋書: 通典邊防一 新羅:至隋文帝時,遣使來貢。其王姓金名真平,隋東蕃風俗記云:「金姓相承三十餘葉。」文帝拜為樂浪郡公、新羅王。其王至今亦姓金。按梁史云姓慕,未詳中間易姓之由。其先附屬於百濟,後因百濟征高麗,人不堪戎役,相率歸之,遂致強盛,因襲加羅、任那諸國,滅之。並三韓之地。其西北界犬牙出高麗、百濟之間.]). 그에 따르면, 478년(宋順帝升明二年)에 왜국왕 무(武)는 중국에 표를 보내 “사지절·도독 왜 백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칠국제군사·안동대장군·왜국왕(使持節·都督倭 百濟 新羅 任那 加羅 秦韓 慕韓七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國王)”이라는 작위를 요청하였다. 송나라 조정에서는 백제 이름은 제거 하고 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육국제국사 안동대장군 왜왕“詔除武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王”이란 작위를 주었다(*[.宋書:毗死,子慶代立。世祖大明元年,遣使求除授,詔許。二年,慶遣使上表曰:「臣國累葉,偏受殊恩,文武良輔,世蒙朝爵。行冠軍將軍右賢王餘紀等十一人,忠勤宜在顯進,伏願垂愍,並聽賜除。」仍以行冠軍將軍右賢王餘紀為冠軍將軍。以行征虜將軍左賢王餘昆、行征虜將軍餘暈並為征虜將軍。倭國,在高驪東南大海中,世修貢職。高祖永初二年,詔曰.二十年,倭國王濟遣使奉獻,復以為安東將軍、倭國王。二十八年,加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將軍如故.]).
그후 유송 최후가 되는 479년(順帝升明二年)에 왜에서 보낸 편지에는 는 내용이 있다(*[.宋書: 順帝升明二年,遣使上表曰:「封國偏遠,作籓於外,自昔祖禰,躬擐甲胄,跋涉山川,不遑寧處。東征毛人五十五國,西服眾夷六十六國,渡平海北九十五國,王道融泰,廓土遐畿,累葉朝宗,不愆于歲。臣雖下愚,忝胤先緒,驅率所統,歸崇天極,道遙百濟,裝治船舫,而句驪無道,圖欲見吞,掠抄邊隸,虔劉不已,每致稽滯,以失良風。雖曰進路,或通或不。臣亡考濟實忿寇仇,壅塞天路,控弦百萬,義聲感激,方欲大舉,奄喪父兄,使垂成之功,不獲一簣。居在諒暗,不動兵甲,是以偃息未捷。至今欲練甲治兵,申父兄之志,義士虎賁,文武效功,白刃交前,亦所不顧。若以帝德覆載,摧此彊敵,克靖方難,無替前功。竊自假開府儀同三司,其餘咸各假授,以勸忠節。」詔除武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王。]).
유송의 순제 유준(宋順帝劉準:467年-479年)이 소도성(蕭道成, 427년 ~ 482년)에게 양위하여 남제(南齊; 479년 ~ 502년)가 나타났다. 고구려 장수왕(長壽王 巨璉: 394년~491년, 재위: 412년? – 491년)이 475년에 백제 수도 한성(王所都漢城. 대동강 하류 낭랑유적지)을 점령고 개로왕(扶餘慶)을 살해한 이후다. 강남의 남제와 교류를 텄다. 바닷속에서 백제의 피란민을 잡아 남제에 보네 소도성으로 부터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 이한 작위를 받았다. 이로 인하여 북조의 강자 북위로 부터 꾸지람(魏高祖詔責王)을 받았다(*[.三國史記:六十三年,春二月,遣使入魏朝貢。秋八月,遣使入魏朝貢。九月,王帥兵三萬,侵百濟,陷王所都漢城,殺其王扶餘慶,虜男女八千而歸.六十八年,夏四月,南齊太祖蕭道成,策王為驃騎大將軍。王遣使餘奴等,朝聘南齊,魏光州人,於海中得餘奴等,送闕。魏高祖詔責王曰:「道成親弑其君,竊位號江左。朕方欲興滅國於舊邦,繼絶世於劉氏,而卿越境外交,遠通簒賊,豈是藩臣守節之義?今不以一過掩卿舊款,卽送還藩,其感恕恩思愆,祗承明憲,輯寧所部,勤動靜以聞。」]).
옛 졸본부여 평양에 수도를 두었던 장수왕은 중원의 남북조 세력과 교류 했다. 그 이전에 광개토대왕(374년 ~ 413년)이 요동만을 건넜다.
당나라 때 편찬된 통전(通典新羅)에는 신라가 남만주에서 한반도 동남 연안으로 옮겨온 이후 처음으로 중원에 사신을 보냈다. 그 기록에 아래와 같은 문장이 있다:
통전의 기록을 보면, 논란이 되는 가라와 임나(加羅、任那)가 한반도 남쪽에 있었다. 그 시기는 광개토대왕이 발해 요동만 일대를 석권하던 백제 세력을 물리친 이후 경주에 수도를 정한 신라가 가야를 흡수한 사실을 기록 했다. 한강 하구에서 산동반도로 가는 해상로를 신라가 사용 했다.
북송의 사마광(司馬光:1019年 — 1086年)이 편술한 자치통감(資治通鑑)에도 수양제 때인 608년에 왜왕 다리사비고(倭王多利思比孤)가 사신을 보네 현 일본 열도와의 교류가 시작되었다(*[.資治通鑑 ●卷第一百八十一:煬皇帝上之下大業四年戊辰,公元六零八年
倭王多利思比孤遣使入貢,遺帝書曰:「日出處天子致書日沒處天子無恙。」帝覽之,不悅,謂鴻臚卿曰:「蠻夷書無禮者,勿復以聞。」]). 왜왕이 보낸 편지에 “日出處天子致書日沒處天子無恙>”란 문구는가 있다. 화친결혼을 했던 흉노가 한 고조 부인에게 보넸던 편지와 같이 였다.
이를 종합해 보면 이다. 고구려가 막았고 있었다는 문구는 비유왕(毗有王. 百濟王餘毗, 재위 : 427년 ~ 455년)의 아들,개로왕(蓋鹵王餘慶, ? ~ 475년 9월)이 북위(北魏)에 구원을 청했던 내용과 같다. 송서 왜인전에 나오는 우리 옛 할아버지 니예 (自昔祖禰)와 양서에 나오는 (賛死立弟彌 彌死立子濟)는 삼국지 왜인전에 나오는 친위왜왕 비미호(親魏倭王卑彌呼)의 미자와 같은 뜻을 지닌 글자다. 이는 백제 구이신왕(久爾辛王;재위 420∼427)을 의미 했다.
송서에 일본 열도 전역을 정벌 했다고 편지를 작성한 왜왕의 위치는 한반도 서남 해안에 있던 반도 백제의 수도였다.
대륙에 있던 백제, 북제(高濟,北齊:550-577년)와 같은 시절에 남쪽 내륙에 있었던 양나라(梁:502-557년)의 역사서(梁書)는 당나라 때에 요사(姚思廉:557年 — 637年)이 편찬 했다. 삼국지 왜인전을 서두로 하고 그 후에 나타난 사실을 기록 했다. 당시에 하북 평원은 선비족이 석권하여 오호 십육국 시대라 한다. 중원의 동해안은 고조선 후예들이 관장 했다. 그 내용에 강남으로 도망 갔던 동진안제(晉安帝; 382年-419年)시절로 부터 왜오왕(倭五王)의 이름이 찬(讚), 진(珍), 제(濟), 흥(興), 무(武) 라고 했다. 광개토대왕 이후에 왜오왕 첫번쩨인 찬(讚)이 나타났다. 그들에게 진동대장군 또는 정동장군(鎮東大將軍。高祖卽位,進武號征東將軍)이라 했다. 뒤를 이어 왜의 남쪽에는 키가 작은 사람들이 사는 (侏儒國、裸國、黑齒國)이 있다고 했다[. 梁書:晉安帝時有倭王賛 賛死立弟彌 彌死立子濟 濟死立子興 興死立弟武 齊建元中除武持節督倭新羅任那伽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鎮東大將軍 高祖即位進武號征東大將軍.其南有侏儒国 人長三四尺 又南黒齒國裸國 去倭四千餘里船行可一年至 又西南萬里有海人 身黒眼白裸而醜其肉羙行者或射而食之]. 그러나 수서,구당서에는 그러한 이름이 없고 백제 장군 흑치상치가 실렸다. 통전(通典 倭)에 [.通典邊防一倭: 隋文帝開皇二十年,倭王姓阿每,名多利思比孤,其國號「阿輩雞彌」,華言天兒也,遣使詣闕.又千餘里至侏儒國,人長三四尺。自侏儒東南行船行一年至裸國、黑齒國,使驛所傳,極於此矣.倭一名日本,自云國在日邊,故以為稱。武太后長安二年,遣其大臣朝臣真人貢方物.]. 양서는 이 내용을 인용 했다. 진동 정동 하는 어휘는 양나라의 수도를 영점으로 한 시각에서 표현 했다. 왜오왕(倭五王)의 이름은 남조의 동쪽 해안을 통치 했던 대륙백제 지도자 부여씨(扶餘氏)의 이름자다.
남만주에서 는 문구가 삼국유사에 있다. 고조선의 후예들은 한해의 서쪽 해안을 따라서도 내려 갔었다. 신라 지증왕(智證王, 437년~514년, 재위: 500년~514년) 이전을 상고 그후를 중고 (已上為上古已下為 中古)라 했다. 이 시기에 신라는 수도를 오늘의 경주지역으로 옮겼다. 그 후에 진흥왕(眞興王, 526년~576년, 재위: 540년~576년)이 북제 무성황제로 부터 처음으로 중원에 사절단을 보내서 낭랑군공 신라(樂浪郡公新羅王)란 칭호를 받았다. 북제 남쪽에 있던 진(陳; 557년 ~ 589년)나라로 부는 불경(釋氏經論千七百餘卷)을 받았다[. 三國史記 新羅本紀第四:二十六年,春二月,北齊武成皇帝詔,以王為使持節東夷校尉樂浪郡公新羅王。秋八月,命阿●春賦出守國原。九月,廢完山州,置大耶州。陳遣使劉思與僧明觀,來聘,送釋氏經論千七百餘卷]. 같은 작위를 그의 손자 진평왕(眞平王, 재위 579년 ~ 632년)이 수 문제로 부터 받았다. 진흥왕이 한반도 동남과 서 북쪽 네 곳에 순수비를 세웠다. 한강을 따라 네려가 중원으로 가는 해상통로를 장악 했다. 이 시절에 양자강 이남에서 한반도 서해안에 이르는 통로를 사용 했다. 그 이전에 어느 누가 한해 남로(翰海南路)를 개발 했었다.
태평어람(太平御覽 倭)에는 왜에 관한 자세한 설명이 있다. 오호 십육국 시대 동진의 제10대 안제(晉 安帝; 396년 ~ 418년) 때에 왜왕 찬이 사신을 보네(倭王贊遣使) 조공물 바쳤다[. 太平御覽 四夷部三·東夷三倭:《南史》曰:倭國風俗不淫,男女皆露髻。富貴者以錦繡雜采為帽,似中國胡公頭。晉安帝時,有倭王贊遣使朝貢。宋武帝永初二年,詔曰:「倭王贊遠誠宜甄,可賜除授。」文帝元嘉二年,贊又遣使奉表獻方物。贊死,弟珍立,遣使貢獻,自稱使持節都督倭、百濟、新羅、任那、秦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國王,詔除安東將軍、倭國王。珍又求除正倭洧等十三人平西征虜冠軍號,詔并聽之。自此朝貢不絕。至順帝升明二年,倭王武遣使上表言:「自昔祖禰躬擐甲胄,跋涉山川,不遑寧處,東征毛人五十五國,西服眾夷六十六國,陵平海北九十五國,王道融泰,廓士遐畿,累葉朝宗,不愆于歲。道過百濟,裝飾船舫,而句麗無道,圖欲見吞。臣亡考濟,方欲大舉,奄喪父兄,使垂成之功,不獲一簣。今欲練兵,申父兄之志,竊自假開府儀三司,其餘咸各假授,以勸忠節。」詔除武使持節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國王。至齊建元中,及梁武帝時,并來朝貢.]. 426년(南宋文帝元嘉二年)에 찬이 죽고 동생 진(珍)이 왕 (贊死,弟珍立.自稱使持節都督倭、百濟、新羅、任那、秦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國王,詔除安東將軍、倭國王)이 되었다. 양서에 실린 왜오왕의 이름이다. 삼국사기 백제 본기에는 그러한 이름이 없다. 시대적으로는 남만주에서 고구려가 득세 하여 광개토대왕에게 요동 반도 끝의 요새마저 빼았기고 쫒겨 났다. 뒤를 이은 장수왕 (413년 ~ 491년)이 취임한 해에 동진(東晉)에 사신을 보네 안제(晉安帝:382年-419年)로 부터 고구려왕 낙안 즉 낭랑군공(樂安郡樂浪郡公)이란 칭호를 받았다[.三國史記 高句麗本紀第六: 長壽王,諱巨連一作璉。開土王之元子也。開土王十八年,立為太子.元年,遣長史高翼,入晉奉表,獻●白馬。安帝封王高句麗王樂安郡樂浪郡}}}公. 十二年,新羅遣使修聘.十五年,移都平壤. ]. 제임 12년에는 신라에 사신을 보네(新羅遣使修聘) 그들의 노고를 위로했다.
신대왕 백고(新大王伯固)의 큰아들 발기(拔奇, 發岐, ? ~ 197년)가 왕위 계승을 못한 사건으로 졸본부여에서 국내성(丸都城)으로 옮겼던 수도를 했다. 옛적에 요동만 서쪽에 있던 신라를 부용국으로 했다. 장수왕은 계속 백제를 추격하여 반도백제의 수도 한성(漢城.其北岸狗邪韓國. 대동강 하류 낭랑유적)을 전령 했다. 계속 남쪽으로 진출하여 충주에 고구려비를 세웠다.
그 전투에서 백제 개로왕 (蓋鹵王;재위: 455년~475년)부여경(王扶餘慶)이 피살당하고 백제는 한반도 서남쪽으로 수도를 옮겼다. 대동강 하류 한성에 있던 부여경은 대륙에 있던 북위(北魏, 386년~534년)와 동남쪽에 있던 신라에 구원을 청했지만 구원병이 오기전에 전쟁이 끝났다. 개로왕이 북위에 올린 편지에 사신으로 대방태수 장무(張茂等)등이 “投舫波阻,搜徑玄津,託命自然之運,遣進萬一之誠”란 문구가 있다. 천운에 생명을 맞기고 대동강 하구에서 뱃길로 산동반도 아니면 천진항에 이르렀다는 뜻이다. 고구려가 해상통로를 장악 했다는 뜻을 사랑격로(豺狼隔路)라 했다[. 三國史記: 四十一年,冬十月,百濟王率帥兵三萬,來攻平壤城。王出師拒之,為流矢所中。是月二十三日,薨。葬于故國之原。百濟蓋鹵王表魏曰:「梟斬釗首。」過辭也。蓋鹵王或云近蓋婁。諱慶司,毗有王之長子.十八年,遣使朝魏。上表曰:「臣立國東極,豺狼隔路,雖世承靈化,莫由奉藩。瞻望雲闕,馳情罔極,凉風微應。伏惟皇帝陛下,●協和天休,不勝係仰之情。謹遣私署冠軍將軍駙馬都尉弗斯侯長史餘禮,龍●將軍帶方太守司馬張茂等,投舫波阻,搜徑玄津,託命自然之運,遣進萬一之誠。冀神祗祇垂感,皇靈洪覆,克達天庭,宣暢臣志,雖旦聞夕沒,永無餘恨。」].
부여의 후손 비류가 옛 선조들이 살던 조선땅이 였던 발해만 서남쪽에 자리잡았던 대륙백제를 왜(倭)로 기록하였고, 동생이 세운 반도 백제의 첫 수도는 남만주 해안에 위례성(慰禮城)있어 사료 분석에 혼란이 왔다. 요동만 북쪽 해안을 따라 뱃길로 이 두 지역을 왕래 했다. 고구려와 백제는 이해안선 소유권을 놓고 오랫동안 다투었다. 고국원왕(故國原王, 재위: 331년 ~ 371년)이 잃었던 옛 서울 졸본부여를 되찾으려고 백제를 공략하려다가 371년 전쟁에서 전사하였다[. 三國史記 新羅本紀第一:自辰韓遺民,以至卞韓、樂浪、倭人,無不畏懷,而吾王謙虛,遣下臣,修聘,可謂過於禮矣,而大王赫怒,劫之以兵,是何意耶?」王憤欲殺之,左右諫止,乃許歸。前此,中國之人,苦秦亂,東來者衆,多處馬韓東,與辰韓雜居,至是●寢盛。故馬韓忌之,有責焉。瓠公者,未詳其族姓。本倭人,初以瓠繫腰,渡海而來,故稱瓠公.三國史記 百濟本紀第六:古史曰:」百濟與高句麗,同出扶餘。「又云:」秦、漢亂離之時,中國人多竄海東.]. 광개토대왕이 숙적 백제를 물리 치고 요동반도 끝에 있는 요충지 관미성(關彌城)을 점령하여 발해 요동만의 해상권을 빼았었다[. 三國史記 新羅本紀第一:自辰韓遺民,以至卞韓、樂浪、倭人,無不畏懷,而吾王謙虛,遣下臣,修聘,可謂過於禮矣,而大王赫怒,劫之以兵,是何意耶?」王憤欲殺之,左右諫止,乃許歸。前此,中國之人,苦秦亂,東來者衆,多處馬韓東,與辰韓雜居,至是●寢盛。故馬韓忌之,有責焉。瓠公者,未詳其族姓。本倭人,初以瓠繫腰,渡海而來,故稱瓠公.三國史記 百濟本紀第六:古史曰:」百濟與高句麗,同出扶餘。「又云:」秦、漢亂離之時,中國人多竄海東.].
광개토대왕 비문에 있다. 문제가 되는“능왜이 신묘년 래(而倭以辛卯年來)로 읽어, 연래(年來)을 “xx년 부터 계속하여”란 숙어로 풀이 하지 말고, 두 글자를 떼여 순서 대로 풀이 하면, 그 전의 전쟁에서 얻어온 왜인 포로 중에 바다에서 배를 잘 다를 수 있는 제능(才能)이 있는 자들(而)이 드디어 “신묘년 (가을)에 대왕의 군영에 와서 (來)” 이들을 사공으로 사용(以)하여 노를 젓는 배를 타고 고구려 군사가 바다를 건너 발해만 동남쪽 요동 반도 끝에 이르러 백제가 가장 중요시 하던 통상로에 있는 성을 함락 했다는 뜻이다. 이 사실이 삼국사기에는 “대왕 원년 겨울 10월에 백제의 관미성(攻陷百濟關彌城)을 쳐서 함락 시켰다. 그 성은 사방이 험준하고 바닷물에 둘러 싸여서 왕은 군사를 일곱 갈래로 나누어 공격 한지 20일 만에야 함락 시켰다”고 했다. 광개토대왕 비문에 미추성(彌鄒城)이 비류가 자리잡은 대방 고지 미추홀(彌鄒忽)이다. 광개토대왕이 뱃길로 요동만을 가로 질러 백제의 허를 찔러 성공한 상육 작전을 이루었다. 장수왕의 손자가 문자명왕(文咨明王, 재위 : 491년 ~ 519년)이 중원의 요구를 거절 하면서 섬라(耽羅, 涉羅, 제주도)는 백제의 영토가 되었다고 했다. 한해의 동남 지역통로, 즉 한해남로(翰海南路)는 백제가 개발하여 강남에서 제주도와 한반도를 거처 구주에 이르는 뱃길을 계속 유지 했다. 후에 수나라 전한이 탐라에 표류 하여 백제를 통해서 수나라에 돌려 보냈다.
대륙 백제가 (옛적에 고구려에 밀려 나기전에)하북 평원에서 활발하게 해양권을 소유한 강자로 대륙을 본향으로 하던 선비족과 싸웠다. 남제서 동남이(南齊書東南夷)편에는 고구려 장수왕(長壽王.高麗王樂浪公高璉)과 싸우던 백제 남만주를 통하여 중원에 이르던 한해 북로(翰海北路)를 고구려에 빼았기고 한해의 동서남쪽으로 떠난 시절의 상황이 실렸다[. 三國史記 新羅本紀第一:自辰韓遺民,以至卞韓、樂浪、倭人,無不畏懷,而吾王謙虛,遣下臣,修聘,可謂過於禮矣,而大王赫怒,劫之以兵,是何意耶?」王憤欲殺之,左右諫止,乃許歸。前此,中國之人,苦秦亂,東來者衆,多處馬韓東,與辰韓雜居,至是●寢盛。故馬韓忌之,有責焉。瓠公者,未詳其族姓。本倭人,初以瓠繫腰,渡海而來,故稱瓠公.三國史記 百濟本紀第六:古史曰:」百濟與高句麗,同出扶餘。「又云:」秦、漢亂離之時,中國人多竄海東.]. 그 내용에 동성왕 모대(東城王 牟大: 재위 : 479년~501년)가 나타난다[. 三國史記 新羅本紀第三:十五年,春三月,百濟王牟大遣使請婚,王以伊伐●比智女,送之.十六年,將軍實竹等,與高句麗戰薩水之原,不克,退保犬牙城,高句麗兵圍之,百濟王牟大遣兵三千,救解圍.
三國史記 百濟本紀第四:東城王,諱牟大或作摩牟摩帝。文周王弟昆支之子.又永明八年,百濟王牟大遣使上表。遣謁者僕射孫副,策命大襲亡祖父牟都,為百濟王,曰:「於戱,惟爾世襲忠勤,誠著遐表,海路肅澄,要貢無替,式循彛典,用纂顯命,往敬哉。其敬膺休業,可不愼歟。行都督百濟諸軍事鎭東大將軍百濟王。」而『三韓古記』無牟都為王之事。又按牟大,盖鹵王之孫,盖鹵第二子昆支之子,不言其祖牟都,則『齊書』所載,不可不疑.]. 진동대장군 백제왕 모대(鎮東大將軍百濟王牟大)가 올린 표(表曰)에 있다: <태시중에 이르러 (泰始中; 465년-471년) 서는 이웃에 있던 송나라에 사신 (比使宋朝)을 보냈다. 조부 모도(牟都)의 작위를 이어 받아 백제왕에 봉했다. 위로(魏虜) 수십만명이 백제를 공격하려고 국경을 너머 와서 해례곤(解禮昆)과 목간나 (木干那)등을 보내 무찔렀다는 등 찬란 했던 시절을 알렸다. 삼한의 하나였던 가라국왕 하지(加羅國王荷知使來獻)가 남제(南齊;479년 ~ 502년)의 초대 황제 소도성(高帝萧道成)에게479년?(建元元年)에 사신을 보냈다[.南齊書 卷五十八列傳第三十九 東南夷:加羅國,三韓種也。建元元年,國王荷知使來獻。詔曰:「量廣始登,遠夷洽化。加羅王荷知款關海外,奉贄東遐。可授輔國將軍、本國王。」
倭國,在帶方東南大海島中,漢末以來,立女王。土俗已見前史。建元元年,進新除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王武號為鎮東大將軍]. 소에 나오는 합화(詔曰:洽化)란 문구는 물이 합쳐서 화합 했다는 뜻이 있다. 하지의 가라국(加羅國)은 중원 땅에 있었다.
위로(魏虜), 혐융(獫狁), 이 불손(弗悛)하게 많은 병사를 동원하여,낙랑태수(樂浪太守), 조선태수신 장한 (朝鮮太守臣張塞) 등 등, 여러 상황을 종합해 보면 전쟁터는 하북평원이였고 하지(荷知)가 다스리던 가라국(加羅國)은 광개토대왕 비문에 나타난 임나 가라“自倭*背急追至任那加羅*從拔城”다. 발해만 연안에 있었다. 백제왕 모대 (牟大)의 선조는 대륙백제 고(高)씨가 모용씨(慕容)와 같이 서진 말기에 서쪽에서 나타난 선비족 탁발씨 (托跋氏)의 친입을 맞아 싸워 이긴 상황을 설명 했다. 대륙백제의 혈통을 로 기록 했다. 전연(前燕)의 초대 황제가 된 모용황 (慕容皝, 297년- 348년)을 조선공 (朝鮮公)으로 봉했다. 북사에도 조선후 (朝鲜侯)란 칭호가 나타난다. 비류가 떠났던 졸본주를 동왜(東倭)라 했다. 그가 정착 했던 발해만 연안 미추홀(彌鄒忽)이 있던 곳을 후한서에서 왜인(倭人,倭人國)이 사는 곳이라 했다[.後漢書烏桓鮮卑列傳:檀石槐乃自徇行,見烏侯秦水廣從數百里,水停不流,其中有魚,不能得之。聞倭人善網捕,於是東擊倭人國,得千餘家,徙置秦水上,令捕魚以助糧食.]. 이 곳에서 단석괴(檀石槐)가 그믈로 생선을 잘잡는 한인(汗人,汗國)을 잡았다[.三國志 鮮卑傳:聞汗人善捕魚,於是檀石槐東擊汗國,得千餘家,徙置烏侯秦水上,使捕魚以助糧。至于今,烏侯秦水上有汗人數百戶。]. 발해만 서남쪽 연안이 왜인(倭人,倭人國)의 본향이다. 발기(拔奇)가 도망 가서 공손도(公孫度)에게 의존 했다는 요동(遼東)을 왜(倭), 그가 돌아온 비류수(沸流水)상 졸본부여(卒本扶餘)를 진서(晉書)에는 동왜(東倭)라 했다[.三國志 魏書三十 高句麗傳:伯固死,有二子,長子拔奇,小子伊夷模。拔奇不肖,國人便共立伊夷模為王。拔奇怨為兄而不得立,與涓奴加各將下戶三萬餘口詣康降,還住沸流水。降胡亦叛伊夷模,伊夷模更作新國,今日所在是也。拔奇遂往遼東,有子留句麗國,今古雛加駮位居是也。其後復擊玄菟,玄菟與遼東合擊,大破之.
三國史記 高句麗本紀第四:國人又無從發●者。發●知難,以妻子奔遼東。見大守太守公孫度公孫康.晉書 帝紀第一:宣皇帝諱懿,字仲達.魏正始元年春正月,東倭重譯納貢,焉耆、危須諸國,弱水以南,鮮卑名王,皆遣使來獻。天子歸美宰輔,又增帝封邑。初,魏明帝好脩宮室,制度靡麗,百姓苦之。帝自遼東還,役者猶萬餘人,雕玩之物動以千計。].
결론: 태평어람에 “倭、新羅、任那、加羅、秦, 韓六國”은 발해만에서 부터 한해의 서북쪽연안에 흐터져 있던 여섯 국가를 뜻했다. 같은 내용을 송서(宋書)에는 진한 모한 6국 (秦韓慕韓六國)이라 했다. 진한 전란에 중원 사람들이 일본 열도에 도망 갔다는 뜻이라 신빙성이 없다. 삼국지 진한전에 나오는 낭랑인이 동쪽으로 와서 여섯 나라를 세웠다는 진한자(秦韓者)를 뜻했던 곳이다[. 漢書 地理志下: 遼東郡。縣十八:襄平,新昌,無慮,望平,房,候城,遼隊,遼陽,險瀆,居就,高顯,安市,武次,平郭,西安平,文,番汗,沓氏. 三國史記: 王遣將,襲漢遼東西安平縣,殺帶方令,掠得樂浪大守太守妻子。 『梁書』:「以司馬懿討公孫淵,王遣將,襲西安平,毋丘儉來侵。」『通鑑』:「以得來諫王,為王位宮時事。」 三國志 句麗作國,依大水而居,西安平縣北有小水,南流入海,句麗別種依小水作國,因名之為小水貊,出好弓, 所謂貊弓是也. 通典 高句麗:漢遼東郡西安平縣北有小水,南流入海,句麗之別種,依小水作居,因名之為小水貊 ]. 삼국사기에는 신라와 백제 초기에 관한 기록에 진시황 때부터 한나라에 이르는 중원의 혼란기(秦、漢亂離之時)에 많은 사람들이 남만주로 들어 왔다는 기록이 있다[. 三國史記 新羅本紀第一:自辰韓遺民,以至卞韓、樂浪、倭人,無不畏懷,而吾王謙虛,遣下臣,修聘,可謂過於禮矣,而大王赫怒,劫之以兵,是何意耶?」王憤欲殺之,左右諫止,乃許歸。前此,中國之人,苦秦亂,東來者衆,多處馬韓東,與辰韓雜居,至是●寢盛。故馬韓忌之,有責焉。瓠公者,未詳其族姓。本倭人,初以瓠繫腰,渡海而來,故稱瓠公.三國史記 百濟本紀第六:古史曰:」百濟與高句麗,同出扶餘。「又云:」秦、漢亂離之時,中國人多竄海東.].
남북조시대 나타나는 안동대장군 왜국왕(安東大將軍 倭國王)이란 문구는 중원의 동쪽 연안을 맡아 보던 직책이다. 한(汗人, 汗國)자를 왜(倭人, 倭國)자로 기록 하였듯이, 한해의 동서 양쪽을 통치 했던 이라고했다.
신라 임나 가라(新羅、任那、加羅) 진한 6국을 통치 했다는 지역은 한반도가 아니라 남만주 땅을 뜻했다. 발기(拔奇)가 도망 갔던 요동(遼東)을 왜(倭)라 하고, 그가 돌아온 비류수(沸流水)상 졸본부여(卒本扶餘)를 동왜(東倭)라 했다. 한때 이 일대를 통치하던 대륙백제의 부여씨(扶餘氏)가 중국 동해안을 따라 해안 일대를 통치 했다하여 안동대장군 왜국왕(安東大將軍 倭國王)이라 했다.
일본 구주후쿠오카 시(福岡市) 해안에서는 왜왕인(委奴國王)이 발견 되었다는 유물은 남만주에 살던 고조선 후예 지도자가 받았다. 그 후손이 삼국지 왜인전에 나타난 해상 통로를 따라 구주에 정착했었다는 증거다.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란 어휘는 훗날에 일본 사람들이 그들의 영역이 한반도에 있었다는 학설을 만들어 옛 사료를 잘못 풀이하여 만든 문구다.
Ps: 계속 연구하는 소제의 중간 보고 입니다. 앞으로 보충 수경이 불가피 하리라 봅니다.
끝.
Ps: 계속 연구하는 소제의 중간 보고 입니다. 앞으로 보충 수경이 불가피 하리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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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e 10, 2019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