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괘(利簋)명문-4: 箕子의 행적을 추적하여 찾은 조선의 위치:
기원 전 1046년에 목야전(牧野之戰)에 패한 상(商)나라는 하북평원에서 수도를 여러번 옮겼다. 반경(盤庚)이 5번 쩨로 옮겼다는 마지막 수도가 은(殷) 이다[1]. 그곳에서 상나라는 번창 했다. 기자가 패허가 된 옛 성터를 지나면서 (過故殷虛) 맥수가(麥秀歌) 를 읊었다[2].은허는 하남성(河南省) 안양 시 서북쪽 안양현(安陽縣) 으로 확인 되어 그 곳에서 많은 갑골문이 발굴 되었다
기자가 조선에 갔다 돌아 와서 주 왕실에 참배 하고 나서 옛 궁터를 지났다. 주 왕실에 참배하고 배푼 연회를 읊은 시문이 시경 소아 록명 (詩經 小雅 鹿鳴) 편이다[3]. 기자 일행을 귀한 손님(我有嘉賓) 이라고 했다. 일주서 왕회해 (逸周書 王會解)에 나타난 발인(發人) 이다[4]. 고조선 과 북당에서 온 사신들이 모두 사슴뿔 형상의 관을 쓰고 왔다. 그러한 관(解隃冠, 北唐以閭,閭似隃冠)을 서주 왕실에 선물로 바첬다. 면류관의 원형이다. 이러한 관을 쓴 제사장이 살던 곳이라 선비산이라고 알려진 남만주의 진산을 의무려산(醫巫閭山) 이라고 했다. 그러한 관을 쓰고 서주 왕실에서 패백을 올렸다. 해(解)나라에서 온 사신과 발인 (發人)은 같은 지역에서 온 사신이였다.
발인(發人) 만은 선물이 아닌 감사의 뜻을 전하러 왔다. 그 형상을 “麃麃者,若鹿,迅走”란 문구로 표현 했다. 여러 사서에는 <도망 갔던 사슴이 돌아 와서 업드려 운다>는 형상이라고 풀이 했다.
서주 성왕 때의 상황이다. 그 후로 성왕은 고조선 영역의 원주민을 소탕했다. 이 시기를 유가에서는 성강지치(成康之治)라 한다. 여러 사서를 종합해 보면 이 시절에 무왕을 도아 상나라를 정벌한 아버지 친구 단공(壇公)에게 이괘를 선물로 주고 주족의 염원이던 안읍 (安邑, 平陽, 鎬, 以箕子歸鎬京)을 빼았었다[5]. 시경 기부지습 사간 (祈父之什 斯干)이 안읍에 살던 성주다. 기부(祈父)이란 주 목천자 를 보좌하고 서왕무 를 만나고 온 사람이다. 그가 읊은 시문과 유사한 10편을 시문을 묶었다 하여 기부지습 (祈父之什
)이라 했다.
사간에는 배신 당한 눈물겨운 사연이 실려 있다. 또한 예적 한국 풍속이 실려 있다.
첫 시구 “질질사간 유유남산秩秩
斯干,幽幽南山”
의 “秩;禾,右:失”자는 생활 필수 품인 곡식을 잃었다는 복합 상형자다. 질/실자의 원형은 풍(豑; 豊, 弟)살던 사람의 의형제란 복합 상형자 라고 했다. 그 다음에 나타난 문구가 이를 확인 한다.
“如竹苞矣、如松茂矣。兄及弟矣、式相好矣、無相猶矣”
대나무 숲같이 무성하고 소나무가 우거지듯 형과 동생이여. 서로 아끼고 미워 함이 없이….
풍(豊)에 살던 주 족이 평양을 빼았아 사간(斯干)이 이끌던 부족은 가혹한 고통을 겪었다. 그러한 상황을 읊은 시문이 여러편 있다[6].
또한 시경에는 지금도 한국 어법에 많이 쓰이는<강조를 뜻하는 되풀이 표현(同語反復, 類義語反復Tautology) >이 많이 있다.
기부지습 (祈父之什)의 기부(祈父)는 한글 어순이다:
시경 풀이에는 옛 부터 논란이 많으나 특히 기부(祈父)는 좌전, 일주서, 한시외전 등등 여러 고전에서 풀이가 다르게 설명 했다. 어머니의 시신을 안고 “有母之尸雍”의 글자를 바꾸어 “有母之尸饔”라 했다.
祈父之什 祈父
祈父、予王之爪牙。
胡轉予于恤、靡所止居
祈父、予王之爪士。
胡轉予于恤、靡所底止
祈父、亶不聰。
胡轉予于恤、有母之尸饔. 《詩》曰:「有母之尸雍。」
**한글 어순으로 풀이해 본다.기부(祈父) 야외에서 지내는 제사(祭事,郊祭)를 맡아 보던 사람. 단(亶,旦)은 융족 부락의 지도자로 천신께 제사 드리는 임무를 맡았던 사람.
기부, 나는 왕의 친우병 지도자다.
(북쪽으로는)호의 영역을 돌며 갖은 고생 다 하고,
(서쪽) 모해 (말갈)사람들이 사는 집에 머무렀다.
기부, 나는 왕의 친우병 지도자다.
(북쪽으로는)호의 영역을 돌며 갖은 고생 다 하고, (서쪽) 모해 (말갈) 사람들이 사는 지역에까지 이르렀다.
기부 단이 불총하여, 호의 땅을 돌며 나 온갗 고생 다하다,
(돌아와 보니 모두들) 어머니의 시신을 껴안고 있구나.
**필자가 서술한 당시의 역사를 염두에 두고시경을 다시 한번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사마천은 공자 세가에서 시경의 내력을 간략히 설명했다[7]: 시대적으로 제일 오랫적에는 고조선 발생시기, 중편은 상나라와 서주의 전성기, 끝으로 서주의 말로(上采契后稷,中述殷周之盛) 를 실었다고 했다. 성강지치 시절의 시문에는 이괘에 실린 사건과 연류된 시문이 많이 있다. 기자의 시문 영향이 컸다고 본다.
기자 (箕子)가 도망 갔다는 곳을 조선 땅이라 알려 젔다. 어느 중국기록에는 요동(遼東)에 갔다고 했다. 그는 3-4년 후에 서주로 돌아 와 중원 땅에 묻혔다. 수경주에는 양국 몽현(梁國蒙縣. 今安徽省亳州市蒙城縣 )에 기자총(箕子冢)이 있었다고 했다.
하남성 동쪽 상구(商丘) 북쪽 조현(曺縣)에는 주민들이 기자묘 (箕子塚)와 비석을 세웠다. 일설에는 그보다 남쪽 호주시 몽성현 (亳州市蒙城縣)이었다고 한다.
기자가 갔던 조선은 산서성에서 북경 서쪽을 지나는 태행산맥 일대 에 있었다. 춘추 시대 초기 까지 중원 세력의 영역 밖이라 조선의 지도자를 북주후모(北州侯莫) 라고 했다. 산서성 태원 남쪽에 기성(太原陽邑縣南有箕城)이 있었다. 그 일대에서 해나라 사신과 발인 (解,發人)이 왔다. 관자에 발조선 (發朝鮮) 이라 하던 곳이다. 사마천은 오제 본기에 북발(北發), 또는 “북쪽에 산융 발 숙신 (北山戎, 發, 息慎)이 있다고 했다.
끝 , 다음에 계속
February 21, 2019
[1].詩經 大雅 大明:牧野洋洋、檀車煌煌、駟騵彭彭. 詩經 小雅 鹿鳴之什 杕杜:陟彼北山、言采其杞。
王事靡盬、憂我父母。檀車幝幝、四牡痯痯、征夫不遠
[2]. 史記 宋微子世家: 其後箕子朝周,過故殷虛,感宮室毀壞,生禾黍,箕子傷之,欲哭則不可,欲泣為其近婦人, 乃作麥秀之詩以歌詠之。其詩曰:「麥秀漸漸兮,禾黍油油。彼狡僮兮,不與我好兮!」所謂狡童者,紂也。殷民聞之,皆為流涕。
[3]. 詩經 鹿鳴之什 鹿鳴: 呦呦鹿鳴、食野之苹。我有嘉賓、鼓瑟吹笙。吹笙鼓簧、承筐是將。人之好我、示我周行. 呦呦鹿鳴、 食野之蒿。我有嘉賓、德音孔昭。視民不恌、君子是則是傚。我有旨酒、嘉賓式燕以敖. 呦呦鹿鳴、食野之芩。 我有嘉賓、鼓瑟鼓琴。鼓瑟鼓琴、和樂且湛。我有旨酒、以嘉樂嘉賓之心。
[4]. 逸周書 王會解:揚州禺,禺,魚名,解隃冠,發人。麃麃者,若鹿,迅走,俞人雖馬,青丘狐九尾,周頭煇羝,煇羝者,羊也。
[5]. 《山海經》釐山西二百里曰箕尾之山。《春秋·僖三十三年》晉人敗狄于箕。《註》太原陽邑縣南有箕城。 《孟子》益避禹之子 於箕山之隂。《疏》箕山,嵩高之北是也。《書·洪範傳》以箕子歸鎬京。《釋文》鎬,胡老反。本又作鄗。又《正字通》靈夏等地,亦曰鎬。《詩·小雅》侵鎬及方。《箋》鎬、方,皆北方地名
[6]. 詩經 鹿鳴之什 鹿鳴: 呦呦鹿鳴、食野之苹。我有嘉賓、鼓瑟吹笙。吹笙鼓簧、承筐是將。人之好我、示我周行. 呦呦鹿鳴、 食野之蒿。我有嘉賓、德音孔昭。視民不恌、君子是則是傚。我有旨酒、嘉賓式燕以敖. 呦呦鹿鳴、食野之芩。 我有嘉賓、鼓瑟鼓琴。鼓瑟鼓琴、和樂且湛。我有旨酒、以嘉樂嘉賓之心。
[7]. 史記 孔子世家:古者詩三千餘篇,及至孔子,去其重,取可施於禮義,上采契后稷,中述殷周之盛,至幽厲之缺,始於衽席, 故曰「關雎之亂以為風始,鹿鳴為小雅始,文王為大雅始,清廟為頌始」。三百五篇孔子皆弦歌之,以求合韶武雅頌之音。禮樂自此可得而述,以備王道,成六藝
Retired physician from GWU and Georgetown University in 2010 2011: First Book in Korean "뿌리를 찾아서, Searching for the Root" 2013: Ancient History of the Manchuria. Redefining the Past. 2015: Ancient History of Korea. Mystery Unveiled.